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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 화

나는 순간 멈칫했다. 다시 확인하려고 메일을 여러 번 꼼꼼하게 보았다. 여러 번 확인해도 여정은이 확실했다.

여정은은 낙하산으로 디자인팀 본부장이 되어 나의 직속 상사가 되었다.

“지연이 너 이 여자 알지?”

나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강예지는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나는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말했다.

“응. 이 사람이 바로 진구 씨랑 피 한 방울 안 섞인 누나야. 예전에 너한테 얘기한 적이 있어.”

졸업 후 다른 친구들은 각자 자기 삶을 쫓느라 뿔뿔이 흩어졌지만 대학교 때부터 사이가 좋았던 나와 강예지는 어디도 가지 말고 경운에 남자고 약속했었다.

강예지가 혀를 찼다.

“대박. 낙하산이었어?”

나는 아무 말 없이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것도 평범한 낙하산이 아니야.’

“여진구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강예지는 계속하여 나 대신 불만을 터트렸다.

“대체 왜? 이 바닥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어. 그런데 본부장 자리를 이런 사람한테 줘? 넌? 대체 널 뭐라 생각하는 거야?”

“됐어. 그만해.”

나는 강예지의 말을 가로채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나한테 주고 싶었더라면 줬겠지.”

여진구가 주지 않았더라면 다른 사람이 줬을 것이다. 하지만 회사 구내식당이라 이 얘기까진 할 필요가 없었다. 괜히 남의 귀에 들어가 헛소문이라도 퍼지면 큰일이니까.

“혹시 다른 계획이 있는 거야?”

누구보다 나를 잘 알았던 강예지는 식당을 나온 후 주변에 아무도 없자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수상하게 물었다.

나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맞춰봐.”

“지연아, 나한테만 알려줘.”

“있다고 할 수는 있는데 아직 다 생각하지 못했어.”

이 회사에 다닌 지 4년 되었고 단 한 번도 이직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젠 재이 그룹이 참으로 편했다.

만약 정말 재이 그룹을 떠난다면 다른 계기가 더 필요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새해 한정판 디자인에 몰두하느라 점심시간에도 쉬질 않았다. 원래 본부장의 일이었지만 본부장이 퇴사한 바람에 아주 자연스럽게 차장인 나의 일이 돼버렸다. 시간이 촉박하여 빨리 완성해야 했다.

“언니, 커피 마셔요.”

오후 두 시가 거의 될 무렵 비서 임수민이 노크하고 들어와 커피 한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내가 설계도를 그리는 걸 본 임수민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언니, 지금 디자인이 눈에 들어와요? 그 낙하산 말이에요. 면접도 보지 않고 본부장 자리를 가져갔대요. 언니는 화도 안 나요?”

“...”

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그저 웃기만 했다.

‘화가 안 날 리가 있나. 당연히 화가 나지.’

하지만 부하에게 뭐라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들 여기 좀 모여봐요.”

사무실 밖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더니 비서실장이 사람들을 한곳으로 불렀다.

통유리라 공동 사무 구역을 훤히 다 볼 수 있었다.

여진구는 맞춤 제작한 짙은 색 양복을 입고 있었고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서 있기만 하는데도 귀티가 줄줄 흘러넘쳤고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었다.

여정은과 함께 서 있으니 그야말로 선남선녀였다.

여정은은 옆에 무덤덤하게 서 있는 여진구를 보며 도움의 눈빛을 보냈다. 여진구는 살짝 짜증 난듯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뜻대로 소개해주었다.

“이분은 새로 부임한 디자인팀 본부장 여정은 씨입니다. 앞으로 이분 말씀 잘 듣고 업무 협조 잘해주길 바랍니다.”

여정은은 그를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말해?”

그러고는 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사람 말 들을 필요 없어요. 나 그렇게 까칠한 사람이 아니고 또 새로 부임했다고 부하 직원 막 잡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처음이니까 잘 못 하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말해주세요.”

...

대표가 직접 나서니 분위기는 당연히 나쁠 리가 없었다.

임수민이 참다못해 입을 삐죽거렸다.

“진짜 낙하산 맞네? 입이 귀에 걸렸어, 아주.”

그들의 모습에 나도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여진구는 여정은을 본부장 사무실 입구까지 데려다줬다.

“됐어, 뭘 그렇게 걱정해? 너 자꾸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면 앞으로 누가 감히 날 찾아오겠어?”

여정은은 여진구를 밀면서 친밀한 사이를 과시했다. 말투는 툴툴거렸지만 얼굴의 미소는 여전했다.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지금의 내 기분처럼 너무도 썼다.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임수민이 가져가 한 모금 마셨다.

“안 쓴데요? 오늘 특별히 시럽까지 넣었는데. 달달한 거 마시고 기분 좋아지라고요.”

똑똑.

여정은에게 쫓겨난 여진구는 곧장 내 사무실로 들어왔다. 나는 그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빤히 쳐다보았다.

“한잔 더 타줄게요.”

임수민은 핑계를 대고 나가버렸다. 여진구는 천천히 다가오더니 문을 닫은 후 아주 여유롭게 설명했다.

“나와서 처음 일하는데 긴장해서 나한테 도와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직접 소개해준 거야.”

“그래?”

나는 웃으면서 되물었다.

“전혀 그렇게 안 보이던데?”

대표인 여진구가 직접 그녀를 소개하게 되면 두어 마디만 들어봐도 두 사람의 관계가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여정은이 자신은 까칠한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대표가 뒤에서 받쳐주고 있는데 누가 감히 그녀에게 찍소리를 하겠는가 말이다.

“됐어. 정은이 당신보다 나이는 많지만 일적으로는 당신이 선배야. 디자인 실력도 당신이 훨씬 뛰어나고 팀원들도 당신 말을 더 잘 들어.”

여진구는 나의 뒤로 다가와 어깨를 살살 마사지하며 달랬다.

“그러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냥 정은이 괴롭힘만 당하지 않게 하면 돼. 응?”

여진구에게 참을 수 없는 화가 생긴 건 난생처음이었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벌떡 일어나 날카롭게 물었다.

“만약 그런 거라면 왜 본부장은 내가 아니라 저 여자야?”

말을 내뱉은 순간 그제야 너무 직설적으로 말했다는 걸 깨달았다. 늘 흔들림 없던 여진구마저도 두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결혼 3년 동안 죽고 못 사는 사이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서로 존중하며 살아왔다. 얼굴 붉힌 적도 없었고 싸운 적도 없었다. 그는 아마 내가 화도 낼 줄을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한마디를 뱉은 걸 후회하지 않았다.

만약 나보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본부장 자리에 앉았더라면 무조건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런데 여정은에게 그 자리를 주었으니 물어보는 것쯤은 별거 아니지 않나?

나의 날카로운 모습을 처음 본 여진구가 입술을 적시며 말했다.

“지연 씨, 그것 때문에 화났어?”

“난 화내면 안 돼?”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마음이 넓은 척할 수 있었지만 남편 앞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남편에게조차 자신을 숨긴다면 그건 너무나도 실패한 결혼이었다.

“당신 바보야?”

그는 리모컨으로 통유리를 가렸다. 그러고는 긴 팔을 뻗어 나를 확 끌어안았다.

“재이 그룹 전체가 당신 건데 그깟 자리 하나 때문에 화를 내?”

“재이 그룹은 당신 것이지, 내 것이 아니야.”

내가 지금 잡을 수 있는 건 그 자리뿐이었다. 여진구는 내 턱을 들고 진지하게 쳐다보았다.

“우린 부부인데 당신 것, 내 것이 어디 있어?”

“그럼 나한테 주식 일부를 양도해줄 수 있어?”

나는 피식 웃었다. 그의 표정을 놓치지 않으려고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아무런 표정도 캐치하지 못했다.

여진구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얼마나?”

“10%.”

한번 지를 바에 제대로 확 질렀다.

여진구는 나와 결혼한 후 재이 그룹을 맡게 되었는데 그 후 사업 규모는 더 커졌다. 10%가 아니라 1%라고 해도 수백억에 달했다.

나는 그가 동의할 줄 모르고 아무 숫자가 말한 것이었다.

“알았어.”

여진구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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