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구는 한 치의 망설임과 고민도 없이 흔쾌히 동의했다.나는 그의 목을 잡고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그윽하게 쳐다보았다.“정말 10%나 주려고? 아깝지 않아?”그의 두 눈은 한없이 맑고 투명했다.“남도 아니고 당신 주는 건데, 뭐.”그 순간 돈은 정말 충성을 표하는 좋은 물건이라는 걸 깨달았다. 온 점심 우울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풀리는 것 같았다.나는 뭔가를 떠보듯 웃으며 물었다.“그럼 정은 언니는? 언니한테는 줄 거야?”여진구는 잠깐 침묵하다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니.”“정말?”“응. 내가 누나한테
여진구가 날 기다리는 걸 뻔히 알면서도 차를 얻어탔다. 그것도 조수석에.마음 같아서는 홱 돌아서고 싶었지만 이성의 끈을 붙잡고 여진구에게 손을 내밀었다.“차 키.”여진구는 아무 말 없이 차 키를 나에게 건넸다.나는 곧장 운전석에 올라탄 후 여정은의 놀란 얼굴을 보며 히죽 웃었다.“뭐라 하긴요. 언니도 진구 씨 누나인데 차를 얻어타는 게 이상할 건 없죠.”그러고는 고개를 내밀어 밖에 있는 여진구를 쳐다보았다.“빨리 타. 할아버지 기다리시겠다.”본가로 가는 길 내내 차 안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다.여정은은 여진구와 얘기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온몸에 흐르는 피가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심지어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마저 들었다.가끔 두 사람 사이에 진짜 뭔가가 있는 건 아닌지 상상하긴 했었다. 하지만 매번 계속 부정했다. 비록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고 해도 여씨 가문 도련님과 아가씨인 두 사람은 명의상으로는 그래도 남매였고 게다가 각자 결혼까지 한 상태였다.여진구처럼 모든 걸 다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절대 이런 황당한 일을 할 리가 없었다.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서 여진구는 여정은을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조롱과 싸늘함이 섞인
여진구는 여정은을 내팽개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조금 전의 날카롭고 차갑던 목소리와는 달리 한없이 다정했다.“다 들었어?”“응.”나는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여진구도 뭐라 하지 않고 도우미에게서 겉옷을 받아 나의 어깨에 걸쳐주고는 안으로 걸어가며 자연스럽게 말했다.“바람이 차니까 들어가자.”마치 내가 방금 들은 얘기들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얘기인 듯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진구야.”여정은의 고집스러운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여진구!”하지만 여진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그 후 여진구는 정신이 딴 데 팔린
여진구는 잠깐 놀라는가 싶더니 뭐라 하진 않았다.나는 입술을 적시고 말했다.“그럼 신혼 첫날밤에는 무슨 이유로 만났어?”그날 밤 베란다에서 밤새 기다렸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신혼 첫날밤에 결혼한 아내를 내팽개치고 집을 나간 여진구였다. 나는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무척이나 걱정했었고 나한테 불만이 있는 건 아닌지 오만가지 생각을 하면서 그가 빨리 집에 들어오길 바랐었다.그때 난 고작 23살이었고 어쩌다 보니 내가 오랫동안 짝사랑한 남자와 결혼하게 되었다.그러니 결혼과 여진구에게 어찌 기대가 없겠는가?그런데 오늘에
강예지가 갑자기 그 얘기를 꺼내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무슨 밥?”그녀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여진구가 식당에서 밥 몇 번 사줬잖아. 잊었어?”“...”잊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여진구를 좋아하게 되었으니까.부모를 일찍 여윈 나는 고모네 집으로 갔다. 고모는 나에게 잘해주고 싶었지만 고모부와 사촌 동생의 눈치를 봐야 했다.중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대학교 때는 학비와 생활비를 내가 직접 벌었다. 가끔 갑자기 학교에 내야 할 돈이 생겨 다 내고 나면 생활비가 부족하기 일쑤였다.그리고 영양실조로 학교에서 쓰러진 적이
...난 알고 싶지 않았지만 바로 그 뜻을 알아들었다.강예지는 코웃음을 치며 평가했다.“그냥 그래.”“...”나는 놀란 토끼 눈으로 강예지를 쳐다보았다.“한 번 잔 적이 있는데 느낌이 좋지 않았어.”강예지는 하성주가 옆에 있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녀의 말에 하성주가 펄쩍 뛰었다.“그건 내 처음이었단 말이야. 네가 뭘 안다고 그래?”“스톱, 스톱. 난 책임 못 져. 너 같은 바람둥이가 처음이라는 게 말이 돼? 그리고 네 처음은 얘나 얘한테 줬겠지.”강예지는 하성주의 양손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육형준은 뼛속까지 다정한 사람이었고 여진구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었다. 지금 이 상황을 봐도 알 수 있었다. 육형준은 남의 사생활이라고 캐묻지 않았지만 여진구는 아예 관심이 없어서 묻지 않을 것이다. 여진구는 마음이라곤 없었다.술자리는 새벽까지 계속되었고 하성주는 자리를 옮겨 더 마시자고 아우성쳤다.강예지는 내가 임산부라 밤을 새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집에 데려다주려 했다. 그러자 하성주가 말했다.“형준이더러 데려다주라고 하면 돼. 쟤도 밤새는 거 싫어해.”강예지는 흔쾌히 동의했다. 하지만 나는 강예지가 걱정되어 거절하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