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를 몇 년 동안 얼마나 힘들게 키웠는데 이렇게 아이들을 뺏긴다고? 여기까지 생각한 윤아는 서서히 주먹을 쥐고는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수현은 아직도 두 꼬마가 밥 먹는 것을 보는 즐거움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윤아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엄마?”닭발을 갉아먹고 있다가 갑자기 수현의 뒤에 사람 그림자가 드리운 것을 본 하윤은 고개를 들어 보니 윤아인 것을 발견하고는 놀라서 소리쳤다.자리에 앉아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있던 수현은 윤아를 부르는 하윤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입가에 웃음이 사라졌다.한편 조용히 밥을 먹고 있던 서훈도 식사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수현의 뒤를 바라보았는데 눈빛에는 당황함이 가득했다.수현은 입술을 약간 오므렸다. 막 일어서려고 하는 찰나 윤아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진수현씨?”그의 동작은 잠시 멈칫했고 그리고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다시 평온하게 바로잡고는 천천히 일어나 윤아의 시선과 마주했다."엄마, 왜 왔어?"하윤은 얼른 숟가락을 내려놓고 티슈를 가져다가 자신의 입가를 깨끗하게 닦은 뒤 다가가 그녀의 다리를 껴안으며 물었다.윤아는 하이힐을 신고 있었는데 하윤이 이렇게 안기자 걸음걸이가 약간 비틀거렸지만 그녀는 곧 똑바로 섰고 특유의 카리스마를 풍겼다."심윤아 씨.”그녀가 똑바로 서자마자 수현이 젠틀하게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것을 보았다.윤아는 그의 큰 손을 보며 속으로는 냉소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가볍게 잡았다."안녕하세요.”하지만 그녀는 두 손이 닿자마자 떼여냈기에 수현은 그녀와 악수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도 없었다.한편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서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엄마는 진 아저씨를 정말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 왜 그럴까?서로 모른 척하고 인사를 마친 윤아는 눈길을 밥상 위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윤이랑 훈이, 엄마가 전에 너희들에게 어떻게 말했는지 벌써 까먹었어? 낯선 사람이 주는 음식을 자꾸 먹으면 안 돼.”낯선 사람
역시 그러했다.하지만 이를 모르는 하윤은 윤아의 말을 듣고 반박에 나섰다."엄마, 하지만 우리 생방송 때 이미 현 아저씨한테서 돈을 많이 받았잖아요. 그리고 현 아저씨가 만약 윤이 아빠가 된다면 낯선 사람이 아니잖아요.”"……”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수현은 하윤의 말에 기분이 풀렸고 입가에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하윤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윤이 말이 맞아.”윤아는 이들의 말에 저도 모르게 미간이 조여졌다. 아이들 앞이라 무엇이라 대꾸하기도 꺼려졌다. 왜냐하면 그녀는 어른들 사이의 일에 아이들까지 연루되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현님, 자리를 옮겨서 얘기할까요?”수현은 눈썹을 치켜들며 흔쾌히 대답했다."그러죠.”"윤이, 훈이."두 아이의 이름을 부른 후 윤아는 옆에 앉아 있는 조민기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그의 모습과 성을 보니 그도 수현의 친척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어쨌든, 어린아이이니 윤아도 아이한테까지 불똥이 튀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조민기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럼 너희들은 얌전히 여기서 밥을 먹고 있어. 엄마와 현 아저씨는 먼저 얘기를 나누고 곧 올게.”세 아이는 그녀의 말에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아이들을 잘 안치해 놓고 윤아는 수현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한테 나가자는 사인을 했다.수현은 한참 동안 말없이 조용해 있더니 드디어 천천히 일어나 그녀를 따라 나갔다.두 사람은 교내에서 얘기를 나누지 않고 밖으로 나갔고 윤아는 나갈 때 출입구 보안관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오자마자 가려고요?”윤아는 웃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인사를 하고 나니 보안관은 그녀 뒤를 따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눈여겨보니 평소에 늘 도시락을 가지고 오던 그 양반이었다.보안관은 얼굴빛이 예전보다 어두워진 윤아를 보고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인사말을 삼키고 두 사람이 앞뒤로 교문을 나서는 것을 지켜보았다.두 사람은 교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걸어가다 차 옆에 멈춰 섰다.보안요원은 두 사람을 몰래 쳐다보다가
"얼굴?”이 말에 윤아는 순간 냉소를 지었다."얘들 모습이 왜? 어떻게 네 아이일 수가 있어? 김칫국 좀 적게 마실래?”수현은 그녀가 지금 화를 내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그녀가 5년 동안 홀로 키워온 아이이기 때문에 그녀는 충분히 자신에게 화를 낼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의 말투는 차분했고 한층 부드러웠다."내가 김칫국을 마신다고? 좋아, 그럼 말해봐, 내가 그들의 아버지가 아니라면 그들의 아버지는 과연 누군지.”"네 알 바 아니잖아.”"내 알 바 아닌 거야 아니면 말하지 못 하는 거야? 또 아니면 내 얼굴을 보면서 아이가 내 아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는 거야?”윤아는 수현의 말에 화가 단단히 났다."절대 네 아이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그래? 인정 안 해도 상관없어. 유전자 검사를 받으면 돼.”그 두 아이가 윤아의 아이라는 것을 안 후, 수현은 거의 동시에 두 아이가 자신의 혈육임을 알아챘다. 그래서 그는 애초에 친자 확인을 할 생각을 한 적이 없다.전혀 필요 없으니까 말이다.그는 이 두 아이에게 다가가자마자 느낌이 다르다고 느꼈다, 매우 친근하고 저도 모르게 이 아이들한테는 마음이 갔다. 생김새는 더욱 말 할 것이 없었다.하지만 윤아가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도 친자 확인을 하는 것을 개의치 않을 것이다.유전자 검사를 하겠다는 소리에 마침내 평정심을 되찾은 윤아는 수현을 바라보며 얘기했다."우리는 이미 이혼한 지 5년이 지났어. 즉 지금 우리는 아무 관계도 아니란 소리야. 내 아이도 너와 아무 관계도 없고. 그러니 너는 유전자 검사를 할 자격이 없다는 얘기야.”"이혼할 때 넌 아이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잖아? 그렇다고 해서 지금 아이들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아?”듣고 보니 윤아도 멍해졌다.이혼할 때 수현은 확실히 아이가 있는 줄 몰랐다. 왜냐하면 그는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윤아는 어쩔 수 없이 임신 사실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꿈도 꾸지 마."윤아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매우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아무도 내 아이를 건드릴 생각을 하지 마.”말을 마친 윤아는 몸을 돌려 수현을 홀로 남겨두고 그 자리를 떴다.보안요원들은 화가 잔뜩 난 듯한 윤아가 다시 돌아오니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방금 멀리서 그녀가 남자와 이야기하는 것을 봤는데 비록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언행을 보니 싸움이 난 것 같았다.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까지 품었던 보안요원들은 말 한마디 없이 들어가는 윤아를 보고는 그들의 의심이 정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곧이어 남자도 다시 돌아왔다.여자의 화난 모습에 비해 남자는 거의 주위를 뒤덮을 듯한 냉기를 풍겼고 그의 아우라에 보안요원들은 몸서리를 쳤다. 이어 그들은 오늘 옷을 정말 적게 입고 나왔다며 한탄을 시작했다.노기등등하던 윤아는 교문을 들어서자 표정이 바뀌었다.세 아이에게 다가갔을 때 그녀는 이미 얼굴에 온화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엄마, 다녀오셨어요.”그녀가 돌아온 것을 보자마자 하윤은 즉시 그녀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는 몰래 그녀의 뒤를 보았다. 그러다 수현이 아직 먼 곳에 있는 것을 보고 작은 소리로 물었다."엄마, 어때요? 현 아저씨 엄청나게 멋있지 않아요?”하윤의 신경이 온통 수현에게 쏘인 것을 느낀 윤아는 수현에 대한 나쁜 말을 퍼부어 하윤이가 수현을 거부하면서 그와 접촉하지 못하게 할 생각까지 했다.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정말 잘해줬으니 지금 그의 나쁜 말을 하면 안 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윤아도 엄마는 처음이라 아무런 경험도 없이 자신의 의식에 따라 일을 해나갈 뿐이었다.그는 하윤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가볍게 말했다."엄마랑 약속해, 앞으로 아저씨가 가져온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알았지?”하윤은 이 말을 듣자마자 작은 얼굴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왜, 왜 그래요, 엄마? 엄마가 현 아저씨를 안 좋아하는 거예요? 아니면 현 아저씨가 엄마를 화나게
윤아는 수현이 이토록 파렴치할 줄은 몰랐다. 아이들 앞에서 자신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하지를 않나... 진씨 그룹의 대표라는 사람이 이렇게 뻔뻔스러울 수가...윤아는 심호흡을 하였다. 수현의 말에 너무 어이없어 대답하고 싶지 않아서였다."엄마, 첫눈에 반하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하지만 수현의 말은 하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하윤아, 첫눈에 반했다는 건 아저씨가 하윤이 엄마를 좋아한다는 뜻이야.”말이 끝나자 윤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수현을 바라보았다.수현도 윤아가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자 그녀를 마주 보았는데 입가에 미소가 어려있었다.그의 까만 눈동자를 마주친 순간, 윤아는 순간 자신이 그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아이 앞에서 그녀가 화를 내기 싫어하고 추태를 부리기 싫어한다는 걸 눈치채고 일부러 그러는 거야."와.”하윤은 작은 손으로 자신의 작은 얼굴을 감쌌다."현 아저씨가 우리 엄마를 좋아한다고요?”"응.”윤아는 오버하는 자신의 딸이 어이없었지만 지금은 별수 없이 아이의 옷차림을 정리해 준 뒤 다정하게 물었다."밥은 다 먹었어? 다 먹었으면 오빠랑 교실에 들어가.”"응, 배불러.”그러자 서훈도 얼른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일어섰다."서훈아, 그럼 하윤이를 데리고 얼른 교실로 가. 공부 열심히 하고, 수업 끝나고는 어디 뛰어다니지 말고 엄마가 데리러 올 때까지 기다려.”"알았어, 엄마.”서훈은 몸을 일으켜 하윤의 손을 잡고 떠나는데 그러다 수현의 곁을 지날 때 수현은 서훈의 손가락을 살짝 찔렀다.서훈은 갑자기 손가락이 불에 닿은 듯 다급하게 한쪽으로 비켜서며 수현을 쳐다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쯧.얼굴 빨리 변하네.수현은 윤아가 오기 전에는 이 녀석이 자신을 잘 믿는 것처럼 보였지만, 윤아가 오자 바로 태도를 바꾼다며 속으로 한탄했다.역시 피는 못 속이나 보다.수현은 여기까지 생각하고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고 이어 윤아가 조민기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너도 하윤이랑 서훈이 같이
"윤아야, 난 그저 전에 못 해줬던 것들 지금이라도 해주고 싶을 뿐이야.”"5년 동안 우리 세 식구는 충분히 잘 살아왔어. 굳이 만회할 게 있다면, 우리 눈에서 벗어나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 거야.”그녀가 말을 마치자 수현은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고 눈빛은 여전히 까맣고 입가도 곧게 눌려 웃음기가 사라졌다.그의 모습은 담담해 보였지만 포기하지 않는 태도였다.윤아는 당연히 그가 이렇게 많이 한 것을 알고 있으니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그녀도 자신의 몇 마디 말로 그가 포기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잠시 후, 수현은 책상 위의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윤아는 그의 이런 동작을 보고 두 아이가 그녀에게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글쎄 현 아저씨가 그들이 남긴 햄버거 껍질도 먹었다니.예전의 그라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뭐 그렇다고 윤아가 그를 쉽게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여기까지 생각한 윤아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다시는 우리를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말을 마치고 그녀는 학교를 떠났다.수현도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고, 윤아는 차에 올라타자 참지 못하고 운전대에 엎드려 지친 듯 숨을 내쉬었다.방법을 생각해, 반드시 방법을 생각해서 이 일을 해결해야 해.그녀는 절대 수현에게 아이들을 주지 않을 거야, 절대!다시 회사로 돌아왔지만 윤아는 일할 마음이 별로 없었고 신경은 줄곧 자신의 두 아이와 수현에게만 집중되었다.간신히 퇴근 시간이 되길 기다린 윤아는 열쇠를 움켜쥐고 회사를 떠났다.오민우는 그녀와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결과 윤아는 급한 일이 있다고 말하고는 다시 한번 황급히 그의 곁을 지나갔다."하루 종일 이렇게 바쁘다고?”-학교로 가는 길, 왠지 모르게 윤아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이런 불길한 예감은 학교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커져만 갔다.그녀가 학교에 도착해서 물어보니 과연 두 아이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 데리고 간 후였다.
그녀가 진씨 그룹에 도착했을 때 진씨 그룹은 이미 퇴근 시간이 되었기에 대부분 사람은 거의 다 떠났었다.진씨 그룹 지사 건물에는 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보안요원들은 자리를 뜨지 않은 채 교대로 보초를 서야 했다.윤아는 바로 들어가서 프런트 데스크를 찾았는데 마침 이 프런트 데스크는 전에 그녀를 접대했던 사람이었는 데 아직 퇴근 전이였다.그녀를 보고 프런트 데스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나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윤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안녕하세요, 이 비서를 찾고 싶은데요.”프런트 데스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뒤늦게 대답했다."이 조수님은 이미 퇴근하셨습니다.”"퇴근했다고요? 그럼 진 대표님은요, 그 사람도 퇴근했나요?”"대표님은 오늘 오후에 회사에 오지 않으셨어요. 이 조수님은 10분 전에 퇴근하셨고요.”진수현이 오후에 회사에 오지 않았다고?그럼 뭐 하러 갔지?사람을 찾지 못한 윤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민재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민재는 윤아로부터 온 전화를 받았을 때 퍽 놀랐다. "윤아 씨?”윤아가 먼저 전화를 걸어올 줄 몰랐다는 눈치였고 그의 말투에는 놀라움이 묻어있었다.그녀의 두 아이를 데려간 말투는 더더욱 아니다.설마 이 일에 그가 관여하지 않았단 말인가?윤아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고 할 수 없이 그녀는 민재에게 말했다."진수현을 찾아야겠어요.”"대표님이요? 근데 대표님은 지금 제 옆에 없는데, 무슨 일로 찾으시죠? 아니면 직접 전화해 보시겠어요?”윤아는 간신히 화를 참으며 대답했다."전화 연결이 안 되는데요.”"네? 어떻게 연결이 안 될 수가 있죠?”"잘 모르겠어요. 혹시 어디 갔는지 알아요?”"그게... 대표님은 오후에 회사에 오지 않으셔서, 저도 일정을 잘 몰라요.“사실 민재도 이 대답을 할 때 마음이 불편했다. 왜냐하면 그는 진수현이 점심에 학교에 가 아이들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을 그가 어찌 윤아한테 말할 수 있겠는가?그래서 그는 잘
윤아는 어쩔 수 없이 성질을 참으며 제자리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민재가 20분 정도 지난 후에야 서둘러 도착해 얼굴인식을 한 후에야 그녀는 별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윤아 씨, 제가 모셔다드릴까요?”그가 말을 마치자 윤아도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부탁할게요."현재 민재의 행동으로 볼 때 그는 수현이 그녀의 두 아이를 데려간 것을 아직 모르기 때문에 그녀를 돕고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래서 윤아는 당연히 그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민재의 안내로 그녀는 빨리 수현의 거처에 도착했다."윤아 씨, 도착했습니다.”앞에 있는 큰 집을 바라보며 초인종을 누르려는데 민재가 막아서며 입을 열었다."윤아 씨, 제가 출입문 비밀번호를 알려드릴 테니 그냥 들어가시면 됩니다.”그 말에 윤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세요, 그럼.”민재는 비밀번호를 알려준 뒤 그대로 자리를 떴고, 윤아는 비밀번호를 입력해 무사히 현관으로 들어갔다.이 별장은 조용했고 들어서면 분수가 있었는데, 양쪽의 불빛이 서로 어울려 주위가 대낮처럼 밝았다.윤아가 별장으로 들어간 후에는 또 다른 도어락이 있었는데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그녀의 마음은 복잡했다.왜냐하면 출입문 비밀번호가 그녀의 생일이었기 때문이다.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문이 자동으로 열렸고 그녀가 들어가자마자 로봇의 목소리가 들렸다."주인님, 실내 배기 시스템, 공기 순환이 시작되었습니다.”실내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녀는 곧장 들어가려다 티끌 하나 없이 청소된 카펫을 보고는 옆 캐비닛에서 슬리퍼를 갈아 신고 들어갔다.실내는 조용하니 한 사람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윤아는 주위를 살피며 눈썹을 찡그렸다. 수현이 정말로 여기에 사는지 의심이 되었기 때문이었다.휴대전화를 꺼내 다시 수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연결되지 않았다.그래서 그녀는 수현에게 연락하는 것은 포기하고 일단 찾아보기로 했다. 그녀는 아래층을 한 바퀴 돌았지만 사람을 찾지 못해 2층으로 올라갔다.마침내 한 침실의 욕실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