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 윤이와 달리 훈이는 여전히 담담하게 행동했다.하지만 곁에 있었던 민기는 이 장면을 보자 참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비록 민기 집안은 몹시 가난한 건 아니었고 또 부모님 수입도 괜찮았지만 대부분 돈은 고액의 대출을 갚는 데 사용했다. 그래서 평소 이런 음식은 그에겐 사치였다.한 달에 한 번 먹을 기회도 없었다.“자.”윤이는 첫 번째 햄버거를 민기에게 건넸다.민기는 원래 손을 뻗어 받으려고 했으나 뭔가 떠오른 듯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수현을 보았다.민재 아저씨가 눈앞의 이 남자를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아침의 그 한마디부터 지금까지 민기는 여전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너무 무서웠다. 만약 수현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분명 혼날 거라고 생각했다.윤이도 민기가 멈춘 것을 보자 그의 시선 따라 수현을 보았다.수현의 입가에 걸렸던 웃음도 한순간 경직되었다.‘왜 날 보는 거야?’‘음식을 먹는 것도 내 동의가 필요해? 나중에 두 아이가 날 어떻게 보겠어? 이 비서 진짜 아이한테 사상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아저씨?”윤이 목소리에 수현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얼른 표정을 바꾸고는 민기에게 말했다.“민기야, 윤이한테 고맙다고 말했어?”민기도 수현의 뜻을 알아차리고 얼른 윤이가 건넨 햄버거를 받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했다.윤이는 이 일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 윤아도 아이에게 이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햄버거를 가진 후, 윤이는 햄버거 껍데기를 수현에게 건넸는데 조금의 민망함도 없었다.곁에 있던 훈이가 이 장면을 보고 얼른 손을 뻗어 막았다.“윤아, 이러면 예의 없어.”이 말을 들은 윤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하, 하지만 아저씨가 윤이랑 오빠 대신 햄버거 껍데기 먹겠다고 하지 않았어?” “...”훈이는 일시에 어떻게 윤이에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몰랐다.하지만 만약 고독현 아저씨가 장난으로 하는 말이었다면? 몇 번 밖에 만나지 않은 사인데 어떻게 그들 대신 먹어주겠는가.훈이가 자신의 햄버거 껍
민기는 고개를 끄덕였다.“나중에 기사 아저씨 차 타면 돼.”“네, 삼촌.”아이들과 작별한 후, 수현은 학교를 떠났다.학교 문을 나선 후, 수현의 안색은 조금 어두워졌다. 그는 손으로 입을 막고 눈썹을 찌푸렸다.민재는 얼른 보온병을 건넸다.“대표님, 위가 아직도 낫지 않으셨는데 이런 패스트 푸드 드시면 위에 더 안 좋습니다.”수현은 보온병을 받은 후 담담하게 몇 모금 마셨다.민재는 이를 보더니 또 약 몇 알을 건넸다.수현은 그 약을 보더니 받지 않았다.“대표님, 그냥 드시죠. 나중에 불편하면 두 아이는 어쩌려고요?”“...”역시나 수현은 이 말에 설득당하고 묵묵히 약을 받아 삼켰다.민재는 조용히 기뻐했다.참 잘 됐다. 수현은 전에 약을 먹기 싫어했다. 약 따윈 먹지 않아도 나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약을 먹는 계기가 생기니 일이 많이 쉬워졌다.약을 먹은 후, 수현은 차에 기대 조금 쉬었으나 아직도 위가 많이 불편했다.역시 쓰레기 음식이었다고, 만약 다음에 또 아이들에게 음식을 사줄 일이 있다면 절대 이런 걸 사지 말아야겠다고 수현은 생각했다.“대표님, 상태가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저희 병원에 며칠 더 있을까요? 저번에 상황이 많이 엄중했잖아요.”“됐습니다.”수현은 담담하게 민재의 제안을 거절했다.“버틸 수 있어요.”“하지만...”“하지만 뭐요? 제때 밥 먹고 약도 먹으면 되잖아요. 이래도 안 됩니까?”“되죠, 되죠. 하지만...”민재는 그저 수현의 건강이 걱정되었다.“그럼 쓸모없는 소리 하지 말고 운전이나 해요.”-윤아는 일찍 퇴근하고 차를 가지러 갔다.차를 가진 후, 윤아는 직접 아이들을 픽업하러 갔다.비록 운전 실력이 줄어들지는 않았으나 한국의 차량 흐름엔 조금 습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가는 길에 의식적으로 속도를 줄였다.학교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두 아이의 옆에 갑자기 낯선 남자아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 남자아이는 윤이 근처에 서 있었고 윤이는 계속 재잘재잘 말하고 있었는
이렇게 생각한 윤아는 민기를 보며 조용히 물었다.“얘야, 이름이 뭐니?”“저, 저는 조민기라고 해요.”조민기?낮에 그녀가 돈을 입금한 계좌의 주인과 같은 성씨였다.같은 성씨라면 아마 아주 가까운 관계일 거다.“윤이가 말한 그 사람이 너랑 무슨 사이야?”“제 삼촌이에요.”삼촌?그래서 모두 조 씨였구나.이렇게 생각한 윤아는 민기에게 물었다.“그럼 삼촌이 데리러 와?”민기는 고개를 저었다.“삼촌은 평소에 바빠서 안 와요. 대신 기사 아저씨가 데리러 오세요.”민기는 아직도 점심에 수현이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략 언제쯤 오신대?”“모, 모르겠어요.”윤아는 열정적인 사람이 아니었지만 ‘고독현 밤’에게는 조금의 호기심이 생겨 저도 모르게 물었다.“아줌마가 데려다줄까?”이렇게 말하고 있을 때 뒤에서 고급 차 한 대가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잠시 후, 안경을 쓴 중년 남성이 차에서 내려 민기 쪽으로 뛰어갔다.뭐라고 말하려고 할 때 그는 윤아를 보더니 잠시 멈칫한 후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미스 심.”이 한마디에 윤아는 멈칫하고 의아한 듯 상대방을 보았다.“절 아세요? 그쪽은 누구시죠?”기사는 윤아의 말에 심장이 덜컹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탄식했다.“망했다...”이일로 수현은 늘 바빴다. 기사도 영리한 사람이었으니 돈을 받고 일을 할 때 위에서 시키는 대로만 했다.하지만 전에 차에서 윤아를 보았고 또 이 여자가 대표님 마음속에서의 위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까 윤아를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인사했다.수현의 일을 망칠 수 있다는 걸 잊은 채 말이다.“저...”기사는 지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때 곁에 있던 두 아이를 보자 좋은 생각이 떠올라 얼른 말했다.“두 아이와 함께 서 계시니 아이들의 어머니라고 추측했습니다.”이 말에 윤아는 두 아이를 한번 훑어보았는데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그래요?”기사는 조금 머쓱했다.“네. 아가씨 성함은 모르지만 두 아이의 성이 모두 심 씨이니까 그냥 미스
[조우림 씨, 제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이미 만나셨다고요?]메시지를 보낸 후, 상대방은 답장하지 않았다.십 분 후, 윤아는 다시 한번 핸드폰을 보았지만 ‘고독현 밤’은 여전히 답장이 없었다.그녀도 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공은 이미 던졌고 그는 빠르나 늦으나 받아야만 했으니까.이렇게 생각한 윤아는 또 한마디를 보탰다.[조우림 씨 아이도 거기에서 학교 다녀요?]이렇게 보낸 후, 마침 도우미가 그녀를 불렀다. 윤아는 알겠다고 말한 후, 핸드폰을 거두고 가보려 할 때 뜻밖에도 핸드폰이 진동했다.‘고독현 밤’이 칼답 했던 것이다.[제 아이 아닙니다.]이 답장을 보내는 속도에 윤아는 놀라 눈썹을 올렸다.‘칼답한 거야? 그러니까 전에 내 메시지를 보긴 봤지만 답장하지 않았다는 건가?’‘왜 답장 안 한 거지? 뭘 숨기고 있는 건데...’윤아는 예쁜 눈을 가늘게 떴다. 갑자기 이 ‘고독현 밤’이 궁금했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빠르게 상대방은 그녀에게 한마디 더 보냈다.[제 친척 아이입니다. 전 그냥 가끔 보러 가는 거고요.]윤아는 입꼬리를 올렸다.[그래요? 조우림 씨는 평소에 바쁘시나 봐요.]상대방은 한참 침묵하더니 답장을 보냈다.[네, 요즘 조금 바쁩니다.][그럼 지금 시간 되세요?]윤아가 이 메시지를 보냈을 때 수현은 자신에게 온수를 따르려 했다. 이걸 보자마자 그는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더니 물도 안 마시고 직접 물었다.[무슨 일입니까?]이렇게 늦은 밤에 낯선 남자한테 시간이 있냐고 물어보다니.[물어볼 게 있어서요.]물어볼 거?수현의 눈동자에 담긴 화는 많이 사그라졌다.[말해요.][조우림 씨께서 아직 제 물음에 답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제 아이들을 이미 만나 봤어요?]이 물음에 상대방은 잠시 침묵하더니 답장했다.[이미 뻔하지 않습니까?]뻔하다고?윤아의 표정은 더 서늘해졌다.[그렇다면 조우림 씨 기사분이 제 성이 심 씨라는 걸 알고 있었던 일도 뻔한 건가요?]이 메시지를 보낸 후, 윤아는 만약 이 ‘고
윤아는 상대방이 이렇게 빨리 사과할 줄은 몰랐다.[학교 직원입니다.]이 대답에 윤아는 멈칫했다. 그런 학교에 아는 사람이 있는 건 별로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익숙한 사람이 훈이와 윤이를 안다면 그들 부모에 대해 말하는 것도 정상인 듯했다.하지만 학교 사람들은 선우를 아이들의 아버지라고 여기지 않는가?이것도 알고 있을까?만약 그가 이것도 알고 있는 거라면 왜 만나자고 했을까?윤아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 일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결코 상대방이 말한 것처럼 간단하지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더는 묻고 싶지 않아 우선 그의 근심부터 없애기로 결정했다.생각을 정리한 윤아는 답장을 보냈다.[그렇군요. 그렇다면 다른 일 없어요. 일찍 쉬세요.]이게 끝이라고?수현은 눈썹을 찌푸리고 얇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그는 줄곧 윤아와 함께 자랐기 때문에 윤아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의심이 뿌리를 내렸다면 절대 이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다.지금 추궁하지 않는 건 갑자기 다른 일을 떠올렸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우선 넘어가는 것으로 그의 경계심을 늦추려는 게 목적이었다.만약 그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수현은 절대 이런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을 거다. 그냥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고 절대 이 따위 일로 고민하지 않았을 거다.하지만 이 사람이 하필이면 윤아였다.수현은 당장 민재에게 전화를 걸어 일 처리를 분부했다.-다음 날.윤아는 두 아이를 학교에 데려간 후, 급히 떠나는 대신 아이들과 함께 학교에 들어갔다.학교 선생님은 얌전하고 말을 잘 들으며 또 똑똑하고 귀여운 훈이와 윤이 쌍둥이를 많이 좋아했다. 그래서 윤아가 함께 들어갔을 때 어떤 선생님 한 분이 마중을 나왔다.“훈이 윤이 어머니,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셨네요?”윤아는 상대방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안녕하세요. 김 선생님, 오늘은 선생님께 아이들이 반에서 표현이 어떤지 물어보려고 왔어요.”김 선생은 먼저 두 아이를 교실
“네, 민기 삼촌이 먹을 걸 들고 민기를 찾으러 왔는데 윤이와 훈이도 함께 따라갔어요. 저희도 아이 삼촌이 동의하는 걸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요.”그 후, 윤아는 또 다른 상황에 관해 물어보았지만 별로 유용한 정보를 얻지 못해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모든 건 꽤 정상적으로 흘러갔다.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 민기 삼촌이라는 사람도 이상했고 모든 게 심상치 않았다.회사에 가는 길에 윤아는 이 일을 현아에게 말했다. 현아는 자초지종을 들은 후, 오히려 윤아와 완전히 다른 생각을 내놓았다.“너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그래?”“그 사람도 둘 사이에 벌어진 일이 너무 지나치게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너한테 호기심이 생긴 건 아닐까? 그래서 널 조사했던 거고.”심윤아: “...”윤아는 잠시 침묵한 후 결국 참지 못하고 친구의 말에 투덜거렸다.“있잖아, 현아야. 난 왜 네 머리에 온통 드라마 에피소드만 들어 있는 것 같지?”“에잇, 그게 아니면 뭔데? 상대방은 돈도 많고 권력도 있는데 너한테 뭘 할 수 있겠어? 목적이 불순한 것 외, 너한테 다가갈 다른 이유라도 있어?”윤아는 또 침묵했다. 다른 답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도 다른 남자에게 주동적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아, 누구는 빼고.하지만 그것도 옛날이야기였고 지금은 더 이상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그래서 너한테 관심 있는 것만 아니면 네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한 거야.”현아는 입을 달싹이며 더 말하려고 했지만 이때 갑자기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뭐 하는 겁니까?”남자 목소리는 아주 담담하고 맑았는데 전에 들었던 현아 상사의 목소리였다.“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협력업체에서 온 전화를 받고 있었어요.”“비상계단에서 협력업체 전화를 받아요? 도둑질합니까?”“헐, 그냥 제 습관이거든요? 비상계단에서 바이어랑 전화하든 화장실에서 하든 무슨 상관인데요?”두 사람이 또 싸우기 시작하는 것을 들은 윤아는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올
아마 자신이 잘못한 걸 의식했는지 윤이는 이 말을 듣자마자 순간 고개를 푹 숙이고 작고 하얀 손가락을 꾹꾹 눌렀다.“엄마, 잘못 했어요. 윤이가 너무 먹고 싶어서 그랬어요.”훈이도 잘못한 게 있는지라 별로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다.윤아는 이런 훈이를 보더니 너무 화가 나서 웃음이 나왔다.“훈아, 너도 먹고 싶어서 그랬어?”먹고 싶다는 형용에 훈이의 귀여운 얼굴은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아, 아니에요, 엄마...”“휴.”윤아는 한숨을 내뱉더니 조용히 말했다.“너희 둘 갑자기 왜 이래? 엄마가 전에 늘 말하지 않았어? 모르는 사람들이 주는 음식을 함부로 먹지 말라고 말이야.”“그, 그런데 어제 엄마가 우리랑 민기가 이제부터는 친구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엄마도 민기한테 사탕 줬잖아요.”“...”딸의 이 한마디에 말문이 막혔다.그렇다. 만약 민기의 삼촌이 아이들에겐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녀도 민기에게 같은 존재였다.잠시 생각한 후, 윤아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엄마가 잘못 말했어.”윤이는 이 말을 듣더니 영리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이렇게 말했다.“괜찮아요. 윤이는 엄마 탓하지 않을 거예요.”“그럼 엄마는 윤이한테 고맙다고 해야겠네?”“별말씀을요.”윤아는 손을 뻗어 딸애의 보드라운 머리를 만지더니 갑자기 표정을 바꾸었다.“그래도 연속 두 날이나 모르는 사람 밥 얻어먹었던 일은 엄마한테 설명 해야지 않겠어?”윤아가 계속 추궁하는 것을 듣자 윤이는 찔리는 표정으로 우물쭈물 말했다.“엄마, 그런데요. 고독현 아저씨는... 모르는 사람 아니잖아요.”고독현 아저씨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고?하긴 그랬다. 두 아이에겐 ‘고독현 밤’이라는 신분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을 동반해 준 존재였다. 비록 전에 실물을 본 적이 없이 그저 그들의 라이브 방송을 보며 선물을 보내는 입장이긴 했지만 말이다.하지만 하루하루 쌓인 호감은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아주 큰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니 실물을 본 후, 어떻게 좋아하지 않겠는가?훈이도 이
심윤아: “...”쪼끄만 게 어쩌면 그녀의 뜻을 완전히 다르게 받아들였을까?“엄마는 그 뜻이 아니야. 윤이 넌 고독현 아저씨가 아내랑 아이가 있는지 없는지 알고 있어? 이젠 엄마 말 이해 했어?”“네.”윤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 빠르게 입을 열었다.“그럼 엄마, 내일 윤이가 엄마 대신 아저씨한테 물어볼게요. 만약 아저씨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윤이 아빠로 될 수 있죠? 그렇죠?”“...”'얘가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전에 선우가 그렇게 잘해주었을 때도 지금처럼 자신의 아빠로 되어 달라고 조르지 않았다.그런데 이 ‘고독현 밤’은 아이들과 고작 몇 번만 만났을 뿐인데 벌써 이런 생각을 하다니. 설마 햄버거 껍데기 대신 먹어준 것 때문인가? 그게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윤아는 놀라웠다.“심하윤, 너 엄마한테 솔직하게 말해봐. 고독현 아저씨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건데?“어떤 말인데요, 엄마?”“음...예를 들어서 네 아빠가 되고 싶다는 등 뭐 이런 말?”윤이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윤이가 스스로 원한 거예요. 아저씨가 내 아빠로 되었으면 하고요.”“왜?”“그야 아저씨가 윤이랑 오빠한테 잘해주니까 그러죠!”윤아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그럼 선우 아저씨는 너한테 잘 안 해줘?”하지만 이렇게 말하자마자 그녀는 후회했다.선우와 비교하지 말았어야 했다. 어쨌든 이미 거절했으니까.다행히도 어린 애들은 생각이 단순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녀의 말을 들은 다음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하지만 엄마, 고독현 아저씨가 선우 아저씨보다 잘 생겼어요!”“?”윤아는 갑자기 딸애가 얼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외모로 아빠를 고르다니...하지만 냉정해진 후, 윤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선우는 외모나 몸매나 두말할 것 없이 훌륭했다. 게다가 권력이며 재력도 탑 급이니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그런데 윤이는 ‘고독현 밤’이 선우보다 더 잘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