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다시 입을 열었다.“오후에 같이 차 보러 갈 필요 없다고 한 것도 이런 말들을 하고 싶어서였어?”“아니, 그냥 갑자기 네가 없어도 될 것 같았어.”여기까지 말이 나오자 윤아는 멈칫거리더니 다시 차가운 목소리로 덧붙였다.“네가 애들 학교 앞으로 찾아오지 않았다면, 난 네 차에 오르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 너하고 여기에 앉아 이런 말을 하고 있지도 않았을 거야. 나… 귀찮아.”“귀찮다고?”“그래. 나 너 좋아하지 않아. 그 전부터 난 이미 내 마음을 똑똑히 너한테 말했었어. 근데 네가 자꾸 매달리고 있잖아. 난 매일 너를 상대하느라 엄청난 시간을 들이고 있어. 귀국하고 나서 난 더 이상 널 상대할 인내심조차 없어졌어. 그러니 내가 정말 부탁하는 데 나한테 그만 좀 시간 낭비하고 다른 사람 찾아가면 안 돼?”윤아의 말에 선우의 눈빛은 더없이 차가워졌는데,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이때 머리 속에서 또 다른 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윤아의 목소리와 겹치게 되었다.“넌 네가 얼마나 귀찮은지 모르지? 네 세상에는 내가 전부야? 나 밖에 없어? 왜 맨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게 나만 붙잡고 늘어지는 거야? 네 아빠한테 가서 좀 귀찮게 굴어! X신! 너 나보고 뭐 한다고 그랬어? 너 같은 X신 때문에 네 아빠가 모질게 구는 거야!”칠흑 같은 어둠에 방 안에 있음에도 한겨울의 칼바람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어린아이는 딱딱한 마루에 무릎을 꿇은 채 차가운 물에 맞아 홀딱 젖어버렸다.차디찬 온도에 어린아이는 거의 질식할 정도로 얼어붙게 되었다.“엄, 엄마…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하지만 “엄마”라고 불리는 그 사람은 매몰차게 물 바구니를 버린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수만은 어둠의 나날들이 밀물처럼 밀려 와 당장이라고 선우의 숨통을 조일 것만 같다.그는 아랫입술을 꽉 물고 두 손도 주먹으로 움켜쥐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윤아는 이런 선우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차가운 말만 남기고 나서 눈을 내리깐
선우의 도움으로 일어난 식당 직원은 걱정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두 눈을 마주하며 살짝 혼란스러웠다.눈앞에 다정다감한 사람이 조금 전의 난폭하기 그지없었던 그 사람과 동일 인물인지 의심이 들었다.“저, 저 괜찮아요.”하지만 선우는 식당 직원을 놓아주지 않고 실례 좀 하겠다고 미리 인사를 하고 나서 옷소매를 거두고 살펴보았다.걷자마자 이미 벌겋게 부어오른 상처가 눈에 훤하게 들어왔다.선우는 안색이 살짝 변하면서 무거운 소리로 입을 열었다.“일단 차가운 물로 온도부터 좀 낮추세요.”“네…”그러고 나서 선우는 식당 직원과 함께 식당 뒤쪽으로 갔는데, 차가운 물로 적시고 있을 때, 선우는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뜨거운 물에 데인 아픔이 차가운 물로 차차 식혀져 아픔이 사라졌다.하지만 겨울이라 차가운 물에 한참을 적시고 나니 손은 거의 감각을 잃은 듯했다.그렇게 한참을 적시고 나서 직원은 밖으로 나왔는데, 선우가 그녀의 앞길을 막았다.“정말 죄송해요. 지금 병원으로 같이 가요.”“아, 아니에요. 그냥 살짝 데인 거뿐이에요. 차가운 물로 식혔으니 인제 괜찮을 거예요.”“그러지 말고 그냥 병원으로 가요. 제 책임이에요.”준수하고 부드러운 선우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여자 직원은 결국 거절하지 못했다.…집으로 돌아온 윤아는 여전히 마음속으로 죄책감이 들었지만, 한껏 홀가분해졌다.전에는 선우가 자기한테 잘해주면 잘해 줄수록 거대한 산에 억눌린 듯이 숨이 막혔지만, 인제 제대로 나쁜 사람이 되어 나쁜 말들을 하고 나니 오히려 전보다 좋아졌다.적어도 가쇄에 갇혀 있는 기분은 들지 않았으니 말이다.“엄마, 오셨어요.”서훈은 현관에 서서 윤아를 불렀다.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윤아는 서훈을 보고 그를 향해 걸어갔다.“그래, 엄마 기다렸어?”서훈의 작은 얼굴에는 걱정하는 모습이 드러났다.“엄마, 선우 아저씨랑 싸우셨어요?”‘싸워?’윤아는 고개를 저었다.“싸운 건 아니야. 그냥 어떤 일들을 똑똑히 말해준 것 뿐이야.”이에 서훈은 뭔가 느낀 듯
하지만 지금의 상황으로 보아서는 첫 번째 생각이 맞을 가능성이 더욱 높다.만약 두 번째 생각대로라면 지금은 휴식을 해야 할 시간인데, 응당 휴대폰을 확인하고도 남았을 것이다.이리저리 생각하더니 윤아는 결국 일단 자기로 했다.다음날.윤아는 민우에게 이사 갈 생각을 털어 놓았다.본 지방 사람인 민우이기에 좋은 곳이라도 있는지 물어보려던 생각이었다.윤아의 말을 듣고 민우는 살짝 당황했다.“이사 가신다고요? 이렇게 갑자기요? 수원으로 오시기 전에 미리 준비해 놓으셔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윤아는 자기의 사적인 일을 민우에게 알릴 생각이 없어 덤덤하게 웃기만 했다.“그럴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그냥 알려주시면 돼요.”하지만 능구렁이 같은 민우는 이미 뭔가를 눈치챈 듯이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혹시 그 전에 살고 계시던 집 말이에요, 이선우 씨께서 준비해 주신 거 아니에요? 갑자기 다른 곳으로 이사 가신다는 걸 보면, 대표님께서 이선우 씨를 거절했나 봐요?”“…”‘뭔 사람이 눈치가 백단이야?’“오민우 씨, 그런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을 시간에 업무에 더 집중한다면 저희 회사 발전에 아주 바람직할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전혀요. 사람이 어떻게 일만 하고 살 수 있겠어요. 근데 제가 미리 제안하는 바인데, 앞으로 긴 시간 동안 이곳에서 발전하고 싶으시다면, 부근에서 집을 장만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여기저기 이사 갈 필요는 없잖아요.”이에 대해 윤아도 생각했었다.하지만 자주 나타나는 수현으로 하여 귀국 발전을 선택한 것이 올바른 일인지 망설이기 시작했다.만약 마지막에 아이들까지 수현에게 빼앗긴다면, 차라리 해외에서 작은 사업이나 해도 좋을 듯싶었다.굳이 회사를 차려 발전시킬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윤아를 바라보며 민우가 물었다.“무슨 문제라고 있어요?”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윤아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이미 저지른 일인데, 만약 생각을 바꾸면서 갈팡질팡한다면, 회사 사람들에게도
민기 때문에 두 아이 앞에서 나쁜 이미지를 남길 생각을 하니 수현은 눈살을 더욱 매섭게 찌푸렸다.온갖 정성을 들인 이유는 단 하나 서훈이가 자기한테 경계심을 풀고 그와 동시에 사이를 좁히기 위함이었다.그러나 생각했던 결과와 완전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이 사람들한테 잘 해줄 필요도 없다.여기까지 생각하면서 민기를 바라보는 수현의 눈빛은 점점 더 차가워졌다.그런 눈빛을 마주하면서 민기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만 같았다.‘무서워… 집에 가고 싶어.’앞에 앉아 있던 민재가 더는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선뜻 나서서 말렸다.“대표님,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민기도 겨우 5살 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잖아요. 대표님께서 그렇게 어두운 표정만 하고 있으니 당연히 겁을 먹고 있는 거예요.”이에 수현은 멈칫거렸다.“그래요?”그러자 민재가 되물었다.“그럼,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이런 표정과 동작으로 훈이, 윤이를 마주한다면, 그 아이는 지금 민기처럼 두려워하지 않을까요?”민재의 말에 수현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그럼, 어떡해요?”“그건 아주 간단해요.”민재는 마치 밥 먹고 물 마시듯이 간단하다는 뉘앙스로 말했다.“훈이, 윤이한테 대하는 것처럼 대하면 돼요.”이에 수현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다른 아이에게 부드러울 리가 없다.하지만 민재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뭐가 불가능하다는 거죠? 두 아이와 가까워지고 싶어 하시는 것도 대표님 아니었어요? 돈도 들였고 사람도 찾아왔는데, 이제 와서 불가능하다고요? 그럼, 그 전에 뭐 하셨어요? 차라리 그냥 민기 도로 돌려보내시고 남은 일들도 다 그만두세요.”“…”민재의 말에 수현은 말 문이 턱턱 막혔다.잠시 침묵하더니 수현은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열었다.“요즘 들어 갈수록 위아래가 없는 것 같네요.”수현의 온몸에서 풍겨 나오는 한기에 민재는 목을 웅크렸다.“제가 어찌 감히… 전 그냥 합리적인 제의를 건네는 것 뿐이에요.”수현은 더는 말을 하
하윤은 곧 수현의 손에서 사탕을 건네받았다.이어 수현은 서훈에게도 건네주었는데, 서훈은 다소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고 사탕을 손에 쥐고도 즉시 입으로 넣지 않았다.오히려 수현 옆에 갑자기 나타난 민기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민기도 지금 자기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는 화려한 두 친구를 바라보고 있다.비록 5살밖에 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런 느낌이 들었다.자기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는 생각 말이다.민기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저도 모르게 수현의 몸 뒤로 움직였다.“어?”그런 민기의 움직임에 하윤의 시선도 집중되었다.“아저씨 아이예요?”“…”수현은 입술을 오므린 채 어쩔 수 없다는 뉘앙스로 부정했다.“그렇다고 해도 좋아. 근데 아저씨 아이가 아니라 아저씨 친척 집의 아이야.”이에 하윤은 초롱초롱한 두 눈을 뜨고 물었다.“그럼, 아저씨가 전에 말씀하셨던 그 아이예요? 학교 바래다주고 있다고 했던 그 아이인가요?”“그래, 엄마 아빠가 아주 바쁘셔서 아저씨가 대신 돌봐주고 있어.”예전과 같다면 수현은 종래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상황이 이러하니 어쩔 수 없는 마음에 이럴 수밖에 없다.그러나 순수하기 그지없는 하윤의 맑은 두 눈을 마주하고 거짓말을 하니 수현은 마음속에 죄책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왠지 모르게 “이상한 아저씨”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하윤은 그 속의 진상도 모른 채 앞으로 다가와 민기와 인사를 하고 있다.“안녕, 난 심하윤이라고 해. 그리고 여긴 우리 오빠 심서훈이야. 넌 이름이 뭐야?”도자기 인형이랑 다름없는 하윤은 오늘 베이지 외투를 입고 양 갈래 머리를 하고 있다.지금 하윤의 모습은 귀여울 뿐만 아니라 친화력도 엄청 있어 보인다.하윤의 말에 민기는 그제야 수줍어하며 입을 열었다.“난 조민기라고 해.”하윤은 붙임성이 좋아 민기도 하윤에게 감화되어 곧 두 사람에게 스며들게 되었다.세 아이를 바라보면서 수현은 입을 열었다.“민기 성격이 좀 내성적이야. 그러니 학교에서 훈이, 윤이
“그래서 오빠는 낭비하는 게 두려워서 그런 거야? 껍데기 먹기 좋아하는 게 아니라?”훈이 표정은 순간 조금 일그러졌다.누가 햄버거 껍데기를 좋아하겠는가?“응.”“오빠, 미안해. 그럼 앞으로 껍데기는 윤이가 절로 먹을게.”햄버거 껍데기를 먹을 생각을 하니 윤이의 오관은 모두 일그러졌다. 사실 윤이는 햄버거 껍데기는 두말할 것도 없고 햄버거 안의 야채도 골라냈다.하지만 오빠가 매번 자신을 대신해 먹으니 오빠가 먹기 좋아한다고 생각했다.수현은 옆에서 두 아이가 의논하는 이 일을 열심히 듣고 있다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둘 다 먹기 싫으면 아저씨가 대신 먹어줄까?”비록 그도 먹기 싫어하지만 말이다.햄버거?이건 수현에겐 그저 패스트 푸드에 불과했다. 하지만 많은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햄버거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물론 옆에 있던 민재가 수현이 속으로 한 이 말들을 들었다면 경멸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을 거다.“대표님께선 젊지 않으십니까?”두 아이는 이 말을 듣더니 동시에 수현을 보았다.훈이는 여전히 비교적 경계적인 상태였고 좋다고도, 싫다고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윤이는 달랐다. 아이는 선천적으로 사교성이 좋았고 경각심이 부족했다. 그래서 얼른 수현의 말에 좋다고 했다.“좋아요! 아저씨, 그럼 약속한 거예요. 앞으로 저랑 오빠가 고기를 먹고 아저씨가 껍데기와 야채를 드셔야 해요.”원래 알겠다고 말하려던 수현은 마지막까지 듣자 눈썹을 찌푸렸다.“어, 윤이 너 야채도 안 먹어?”햄버거 껍데기를 먹지 않는 건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별로 건강한 음식도 아니었으니까.하지만 야채도 먹지 않는다니!“아저씨, 야채는 정말 맛없는걸요.”“아무리 맛없어도 조금은 먹으면서 비타민 보충해야지. 안 그러면 건강에 안 좋아.”아버지라는 마음가짐으로 아이들을 대하다 보니 수현은 얼른 자기 생각을 윤이에게 말했다.하지만 윤이는 이 말을 듣자마자 기분이 안 좋았다. 아이는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며 말했다.“아저씨, 왜 우리 엄마랑 같아요?”
[미안해요. 어젠 급한 일이 있어서 가지 못했어요.]상대방도 가지 않았고 자신도 가지 않았다. 자신도 사과했고 그도 사과했다.윤아는 화를 낼 수 없었다. 아무런 입장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묻기만 했다.[그럼 이 현금 아직도 필요하세요? 제가 카드로 보낼까요?]원래 상대방이 거절할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그는 이번에 냉큼 승낙했다. 한참이 지나서 그녀에게 카드 번호와 이름을 보내왔다.“조우림?”성이 조 씨인가?윤아는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이 시간을 빌려 돈을 이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의 계좌에 넣었다.그리고 상대방에게 돈을 보냈다고 말한 후, 다시 회의실에 들어갔다,수현은 윤아의 답장을 받은 후, 민재에게 설명했다. 민재는 얼른 우림과 이 사실을 말했고 우림도 자초지종을 안 후, 돈을 민재에게 돌려주었다.비록 그 몇백만 원이 아깝지만 말이다.그러나 요 며칠 발생한 일을 생각해 보니 그는 어렴풋이 뭔가를 느꼈다. 어쨌든 그는 직장에서 오랫동안 일한 사람이다 보니 관리층으로 올라갈 머리는 없어도 어떤 건 알아챌 수 있었다.시간이 이렇게 오래 흘러도 남성 진씨 집안의 사람들은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관계를 맺으려 해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수현이 갑자기 나타나 그들 부부에게 일자리를 바꿔주었고 또 집도 새로 마련해 주었다. 심지어 그들 아이도 시에서 가장 좋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했다.아무 이유도 없는 건 불가능했다.하지만 그 구체적인 원인은 감히 엿볼 엄두가 없었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다. 수현 같은 인물은 분명 그를 해치지 않을 테니까.그리고 그는 그저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이 떡을 체하지 않게 먹고 잘 살기만 하면 된다.민재는 받은 돈을 빠르게 수현의 계좌에 보냈다.돌고 돌아 윤아가 수현에게 보낸 돈은 이미 두 사람의 손을 거쳤다.비록 작은 액수지만 말이다.수현은 핸드폰의 숫자를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옆에 있던 민재가 결국 그에게 귀띔해 주었다.“대표님, 이제 가셔야 합니다.”요즘 이 일 때문에 수현의
기쁜 윤이와 달리 훈이는 여전히 담담하게 행동했다.하지만 곁에 있었던 민기는 이 장면을 보자 참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비록 민기 집안은 몹시 가난한 건 아니었고 또 부모님 수입도 괜찮았지만 대부분 돈은 고액의 대출을 갚는 데 사용했다. 그래서 평소 이런 음식은 그에겐 사치였다.한 달에 한 번 먹을 기회도 없었다.“자.”윤이는 첫 번째 햄버거를 민기에게 건넸다.민기는 원래 손을 뻗어 받으려고 했으나 뭔가 떠오른 듯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수현을 보았다.민재 아저씨가 눈앞의 이 남자를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아침의 그 한마디부터 지금까지 민기는 여전히 엄두를 내지 못했다.너무 무서웠다. 만약 수현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분명 혼날 거라고 생각했다.윤이도 민기가 멈춘 것을 보자 그의 시선 따라 수현을 보았다.수현의 입가에 걸렸던 웃음도 한순간 경직되었다.‘왜 날 보는 거야?’‘음식을 먹는 것도 내 동의가 필요해? 나중에 두 아이가 날 어떻게 보겠어? 이 비서 진짜 아이한테 사상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아저씨?”윤이 목소리에 수현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얼른 표정을 바꾸고는 민기에게 말했다.“민기야, 윤이한테 고맙다고 말했어?”민기도 수현의 뜻을 알아차리고 얼른 윤이가 건넨 햄버거를 받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했다.윤이는 이 일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 윤아도 아이에게 이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햄버거를 가진 후, 윤이는 햄버거 껍데기를 수현에게 건넸는데 조금의 민망함도 없었다.곁에 있던 훈이가 이 장면을 보고 얼른 손을 뻗어 막았다.“윤아, 이러면 예의 없어.”이 말을 들은 윤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하, 하지만 아저씨가 윤이랑 오빠 대신 햄버거 껍데기 먹겠다고 하지 않았어?” “...”훈이는 일시에 어떻게 윤이에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몰랐다.하지만 만약 고독현 아저씨가 장난으로 하는 말이었다면? 몇 번 밖에 만나지 않은 사인데 어떻게 그들 대신 먹어주겠는가.훈이가 자신의 햄버거 껍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