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의 손이 닿은 그 순간, 윤아가 느낀 건 딱 한 가지였다. 차가움.수현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이 윤아의 체온을 머금은 팔에 닿자 소름이 오소소 끼쳤다.윤아는 그제야 수현의 창백한 낯빛을 보았다.둘의 접촉으로 수현도 자연스레 윤아의 반응이 이상하단 걸 눈치챘다.때문에 윤아가 자리에 앉고 나서 수현은 곧바로 손을 도로 치웠다.스튜어디스가 떠난 후, 윤아가 태연하게 물었다.“못 들어가게 할 땐 언제고?”수현은 그늘진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하지만 속으로는 민재의 계략이 꽤 쓸모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역시 가까이 못 다가오게 할수록 이 여자는 뭔가 숨기는 게 있나 하고 더 가까이 다가왔다.이런 결과가 바로 그가 원하던 것이었다.아니나 다를까, 잠깐 침묵하던 윤아가 주동적으로 물었다.“퇴원 수속 했어?”“안그럼? 돌아가서 다시 입원하게?”윤아는 그의 말투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들었지만 할머님을 만나러 데려가 준다니 더 화를 내진 않았다.“아직 완전히 회복된 게 아니면 돌아가 좀 더 있는 것도 나쁘진 않지. 회복 안 할 거야?’수현이 윤아를 힐끗 보았다.“너랑 무슨 상관인데?”윤아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왜 상관이 없어? 네가 우리 회사 최고 투자자라는 거 잊지 마.”그녀의 말에 안 그래도 퀭하던 수현의 눈이 더 생기를 잃었다. 게다가 입술도 아까보다 더 창백해진 것 같았다.그의 손이 얼음장같이 차던 걸 떠올린 윤아는 지나가던 스튜어디스를 불렀다.“저기, 담요 좀 가져다주실래요?”스튜어디스는 금방 담요를 가져왔고 윤아는 그걸 자기가 아닌 수현의 몸에 덮어주었다.수현:“?”수현이 의아한 듯 고개를 돌렸다.습관적으로 반항하는 수현:“누가 나 춥댔어?”“내가.”“필요 없어. 가져가.”윤아가 미간을 찌푸렸다.“안돼.”말을 마친 윤아는 몸을 돌려 더는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 수현은 눈썹을 찌푸린 채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말로는 필요 없으니 가져가라 툴툴대도 몸은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안 그래도 얇게 입은 수현은
수현은 입꼬리를 슥 올리더니 그녀에게 한마디 해줬다.수현의 말에 일에 몰두하고 있던 윤아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왜, 내 말이 틀려?”미간을 찌푸리는 윤아:“왜 안 자?”수현:“안 졸려.”윤아는 더 얘기하는 대신 아까 수현이 했던 말을 되새기며 프로젝트를 다시 검토했다. 수현이 알려준 해결방안은 말 그대로 완벽했다.“나 일하는 데 방해나 하지 마.”시선을 떨군 채 웃음을 터뜨리는 수현.“기껏 도와줬더니.”“도움 필요 없어.”수현은 기가 막혔다. 그러나 윤아가 자기의 조언 대로 수정하는 걸 보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내심 마음이 풀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스튜어디스가 기내식을 들고 다가왔다. 윤아는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수현이 대신 말 했다.“와인 한 잔 부탁해요.”그의 말에 한창 바쁘게 머리를 파묻고 타자하던 윤아가 머리를 번쩍 들고 수현을 노려봤다.“아픈 사람이 무슨 술이야?”“거의 나았어.”수현이 침착하게 말했다.“몇 모금만 마실게.”윤아는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왔다. 잠시 후 그녀는 스튜어디스를 보며 말했다.“죄송해요. 이제 막 병원에서 나온 사람이라 술은 안돼요. 따뜻한 물 한 잔만 부탁드릴게요.”스튜어디스는 윤아와 수현을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심윤아. 네가 뭔데 날 단속해?”그에 윤아가 무표정으로 말했다.“옆자리 앉은 사람. 네가 술 마시고 또 위병 도져서 내 일에 방해되면 어떡해? 비행기 내려서는 마시든 말든 마음대로 해.”수현:“...”이윽고 스튜어디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물을 한 잔 들고 왔다.수현은 밋밋한 맹물을 말없이 쳐다봤다.여태껏 살면서 비행기에 수십 번을 타봤지만 그에게 따뜻한 물을 건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하지만 그는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가 않았다.오히려 문제는 그가 직접 그 물을 받아들기 창피해서 싫다는 것이다.그렇지만...수현은 체면 차리기만 하면 누가 넘어오냐는 민재의 말이 떠올랐다.생각 끝에 수현은 결국 입을 앙다
두 시간 후, 비행기는 남성에 착륙했다.마음의 준비는 했지만 비행기에서 내려 익숙한 공항을 보자 윤아는 저도 모르게 아래로 떨군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느꼈다.5년 전, 그녀는 바로 여기서 떠났다.5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공항은 딱히 달라진 게 없었다. 윤아는 맨 뒤에서 걸었는데 마음이 몸보다 무거웠다.윤아는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걷다 보니 어느새 앞의 사람들과 동떨어졌다. 윤아가 너무 늦게 따라오자 먼저 가던 수현과 민재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그것 역시 발견하지 못한 윤아는 그냥 앞으로 걸어가다 어딘가에 이마를 부딪쳤다.쿵.윤아의 이마가 단단한 가슴에 파묻혔다.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수현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서늘하게 말하는 수현.“앞 안 보고 걸어?”윤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마를 문지르며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뭐 좀 생각하느라.”“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렇게 정신이 팔려있어?”윤아는 이마를 만지던 동작을 멈추고 다시 공허한 눈빛으로 말했다.“할머님이 날 탓하진 않겠지? 내가 가는걸... 반기지 않으면?”수현이 멈칫했다.잠시 후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말했잖아. 널 아주 보고 싶어 하셨다고.”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생각해보면 제대로 효도도 못 해 드렸다. 윤아는 자기가 만약 할머님이었다면 분명 그녀를 탓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평소 온화한 성격이신 할머님을 떠올리면 그런 원망은 안 하실 것 같았다.“가자.”공항을 나와 호텔에 도착했을 땐 이미 여섯 시가 다 되어갔다.하늘이 흐린 걸 보니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았다.윤아가 호텔 체크인을 하는데 수현이 따라 들어왔다.“집에 안 가?”수현이 태연하게 말했다.“묘지가 여기랑 가까워. 반 시간 거리야.”그런 이유라면 이해가 되니 윤아도 더 뭐라 하지 않았다.둘은 각자 다른 방을 썼는데 수현은 민재와 같이 방을 쓰고 윤아는 독방을 썼다.두 사람의 방은 마침 서로 마주하고 있었다.방에 들어간 윤아
그 얘기를 꺼내자 윤아도 기억이 되살아났다.그때는 아직 해외에 있었을 땐데 다 같이 놀고 나서 함께 사진을 찍었었다. 그 사진엔 현아도 함께였다.여자 셋과 두 아이까지.사진이 인스타에 올려지자 많은 사람이 두 아이가 현아의 아이일지 윤아의 아이일지 추측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앨리스에게 따로 디엠을 보내 윤아의 연락처를 묻는 사람들도 난무했다.그러다 후에 윤아가 두 아이의 엄마라는 걸 알고 나서야 다시 잠잠해졌다.“됐어. 이제 그만 얘기할게. 나 지금 운전 중이라. 거의 도착했어. 넌 네 일에 집중해, 윤이랑 훈이는 나한테 맡기고. 내가 잘 보고 있을게.”“응.”윤아는 두 아이에게도 이런저런 당부를 한 후 전화를 끊었다.윤아가 핸드폰을 끄자 마침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몸을 일으켜 문을 열어주는 윤아.문밖엔 민재가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아가씨. 저희 저녁은 어디서 먹을까요?”저녁?그의 말에 윤아는 문득 허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졸렸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수현에게 줄 음식을 준비한 바람에 수면 시간이 짧아진 것도 있고 오늘 비행기를 타서인지 피로함이 밀려왔다.“별로 나가고 싶지 않아서요. 그냥 방에서 간단히 먹죠.”“하지만...”민재가 머뭇거렸다.곤란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윤아가 물었다.“왜요?”“별건 아니고요. 저는 강철 위장이라 아무거나 먹어도 되지만 대표님은...”여기까지 들은 윤아는 그가 왜 머뭇거렸는지 알 것 같았다.내일 할머님을 뵈러 가기도 해야 하니 윤아는 하는 수없이 말했다.“겉옷만 입고요. 나가 먹어요.”“네. 그럼 대표님께 말씀드릴게요.”“네.”윤아는 방으로 돌아가 겉옷 하나를 걸친 뒤 문을 나섰다.방문을 나서자 민재의 재촉에 못 이겨 나오는 수현이 보였다.윤아는 수현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가자.”수현도 성큼성큼 뒤따랐다.로비로 내려간 후 민재가 물었다.“윤아 아가씨. 뭐 먹고 싶은 거 있으세요?”“찾아보죠.”윤아가 핸드폰을 꺼내 주변 식당들을
10분 뒤.중식집.상의끝에 그들은 결국 중식집에 가기로 타협을 봤다.윤아는 메뉴판을 직원한테 돌려줬다.“네, 됐어요.”직원은 메뉴판을 건네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말을 마치고 그는 메뉴판을 챙겨 자리를 떴다.한편 윤아 맞은편에 앉은 수현은 시종 입을 열지 않았다.세 사람은 어색한 분위기를 풍기며 테이블에 마주 앉아있었다.민재는 차라리 이 상황을 외면하기로 마음먹고 편하게 있었다.윤아도 더 이상 수현과 대화하려는 의욕이 없어진 채 핸드폰으로 자료만 뒤지고 있었다.곁에 있던 민재는 그녀를 보더니 역시나 워커홀릭이라고 속으로 불만을 늘어놓았다.이전에 그는 수현도 충분히 워커홀릭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윤아가 더 심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식당에는 사람이 북적북적했다. 공기조차도 사레들릴 듯 매콤했다. 비록 맛있는 매운맛이었지만 수현의 위 건강에는 좋지 않았다.대략 10분쯤 지나자, 윤아가 주문한 요리들은 하나씩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누가 중식당이 아니랄까 봐 하나의 요리마다 빨간 빛깔을 뽐냈고, 고추가 들어있었다.민재는 평소에도 매운맛을 즐겨 먹는 편이라 매운 음식이 밥에 더 잘 맞다고 생각했다.그래서 그는 매 하나의 요리가 나올 때마다 벌써 군침이 고였지만 맞은편에 앉아있는 윤아와 수현을 보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요리가 다 나온 뒤에야 윤아는 입을 열었다.“이제 드시죠.”민재는 그녀를 바라보더니 그제야 자신한테 하는 말인 걸 알아챘다.그는 수현을 몰래 흘겨봤다.처음에 그는 무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지금의 수현은 마치 폭풍 전야의 분위기와 같이 안색은 먹으로 칠한 듯 어두워졌다.그가 수저를 들지 않으면 민재도 감히 수저를 들지 못했다.“드세요.”윤아는 그를 재촉하면서 심지어 자기는 이미 수저를 들었다. 민재도 그제야 수저를 들더니 낮은 목소리로 수현에게 속삭였다.“대표님, 고추를 볶지 않은 요리가 있는지 봐 드리겠습니다.”결국 그는 한참을 찾아도 고추가 들어있지 않은 요리를 찾아내지 못했다.이
왜냐하면 그는 전에 그녀한테 미안한 짓을 했었기 때문이다.비록 그는 가슴이 너무 답답했지만, 만약 그녀가 정말로 자신한테 복수라도 한다면 그는 받아들이기로 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직원은 마지막 요리를 테이블에 올렸다.“죄송합니다. 손님, 죽 끓이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하다 보니 이제야 다 됐네요. 맛있게 드세요.”직원은 냄비에 담긴 흰 쌀죽을 왼쪽 빈 공간에 올려놓았다.수현은 죽을 보더니 순간 멍해졌다.민재도 따라서 멈칫했다.“윤, 윤아 아가씨, 이 죽은...?”윤아는 그가 놀란 모습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제가 그렇게도 악독해 보였어요? 위가 안 좋은 걸 알면서도 이걸 먹이려 했었을까 봐요?”만약 정말로 그에게 일이라도 생기게 하고 싶다면 병원에 가지 않고 그를 내버려두면 그만이지, 굳이 이렇게 빙빙 돌 필요가 있겠는가?하지만 윤아가 그를 데리고 중식집에 온 것은 고의였다.‘내가 지키지 않는다고 밥도 제대로 안 먹는다 이거지?’‘그럼 넌 여기서 흰 쌀죽이나 먹으며 우리가 맛있는 걸 먹는 모습을 지켜봐.’“아니에요, 아니에요.”민재는 급히 아니라고 해명했다. 전에 복잡했던 마음도 지금은 확 트였다.수현은 말할 것도 없고, 그는 아직도 연기가 나는 흰 쌀죽을 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설마 그녀가...그럼 그녀는 이미 도착하기 전부터 주문해 놓았던 건가?민재는 이내 수현에게 흰 쌀죽 한 그릇을 떠주며 말했다.“대표님, 조금 뜨거우니 식힌 후에 드세요. 천천히 드셔야 해요. 식도나 위가 데여도 좋지 않으니깐요.”수현은 자신의 앞에 놓인 흰 쌀죽을 멍하니 바라봤다.비록 지극히 흔하고 평범한 흰 쌀죽이었을 뿐인데 그는 지금 이 순간만큼 그게 너무 값졌다.윤아가 생각하던 대로, 흰 쌀죽이나 먹으며 우리가 맛있게 먹는 걸 지켜보는 수현에게 털끝만큼의 복수도 이루지 못했다.그는 누구도 보지 못하는 가운데서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렸다. 그리고 숟가락을 들고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죽을 한 모금을 입에 넣었다.조금 뜨거웠지만 금방 민재
잠들기 전, 윤아는 앨리스에게 문자를 보냈다.앨리스는 아예 아이 두 명이 놀이터에서 노는 영상을 보내줬다.“걱정하지 마. 잘 보고 있어. 둘이 오늘 꽤 즐겁게 논 모양이야. 내일 마침 주말이기도 하고. 조금 더 놀다가 집으로 데리고 갈게."앨리스가 예전에 그를 도와 아이를 돌본 적이 있었던지라 윤아는 시름이 놓였다.“그래. 고마워. 얼른 갈게. 기다려줘.”말을 마치고 윤아는 핸드폰을 거두고 휴식을 취했다.그녀는 미처 신경 쓰지도 못했다. 앨리스가 그녀에게 문자를 보낸 후 그녀는 또 하윤과 서훈의 영상을 돌려봤다.너무 사랑스러운 나머지 그녀는 영상을 인스타에 올려 자랑했다.공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줄곧 그녀를 쫓아다니던 몇몇 남자들은 ‘좋아요’를 누르고 아이들을 칭찬하며 그녀의 환심을 샀다.앨리스는 그녀의 게시물에 달린 댓글을 보며 전혀 기쁘지 않았다,그녀가 무슨 게시물을 올리던 그 남자들은 그저 생각 없이 아부할 뿐이었다. 가식덩어리 그 자체였다.순간 무언가 떠올랐는지 앨리스는 인스타를 탈퇴하고는 참지 못하고 그녀가 맨 위고정으로 설정한 카톡 프로필을 바라봤다.그것은 수현의 프로필이었다...그날 연락처를 추가한 뒤로 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그에게 문자를 보낸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 앨리스는 그의 차가운 태도를 봐서는 아마 문자를 읽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게다가 그와 윤아 사이에 뭔가 있는것 같기도 했다.그녀는 감히 물어볼 용기도 없었고 묻고 싶지도 않았다. 만약 정말로 뭔가 있다고 하더라도 알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이때까지 한 번도 이렇게 비참했던 적이 없었다. 늘 곁에는 그녀를 추구하는 남자들로 가득 찼었지, 그녀가 먼저 주동적으로 대쉬한대도 그저 손가락 한번 까딱하면 남자들은 죄다 넘어오곤 했다.하지만 지금 이 남자는 그녀가 어떻게 대하든 관심이 없어 보였다.앨리스는 조금 화가 난 나머지 그의 연락처를 삭제하려고 했다.막상 손가락을 삭제 버튼에 터치하려는 순간 그녀는 망설
“비서님, 저한테 잔소리하실 거면 차라리 당신네 진 대표한테나 잔소리하세요. 저보다도 더 적게 입었는데.”적어도 그녀는 누빔 안감 코트를 입었다.“안 추워.”수현은 입을 열었다.“하지만 넌 환자잖아.”윤아도 이어 말했다.그 말을 들은 수현은 피식 웃었다.“환자가 너랑 같이 산소를 가냐? 얼른 가자, 잔소리 그만하고. 또 살 것도 있잖아.”윤아도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그래도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깐 옷을 더 껴입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그녀도 계속 엄마처럼 옆에서 잔소리할 수도 없었다.생각 끝에 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그럼 가자.”그들은 과일과 꽃을 사 들고 또 제물도 좀 사고 나서 묘원으로 향했다.묘원으로 가는 길, 윤아는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차 안의 분위기도 많이 가라앉았다.누구도 말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 다들 슬픈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말이다.“도착했어.”묘원에 도착하자 차를 세우고 차 문을 열었다.밤새 내린 비 때문에 묘원의 땅은 질퍽했다. 공기 중에는 온통 빗물과 그윽한 나무 냄새가 섞여 싱그러운 향기가 났다.비가 그친 후의 묘원에는 사람이 드물었다. 여기는 남성에서 지리 풍수가 제일 좋은 묘원이었다. 길 양측 도로는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고 빗물은 낙엽을 진흙 속으로 쓸어버렸다.윤아는 수현 뒤로 따라 들어갔다. 묘와 묘 사이의 거리는 그녀가 평상시 보던 묘원처럼 바싹 붙어있지 않고 조금씩 거리를 두고 있었다.그녀는 주위를 둘러보고 이내 눈길을 접었다.얼마나 걸었는지 수현은 걸음을 멈췄다.윤아도 따라서 발걸음을 멈칫하더니 수현의 눈길을 따라 내다봤다.묘비에는 한 장의 컬러사진이 붙어있었다.사진에는 할머니께서 젊으셨을 때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밝은 웃음을 하고 있는 소녀는 비할 데 없이 눈부셨다.그 사진을 본 윤아는 제자리에 넋이 나간 채 굳어버렸다.마치 그때 할머니가 하셨던 말씀이 귓전을 울리는 것 같았다.“수현아, 윤아야, 이제 이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