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그는 전에 그녀한테 미안한 짓을 했었기 때문이다.비록 그는 가슴이 너무 답답했지만, 만약 그녀가 정말로 자신한테 복수라도 한다면 그는 받아들이기로 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직원은 마지막 요리를 테이블에 올렸다.“죄송합니다. 손님, 죽 끓이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하다 보니 이제야 다 됐네요. 맛있게 드세요.”직원은 냄비에 담긴 흰 쌀죽을 왼쪽 빈 공간에 올려놓았다.수현은 죽을 보더니 순간 멍해졌다.민재도 따라서 멈칫했다.“윤, 윤아 아가씨, 이 죽은...?”윤아는 그가 놀란 모습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제가 그렇게도 악독해 보였어요? 위가 안 좋은 걸 알면서도 이걸 먹이려 했었을까 봐요?”만약 정말로 그에게 일이라도 생기게 하고 싶다면 병원에 가지 않고 그를 내버려두면 그만이지, 굳이 이렇게 빙빙 돌 필요가 있겠는가?하지만 윤아가 그를 데리고 중식집에 온 것은 고의였다.‘내가 지키지 않는다고 밥도 제대로 안 먹는다 이거지?’‘그럼 넌 여기서 흰 쌀죽이나 먹으며 우리가 맛있는 걸 먹는 모습을 지켜봐.’“아니에요, 아니에요.”민재는 급히 아니라고 해명했다. 전에 복잡했던 마음도 지금은 확 트였다.수현은 말할 것도 없고, 그는 아직도 연기가 나는 흰 쌀죽을 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설마 그녀가...그럼 그녀는 이미 도착하기 전부터 주문해 놓았던 건가?민재는 이내 수현에게 흰 쌀죽 한 그릇을 떠주며 말했다.“대표님, 조금 뜨거우니 식힌 후에 드세요. 천천히 드셔야 해요. 식도나 위가 데여도 좋지 않으니깐요.”수현은 자신의 앞에 놓인 흰 쌀죽을 멍하니 바라봤다.비록 지극히 흔하고 평범한 흰 쌀죽이었을 뿐인데 그는 지금 이 순간만큼 그게 너무 값졌다.윤아가 생각하던 대로, 흰 쌀죽이나 먹으며 우리가 맛있게 먹는 걸 지켜보는 수현에게 털끝만큼의 복수도 이루지 못했다.그는 누구도 보지 못하는 가운데서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렸다. 그리고 숟가락을 들고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죽을 한 모금을 입에 넣었다.조금 뜨거웠지만 금방 민재
잠들기 전, 윤아는 앨리스에게 문자를 보냈다.앨리스는 아예 아이 두 명이 놀이터에서 노는 영상을 보내줬다.“걱정하지 마. 잘 보고 있어. 둘이 오늘 꽤 즐겁게 논 모양이야. 내일 마침 주말이기도 하고. 조금 더 놀다가 집으로 데리고 갈게."앨리스가 예전에 그를 도와 아이를 돌본 적이 있었던지라 윤아는 시름이 놓였다.“그래. 고마워. 얼른 갈게. 기다려줘.”말을 마치고 윤아는 핸드폰을 거두고 휴식을 취했다.그녀는 미처 신경 쓰지도 못했다. 앨리스가 그녀에게 문자를 보낸 후 그녀는 또 하윤과 서훈의 영상을 돌려봤다.너무 사랑스러운 나머지 그녀는 영상을 인스타에 올려 자랑했다.공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줄곧 그녀를 쫓아다니던 몇몇 남자들은 ‘좋아요’를 누르고 아이들을 칭찬하며 그녀의 환심을 샀다.앨리스는 그녀의 게시물에 달린 댓글을 보며 전혀 기쁘지 않았다,그녀가 무슨 게시물을 올리던 그 남자들은 그저 생각 없이 아부할 뿐이었다. 가식덩어리 그 자체였다.순간 무언가 떠올랐는지 앨리스는 인스타를 탈퇴하고는 참지 못하고 그녀가 맨 위고정으로 설정한 카톡 프로필을 바라봤다.그것은 수현의 프로필이었다...그날 연락처를 추가한 뒤로 두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그에게 문자를 보낸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 앨리스는 그의 차가운 태도를 봐서는 아마 문자를 읽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게다가 그와 윤아 사이에 뭔가 있는것 같기도 했다.그녀는 감히 물어볼 용기도 없었고 묻고 싶지도 않았다. 만약 정말로 뭔가 있다고 하더라도 알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이때까지 한 번도 이렇게 비참했던 적이 없었다. 늘 곁에는 그녀를 추구하는 남자들로 가득 찼었지, 그녀가 먼저 주동적으로 대쉬한대도 그저 손가락 한번 까딱하면 남자들은 죄다 넘어오곤 했다.하지만 지금 이 남자는 그녀가 어떻게 대하든 관심이 없어 보였다.앨리스는 조금 화가 난 나머지 그의 연락처를 삭제하려고 했다.막상 손가락을 삭제 버튼에 터치하려는 순간 그녀는 망설
“비서님, 저한테 잔소리하실 거면 차라리 당신네 진 대표한테나 잔소리하세요. 저보다도 더 적게 입었는데.”적어도 그녀는 누빔 안감 코트를 입었다.“안 추워.”수현은 입을 열었다.“하지만 넌 환자잖아.”윤아도 이어 말했다.그 말을 들은 수현은 피식 웃었다.“환자가 너랑 같이 산소를 가냐? 얼른 가자, 잔소리 그만하고. 또 살 것도 있잖아.”윤아도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그래도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깐 옷을 더 껴입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그녀도 계속 엄마처럼 옆에서 잔소리할 수도 없었다.생각 끝에 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그럼 가자.”그들은 과일과 꽃을 사 들고 또 제물도 좀 사고 나서 묘원으로 향했다.묘원으로 가는 길, 윤아는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차 안의 분위기도 많이 가라앉았다.누구도 말을 먼저 꺼내지 않았다. 다들 슬픈 상황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말이다.“도착했어.”묘원에 도착하자 차를 세우고 차 문을 열었다.밤새 내린 비 때문에 묘원의 땅은 질퍽했다. 공기 중에는 온통 빗물과 그윽한 나무 냄새가 섞여 싱그러운 향기가 났다.비가 그친 후의 묘원에는 사람이 드물었다. 여기는 남성에서 지리 풍수가 제일 좋은 묘원이었다. 길 양측 도로는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고 빗물은 낙엽을 진흙 속으로 쓸어버렸다.윤아는 수현 뒤로 따라 들어갔다. 묘와 묘 사이의 거리는 그녀가 평상시 보던 묘원처럼 바싹 붙어있지 않고 조금씩 거리를 두고 있었다.그녀는 주위를 둘러보고 이내 눈길을 접었다.얼마나 걸었는지 수현은 걸음을 멈췄다.윤아도 따라서 발걸음을 멈칫하더니 수현의 눈길을 따라 내다봤다.묘비에는 한 장의 컬러사진이 붙어있었다.사진에는 할머니께서 젊으셨을 때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밝은 웃음을 하고 있는 소녀는 비할 데 없이 눈부셨다.그 사진을 본 윤아는 제자리에 넋이 나간 채 굳어버렸다.마치 그때 할머니가 하셨던 말씀이 귓전을 울리는 것 같았다.“수현아, 윤아야, 이제 이 할
수현은 멀리서 묘비 옆에 기댄 채 살며시 할머니랑 대화하는 윤아를 조용히 바라봤다.무엇을 말하는지 그는 들을수 없었지만 그녀한테서 풍기는 짙고 무거운 슬픔과 절망을 느낄 수 있었다.그녀의 상태는 마치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단 사실을 들은 그때의 그와 똑같았다.아니, 심지어 그보다도 더 심한 것 같다.수현은 5년 전 할머니께서 수술하던 그날을 떠올렸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정말이지 할머니가 그녀의 마음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생각한 수현은 양미간을 찌푸린 채 검은 눈동자를 반쯤 뜨고 할머니를 보고 난 후 윤아의 상태를 걱정하기 시작했다.얼마 후, 날씨가 다시 흐려지기 시작했고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민재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봤더니 날씨는 더 흐려졌다.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귀띔했다.“대표님, 또 비가 오려나 봐요. 아가씨보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수현은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선 채 이내 입을 열었다.“가서 우산 2개 찾아와주세요.”민재는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키고 몸을 돌려 경비원한테 우산을 빌리러 갔다.몇 분 후, 민재는 양손에 검은 우산 1개씩 든 채 여기를 향해 달려왔다.“대표님, 찾았습니다.”“갖다주세요.”말을 마치고 그는 또 무언가 떠올랐는지 민재를 향해 손을 뻗었다.“됐어요. 그냥 나한테 줘요.”그는 우산 하나를 갖고 걸어갔다.윤아는 이미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거기에 기댄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그녀는 마치 이미지도 신경 쓰지 않는 듯 땅바닥이 젖어있든 말든 거기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몸에 걸친 옅은 색의 코트도 흙으로 얼룩져 있었다.수현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우산을 받쳐 들고 그녀 앞에 가서 멈추었다.“비 올 것 같아.”그는 그녀한테 귀띔했다. 윤아는 그의 말을 듣고도 아무 반응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수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심윤아.”그녀는 여전히 제자리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우
“뭔 뜻인데? 그때 이혼하자고 한 건 너잖아.”“내가 이혼하자고 했다고?”윤아는 마치 무슨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듯 수현을 밀어내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서더니 빗속에 그대로 드러났다.수현은 비를 맞고 있는 그녀를 보고 안색이 어두워져서 그녀한테 다가가 비를 막아줬다. 그녀가 또 뒤로 물러서려고 하자 수현은 아예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다.“뒤로 더 가면 비 맞아.”“그래도 너랑 상관없어.”윤아는 말을 이어가며 차가운 표정을 짓고서 그한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수현은 이내 팔목을 잡아챘다.“왜 나랑 상관없는데? 차라리 오늘 할머니 앞에서 다 얘기해.”마지막 한마디의 말을 들은 윤아는 문득 자신이 아직도 할머니 묘에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싸움하더라도 할머니 묘 앞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할머니 앞에서 예의를 잃어서는 안 된다. 그러자 윤아는 엉망이었던 기분이 점차 가라앉고, 사람 자체가 진정되기 시작했다.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너랑 더 이상 할말 없어. 이젠 가자.”말을 마치고 윤아는 앞으로 걸어갔다. 수현은 이내 윤아를 잡았다.“말 제대로 해.”수현은 전혀 떠나려는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팔목을 잡은 채 말을 이어갔다.“나 때문이 아니었다면 할머니를 떠나지 않았다는 게 도대체 무슨 뜻인데?”윤아는 차가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말 그대로야, 모르겠어?”그리고 윤아는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는 바닥에 쓰러졌다.“아가씨!”곁에 있던 민재는 너무 놀란 나머지 본능적으로 다가가서 잡으려고 했다.하지만 수현이 즉시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았다.정신을 잃고 쓰러진 윤아가 그의 품에 넘어지자 수현은 비로소 그녀의 안색이 금방 왔을 때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지금의 그녀는 안색이 더없이 창백한데, 그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대표님, 아가씨 별일 없겠죠?”민재도 다소 걱정되었는지 창백해진 윤아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원래 병원에 가려고 했지만 차가 아직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윤아는 깨어났다.그녀가 깨어나 보니 차 안에 에어컨 온도는 높게 켜져 있었지만 앞에 앉은 민재의 옷은 아직도 젖어 있었고, 그는 추워서 재채기할 정도인 데다 코까지 계속 들이마셨다.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손을 뻗어 자신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러다 싸늘함이 묻어있는 수현의 두 눈과 마주쳤다.수현은 뒷좌석의 구석에 앉아 그녀를 조용히 바라봤다.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뒷좌석을 다 차지한 바람에 수현이 구석으로 밀려난 것을 눈치챘다.그녀가 일어나려 하자 이내 머리가 어지러워 나서 아예 그대로 누워있었다.앞좌석에 앉은 민재는 또 연신 재채기를 했다.그는 아직 윤아가 깨어난 줄도 모르고 재채기를 하고 나서 코를 비비더니 고개를 돌려 수현에게 물었다.“대표님, 아까 보니 등이 다 젖으신 것 같은데 왜 대표님은 재채기를 하지 않으시는 거죠?”그 말을 들은 윤아는 멈칫하더니 민재의 말을 통해 자신이 쓰러진 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그때는 한창 비가 쏟아지고 있었고 그녀는 또 쓰러지기까지 했다. 둘은 모두 흠뻑 젖었지만 그녀는 여기에 누워있는 채 아무런 불편한 점도 느끼지 못했다.‘생각할 필요도 없이 뻔했다. 이 모든 걸 누가했는지.’분명히 둘은 아까까지 싸우고 있었지만 이내 윤아가 쓰러지자 수현은 다정하게 그녀를 챙겼다.윤아는 가슴이 아팠다.“대표님, 병원에 거의 도착합니다.”앞좌석에 앉은 기사가 귀띔했다.윤아는 멍해져 있더니 그제야 자기가 쓰러진 후 그들이 그녀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려 했던 걸 알아챘다.앞좌석에 앉은 민재도 뭔가 눈치챘는지 몸을 기울여 윤아를 바라봤더니 윤아의 서늘한 눈망울이 앞에 보였다.그는 멍하니 있었다.“아가씨, 깨어나셨군요.”윤아는 그를 덤덤하게 쳐다보니 대답했다.“네, 병원은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호텔로 가시죠.”민재는 온몸이 젖어있는 상태라 빨리 호텔로 돌아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 게 좋았다.그 둘은 모두 그녀를 챙기려
수현이 여전히 그곳에 꼼짝 않고 앉아 있는 것을 보자 민재는 독설을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만약 대표님께서 젖은 옷을 벗지 않으신다면 조금 있다가 아가씨께서 보시면 당연히 일부러 그러신 거 아시지 않을가요?”“듣고 보니 일리있는 말이네요.”수현은 드디어 그한테 설득당했는지 몸을 일으켜 젖은 외투와 옷을 벗었다.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후 수현은 확실히 몸이 순식간에 편안해졌다. 때마침 민재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그가 휴대전화를 막 꺼내려는데 수현이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윤아가 뭐래요?”민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가 문자를 볼 겨를도 없이 수현이 질문을 날렸던것이다.문자를 보고 난 후에야 민재는 입을 열었다.“아가씨께서 말씀하시는데 몸이 좀 불편하셔서 낮잠을 주무시겠대요. 우리랑 점심을 함께할 수 없다는 것 같네요.”“불편하다고?”수현은 양미간을 찌푸렸다.“물어봐요. 어디가 불편한지.”아까 기절했었는데 지금 또 몸이 불편하다고 하니 걱정되긴 했다.민재는 핸드폰을 손에 쥔 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수현을 바라봤다.“대표님, 아니면 직접 전화 걸어서 물어보시죠?”말이 끝나기 바쁘게 민재는 수현의 차가운 시선을 느꼈다. 그는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 나더니 거의 반강제로 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얼마 울리지 않아 윤아는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 있어요? 비서님.”“아가씨, 저...”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현은 핸드폰을 낚아챘다.“어디가 아픈데?”전화 너머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전화에 대고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피곤한 것도 속해?”수현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분명히 성의 없게 그의 물음에 답한 것이었다.그러자 윤아는 다시 물었다.“나 이제 잘 건데, 할 말 있어?”그를 귀찮아하는 그녀의 태도는 불 보듯 뻔했다.수현은 입술을 꾹 다물더니 말을 이었다.“어디가 불편해? 불편하면 병원 가자.”“...피곤해서 그래. 이제 잘래.”그녀는 자기 할말만 하고 수현의 전
호텔 직원은 두 사람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그쪽은 누구시죠?”민재는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아까 전화해서 친구 대신 주문한 분입니다. 친구가 맞은편에 있거든요.”그제야 호텔 직원은 상황 정리가 된 듯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아~ 그러시군요. 그런데 친구분이 안에 없는듯하네요. 벨을 몇 번이나 눌러도 반응이 없어요.”여기까지 말하고는, 호텔 직원은 혹시나 하는 생각 때문에 불안해서 주의를 주었다.“아니면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는 게 어떠세요? 친구분이 안에 있는지.”수현은 민재를 바라봤다.“전화 거세요.”민재는 핸드폰을 꺼내 윤아에게 걸었다. 그는 윤아가 받지 않을 줄 알았는데 생각 밖에도 전화를 금방 받았다.“비서님?”민재는 윤아의 또렷한 목소리를 들으니 금방 잠에서 깬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그럼 지금쯤 잠도 안 자고 있었겠는데 벨소리를 듣고도 왜 문을 열지 않았는지 의문이었다.“아가씨, 잠에서 깨신 거예요?”윤아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로비에 앉아서 핸드폰을 귓가에 바싹 댄 채 입술을 오므리더니 깊게 한숨을 쉬었다.“아가씨, 만약 잠에서 깨셨다면 문 좀 열어주실 수 있을까요? 저랑 대표님께서 아가씨께 음식을 주문했거든요.”민재의 목소리에는 불안과 아부가 담겨있었다.그 말을 들은 윤아는 어쩔 수 없이 또 깊게 한숨을 내뱉더니 입을 열었다.“괜찮아요, 비서님. 페를 끼쳤네요. 저 이미 나왔거든요.”“네?”이 말을 들은 민재의 눈빛에는 망연함과 몰이해의 빛이 아른거렸다.“아가씨, 그게 무슨...”결국, 그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휴대폰을 수현에게 빼앗겼다.수현이 막 핸드폰을 귓가에 갖다 대었을 때, 윤아가 마침 입을 열었다.“저 지금 공항이에요. 수원으로 돌아가려고요, 그한테 전해주세요. 부탁할게요.”그 말을 들은 수현은 이내 안색이 어두워졌다.“너 뭐라고?”순식간에 변한 써늘한 목소리는 윤아를 넋이 나가게 만들었다. 그제야 왜 아까 민재의 말이 갑자기 끊겼는지 이해가 되었다. 수현이 핸드폰을 빼앗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