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현아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심윤아를 안으며 말했다.“도착하면 전화해. 꼭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엄마, 나 화장실.”임향의 품에 안겨있던 훈이가 말했다.“할머니랑 같이 가자.”“제가 데리고 갈게요.”심윤아는 진비서에게 짐을 맡기고 임향의 품에서 훈이를 넘겨받으며 아들 윤이에게 물었다.“윤아, 넌 화장실 가지 않을래?”윤이가 고개를 끄덕였다.“가자, 전 아이들 데리고 화장실 다녀올게요.”그러자 주현아가 대답했다.“그래. 그럼 우리는 보안 검색대에서 대신 줄 서 있을게. 저기 보이는 저 줄이야.”“알았어.”심인철, 임향 그리고 주현아까지 마침 세 명이라 세 모자 대신 줄을 섰다.-심윤아는 두 아이를 데리고 공항 화장실을 찾았다.하지만 윤이는 남자아이였기에 심윤아가 같이 화장실에 들어갈수 없었다. 그녀는 화장실 밖에서 두 아이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각자 화장실에 들어가도록 했다.“만약 모르는 게 있으면 안에 있는 아저씨 아줌마한테 물어봐. 화장실 다녀오면 바로 밖에 나와 손 씻어야 해. 엄마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알았지?”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장실로 향했다.심윤아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훈이가 화장실에 들어가자 안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어머! 귀여워라.”밖에서 듣고 있던 심윤아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공항의 화장실은 아주 크고 깨끗했다. 거의 모든 구역을 전문 청소 담당자가 깨끗이 쓸고 닦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심윤은 통화 중이던 검은색 정장을 입은 키 큰 남자를 발견했다.그의 옆모습은 아주 아름다웠고 차가운 눈빛과 앙다문 입술 때문인지 그는 더 차가워 보였다.전화 저편에서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자 그는 냉소를 지었다.윤이가 눈을 깜빡이며 작은 보폭으로 걸어 들어갔다. 복도에서 화장실로 향하는 문이 하나 더 있었다.윤이가 손으로 밀자 문이 찌지직 소리를 내더니 작은 틈이 열렸다.윤이는 고작 다섯 살밖에 안 되었기에 힘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있는 힘껏 문을 열었다.찌지직
몇 초 후, 진수현은 급히 고개를 숙이고 아이를 찾기 시작했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 있던 그 아이는 어디로 간거지? 그는 진수현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는 곧장 화장실로 들어가서 어디에 있는지 알수 없었다.진수현은 입술을 꼭 깨물고 미간을 찌푸렸다.휴대폰 저편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이미 관심 밖이었다.착각이었나?혹시 요개 두 아이가 라이브 방송을 하지 않아서 보고싶은 마음에 방송에서 들었던 윤이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렸던건가.“진회장님, 이번 협력 사안에 대해서 사실 저는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혹시 시간 되시면...”상대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수현이 물었다.“방금 무슨 소리 못들었어요?”갑작스러운 물음에 파트너는 당황하며 물었다.“네?”“이쪽에서 무슨 소리 못 들었어요?”환청이 아니라면 통화 상대도 그 감사 인사를 들었을 것이다.통화중이던 파트너는 순간 무슨 뜻인지 긴가민가 했으나 불현듯 진수현이 소음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라는것을 기억해냈다.방금 어딘가 거슬리는듯한 소리를 들은것 같기도 하지만 곧이곧대로 말하면 혹시 싫어하지는 않을까?이런 생각 끝에 파트너는 말하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하고는 대답했다.“진회장님, 저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요.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파트너는 방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심스레 물었다.진수현은 인상을 찌푸린 채 문을 잡고있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방금 진짜 내가 착각을 했나?그 때, 이민재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자 진수현이 생각을 멈췄다.“진 회장님, 말씀하신 자료 가져왔습니다.”진수현이 언짢은 듯 그를 쳐다봤다.이민재는 자세를 바로 잡고는 입을 다물었다.한참이 지난 후 이민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먼저 보안검색대로 가실까요? 안으로 들어가면 커피숍이 있어서 말씀 나누기 편하실겁니다.”이민재의 말을 들은 파트너도 바로 말을 바꾸었다.“네, 진 회장님, 지금 발씀하시기 불편하시면 저희가 기다리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세요.”잠시 생각에 잠겼던 진수현이 고개를 끄덕이더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저 사람 방금 화장실에서 나왔지?그렇다면...망했다!“윤아야!”주현아는 빛의 속도로 화장실을 향해 뛰었다. 그녀는 줄을 서다가 문득 윤이가 남자아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심윤아가 그를 데리고 여자 화장실에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남자 화장실에 가지도 않을것이다. 그렇다면 일이 좀 복잡해진다.그래서 주현아는 밖에서 기다리며 도와줄 일이 없나 보려고 곧장 화장실로 뛰어온 것이다. 그런데 진수현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진수현을 마지막으로 본 건 아주 오래전이었다.5년이 지난 지금, 진수현은 이미 성숙한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많이 성숙해지고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더 차갑고 강해졌다.그저 멀리서 지켜봤을 뿐인데도 진수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를 느낄 수 있었다.그리고 그의 얼굴은 전에 비해 더 멋있어졌다.그러니 진수현이 인파 속에서 그를 한눈에 알아본 것이다.역시 멋있어!그러니 심윤아가 그렇게 좋아했고 몇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지.만약 진수현이 친구가 좋아하는 남자가 아니었다면 주현아는 잘생긴 얼굴 때문에 이 남자와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화장실에 도착한 진수현은 훈이와 함께 화장실에서 나오는 심윤아와 딱 마주쳤다.그녀는 얼른 뛰어가 헐떡이며 말했다.“윤아야.”“수현아?”심윤아가 의아한 눈길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너 왜 그래?”긴장하기도 했고 또 급히 뛰어온 터라 주현아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네가 두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 불편할 것 같아서 걱정돼서 뛰어왔지. 너 괜찮아? ”말을 마친 주현아는 심윤아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보더니 그녀의 주위를 한바퀴 돌았다.심윤아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윤이는?”심윤아는 훈이를 주현아에게 맡기고는 남자 화장실 앞으로 갔다.방금 훈이가 갑자기 뛰어나와서 그녀를 찾아서 잠깐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 내에 윤이가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을 것이다.역시나 1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꼬마아이
어차피 모르는 거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이미 끝난 인연이니까.그리고 심윤아는 충분히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여기까지 생각하자 주현아의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그녀는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응, 혹시 강아지를 데리고 왔다거나 아니면 거렁뱅이라던가.”“... 너 왜 그래? 공항에는 강아지를 데리고 올 수 없어. 거렁뱅이도 들어올수 없고.”“참 그렇지. 아, 네가 떠난다고 생각하니 내가 너무 우울해져서 정신이 이상해졌나 보다. 너 그냥 가지 말고 여기 있어.”쳇, 심윤아는 더 이상 그녀의 농담을 받아주고 싶지 않았다.심윤아는 두 아이의 옷을 정리해 주었다. “엄마, 나 방금 화장실에서 엄청나게 잘생긴 아저씨 봤어. 나 대신 문도 열어줬어.”윤이가 말했다.심윤아는 그가 만난 사람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그래, 그럼 우리 윤이는 그 아저씨한테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했어?”“말했어.”“역시 착한 어린이네.”심윤아는 그의 이마에 쪽 뽀뽀를 했다.윤이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자 옆에 있던 훈이가 한발 나서며 말했다.“엄마, 훈이도 뽀뽀”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주현아는 너무 부러웠다.할 수만 있다면 심윤아처럼 남편 없이 아이만 가지고 싶었다.준비를 마친 후 그들은 보안 검색대로 돌아왔다.“우리가 여기 줄 서고 있는데 진비서가 오더니 너희는 비즈니스석이라 줄 서지 않고 비즈니스 전용 패스트랙으로 가면 된다고 했어. 내가 그만 깜빡했지 뭐야.”“응, 알았어.”심윤아가 돌아간 후 모두 옆에서 그녀가 보안 검색대를 지나는 것을 지켜보았다.세 모자가 보안 검색대를 지나자 주현아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윤아야, 나 기다리고 있어.”심윤아가 떠나가는 걸 지켜보던 그녀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입꼬리가 점차 내려갔다.망했다!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일을 잊어버리고 있었지.공항에서 만났다는 건 진수현도 국내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건데 혹시 두 사람 같은 비행기는 아니겠지?진수현 같은 사업가들은 당연히 비즈니스석을 탈 텐
앞으로 이런 일이 닥쳤을 때 좀 더 침착하는 게 좋을 듯싶다.“현아야 왜 그래?”자리에 서있는 주현아를 발견한 심인철과 임향 두 사람은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그 소리를 들은 주현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윤아가 가는 게 아쉬워서 그러는 거야? 아이고, 비행기만 타면 바로 만날 수 있는데 뭐, 너무 속상해하지마.”임향이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알겠어요, 너무 걱정 마세요. 보고 싶으면 바로 윤아 찾아 갈거에요.”“그만 가자.”떠나기 전, 주현아는 저도 모르게 보안 검색대를 돌아봤다.윤아가 절대 진수현과 마주치지 않게 해주세요.그들의 인연은 화장실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스쳐 지나가게 해주세요.-보안 검색대를 지나 심윤아는 두 아이를 데리고 곧장 걸어 나갔다. 짐은 그녀가 챙길 필요가 없었다.보안 검색대를 지나가 진비서가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심 대표님, 짐은 이리 주세요, 제가 들게요.”“괜찮습니다. 저희 짐이 많아서 혼자 못 들어요. 저도 같이 들게요.”“심 대표님, 짐은 저한테 맡기세요. 이사장님께서 저를 보내실 때는 심 대표님을 잘 보필하라고 보내신 겁니다. 만약 세분을 잘 모시지 못하면 저는 돌아가서 월급이 깎일지도 모릅니다.”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또 짐을 맡기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작게 한숨을 내쉰 후 심윤아는 어쩔 수 없이 짐을 모두 그녀에게 건넸다. 심윤아와 두 아이는 모두 빈손으로 다니게 되었다.세 모자가 앞에서 걷고 진비서는 본인이 말한 대로 짐꾼이 되어 그들의 뒤를 따랐다.앞에서 걸어갈 때는 그나마 괜찮지만, 매번 뒤를 돌아 볼 때마다 심윤아는 죄책감이 밀려왔다.짐을 주더라도 전부 다 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고민 끝에 심윤아는 걸음을 멈추고 진비서를 기다렸다. 짐을 같이 들자고 얘기하려고막 입을 열려는 순간 진비서가 먼저 선수를 쳤다.“심대표님, 대표님의 짐꾼이 되려는 저의 권리를 뺏지 말아 주세요. 혹시라도 짐을 많이 드는 것이 고생스럽다고 생각하지도 마시고요. 만약
훈이는 먹고 싶어서 입맛을 다졌다.하지만 엄마가 먹으면 안된다고 했으니 비행기에서 음료수를 마실수밖에 없었다.훈이는 눈을 깜빡이며 가게 입구에 걸려있는 음료수 사진을 빤히 쳐다봤다.진비서는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너무 귀여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물었다.“심 대표님, 아이가 너무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제가 두 아이에게 음료수를 사줘도 될까요?”심윤아가 웃으며 말했다.“진 비서님 저희 짐꾼이시라면서요, 한잔 사드릴까요? 너무 수고가 많으신데.”“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진 비서가 대답했다.“진비서님, 앞으로 대표라고 안 하셔도 돼요. 저는 이제 회사 대표가 아니잖아요.”진비서가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알겠습니다, 아가씨.”네 사람은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띵동 휴대폰 소리에 확인해 보니 이선우가 보낸 문자였다.“어떻게 됐어? 보안 검색대는 지났어?”메세지를 확인 한 심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응.”답장을 한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이선우가 연락을 해왔다.“어때? 진 비서가 잘 챙겨줘?”문득 진 비서가 한 말이 생각난 심윤아가 웃으며 대답했다.“네가 진 비서님한테 내 짐꾼 안 하면 연말에 인센티브 깎는다고 했어?”이 말을 들은 진비서의 표정이 굳어졌다.원래 심윤아의 말을 끊으려 했으나 한 박자 늦었다. 이미 그녀가 말 한 뒤였다.망했다.진비서는 심윤아가 자기와 짐을 나눠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 말을 한 것이었는데 이를 이선우에게 고자질 할 줄은 몰랐다.그 놈은 아마 내가 일부러 심윤아 앞에서 그의 험담을 했다고 생각하고 인센티브 뿐만 아니라 월급까지 깎을지도 모를 일이었다.그때 이선우가 웃으며 인정했다.“내가 너 옆에 있어주지 못하니 누군가 너를 챙겨줘야 될 거 아니야. 진비서가 널 케어하는걸 짐꾼이라고 생각한대?”심윤아는 풀이 죽어있는 진비서를 힐끗 보고는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히 아니지. 네가 사람을 보내서 나를 도와주면 나야 좋지. 그런데 진비서님이 나 대신 짐을 전
“아가씨?”오랫동안 이선우 옆에서 보필해 온 전비서는 바로 심윤아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물었다.“괜찮으세요?”아무래도 남자인 전비서에게 얘기하려니 좀 민망했다.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지라 심윤아는 바로 화장실에 가야 했다.그녀는 쭈뼛거리며 말했다.“죄송한데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너희들은 전비서님 따라 가. 엄마가 조금 있다가 갈게.”심윤아가 자리를 뜨자 전비서가 두 아이를 보며 말했다.“그럼 우리 먼저 갈까?” 윤이가 뭔가 생각난 듯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전비서에게 물었다.“아저씨 오늘 며칠이에요?”전비서가 휴대폰을 보고는 날짜를 알려줬다.“날짜는 왜?”날짜를 들은 윤이는 알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이리저리 접으며 계산하더니 말했다.“오늘 아마 엄마 그날 일거에요.”전비서의 표정이 바뀌더니 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그날이라니.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문자 한 통이 와있었다.전비서가 확인 해 보니 이선우에게서 온 문자였다.“한가지 깜빡한 게 있는데 오늘 윤아 그날이야, 찬바람 맞지 않게 하고 차가운것도 못 먹게 해.”...그렇지. 여자들은 생리 기간에 보살핌이 필요하지.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운 커피숍이 보여서 아이들에게 말했다.“우리 저기 가서 엄마한테 줄 따뜻한 음료 살까?”전비서도 연애 경험이 있던 터라 여자들은 생리 기간에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는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여기서 갑자기 따뜻한 물을 줄 수도 없으니 따뜻한 음료라도 사자.그러자 윤이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아저씨 그럼 훈이도 사주실래요? ”...몇 분 후, 전비서는 두 아이를 데리고 커피숍에 들어갔다.커피숍은 아주 컸고 인테리어가 아주 고급스러웠는데 조명도 화려하고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서로 방해받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커피숍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노트북을 가지고 와서 업무를 보고 있었는데 다들 자신의 노트북만 쳐다보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은 전혀
“네, 핫초코 세잔 주문 받았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네.” 진 비서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창문 가까이에 있는 자리를 발견하고 아이들에게 말했다.“아저씨랑 저기에 가서 앉자.”윤이는 얼른 달려가 진 비서의 옷자락을 잡았다.진 비서는 고개를 숙이자 핑크색이 도는 작은 주먹이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주먹은 어찌나 작았는지 그의 손의 삼분의 일도 되지 않는 듯했다.하지만 이렇게 작은 손이 그의 옷자락을 꼭 잡고 있었다.꽤 큰 덩치를 갖고 있는 진 비서는 순간 마음이 조금 말랑해지는 것 같았다.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그는 윤이가 따라올 수 있을 정도로 발걸음을 늦추었다. 그리고 훈이를 한눈 보았다.남자아이는 역시 남자아이였다. 훈이는 그와 일정한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동생 곁을 지키고 있었는데 얼굴을 굳히고 있는 모습이 마치 어른 같았다.민재는 수현에게 경고를 받은 후로부터 더는 정신을 딴 곳에 팔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남자가 캐리어를 끌고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자 또 참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보려고 했다.하지만 아까 수현이 경고하던 시선이 떠오르자 간신히 충동을 눌러 참았다.그 남자가 캐리어를 끌고 그들의 곁에서 지나간 후에야 그는 몰래 고개를 들고 한눈 훑었다.원래 캐리어를 볼 줄 알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귀여운 두 아이의 뒷모습이었다.그리고 두 아이는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고 있었다. 다만 색상이 다를 뿐이었다.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었구나. 왜 그렇게 많은 캐리어를 들고 다니는지 알 것 같았다.“만약 이번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비행기 타지 마요.”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또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민재가 정신을 차리자 수현이 서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발견하고는 안색을 확 바꾸고 재빨리 말했다.“정신을 똑바로 차릴게요.”만약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비행기에 오르지 못한다는 것을 떠올리자 민재는 다른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