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오랫동안 이선우 옆에서 보필해 온 전비서는 바로 심윤아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물었다.“괜찮으세요?”아무래도 남자인 전비서에게 얘기하려니 좀 민망했다.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지라 심윤아는 바로 화장실에 가야 했다.그녀는 쭈뼛거리며 말했다.“죄송한데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너희들은 전비서님 따라 가. 엄마가 조금 있다가 갈게.”심윤아가 자리를 뜨자 전비서가 두 아이를 보며 말했다.“그럼 우리 먼저 갈까?” 윤이가 뭔가 생각난 듯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전비서에게 물었다.“아저씨 오늘 며칠이에요?”전비서가 휴대폰을 보고는 날짜를 알려줬다.“날짜는 왜?”날짜를 들은 윤이는 알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이리저리 접으며 계산하더니 말했다.“오늘 아마 엄마 그날 일거에요.”전비서의 표정이 바뀌더니 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그날이라니.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문자 한 통이 와있었다.전비서가 확인 해 보니 이선우에게서 온 문자였다.“한가지 깜빡한 게 있는데 오늘 윤아 그날이야, 찬바람 맞지 않게 하고 차가운것도 못 먹게 해.”...그렇지. 여자들은 생리 기간에 보살핌이 필요하지.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인테리어가 고급스러운 커피숍이 보여서 아이들에게 말했다.“우리 저기 가서 엄마한테 줄 따뜻한 음료 살까?”전비서도 연애 경험이 있던 터라 여자들은 생리 기간에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는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여기서 갑자기 따뜻한 물을 줄 수도 없으니 따뜻한 음료라도 사자.그러자 윤이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아저씨 그럼 훈이도 사주실래요? ”...몇 분 후, 전비서는 두 아이를 데리고 커피숍에 들어갔다.커피숍은 아주 컸고 인테리어가 아주 고급스러웠는데 조명도 화려하고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서로 방해받지 않고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커피숍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노트북을 가지고 와서 업무를 보고 있었는데 다들 자신의 노트북만 쳐다보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은 전혀
“네, 핫초코 세잔 주문 받았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네.” 진 비서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창문 가까이에 있는 자리를 발견하고 아이들에게 말했다.“아저씨랑 저기에 가서 앉자.”윤이는 얼른 달려가 진 비서의 옷자락을 잡았다.진 비서는 고개를 숙이자 핑크색이 도는 작은 주먹이 자신의 옷자락을 잡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주먹은 어찌나 작았는지 그의 손의 삼분의 일도 되지 않는 듯했다.하지만 이렇게 작은 손이 그의 옷자락을 꼭 잡고 있었다.꽤 큰 덩치를 갖고 있는 진 비서는 순간 마음이 조금 말랑해지는 것 같았다.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그는 윤이가 따라올 수 있을 정도로 발걸음을 늦추었다. 그리고 훈이를 한눈 보았다.남자아이는 역시 남자아이였다. 훈이는 그와 일정한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동생 곁을 지키고 있었는데 얼굴을 굳히고 있는 모습이 마치 어른 같았다.민재는 수현에게 경고를 받은 후로부터 더는 정신을 딴 곳에 팔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남자가 캐리어를 끌고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자 또 참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보려고 했다.하지만 아까 수현이 경고하던 시선이 떠오르자 간신히 충동을 눌러 참았다.그 남자가 캐리어를 끌고 그들의 곁에서 지나간 후에야 그는 몰래 고개를 들고 한눈 훑었다.원래 캐리어를 볼 줄 알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귀여운 두 아이의 뒷모습이었다.그리고 두 아이는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고 있었다. 다만 색상이 다를 뿐이었다.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었구나. 왜 그렇게 많은 캐리어를 들고 다니는지 알 것 같았다.“만약 이번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비행기 타지 마요.”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또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했다.민재가 정신을 차리자 수현이 서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발견하고는 안색을 확 바꾸고 재빨리 말했다.“정신을 똑바로 차릴게요.”만약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비행기에 오르지 못한다는 것을 떠올리자 민재는 다른
상대방은 멈칫하더니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럼 조심해요.”“네, 고마워요.”윤아는 간신히 웃음을 지어내며 그녀에게 고맙다고 인사했다.화장실에서 나간 후 윤아는 앞에 대기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리를 찾아 앉은 후 핸드폰을 꺼내 진 비서에게 문자를 보냈다.「진 비서님, 대기구에 오셨어요?」진 비서가 윤아의 메시지를 받았을 땐 이미 가게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었다. 핫초코 세잔을 아직도 받지 못해 기다리는 게 꽤 짜증이 났었다.여기 효율 정말 너무 느리잖아?이때 윤아의 메시지를 받았다.진비서는 답장을 보냈다.「아까 그곳 주위의 커피숍에 있습니다...」“주문하신 핫초코 나왔습니다.”타자를 끝내기도 전에 커피숍의 직원이 그를 향해 말했다.“네.”진 비서는 핸드폰을 치우고 캐리어를 끈 후 윤이와 훈이에게 말했다.“핫초코 다 만들었대. 우리 갈까?”그리고 그는 캐리어를 끌고 앞으로 걸어갔고 두 아이는 그의 뒤를 따랐다.수현의 곁을 지날 때 가장 뒤에 있던 훈이가 무의식적으로 그를 한눈 보았다.한눈만 보았을 뿐인데 훈이는 수현이 아까 화장실에서 전화하다가 손으로 그에게 문을 열어준 아저씨임을 알아차렸다.그도 여기에 있을 줄 몰랐다.훈이는 수현에게 인사하려고 했으나 이때 앞에서 진 비서의 소리가 들려왔다.“훈아, 얼른 따라와. 만약 너희가 길을 잃으면 난 정말 끝이야.”훈이의 정신은 진 비서에게 끌렸다. 그는 시선을 거두고 짧은 다리로 앞을 향해 걸어갔다.핫초코를 가진 후 돈을 내고 진 비서는 아이들에게 빨대를 꽂아주었다. 그는 훈이와 윤이의 머리를 가볍게 만지면서 말했다.“됐어. 이제 엄마 찾으러 가자.”윤이는 따뜻한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만족한 듯 예쁜 눈을 휘었다.“고마워요, 아저씨.”옆에 있던 훈이도 핫초코를 안으면서 낮은 소리로 고맙다고 했다.“가자.”“후.”이민재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서류 더미에서 고개를 들었다.“드디어 다 해결했네.”말을 마치고 그는 저도 모르게 기지개를 켜려고 했다. 이건 그
전화 온 사람은 마침 협업 측이었다.중요한 얘기를 나눈 후 수현은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리고 나머지 일을 민재에게 넘겼다.민재는 어쩔 수 없이 나머지 일을 처리하면서 속으로는 아까 본 두 아이를 생각했다.곰곰이 생각해 본 후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수현에게 말했다.“저기...대표님, 아까 두 아이를 보았는데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현은 민재에게 경고의 시선을 날렸다.그의 신호를 받은 민재는 그래도 계속을 말했다.“대표님께서 평소 라이브 방송을 보시던 그 두 아이를 본 것 같습니다.”수현은 멈칫했다. 가방을 정리하던 행동도 함께 멈췄다.그리고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뭐라고요?”민재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옆모습만 봐서요. 하지만 그 두 아이는 비슷하게 생겼는데 쌍둥이 같았어요. 그래서 아마 그 아이들이 아닐까하고 추측했...”“어디에 있습니까?”민재가 말을 끝내기 전에 수현은 몸을 일으켰다.“어? 가네요...”민재는 밖을 가리켰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민재는 앞에 있던 수현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한참 동안 멍해 있다가 그는 정신을 차리고 물건을 정리한 후 수현의 뒤를 따라갔다.넓은 공항엔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수현이 쫓아 나갔을 땐 이미 익숙한 뒷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른이 데리고 가는 아이들이 있어도 수현이 원하던 아이들이 아니었다.몇 번이나 찾았지만 역시 찾아내지 못했다.민재가 뒤에서 헉헉거리며 쫓아왔다.“대표님, 공항이 너무 커서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냥 포기하시는 게 어때요?”이 말을 듣자 수현은 민재를 쏘아보았다.“왜 일찍 말하지 않았습니까?”그럴 줄 알았다. 아까는 말이 너무 많다고 지적하다가 지금은 왜 말하지 않냐고 물어본다.뭐, 어차피 다 그의 잘못이 될 게 뻔했다.“대표님, 원래 알려드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전화를 받으셔서 방해할까봐...”“다음에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직접 말해요.”수현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민
이번 기회에 한번 만나 보라고?사실 수현도 자신이 왜 그 두 아이에게 많은 정을 갖고 있는지 잘 몰랐다. 아마 그들의 웃음이 너무 눈부셔서가 아닐까.그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햇빛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밝고 귀여우며 활기 넘치는 모습인 그들은 어둠 속에서 헤매는 그와 전혀 달랐다.그는 차갑고 성격이 사나우며 어울리기가 어렵다.하지만 이런 괴상한 일이 다른 사람 눈에 들어갔을 땐 아마 그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할 것이다. 왜 이유 없이 이 두 아이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말이다.이렇게 생각한 수현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됐습니다.”핸드폰을 통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그 두 아이가 현실에서 그렇게 활기차게 보내는 것을 보면 생활하고 있는 환경이 매우 좋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는 그저 라이브 방송을 보며 조금의 따뜻함이라도 얻는 관객일 뿐이다. 그러니 굳이 그들의 삶을 방해할 필요가 없다.아마 그들을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민재는 수현의 주위의 기온이 변한 것을 발견했다. 차갑고 어두워졌는데 주위의 기온마저 조금 내려간 것 같았다.오 년 동안 그는 이미 수현의 이유 없이 바뀌는 이상한 성격에 적응되었다.-윤아는 대기구에서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진 비서가 찾아오고 있다고 메시지를 보낸 후 그녀는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진 비서는 캐리어를 밀고 오는 길에 멀리서 창백한 얼굴로 앉아있는 윤아를 본 순간 표정이 조금 변했다.선우가 왜 잘 챙겨달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윤아가 월경 기간에 이렇게 아팠기 때문이었다.“윤아 님.”“엄마!”앞에 다가간 후 그는 얼른 손에 들고 있던 핫초코를 윤아에게 건넸다.“금방 산 겁니다. 아직 뜨거울 거예요. 어서 마셔서 배를 따뜻하게 해주세요.”이 말을 듣자 윤아는 멈칫했다. 몇 초 후 진 비서가 자신의 상황을 알아챘다는 것을 깨달은 윤아는 주저하지 않고 손을 뻗어 받아왔다.“고마워요.”“아닙니다. 얼른 마시세요.”따뜻한 핫초코가 배에 들어가니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윤아는 계속 사양했다.“됐어요, 진 비서님.”하지만 진 비서는 계속 견지했다.“윤아 님, 저 힘 셉니다. 윤아 님과 이 캐리어를 밀기엔 충분해요.”심윤아: “...만약 정 밀고 싶다면 윤아, 네가 캐리어에 앉아. 아저씨가 밀어준대.”“알겠어요, 엄마.”윤이는 똑똑한 아이였다. 윤아의 말을 들은 후 재빨리 캐리어에 올라갔다. 하지만 순조롭게 올라가지 못해 진 비서에게 작은 손을 뻗으며 도와달라고 했다.“아저씨, 저 좀 도와주세요.”진 비서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윤이를 캐리어에 앉혔다.윤이가 앉은 후 진 비서는 뭔가 떠오른 듯 재빨리 말했다.“윤아 님, 제 뜻은 그게 아니라...”“윤이가 힘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번거롭겠지만 진 비서님께서 밀어주세요.”“훈아, 너도 네 캐리어를 혼자 밀어.”“네.”두 아이는 윤아의 말을 아주 잘 들었다. 그녀가 뭐라고 하면 둘은 따라 행동했다.결국 진 비서는 윤이를 밀며 앞으로 갔다.“고마워요, 아저씨.”윤이는 진 비서에게 계속 고맙다고 인사했다. 이런 깜찍한 아이를 보자 진 비서도 웃으며 말했다.“자, 떨어지지 않게 똑바로 앉을까?”그들이 예약한 위치는 일등석이었다.원래 진 비서는 윤아를 데리고 휴게실에서 잠시 쉬게 하려고 했지만 밖에서 지체된 시간이 너무 오란지라 도착하자마자 비행기에 탑승할 때가 되었다.그래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먼저 비행기에 올랐다.윤아는 지금 빨리 비행기에서 쉬고 싶었다. 비행기의 기온은 아마 여기보다 높을 것이다. 그리고 스튜어디스에게 담요를 달라고 하면 괜찮아 질 거라고 생각했다,-“대표님, 저희도 탑승하여야 합니다.수현의 뒤에서 따라오던 민재가 그에게 알렸다.수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아, 그리고요. 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진수현: “?”“저희는 줄 서서 탑승해야 합니다.”수현은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무슨 뜻이에요?”“저기...그러니까 제가 어젯밤에 표를 살 때 일등석은 다 팔
“대표님, 이번엔 진짜 죄송합니다. 제 불찰이에요. 이 비행기에 자리가 없는 줄 몰랐습니다.”이 말을 듣자 수현은 발걸음을 멈추고는 칼같은 시선으로 민재를 쏘아보았다.“이 비서, 앞으로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회사 나오지 마요.”“네네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정말 장담해요. 이번엔 정말 사고였어요.”비행기에 오른 후 수현은 습관적으로 일등석 자리로 향했다.“항공사를 이용해 주신 여러분 환영합니다.”스튜어디스는 비행기에서 환영 인사를 했다. 시선이 수현에게 닿는 순간 눈이 반짝거렸다.“고객님, 티켓은요?”이 말이 끝나자 수현의 뒤에 서 있던 민재가 빠르게 둘의 표를 건넸다.스튜어디스는 표를 받고 한 눈 보더니 일등석으로 가려는 수현을 막고 말했다.“죄송합니다, 고객님. 고객님 자리는 저쪽에 있어요.”수현의 발걸음은 우뚝 멈추었다.스튜어디스는 표준적인 미소를 지으며 이코노미석을 가리키며 손을 내밀었다.“이쪽이에요, 고객님.”탑승하던 사람들도 이쪽을 보아왔다. 수현에게 닿은 시선엔 호기심으로 가득했다.이민재: “...”망했다.조금 있다가 또 욕을 먹을 것이 분명했다.“고객님?”스튜어디스는 수현이 서서 아무 반응도 없는 것을 발견하자 또 소리내어 물었다.일 초 후, 수현은 자신의 표를 가지고 차가운 표정으로 이코노미석에 갔다. 민재의 곁을 지날 때 그는 이렇게 한마디 남겨놓았다.“돌아간 다음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요.”민재는 속으로 아우성을 치며 재빨리 스튜어디스 앞에 다가가 말했다.“죄송해요. 어, 저희 친구가 일등석에 있어서 그러는데 이륙하기 전에 한번 다녀와도 될까요?”스튜어디스는 조금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일등석.윤아 일행의 자리는 미리 사놓았다. 그래서 자리가 거의 함께 있었다.윤아의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창문 가까이의 자리는 그녀에게 주었다.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아랫배의 통증은 더 심해졌다.진 비서가 윤아를 대신해 스튜어디스한테 담요를 달라고 한 후 그녀는 자신의 자리에서 잤다.눈
일등석에 들어간 후 민재는 주위를 둘러보며 자리를 바꿔줄 의향이 있을 듯한 사람을 찾았다.결국 그는 시선을 중년 동양인 남자에게 두었다.“안녕하세요.”민재는 앞으로 다가가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상대방은 멈칫하더니 민재를 본 순간 놀란 웃음을 지었다.“이 비서님?”이민재: “?”“절 아세요?”“알죠, 이 비서님이시잖아요. 전 SN 그룹 허 매니저예요. 우리 저번에 만났었잖아요.”민재는 앞에 있는 사각턱, 작은 눈과 낮은 코를 갖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한참 동안 생각해 보았지만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았다.자신을 본 적이 없다는 얼굴을 한 민재를 보자 허 매니저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손으로 코를 문지르며 말했다.“괜찮아요, 이 비서님. 바쁘신데 절 잊는 것도 정상이죠, 뭐.”민재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아, 이 비서님도 오셨는데 진수현 대표님도 오셨겠죠?”이렇게 말하면서 허 매니저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왜 안 보이죠?”이 비서는 그의 모습이 너무 이목을 끄는 것 같아 그의 손을 잡으며 낮은 소리로 설명했다.“허 매니저님, 자리를 바꿀 의향이 있으세요? 자리는 이코노미석인데요. 만약 바꿀 의향이 있으시면 제가 충분한 보수를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원하시는 가격을 말하셔도 됩니다.”허 매니저는 약삭빠른 사람이었다.여기까지 듣자 그는 이 비서의 뜻을 알 것 같았다.“이 비서님 뜻을 알겠어요. 대표님께서 이코노미석에 있어요? 그래서 대표님과 자리를 바꾸겠다는 말이죠?”민재는 그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그렇습니다. 이해하신 대로입니다.”허 매니저는 빠르게 대답했다.“보수라니요. 어서 제 자리를 대표님께 내어드릴게요.”이 말을 마친 허 매니저는 빙그레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이를 보자 민재는 얼른 지갑을 꺼냈다.“허 매니저님, 보수 방면은...”이 말을 들은 허 매니저는 얼른 웃으며 말했다.“이 비서님, 보수는 괜찮아요. 제가 어떻게 그걸 받겠습니다. 진수현 대표님과 자리를 바꾸는 건 제 영광입니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