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그럼 피팅 시작할까요?”직원이 드레스를 가지고 왔다.맞춤 제작된 드레스는 총 두 개였다. 하나는 핑크색 롱 드레스로 우아하고 여성스러웠으며, 다른 하나는 하얀색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로, 청순하고 깨끗한 스타일이었다.두 드레스의 공통점이라면, 모두 상당히 보수적이라는 것이었다. 팔다리도 꽁꽁 감춰진 드레스는 마치 18~19살 여자아이가 입을 법한 스타일이었다.예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아버지의 눈에 딸은 영원히 크지 않는 소녀로 보이는 게 틀림없었다.예나가 피팅룸 안으로 들어갔다…….보기에는 평범해 보였던 드레스를 막상 입으려니 한층 한층 겹겹이 쌓인 구조였고, 전체적으로 클래식한 드레스라 입는 데에 힘이 들었다…….예나는 7~8분 동안 끙끙대며 핑크 드레스를 입었고 마지막으로 허리 부분을 손보고 커튼을 열려는 찰나, 외부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봤어? 얼굴에 진짜 흉터가 있더라고.”“상처가 엄청 깊던데 시술로 흉터가 지워질까? 흉터가 남을 것 같은데.”“얼굴이 그렇게 망가졌는데 맞춤 제작된 드레스가 입고 싶을까? 드레스만 아깝게 됐지 뭐.”“됐어, 그만해. 도예나가 아직 안에서 옷을 입어보고 있는데 들리겠어…….”직원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예나는 바로 커튼을 열고 밝은 미소를 지었다.직원들을 깜짝 놀라 허둥대다가 바로 한 줄로 서서 공손하게 말했다.“드레스가 정말 어울리세요…….”“드레스가 예쁜 거예요? 아니면 사람이 예쁜 거예요?”예나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방금까지 예나의 흉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던 직원들은 또 저마다 입바른 소리를 해댔다.“당연히 도예나 씨가 아름다우셔서 이 드레스가 빛을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말 이 드레스를 입기 위해 태어나신 것 같아요…….”예나는 거울 속 자신을 확인하며 말했다.“얼굴에 두 흉터가 너무 흉측스러워서 걱정이 많았는데 당신들 얼굴을 보니까 내 흉터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가벼운 말 한마디에 직원들의 표
피팅룸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세윤이 수아를 끌고 가장자리의 드레스 코드로 걸어갔다.그리고 그럴싸한 목소리로 말했다.“수아야, 이 하얀색 드레스가 별로인 것 같은데, 다른 거로 갈아입을까?”한 직원이 급히 다가와 공손하게 물었다.“손님, 마음에 드시는 드레스가 있으면 제가 바로 가지고 올 게요.”수아는 직원의 뒤로 작은 손가락을 뻗으며 말했다.“저 예쁜 직원이 가져다줬으면 좋겠어요.”지목된 여 직원은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비록 예나와 현석이 앞으로 이혼할지 몰라도, 네 아이만큼은 확실한 강씨 가문 후손이었으므로 이혼을 한다고 해도 아이들의 지위는 여전했다…… 그러니 강씨 가문 공주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다.‘도예나는 나한테 평범하다고 했는데, 저 아이는 나한테 예쁜 직원이라고 해줬어…….’‘역시 아이들은 거짓말을 못해.’직원이 다가와 친절하게 물었다.“손님, 어느 예복이 마음에 드세요?”세윤은 가장자리에 걸린 핑크 레이스 치마를 가리키며 말했다.“동생한테 저 드레스가 어울릴 것 같아요. 가지고 와주세요.”직원이 바로 몸을 일으켜 드레스를 가지러 갔다.그쪽에 걸린 드레스는 모두 최신 한정판 드레스였으므로 직원의 손길이 아주 조심스러웠다. 행여나 드레스에 주름이라도 생길까 그녀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그런데 직원이 몸을 돌리는 순간, 갑자기 발 하나가 몰래 그녀의 앞길을 막았다.그녀는 손에 쥔 드레스에 정신이 팔려 바닥을 미처 확인하지 못했고,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꽈당!드레스는 철 옷걸이에 걸려 쫙 찢겼고 큰 구멍이 났다.직원은 깜짝 놀라 멍하니 찢긴 구멍을 바라보았다.옆에 선 직원도 깜짝 놀랐지만 행여나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그녀를 부축하는 사람 한 명 없었다…….“어머, 옷이 찢어졌네요.”수아의 귀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모, 옷을 찢었으면 배상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배상, 두 단어에 직원은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분명히 발에 걸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렇지 않고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세윤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형은 왜 하필 강아지와 나를 비교하는 거야…….’“CCTV 확인하시죠.”제훈이 입을 열었다.“고소한다고 해도 당신이 불리할 거예요. 그리고 여기 배상 금액이 얼마인지 계산 좀 해주세요.”얼어붙었던 다른 직원이 황급히 계산기를 두드렸다.총 17벌 예복에서 가장 싼 게 3,000만 원이고, 가장 비싼 건 1억이었다. 계산해 보니 총 10억에 가까운 금액이었다.직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첫 번째 드레스도 배상할 수 없는 가격이었는데 17벌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무슨 일이야?”예나는 피팅 중에 들려오는 소란에 빠르게 환복하고 피팅룸에서 나왔고, 나오자마자 보이는 건 엉망진창이 된 드레스 룸이었다.세윤이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엄마, 이 직원이 옷을 17벌이나 망가뜨려서 10억이나 배상해야 한대요…….”“제, 제가 그런 게 아니라…….”직원이 입술을 덜덜 떨며 말했다.“도예나 씨, 당신 아들이 일부러 발을 걸어 제가 넘어진 거라 저 혼자 감당할 일은 아닌 것 같아요…….”예나는 고개를 돌려 세윤을 살폈다. 세윤은 멋쩍은 듯 코를 만지고 있었다.그러자 예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바로 이해가 되었다. 이 직원이 앞장서 예나의 뒷담을 했고 그걸 들은 아이들이 이러한 일을 벌인 게 틀림없었다.예나는 침착하게 첫 번째 드레스를 손에 쥐며 말했다.“첫 번째 드레스는 저희 쪽에서 부담할 게요.”직원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남은 17벌은요?”“저희 강씨 가문이 아무리 재벌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의 잘못까지 배상해주지는 않아요.”예나가 덤덤하게 말했다.“첫 번째 드레스는 확실히 제 아들의 잘못이 맞아요. 하지만 남은 17벌은 저희와 아무런 상관이 없지요.”그리고 그녀는 드레스를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직원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엉망이 된 드레스룸을 바라보았다. 절망에 사로잡힌 그녀는 엉엉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예나는 돈을 지불하며 아이들
장서원은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제일 먼저 장대휘를 찾아갔다.“아버지, 해외 유명한 성형외과 의사 한 분을 알고 계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혹시 저한테 소개해 줄 수 있나요?”장서원의 말에 장대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장서원,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모두 귓등으로 들은 게냐?”장서원이 입술을 매만지며 말했다.“아버지, 예나는 제 딸이에요. 제가 23년을 빚졌다고요. 이제 겨우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손 놓고 볼 수만은 없는 것 아닙니까?”“겨우 사생아 주제에 장씨 가문으로 돌아오게 된다면 온 성남시에서 우리 장씨 가문을 비웃을 거다!”장대휘가 핏줄을 곤두세워가며 말했다.“그 애가 강씨 가문 사모라면 아무 소리 하지 않았을 테지만, 이혼한다고 소문이 떠들썩하던데 언제 이혼해도 모르는 것 아니냐! 이런 애를 우리 가문으로 데려온다고 해서 좋은 점 하나 없다!”“그냥 딸아이에게 빚진 걸 갚고 싶은 것뿐이에요! 길거리에서 구걸하고 있었다고 해도 전 꼭 딸아이를 가문에 데리고 왔을 거예요!”장서원이 주먹을 쥐며 말했다.“아버지가 계속 반대하셔도 세 날 뒤 연회는 정상대로 진행될 겁니다.”“삼촌, 할아버지도 다 삼촌을 위해서 하시는 말씀 아니겠어요?”이지원은 옆에 앉아 이간질했다.“삼촌도 잘 생각해 보세요. 왜 도예나가 여태껏 장씨 가문으로 돌아오지 않았는지를 요. 그땐 강현석한테 시집간다고 우리 가문을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이혼하게 되니까 급히 비빌 만한 구석을 찾느라고 그러는 거 아니겠어요? 삼촌도 도예나한테 속지 마세요.”장서원이 실망한 눈길로 지원을 바라보았다.예전의 장서원은 딸이 없어 지원을 자기 친딸로 생각하고 사랑을 주었었다.세상에 좋다는 건 모두 지원에게 가져다줬을 정도로 지극 정성이었다.하지만…… 지원은 자기 친딸을 모욕하고 있다. 이에 장서원은 마음이 차갑게 식어갔다.“예나는 내 딸이에요. 당신들이 인정하지 않아도 아무 상관없어요.”장서원이 한 글자 한 글자 차갑게 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는 성형외과
‘도예나를 가르치라고? 허, 말도 안 돼!’이지원은 도예나의 추태를 보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그녀를 진심으로 가르칠 리가 없었다.하지만 성남시 최고 미녀라던 예나의 얼굴에 흉터가 생겼으니, 세 날 뒤 연회에서도 꼴사나울 게 뻔했다.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지원이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아직도 웃음이 나오는 게냐?”장서영 (이지원 모친)이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도예나가 장씨 가문으로 돌아온다고 그러던데, 모르는 건 아니지?”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돌아오면 뭐 어때요? 날개 꺾인 독수리가 뭐가 무섭다고.”“이럴 때일수록 조심해야 한 단다.”장서영이 말했다.“아직 1개월이라는 수습기가 지나야 장씨 그룹 후계자로 정식 인정이 되는데, 한 개월 사이에 문제라도 생겼다가 할아버지가 말을 바꿀 수도 있지 않느냐…….”지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설마 도예나가 일부러 나한테 시비를 걸려고 장씨 가문에 돌아오는 거예요?”“그럴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 없지. 어쨌든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나도 사람을 붙여 도예나를 감시할 테니.”장서영이 손가락 스트레칭을 하며 섬뜩한 표정을 지었다.……예나는 네 아이들과 집으로 돌아온 후 저녁 식사 준비를 했다.아이들은 예나의 음식을 좋아했고, 그녀도 아이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을 즐겼다.그녀가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 들어서려는데 별장 앞에 빨간색 스포츠카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전에 본 적이 없는 차종이었다.양 집사가 공손히 다가가 차 문을 열자, 운전석에서 우아한 귀부인이 내렸다.예나는 눈을 가다듬고 살피다가 그 사람이 바로 결혼식 당일에 뵈었었던 강현석의 둘째 숙모 박정화라는 게 기억이 났다.현석에게는 첫째 고모와 둘째 삼촌이 있었다. 고모는 해외로 시집을 갔고 국내에는 극히 드물게 돌아왔으니 예나는 얼굴을 뵌 적이 없었다.둘째 삼촌의 이름은 강지섭으로, 강씨 그룹 최대 규모의 자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박정화는 바로 강지섭의 아내인 둘째 숙모였다.현석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고,
정지숙이 물을 한 모금 삼키고 입을 열었다.“나는 괜찮네, 며칠 더 누워있으면 나을 테니.”“형님, 이게 다 마음의 병이 도진거에요.”박정화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형님,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알고 지낸 지 수십 년이 넘고 다른 사람보다도 가깝게 지냈는데 저한테라도 털어놓으세요. 그렇게 끙끙 앓다가는 큰일 나요.”현석의 아버지가 돌아가기 전까지 박정화와 정지숙의 관계는 꽤 가까웠다.그러나 현석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두 형제 간의 관계는 남들보다도 못한 상태로 변하면서, 정지숙은 그 곳에 마음을 모두 쏟아붓게 되었다. 박정화와 정지숙 사이의 유대도 이 영향을 받아 서서히 흐지부지해졌다…… 그리고 집안의 일은 다른 이에게 쉽게 말할 수 없었다.정지숙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별일 아니네,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걸세.”“설마 예나가 형님 속을 썩이기라도 한가요?”박정화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현석이 다른 여자랑 만난다는 소문이 돌던데 그것 때문에 형님한테 화풀이라도 한 거예요?”“그런 일 없네.”정지숙이 대답했다.“예나는 나한테 아주 잘 해주고, 내 병은 예나와 아무 상관이 없어.”정지숙의 병은 마음의 병이 맞았다.두 형제가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있으니, 그 형제의 어머니가 마음의 병에 걸린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이 외로운 섬에 갇힌 것 같았다. 주변엔 아무도 없고 혼자 섬에 갇혀 언제 파도가 자신을 덮칠지 불안해했다.“형님, 예나를 위해 말하지 마세요. 그 애를 상대하기 어렵다는 건 저도 눈치챘어요.”박정화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망한 도씨 가문의 큰 딸이잖아요. 작은딸은 감옥에서 미쳤다고 했는데…… 여태 도씨 가문으로 돌아가 보지도 않은 걸 보세요. 도씨 가문에서 딸아이를 잘못 키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네요.”도씨 가문의 일은 성남시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예나는 도씨 가문의 큰딸이자, 강씨 가문의 사모이니 여러 귀부인이 박정화에게 이야기를 날랐다.그 사람들이 박정화에게 전한 말은 차마 입
세윤이 문을 박차고 들어가 두 손을 허리에 짚은 채로 화를 냈다.“엄마는 도씨 가문 사람이 아닌데 왜 도씨 가문을 챙겨야 해요? 그리고 엄마는 우스워질 행동을 한 게 없어요! 작은할머니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함부로 말해요?”박정화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 험담을 하다가 딱 들킨 것도 모자라 겨우 네 살짜리 아이에게 혼이 나고 있었다.박정화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제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이의 까만 눈동자가 정지숙의 창백한 얼굴에 닿았다.“할머니, 둘째 할머니가 한 말이 틀렸는데 왜 가만히 있으셨어요?”정지숙은 제훈의 눈빛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는 다른 가문을 말하고 있었단다. 너희 엄마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 너희들이 잘못 들은 거야.”“할머니, 우리 엄마는 정말 도씨 가문 사람이 아니에요.”수아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엄마의 친아버지이자 우리의 외할아버지는 장서원이에요…… 세날 뒤 장씨 가문에서 연회도 할 거래요. 할머니는 몸이 아파서 못 가도 둘째 할머니는 꼭 가보세요.”수아의 목소리는 귀여웠지만 목소리에 힘이 담겼다.정지숙은 놀란 눈치였다.‘이렇게 중요한 일을 내가 몰랐 다니.’‘세 날 뒤가 연회인데 시어머니가 되어서 며느리의 친부가 누구인지도 몰랐어…….’‘예나가 나를 초대할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야.’정지숙이 두 눈을 감으며 말했다.“다들 이만 나가줘. 좀 피곤해서 그래.”박정화도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차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형님, 그럼 푹 쉬세요. 며칠 뒤에 다시 올 게요.”그 말을 끝으로 박정화가 방에서 나갔다.세훈은 침대 옆으로 다가가 말했다.“아빠가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았고 강씨 가문이든 강씨 그룹이든 강남천의 세력이 아직 남아 있어 위험하다고 판단해 엄마는 강씨 가문 모든 사람을 초대하지 않았어요. 할머니뿐만 아니라 아빠도 초대하지 않았는 걸요.”그 말은 해명 같기도 했다.정지숙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강현석은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 신고 곧장 도예나를 향해 걸어갔다.그의 큰손이 그녀의 가녀린 허리에 닿고, 현석은 그녀의 이마에 자기 머리를 가져다 댔다. 두 눈이 마주친 순간 주변 공기도 달콤해졌다.“아빠, 뽀뽀하면 안돼요…….”세윤이 눈을 가리며 말했다.“우리 넷도 아직 여기 있다고요.”예나는 얼굴을 붉히며 남자를 휙 밀어버렸다.“그래, 조심 해야죠.”네 아이들은 물론이고, 멀리 서 있는 도우미들도 감히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갈게요, 갈게요.”세훈이 마른기침하며 말했다.“채소 다듬는 건 아빠한테 맡기고 우리는 이만 가서 놀게요.”‘매일 뽀뽀하는 걸 모른 척하는 것도 힘이 드네.’네 아이는 손에 쥔 채소를 내려놓고 거실로 향했다. 예나는 채소 바구니를 현석의 품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여기 채소를 모두 다듬어요.”그리고 예나는 몸을 돌려 다른 일을 시작했다.현석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그는 식탁 끝자리에 앉아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녀를 몰래 살폈다. 지극히 단순한 일상에서 그는 마음의 안정감을 찾았다.이게 바로 그가 평생 찾아 헤맸던 평온과 행복일 것이다.그는 자신이 최고의 행운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완벽한 가족을 가졌으니.“아!!”갑자기 짧은 비명이 들려왔다.현석이 다듬던 채소를 버려 두고 빠르게 예나를 향해 걸어갔다. 예나의 손가락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아마도 채소를 썰다가 손이 베인 모양이었다.그는 고민도 없이 그녀의 얇은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예나는 손가락이 아픈 것도 잠시, 심장이 쿵쿵 뛰는 게 느껴졌다.아찔한 화면이 다시 머릿속에 재생되었다…… 엘리자의 괴이한 웃음, 얼굴을 가로지른 칼날, 쏟아 내리는 피, 참을 수 없는 고통, 총을 맞고 죽어가는 엘리자…….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차갑게 변해갔고, 그녀는 남자를 팍 밀어버렸다.“아프잖아요, 살살할 수 없어요?”현석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반응에 급히 사과했다.“미안해요, 예나 씨. 약상자를 가지고 올 게요.”그는 빠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