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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허이서는 밤새 잠을 잘 자지 못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깐 눈을 붙였다. 남회시는 비가 자주 내려서 창밖에 축축한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갑자기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허이서는 화들짝 잠에서 깼다. 고개를 들자 여도준이 침대 위에 앉아서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 게 보였다.

허이서는 침대 위에서 헐레벌떡 일어났다. 그가 입을 열려고 하자 허이서는 남자의 손목을 붙잡더니 다른 손으로 빠르게 그에게서 휴대전화를 빼앗았다.

그녀의 새끼손가락 손톱 때문에 여도준의 얼굴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여도준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고 허이서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곧 벨 소리가 미친 듯이 울려댔다.

그녀는 옆에 있던 이불을 끌어당기면서 휴대전화를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엄마.”

“너 어떻게 된 거야? 왜 밤새 돌아오지 않은 거야? 어딜 간 거야?”

허이서는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저 지금 밖에 있어요. 볼 일이 있었거든요.”

“네 여동생이 지금 이 지경인데 외박할 마음이 드니? 너 같은 언니가 세상에 어디 있니?”

여도준은 허이서가 아무 변명 하지 않고 조용히 시선을 내려뜨리는 걸 바라보았다.

“알겠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

그녀가 덮고 있던 이불을 빼앗은 뒤 여도준은 손을 뻗어 허이서의 발목을 잡은 뒤 그녀를 확 끌어당겼다.

허이서는 뼈가 말라서 발목이 여도준의 손목에 다 잡힐 정도였다. 왼쪽 다리가 자연스럽게 들리면서 다소 민망한 자세가 되자 허이서는 서둘러 미안한 듯 웃어 보였다.

“얼굴은 괜찮아요?”

“내 얼굴을 망치려는 거야?”

조금 전 허이서는 여도준의 위로 엎어져서 그를 물어버릴 것 같았다.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러겠어요.”

여도준은 손에 힘을 주었다. 허이서의 자세는 굉장히 보기 좋지 않았다. 그녀는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저 늦었어요.”

여도준은 허이서를 침대로 끌어당긴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여도준은 소파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소파 위에서 약을 챙겼다.

허이서가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옷을 줍고 있을 때 남자가 손을 뻗었다.

“다음번에 또 보자.”

허이서의 표정이 살짝 굳은 걸 본 여도준은 그녀의 손에 약을 쥐여주었다.

앰버카운티에서 나온 뒤 허이서는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집안은 난장판이었고 바닥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허이서의 엄마는 청소를 하면서 잔소리를 했다.

“이 약이 쓸모 있는지도 모르겠네. 수술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허승아는 침대 위에 누워서 허이서의 손을 잡았다.

“언니, 나 때문에 또 돈 엄청 많이 쓴 거 아니야?”

“아니야.”

“아니긴.”

허이서는 약을 서랍 안에 넣었고 허승아는 팔 한쪽을 들어서 눈 위에 놓았다.

“언니, 그날 레스토랑에서 내가 누구를 봤는지 알아?”

“누구를 봤는데?”

허승아는 잠깐 목이 메었다.

“내가 몰래 좋아했던 우리 옆 반 반장이 있었어. 그 애가 내가 발병하는 전 과정을 모두 봤어. 그리고 걔 여자 친구가... 나보고 역겹다고 했어.”

허이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아 허리를 숙이며 허승아를 품에 꼭 안았다.

만약 여도준의 제안을 일찍 받아들였다면 어쩌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때때로 어떤 일에 있어서 저항은 그저 자신의 처지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허이서가 입으로 돌아간 뒤 여도준은 한동안 그녀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허이서는 여도준이 그날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정말로 손가락을 접으면서 계산을 하면 어떡한단 말인가?

마지막 날에 찾아가서 그날 밤 다섯 번을 하겠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여도준은 괜찮을지 몰라도 허이서는 그걸 견딜 엄두가 들지 않았다.

허이서는 여도준에게 문자를 보냈다.

[제가 갈까요?]

여도준은 오후 내내 그녀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다 퇴근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허이서는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

여도준은 그나마 다정한 편이었다. 그는 허이서를 위해 차를 보냈고 차를 탄 허이서는 곧장 밥 먹는 곳에 도착했다.

종업원은 그녀를 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고 안에는 거대한 병풍 하나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잠깐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왜 거기 멍청하게 서 있는 거야?”

허이서는 병풍 뒤로 돌아가고 나서야 여도준이 소파에 앉아 있는 걸 보았다.

“먼저 도착해 있었던 거예요?”

여도준은 자기 옆으로 오라는 듯이 손을 뻗어 옆을 툭툭 쳤다.

점심에 접대가 있어서 술을 꽤 마셨다.

여도준에게서는 짙은 술 냄새가 났고 색기도 강했으며 사람을 잡아먹을 듯한 표정을 해 보였다.

허이서가 그의 곁으로 다가가자 여도준은 자신의 허벅지를 툭툭 쳤고, 허이서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더니 찔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CCTV 있어요. 혹시 여기서...”

여도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여자가 왜 그렇게 조신하지 못해? 자는 것 말고 다른 할 일은 없는 거야?”

“...”

허이서가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갑자기 룸 문이 확 열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송은호가 보였다.

송은호는 휠체어에 앉아서 허이서를 지독하게 노려보았다. 허이서는 그의 다리를 힐끗 본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이서, 너 정말 대단하네. 내 전화번호, 카톡 전부 차단해 놓고 바로 다른 남자에게 꼬리를 쳐?”

“말 그렇게 하지 마. 우리 사이에 그렇게 모질게 굴 필요는 없잖아?”

송은호는 다리만 멀쩡했으면 바로 그녀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그는 조롱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의 다리를 가리켰다.

“내가 왜 그날 밤 가지 못한 줄 알아? 우리 가족들이 너랑 내가 만나는 걸 동의하지 않아서 날 방에 가뒀어. 난 너를 위해 방에서 뛰어내리기까지 했다고!”

그러나 허이서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감동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넌 병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

허이서는 마치 작은 괴물처럼 냉정하고 차분하게 말했고 그 말들은 여도준의 귓가에 날카롭게 꽂혔다. 허이서는 겉으로 연약해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매정한 사람이었다.

송은호는 그런 그녀를 견딜 수 없었다.

“난 사설탐정에게 널 감시해달라고 의뢰했어. 너 오늘 남자 만나러 여기 온 거지?”

“사람을 시켜서 내 뒤를 밟게 한 거야?”

“그래.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 대체 그 빌어먹을 남자가 누군지?”

송은호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언제든 욕할 준비가 돼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허이서는 웃었다.

“너도 아는 사람이야.”

“...”

송은호는 휠체어를 쾅 내리쳤다.

“내 지인이라고? 감히 내 눈앞에서...”

“여도준 씨야. 그러고 보니 나와 여도준 씨를 이어준 게 너네.”

허이서는 그 말을 할 때 이미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사실 이때 그녀는 여도준이 그녀에게 주제 파악을 못 한다고 혼쭐낼 줄 알고 두려워했다.

송은호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했다.

“여도준이라고?”

“그래. 우리 잤어. 내가 먼저 자자고 한 거야. 여도준 씨는 내 여동생을 구해줬거든.”

송은호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는 지나가다가 행인에게 붙잡혀서 뺨을 몇 대 맞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나도 널 도와줬잖아.”

송은호는 결국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까지 건드렸다.

“여도준 씨가 네게 약을 주려고 했던 그날 밤 나도 그 자리에 있었어. 네가 했던 말 나한테는 큰 상처였어. 송은호, 나랑 여도준 씨는 그날 같이 잤어.”

송은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뻔뻔하긴!”

“그래.”

허이서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애를 썼다.

“사람들은 저마다 강해질 때가 있는 법이야. 순수함, 체면, 그딴 것으로는 사람 목숨을 구할 수 없어. 난 차라리 그런 것들을 버릴래. 그러면 적어도 내 여동생은 병원에서 죽지 않아도 되니까.”

송은호는 휠체어를 짚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다리에 석고붕대를 감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앉아야만 했다. 그는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이서, 너 네가 높이 올라갈 줄 아는 거야? 착각하지 마. 여도준이 너랑 놀아난 이유는 네 가슴이 크기 때문이야.”

그렇게 자극하는 것으로 부족했는지 송은호는 말을 이어갔다.

“네가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여도준의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이 있다고. 너 그거 모르지?”

딸깍.

라이터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담배 연기가 병풍 뒤에서 흘러나왔고, 송은호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허이서는 더 이상 그와 말다툼할 생각이 없었다.

“여도준 씨 여기 있는데 인사라도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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