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밤공기에 허이서는 다리까지 떨고 있는데 여전히 꿈쩍 않는 여도준에 허이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가시죠 도련님.”“네가 앞장서.”할 수 없이 먼저 계단을 내려가던 허이서는 섬뜩한 느낌이 들어 여도준을 향해 물었다.“설마 뒤에서 저 밀치려는 건 아니죠? 여기서 밀면 진짜 죽을 수도 있어요.”여도준은 그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내려가고 있었고 앞장서서 가던 허이서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계단 코너에 쥐가 한 마리 있었는데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건지 그 쥐는 허이서와 여도준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그에 허이서도 굳어버리자 여도준이 재촉하듯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도련님이 저거 좀 어떻게 해봐요.”그에 여도준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너희 집에서 나온 건데 왜 나더러 해결하래.”“우리 집엔 이런 쥐 없거든요.”허이서는 말을 하며 손을 흔들어봤지만 그 쥐는 여전히 도망갈 생각을 안 하고 찍찍거리고만 있었다.항상 깨끗하고 정리가 잘 되어있는 곳에서만 살던 여도준은 이런 더러운 것들은 볼일이 없었기에 이마에 땀까지 맺혀있었다.그는 허이서의 어깨를 꽉 잡으며 소리쳤다.“저거 빨리 쫓아내!”“알겠다고요.”허이서는 내려가서 쥐를 쫓아내려 했지만 그녀가 내려가면 그에 놀란 쥐가 혹시라도 위로 올라올까 봐 여도준은 손에 힘을 풀지 않고 있었다.“정 안되면 태윤 씨 부르세요.”이런 상황에서 구경꾼을 또 끌어드리려는 허이서의 말에 여도준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너랑 쟤랑 같은 부류 아니야? 원래 네가 처리해야 할 일이야.”“말씀 좀 가려서 하시죠? 전 사람이에요.”여도준의 말에 화가 난 허이서는 신발을 벗어 던졌는데 그래도 눈은 정확한지 바로 쥐의 몸을 맞혀버렸다.그에 쥐는 아래층으로 도망쳐버렸고 허이서는 한 발로 뛰어가서 신발을 주우려고 하는데 그때 여도준이 그녀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안 더러워?”“집에 가서 씻으면 돼요.”“나 마저 데려다줘.”하지만 자꾸만 저를 잡아끄는 여도준에 허이서는 결국
바람에 날려갈 듯 야윈 몸이었다.그때 언니가 걱정되어 외투를 들고 뒤를 따라가던 허승아가 들고 온 슬리퍼를 허이서 앞에 놓아주며 말했다.“언니, 얼른 신어.”“승아야, 너 왜 내려왔어?”허승아는 외투로 허이서의 몸을 감싸주며 말했다.“추워, 얼른 올라가자.”날이 갈수록 생기가 도는 허승아를 보며 허이서는 자신이 한 일들에 보람을 느꼈다.허이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가족을 보면 다시 자신을 다독이며 힘을 내는 그런 사람이었다.“언니랑 저분 무슨 사이야? 아까 저분이 왜 언니 방에서 나온 거야?”예민한 허승아를 잠재우기 위해서 허이서는 슬리퍼를 신으며 대충 둘러댔다.“그냥 나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인데 내가 안 받아줘서 그러는 거야.”“왜 안 받아줘? 키도 크고 잘 생겼던데.”입을 크게 벌리며 물어오는 허승아에 허이서는 싸가지가 없어서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애써 웃으며 답했다.“돈이 너무 많잖아, 나랑은 안 어울려.”방으로 돌아온 허이서는 메모장에 “피임약 사기”라는 문구를 적어넣었지만 이렇게 큰일을 까먹진 않을 것 같아 다시 그 문구를 지워버렸다.한편 밤을 지새우고 나니 화가 많이 가라앉은 조서희는 여도준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차분하게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밥 먹자.”침대 쪽으로 다가온 여도준이 조서희를 안아 들려 하자 조서희가 그의 목을 감싸 안으며 말했다.“도준 씨, 나랑 약속 하나만 해줄 수 있어?”“응, 말해.”“그렇게 확신하진 말고, 못 지킬 수도 있잖아.”어젯밤 내내 운 건지 빨개진 눈을 하고 말하는 조서희에 여도준은 가슴이 저릿해 왔다.“지킬 수 있으니까 말해봐.”“허이서한테 약 주지 마 이제.”자신만만하게 약속하던 것과 달리 여도준은 조서희의 말에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허이서 동생이 많이 아파. 보심단을 안 먹으면 죽을 수도 있어.”“도준 씨가 약을 줄 때마다 나는 둘이 잤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밖에 없어. 허이서도 약 때문에 도준 씨랑 잔 거잖아.”조서희는 금세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아까는 약
거래를 먼저 제안한 것도 여도준이었고 이 관계에서 절대적인 갑인 그가 거래를 끝내겠다면 허이서도 할 말은 없었다.하지만 약은 허승아의 생명과도 같았기에 허이서는 포기할 수도 없었다.“안돼요 도련님!”그러자 여도준이 코웃음을 치며 물어왔다.“왜 안돼?”“약 없으면 제 동생 죽어요, 걔가 죽으면 저는...”여도준이 그런 허이서의 말을 끊으며 되물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사실 여도준과 허이서는 잠을 몇 번 자본 게 전부였고 조서희가 깨어난 이상 자신이 이렇게 버려질 거라는 건 늘 예상해왔던 일이었다.하지만 그래도 약은 다른 문제였기에 허이서는 여도준이 전화를 끊기라도 할까 봐 다급하게 말했다.“설마 전에 제가 서희 씨 자극한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그거라면 제가 당장 가서 사과할게요. 서희 씨 화를 풀어줄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할게요.”여도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는 제대로 끝맺지도 못한 허이서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도련님, 제발요... 약은 안돼요...”대답을 듣지 못한 허이서는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점점 더 무거워지는 한숨 소리에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제발 도와주세요 도련님...”누구한테나 똑같이 냉정했던 여도준이기에 허이서의 저런 애원은 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는 게 정상이었다.하지만 여도준은 어쩐지 그녀가 불쌍하게 느껴졌다.“그만해,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야.”하지만 보심단의 효과를 제대로 본 허이서는 이렇게 유일한 기회가 눈앞에서 떠나가는 걸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이를 악물며 말했다.“서희 씨 몸 안 좋다고 나중에도 부르면 바로 오라고 하셨잖아요.”허이서는 체면이나 자존심 따위를 제 발로 짓밟는 마음으로 이 말을 내뱉었다.정말 온몸의 가죽이 뜯겨나갈 듯 아파왔지만 이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저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다.여도준은 담배를 태우며 가소로운 듯 웃고는 말했다.“싫다며?”“약만 주시면...”“난 이제 너한테 관심 없어.”허이서가 가쁜 숨을 몰아쉬자 여도준은
“신으세요.”신발을 내어주던 김숙희는 오목조목 예쁘게 생긴 허이서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워낙 체구가 작은 조서희는 발도 작았기에 허이서는 발을 몇 번이나 다시 구겨 넣어서야 겨우 그 신발을 신을 수 있게 되었다.평소 신던 사이즈보다 두 사이즈는 더 작은 거라서 아직 걷지도 않았는데 발이 아파왔다.그때 조서희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도준 씨 보러 온 거죠? 근데 어쩌죠, 아직 집에 안 왔는데.”“도련님이 아니라 보심단 때문에 온 거예요.”“도준 씨한테 들어보니까 동생이 많이 아픈 것 같던데, 약 안 먹으면 죽을 수도 있다죠?”허이서는 몇 번이나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동생을 떠올리며 답했다.“네, 그래서 서희 씨한테 이렇게 부탁하러 왔어요. 약 몇 통이라도 먼저 주시면 안 될까요?”“어제 물어보니까 아직 시장에 풀리는 시간이 정확히는 안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병원에만 들어가면 비싸지도 않으니까 괜찮을 텐데.”허이서가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었던 조서희는 일부러 유감스럽다는 듯 말했다.“지금 못 사는데 유감이긴 하네요.”조서희는 약 때문에 몸까지 파는 허이서를 더럽다고만 여기고 있었다.도대체 여도준이 뭘 보고 이런 애랑 잔 건지도 의문이었다.그때 문을 열러 나가던 김숙희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조서희를 향해 말했다.“도련님 오셨어요.”그에 환한 웃음을 짓던 조서희가 허이서를 보며 말했다.“좀 비키죠? 도준 씨가 들어와서 처음 보는 얼굴이 이서 씨이길 바라는 거예요?”그 말에 허이서는 옆으로 비켜섰고 집으로 들어온 여도준은 허이서를 봤음에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듯 그녀를 지나쳐 바로 조서희가 앉아있는 휠체어 곁으로 다가갔다.“어때, 오늘은 좀 즐거웠어?”그 말에 허이서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마치 저 자신이 조서희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장난감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렇게라도 해서 조서희가 즐거워지고 그래서 약을 받을 수만 있다면 허이서는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었다.“도준 씨가 없어서 오늘도 별로였어
갑자기 자신을 밀어버리는 여도준에 허이서가 만약 난간을 부여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굴러떨어질 뻔했다.여도준은 허이서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말했다.“침대에 올라오랄 때는 비싸게 굴더니 지금은 왜 올라오지 못해서 안달이야.”그 말에 허이서는 발에서 전해지는 아픔을 참으며 말했다.“만약 약이 아니었으면 제가 도련님이랑 잤겠어요?”“뭐?”심장이 이미 찢길 대로 찢겨 이젠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허이서가 여도준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이미 결정권은 서희 씨에게로 넘어갔으니 전 이제 서희 씨 말만 들으면 되잖아요. 도련님 침대는 너무 귀한 거라 감히 저 같은 게 올라갈 수 있는 데가 아니에요.”말을 마친 허이서는 다시 내려가려고 했는데 그때 굳은 표정을 한 여도준이 그녀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아 오며 차가운 얼굴과는 상반되는 낯간지러운 질문을 했다.“내 밑에서 즐길 때는 그런 말 없었잖아.”허이서는 어깨에 힘을 주며 말했다.“그건 도련님 맘에 드시라고 제가 연기한 거죠.”그 말에 여도준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지자 허이서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 계단을 내려갔다.주방에서는 김숙희가 음식들을 나르고 있었고 조서희는 젓가락을 든 채 말했다.“약은 좀 있다 줄게요. 동생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나도 이해하니까요.”일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풀리자 이상하게 불안했지만 허이서는 쓸데없는 생각이라 치부하며 답했다.“감사해요.”한편 식탁으로 내려온 여도준은 허이서의 발에 신겨진 신발을 보았지만 그게 작다는 건 눈치채지 못하고 물었다.“너도 이거랑 같은 거 있지 않아?”그 말에 허이서의 신발을 보던 조서희는 일부러 놀란 척 하며 물었다.“어머, 진짜 똑같네.”그에 조서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우연이에요 이것도? 어떻게 또 나랑 똑같은 신발을 샀어요?”허이서는 안 그래도 벗고 싶었던 신발인지라 바로 대답을 했다.“벗을게요 지금.”하지만 조서희는 그녀의 뜻대로 해주고 싶지 않았기에 웃으며 답했다.“내가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은 아
약과 관련된 일이라면 타협하고 고개를 숙여야만 한다는 것, 약을 얻는 대가가 목숨이라 해도 허이서는 괜찮았다.“알겠습니다.”그에 조서희는 기뻐서 박수까지 치며 말했다.“거기서 일하다가 정말 이서 씨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잖아요. 만약 이서 씨를 책임져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이서 씨한테도 신분 상승할 수 있는 좋은 기회에요.”여도준 집 거실에 걸려있던 샹들리에가 허이서의 몸을 비춰왔고 그 빛은 가뜩이나 초라한 허이서의 몸에 여러 갈래의 빛줄기를 남겨놓았다.“그리고 내가 라운지에 보낸 일은 도준 씨가 몰랐으면 좋겠어요.”허이서가 집을 나설 때 하이힐을 신고 가라는 조서희의 말에 허이서는 발에 맞지도 않은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섰다.창가에서 통화를 하며 허이서를 보고 있던 여도준은 아파서 몸을 구부정하게 한 채로 천천히 걷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다.발이 아프면 편한 신발을 신을 것이지 굳이 저렇게 높은 하이힐을 신고 여길 온 게 조서희를 자극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허이서가 그럴수록 진작에 사려졌던 연민이라는 감정이 자꾸만 여도준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앰버카운티를 나선 허이서는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신발을 벗어보았다.뒤꿈치는 물집이 잡혀있었고 발 전체가 다 터져 피와 살이 한데 엉겨 붙어있었다.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상처가 가득한 발을 보고 있자니 허이서는 가슴이 아파왔다.마음도, 발도 남은 거라곤 통증뿐이었다....라운지의 이미연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던 허이서가 자신의 출근 의사를 밝히자 이미연은 두 팔 벌려 환영했다.“진작에 오라고 했잖아, 넌 얼굴이랑 몸매가 다 되니까 내가 꼭 널 여기서 제일 유명한 아가씨로 만들어줄게.”하지만 이미연은 이목구비는 예쁘게 생겼는데 저렇게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하면 오던 손님도 떨어져 나갈 것 같아 한마디 했다.“왜, 싫어?”“언니, 술만 같이 마셔주면 안 돼요?”허이서는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태연한 척 말했다.“당연하지
“어디 한번 보자. 커야 할 곳은 다 컸는지.”허이서는 두 팔에 의해 단단한 벽에 밀어붙여졌다. “사... 사람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깡마른 어깨로 애써 반항해 보았지만 소용없었고 오히려 어깨에 깊은 홈이 생겼다. 허이서는 절망에 빠진 얼굴로 눈을 감았다. 1년이란 시간이 흘러서 그녀는 여도준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다.여도준은 또박또박 말했다.“1년 전 침대 위에서 내가 세어봤거든. 너 내 이름을 68번 부르더라.”너무 괴롭고 힘들어서, 미친 듯이 애원했었다.허이서는 발가벗겨진 채로 사람들 앞에 선 기분이 들었다. 그날 밤의 모욕감이 그녀의 머리를 꾹 눌러 끓는 물 안에 넣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당연히 인정할 수 없었다.“전 당신을 만난 적이 없어요.”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여도준은 허이서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예리한 눈초리로 허이서의 이목구비를 구석구석 살펴보기 시작했고, 허이서는 무심결에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여도준의 눈동자는 그 어떤 감정이나 욕망이 자리할 공간이 없을 정도로 싸늘함만으로 가득했다.“내가 잘못 본 건가?”허이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여도준은 한 손으로 허이서의 가냘픈 허리를 쥐고 그녀의 청바지에 손가락을 걸었다. 잡아당기려는 의도는 없어 보였다.허이서의 귓가에 긴 숨결이 스쳐 지나가면서 그녀의 까만색 머리카락이 살짝 휘날렸다.남자는 결국 손을 놓았다.두 사람은 나란히 방으로 돌아왔다. 송은호가 다가가서 허이서의 손을 잡았다.“소개할게. 이쪽은 내 여자 친구야.”여도준은 소파에 앉더니 긴 다리를 꼬았다. 그는 허이서가 송은호의 손을 뿌리치는 걸 보았다.“헛소리하지 마.”송은호는 허이서의 어깨를 끌어당기더니 그녀를 데리고 여도준의 앞에 섰다.“이쪽은 내가 얘기했던 도련님. 네 여동생을 살릴 수 있는 약을 갖고 있어.”허이서는 순간 얼어붙었다. 충격받은 얼굴로 여도준을 바라보는 허이서의 눈동자에 흐릿한 인영이 나타났다.여도준은 담배를 쥐고 있던
허이서는 검은색 벤틀리 안에 앉아서 가는 길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차는 앰버카운티 안으로 들어갔고 곧 대문 앞에 멈춰 섰다. 허이서는 시선을 들었다. 안으로 들어간다면 끝도 없는 심연이 펼쳐질 것이다. 그럼에도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여도준 씨, 그 약은 언제쯤 출시하나요?”허이서는 여도준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로 들어간 여도준은 옷장 안에서 옷 한 벌을 꺼내 허이서에게 건넸다.“샤워하고 나서 갈아입고 나와.”허이서는 두 손을 등 뒤로 감췄다.“아니...”“뭐가 아니라는 거야?”여도준은 허이서를 꿰뚫어 보았다.“송은호랑 잘 돼가나 보네.”“저희는 시작도 하지 않았어요.”“그것참 아쉽겠네.”여도준의 말투에서 아쉬움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허이서에게 옷을 집어 던졌다.“역겨운 냄새 나지 않게 깨끗하게 씻고 나와.”조금 전 룸 안에서 다들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그의 말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허이서는 몸을 돌려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도준이 그녀에게 건넨 옷은 짧은 편이었다. 옷의 주인은 체구가 꽤 작았던 것 같았다.허이서는 서둘러 샤워하고 난 뒤 욕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여도준은 흰색 가운을 입고 소파 위에 앉아서 카드를 손에 들고 있었고, 손가락 두 개로 카드 뭉치를 쥐고 고개를 숙인 채 게임에 열중했다.허이서는 입고 있던 옷을 아래로 잡아당기면서 몇 걸음 만에 여도준의 곁에 섰다.“앉아.”치마도 짧았던 터라 허이서는 자리에 앉은 뒤 손을 허벅지 위에 올렸다.“카드게임 할 줄 알아?”남자가 물었다.“아뇨. 잘 몰라요.”여도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들고 있던 카드들을 테이블 위에 내던지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여동생 심장이 안 좋아?”“네.”여도준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는 연민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여동생을 위해서 날 찾아오다니, 눈물 나는 가족애네.”허이서는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가까운 거리에서 여도준의 시선은 거리낄 것 없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