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과 관련된 일이라면 타협하고 고개를 숙여야만 한다는 것, 약을 얻는 대가가 목숨이라 해도 허이서는 괜찮았다.“알겠습니다.”그에 조서희는 기뻐서 박수까지 치며 말했다.“거기서 일하다가 정말 이서 씨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잖아요. 만약 이서 씨를 책임져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이서 씨한테도 신분 상승할 수 있는 좋은 기회에요.”여도준 집 거실에 걸려있던 샹들리에가 허이서의 몸을 비춰왔고 그 빛은 가뜩이나 초라한 허이서의 몸에 여러 갈래의 빛줄기를 남겨놓았다.“그리고 내가 라운지에 보낸 일은 도준 씨가 몰랐으면 좋겠어요.”허이서가 집을 나설 때 하이힐을 신고 가라는 조서희의 말에 허이서는 발에 맞지도 않은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섰다.창가에서 통화를 하며 허이서를 보고 있던 여도준은 아파서 몸을 구부정하게 한 채로 천천히 걷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다.발이 아프면 편한 신발을 신을 것이지 굳이 저렇게 높은 하이힐을 신고 여길 온 게 조서희를 자극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허이서가 그럴수록 진작에 사려졌던 연민이라는 감정이 자꾸만 여도준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앰버카운티를 나선 허이서는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신발을 벗어보았다.뒤꿈치는 물집이 잡혀있었고 발 전체가 다 터져 피와 살이 한데 엉겨 붙어있었다.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상처가 가득한 발을 보고 있자니 허이서는 가슴이 아파왔다.마음도, 발도 남은 거라곤 통증뿐이었다....라운지의 이미연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던 허이서가 자신의 출근 의사를 밝히자 이미연은 두 팔 벌려 환영했다.“진작에 오라고 했잖아, 넌 얼굴이랑 몸매가 다 되니까 내가 꼭 널 여기서 제일 유명한 아가씨로 만들어줄게.”하지만 이미연은 이목구비는 예쁘게 생겼는데 저렇게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하면 오던 손님도 떨어져 나갈 것 같아 한마디 했다.“왜, 싫어?”“언니, 술만 같이 마셔주면 안 돼요?”허이서는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태연한 척 말했다.“당연하지
“어디 한번 보자. 커야 할 곳은 다 컸는지.”허이서는 두 팔에 의해 단단한 벽에 밀어붙여졌다. “사... 사람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깡마른 어깨로 애써 반항해 보았지만 소용없었고 오히려 어깨에 깊은 홈이 생겼다. 허이서는 절망에 빠진 얼굴로 눈을 감았다. 1년이란 시간이 흘러서 그녀는 여도준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다.여도준은 또박또박 말했다.“1년 전 침대 위에서 내가 세어봤거든. 너 내 이름을 68번 부르더라.”너무 괴롭고 힘들어서, 미친 듯이 애원했었다.허이서는 발가벗겨진 채로 사람들 앞에 선 기분이 들었다. 그날 밤의 모욕감이 그녀의 머리를 꾹 눌러 끓는 물 안에 넣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당연히 인정할 수 없었다.“전 당신을 만난 적이 없어요.”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여도준은 허이서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예리한 눈초리로 허이서의 이목구비를 구석구석 살펴보기 시작했고, 허이서는 무심결에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여도준의 눈동자는 그 어떤 감정이나 욕망이 자리할 공간이 없을 정도로 싸늘함만으로 가득했다.“내가 잘못 본 건가?”허이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여도준은 한 손으로 허이서의 가냘픈 허리를 쥐고 그녀의 청바지에 손가락을 걸었다. 잡아당기려는 의도는 없어 보였다.허이서의 귓가에 긴 숨결이 스쳐 지나가면서 그녀의 까만색 머리카락이 살짝 휘날렸다.남자는 결국 손을 놓았다.두 사람은 나란히 방으로 돌아왔다. 송은호가 다가가서 허이서의 손을 잡았다.“소개할게. 이쪽은 내 여자 친구야.”여도준은 소파에 앉더니 긴 다리를 꼬았다. 그는 허이서가 송은호의 손을 뿌리치는 걸 보았다.“헛소리하지 마.”송은호는 허이서의 어깨를 끌어당기더니 그녀를 데리고 여도준의 앞에 섰다.“이쪽은 내가 얘기했던 도련님. 네 여동생을 살릴 수 있는 약을 갖고 있어.”허이서는 순간 얼어붙었다. 충격받은 얼굴로 여도준을 바라보는 허이서의 눈동자에 흐릿한 인영이 나타났다.여도준은 담배를 쥐고 있던
허이서는 검은색 벤틀리 안에 앉아서 가는 길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차는 앰버카운티 안으로 들어갔고 곧 대문 앞에 멈춰 섰다. 허이서는 시선을 들었다. 안으로 들어간다면 끝도 없는 심연이 펼쳐질 것이다. 그럼에도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여도준 씨, 그 약은 언제쯤 출시하나요?”허이서는 여도준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로 들어간 여도준은 옷장 안에서 옷 한 벌을 꺼내 허이서에게 건넸다.“샤워하고 나서 갈아입고 나와.”허이서는 두 손을 등 뒤로 감췄다.“아니...”“뭐가 아니라는 거야?”여도준은 허이서를 꿰뚫어 보았다.“송은호랑 잘 돼가나 보네.”“저희는 시작도 하지 않았어요.”“그것참 아쉽겠네.”여도준의 말투에서 아쉬움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허이서에게 옷을 집어 던졌다.“역겨운 냄새 나지 않게 깨끗하게 씻고 나와.”조금 전 룸 안에서 다들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그의 말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허이서는 몸을 돌려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도준이 그녀에게 건넨 옷은 짧은 편이었다. 옷의 주인은 체구가 꽤 작았던 것 같았다.허이서는 서둘러 샤워하고 난 뒤 욕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여도준은 흰색 가운을 입고 소파 위에 앉아서 카드를 손에 들고 있었고, 손가락 두 개로 카드 뭉치를 쥐고 고개를 숙인 채 게임에 열중했다.허이서는 입고 있던 옷을 아래로 잡아당기면서 몇 걸음 만에 여도준의 곁에 섰다.“앉아.”치마도 짧았던 터라 허이서는 자리에 앉은 뒤 손을 허벅지 위에 올렸다.“카드게임 할 줄 알아?”남자가 물었다.“아뇨. 잘 몰라요.”여도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들고 있던 카드들을 테이블 위에 내던지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여동생 심장이 안 좋아?”“네.”여도준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는 연민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여동생을 위해서 날 찾아오다니, 눈물 나는 가족애네.”허이서는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가까운 거리에서 여도준의 시선은 거리낄 것 없다는
허이서는 두 무릎을 꿇은 채 허승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패닉에 빠진 허이서는 허승아를 일으키려고 했다.“승아야, 나... 나 놀라게 하지 마.”허승아는 온몸에 경련을 일으켰고 레스토랑 안의 손님들은 그 모습을 먹고 겁을 먹었다.허이서는 허승아를 꼭 끌어안았고 허승아는 어렴풋이 말했다.“언니, 살려줘... 다른 사람들이... 이런 내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해줘.”허승아가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허이서는 옆에서 멍하니 서 있는 직원을 바라보았다.“구급차 불러주세요. 어서요.”그들의 곁으로 남녀 한 쌍이 지나갈 때, 허승아는 더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면서 눈을 뒤집으며 입에 흰 거품을 물었다.여자는 혐오스럽다는 듯 코와 입을 막았다.“뭐야, 역겹게.”허이서는 서둘러 겉옷을 벗어서 허승아의 얼굴을 가려주려고 했다.이때 남자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혀 깨물지 않게 신경 써.”여도준이 말을 마치자마자 허승아의 치아가 주체할 수 없이 힘껏 맞물리는 게 보였고, 허이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뻗었다.순간 날카로운 통중과 함께 허이서의 살갗이 찢어졌다. 허승아는 허이서의 손가락을 힘껏 깨물었고 허이서는 통증 때문에 잠깐 눈앞이 아찔했지만 그럼에도 서둘러 허승아를 꼭 끌어안았다.“승아야, 괜찮아. 금방 지나갈 거야.”두 자매는 한 명은 누워있고 한 명은 무릎을 꿇은 채로 한껏 웅크리고 있었다.구차하고 무력하게, 절망적인 모습으로 말이다.가만히 앉아 있는 여도준은 빛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차갑고도 고귀해 보였다.식욕이 사라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벗어나려고 했는데 허이서가 그 모습을 보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여도준 씨, 제발, 제발 약 좀 주시면 안 될까요?”허이서의 시야에서는 남자의 눈가와 미간을 스치는 한기만이 보였다.“허이서, 약자라고 해서 모든 행동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야.”애원하는 방법이 먹혔다면 동운 제약 앞에는 사람들이 줄지어서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허승아가 구급차에 탔을 때 그녀의 곁에는
허이서는 여도준이 뒤로 물러난 걸 발견하고는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여도준이 손을 들어 그녀의 허리를 살짝 쳤다.“얌전히 굴어.”허이서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엎드렸다.여도준은 당구봉을 쥐고 옆으로 걸어갔다. 그가 허리를 숙였을 때 허이서는 허리까지 이어지는 그의 단단한 근육을 보게 되었다.허이서는 포기할 수 없었기에 끝까지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여씨 일가와 조씨 일가는 정략결혼을 했죠. 이 사진을 사람들이 보게 된다면 여도준 씨는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남들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을까요?”여도준이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에 허이서는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그가 힘을 주어 치자 붉은색 공이 빠르게 굴러왔다.만약 그 공이 허이서의 머리와 부딪힌다면 분명 아플 것이다. 허이서는 뼛속부터 치밀어 오르는 치욕감에 주먹을 꽉 쥐었다.공은 허이서의 가슴에 부딪혔고, 여도준은 웃음을 터뜨렸다.“보기 좋네.”여도준은 빨갛게 된 허이서의 얼굴을 바라보며 앞으로 몇 걸음 걸었다.그는 차가운 표정에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협박하는 거야?”“여도준 씨, 겨우 약일 뿐이에요. 약이 출시되면 다시는 여도준 씨를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그러나 여도준은 줄 생각이 없었다.“사진 퍼뜨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된다면 조씨 일가가 절대 널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허이서는 몸을 일으키며 깊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전 최악의 상황까지 각오했어요.”“그러면서 날 찾아온 거야?”여도준은 날카롭고 냉담했다. 그의 진득한 시선에 허이서는 입술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졌다.허이서는 힘겹게 미소를 지었지만 보기 좋은 미소는 아니었다.“시도조차 해보지 않는다면 동생이 죽는 걸 그냥 지켜봐야 하니까요.”허이서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그러나 여도준은 몹시 냉정했다.다른 사람의 생사 문제는 그의 차가운 심장을 녹일 수가 없었다.“내가 원하는 건 너야. 얼마나 간단해? 널 주면 네 여동생을 살려줄게.”여
허이서는 치아가 덜덜 떨렸다. 이를 악물었지만 떨림이 잦아들기는커녕 더욱 심해질 뿐이었다.송은호는 난감하다는 어투로 말했다.“난 이서랑 이미 약속했어. 나보고 이서에게 어떻게 설명하라는 거야?”여도준의 목소리가 정수리 위에서 들려왔다.“내가 주지 않았다고 해.”송은호는 잠깐 고민했다. 만약 허승아가 약을 먹고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허이서가 과연 그를 만나줄까?구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공범’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발소리가 점점 멀어졌고 곧 송은호는 방에서 나갔다.강태윤은 차분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제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허이서는 송은호가 이렇게 떠날 줄은 몰랐다.허이서는 비틀거리면서 뒷걸음질 치다가 욕조에 다리가 부딪혀서 욕조 안에 풍덩 빠지게 되었다.넘쳐흐른 물이 여도준의 바짓자락을 적셨고 허이서는 물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죄송해요.”허이서의 눈시울이 조금 빨갰다. 여도준은 젖은 바지를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물이 아주 뜨거웠는데 허이서의 체온이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허이서는 서둘러 욕조 밖으로 빠져나갔다.“여도준 씨, 오늘 약을 주시면 안 될까요? 한 팩이라도 좋아요.”허이서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다.“난 송은호에게 기회를 줬어. 너도 봤잖아.”허이서는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말했다.“저에게도 기회를 주세요. 제 동생을 구해주신다면 평생 고마워할게요.”여도준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로 그녀를 바라봤다.“강하게 밀어붙여도 소용없으니까 이번에는 가여운 척하는 거야?”허이서는 아주 처연해 보였다. 여도준은 허이서의 턱을 한 손으로 쥐고 그녀를 잡아당겼고, 손가락으로 허이서의 입술을 쓱 만졌다.허이서는 그의 눈빛에서 일렁이는 욕정을 보고 그의 손을 힘껏 쳐냈다.여도준은 눈을 감고 욕조에 기댔다.“거절도 한두 번이어야 재밌지. 계속 거절하면 재미없어.”여도준이 그녀에게 흥미를 잃는다면 가지고 노는 건 둘째 치고 만나는 것조차 성가셔 할 것이다.허이서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마지막으로
허이서는 손을 거두어들였다.송은호는 흥분하여 앞으로 나섰다.“지금 이곳에서 물어봐. 내가 거짓말을 한 건지, 아니면 여도준이 약을 주지 않으려고 했는지 말이야.”송은호는 어젯밤 그와 여도준이 나눈 대화를 허이서가 들었다는 걸 꿈도 꾸지 못했다.허이서가 떠나려고 하자 송은호가 그녀를 붙잡았다.“물어보라니까.”허이서의 표정이 굳었다.“그만해.”송은호는 어렸을 때부터 오냐오냐 자랐기에 허이서를 짝사랑하는 것에만 참을성이 있었다.그는 순간 짜증을 냈다.“난 누구보다도 네 동생을 구하고 싶어. 네 동생이면 내 동생이야.”’공허한 눈빛으로 여도준을 바라본 허이서는 여도준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했다.여도준은 메뉴판을 닫았다.“할 얘기 있으면 앉아서 하자고.”송은호는 허이서의 어깨를 내리눌렀고 두 사람은 여도준의 맞은편에 앉게 되었다.“여도준, 질문 하나 할게. 요즘 내가 계속 뻔뻔하게 널 찾아가서 약을 달라고 했었지?”송은호는 자신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걸 증명하기에 급급했다.여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래. 네가 좀 뻔뻔하긴 하지.”허이서는 고개를 들지 않아도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도준에게서 느껴지는 압박감을 느낄 수 있었다.그러다 여도준이 갑자기 물었다.“약 효과 있었어?”허이서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옷을 쥐어뜯었고 송은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누구랑 물어보는 거야?”여도준은 허이서를 향해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송은호의 시선이 허이서에게 고정되었다.“약은 어디서 구한 거야?”허이서는 애가 탔다. 여도준은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모습을 즐겼고 허이서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여도준을 빤히 바라보았다.마치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듯이, 그냥 솔직하게 말해버리겠다는 듯이 말이다.여도준은 그녀의 속셈을 꿰뚫은 것처럼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예전에 그 약들 효과 있었냐고.”송은호는 눈을 흘겼다.“효과 있었으면 너한테 이렇게 부탁했겠어?”여도준은 아주 작게 웃음을 터뜨린
굳이 허이서여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는데 그때마다 거절했으니 인내심도 점점 닳아가고 있었다.허승아는 며칠 연속 약을 먹게 되자 상태가 점점 좋아졌고 심지어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산책도 할 수 있게 되었다.열흘째가 되자 약이 동났다.허이서는 허승아를 재운 뒤 몰래 집을 나섰다.그녀는 앰버카운티에 도착해서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집에서 여동생이 발작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그곳에 가서 무릎이라고 꿇고 있는 편이 나았다.그녀의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기에 허이서는 계단을 따라서 내려갔다.남자 한 명이 위층으로 올라오면서 그녀와 지나쳤다. 허이서는 그의 손에 아주 무거워 보이는 통이 하나 들려있는 걸 보았다.허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1층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허이서는 곧바로 걸음을 멈췄고 갑자기 불안감이 치솟았다.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위층으로 달려갔다.“승아야, 문... 열면 안 돼.”그러나 한발 늦었다. 허승아의 비명을 들은 허이서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짙은 피비린내와 함께 허승아의 몸을 적셨고 허이서는 헐레벌떡 집 앞에 도착했다.남자는 허승아를 가리키며 흉악한 표정으로 욕설을 내뱉었다.“이건 네 아버지가 진 빚이야. 네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으면 너희도 편히 못 살 줄 알아.”허이서는 남자의 팔을 잡아당겼고 허승아는 코와 입에서 모두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걸 느꼈다.“오늘은 개 피지만 다음에는 무슨 피일지 나도 장담 못 해!”허이서는 순간 멈칫했다. 허승아는 집 안을 향해 외쳤다.“두부야!”그녀가 키우던 강아지는 오늘 오후 집에 없었다. 허승아는 두부가 나가서 놀고 있는 줄 알았다.허승아는 미친 듯이 두부의 이름을 불러대면서 입안을 적신 피를 삼켰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힘껏 부여잡았다.남자는 그 틈에 허이서를 밀쳤다.“이건 너희 업보야.”허이서는 부랴부랴 집 안으로 들어가서 쓰러지려는 허승아를 부축했다.“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