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4화

허이서는 여도준이 뒤로 물러난 걸 발견하고는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여도준이 손을 들어 그녀의 허리를 살짝 쳤다.

“얌전히 굴어.”

허이서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엎드렸다.

여도준은 당구봉을 쥐고 옆으로 걸어갔다. 그가 허리를 숙였을 때 허이서는 허리까지 이어지는 그의 단단한 근육을 보게 되었다.

허이서는 포기할 수 없었기에 끝까지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

“여씨 일가와 조씨 일가는 정략결혼을 했죠. 이 사진을 사람들이 보게 된다면 여도준 씨는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남들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을까요?”

여도준이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에 허이서는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그가 힘을 주어 치자 붉은색 공이 빠르게 굴러왔다.

만약 그 공이 허이서의 머리와 부딪힌다면 분명 아플 것이다. 허이서는 뼛속부터 치밀어 오르는 치욕감에 주먹을 꽉 쥐었다.

공은 허이서의 가슴에 부딪혔고, 여도준은 웃음을 터뜨렸다.

“보기 좋네.”

여도준은 빨갛게 된 허이서의 얼굴을 바라보며 앞으로 몇 걸음 걸었다.

그는 차가운 표정에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협박하는 거야?”

“여도준 씨, 겨우 약일 뿐이에요. 약이 출시되면 다시는 여도준 씨를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그러나 여도준은 줄 생각이 없었다.

“사진 퍼뜨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된다면 조씨 일가가 절대 널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허이서는 몸을 일으키며 깊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

“전 최악의 상황까지 각오했어요.”

“그러면서 날 찾아온 거야?”

여도준은 날카롭고 냉담했다. 그의 진득한 시선에 허이서는 입술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졌다.

허이서는 힘겹게 미소를 지었지만 보기 좋은 미소는 아니었다.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다면 동생이 죽는 걸 그냥 지켜봐야 하니까요.”

허이서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러나 여도준은 몹시 냉정했다.

다른 사람의 생사 문제는 그의 차가운 심장을 녹일 수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너야. 얼마나 간단해? 널 주면 네 여동생을 살려줄게.”

여도준은 가볍게 말했다.

그러나 허이서의 1년 전 찢어졌던 그곳은 여전히 아물지 않았다.

허이서는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죽는 사람은 제가 되겠네요.”

여도준은 허이서의 눈동자에서 그 어떤 빛도 보지 못했다.

그는 당구 테이블 위에 앉은 뒤 공 하나를 들었고, 다섯 손가락을 쭉 펴더니 길쭉한 손가락으로 공을 꽉 쥔 뒤 다시 손을 펴고 다시 공을 쥐었다.

허이서의 호흡이 가빠졌다.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이 그녀를 괴롭게 했다.

여도준은 혀를 차며 말했다.

“조금 딱딱하네.”

그는 공을 만지다가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가 나가라고 하기도 전에 강태윤이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왔다.

“도련님, 송은호 씨가 쳐들어왔습니다. 경호원들도 막지 못했어요.”

허이서는 어떻게 담판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런 순간에 이곳에서 송은호를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여도준을 바라보는 허이서의 눈동자에 드디어 파문이 일었다.

“올라오지 못하게 해줘요.”

허이서는 송은호를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절대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게 들렸다. 이미 2층까지 온 듯했다.

“여도준, 어디 있어?”

여도준은 허이서가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걸 보았다. 그곳에는 숨을 곳이 없었고 여도준은 문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허이서는 의심하지 않고 빠르게 그쪽으로 걸어갔다.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허이서는 그곳이 침실임을 발견했다.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안으로 따라 들어온 여도준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어디로 가려고? 왜 이렇게 급해? 송은호랑 인사라도 나누고 싶은 거야?”

여도준은 그녀를 욕실로 끌고 갔고 허이서는 힘껏 발버둥 쳤다.

“뭐 하는 거예요?”

허이서는 문도 닫지 않은 채 곧장 욕조 앞으로 걸어가서 물을 틀었다.

“너 도와주고 있잖아.”

송은호가 3층까지 올라왔을 때 강태윤이 그를 막아섰다.

“송은호 씨, 도련님은 지금 계시지 않습니다.”

“난 안 속아요.”

송은호는 귀를 쫑긋 세웠다. 물소리가 들리자 그는 서둘러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

허이서는 마치 바람 피우는 현장을 들킨 사람처럼 바짝 긴장한 얼굴로 벽에 붙어 서 있었다.

송은호는 욕실 안에 발 한쪽을 넣었다. 방 안이 워낙 넓어서 욕실 쪽이 다 보이지는 않았다.

여도준은 문가 쪽을 바라보았다.

“나 샤워하는 거 볼 거야?”

허이서는 숨을 참았다. 송은호가 혹시라도 안으로 들어온다면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었다.

송은호는 걸음을 멈췄다.

“내가 왜 왔는지 알고 있지?”

여도준은 물이 욕조 밖으로 넘쳐흐르는 걸 보고는 손을 들어 수도꼭지를 잠갔다.

“못 줘.”

“젠장, 친구 사이인데 그 정도도 못 해줘?”

송은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욕설을 퍼부었다.

“자꾸 이럴 거야? 이번이 벌써 몇 번째인 줄 알아? 약 좀 달라는 것뿐이잖아.”

허이서는 귓속을 파고드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송은호는 결과적으로 약을 구하지는 못했을 뿐 그녀를 도우려고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여도준은 허이서의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을 보더니 샤워기를 틀어 그녀의 얼굴을 적셨다.

미처 방어할 새가 없었던 허이서는 사레가 들려서 기침할 뻔했고 여도준은 손으로 그녀의 입을 가리며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소리 내지 마. 송은호가 네 모습을 볼까 두렵지 않은 거야?”

그의 숨결 때문에 살짝 간지러웠다. 샤워기에서 흘러나온 물에 허이서의 옷이 젖었고 그녀의 얼굴은 마치 갓 피어난 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여도준은 순간 호흡이 가빠졌다. 송은호는 안에서 인기척을 듣고 말했다.

“여도준, 설마 안에 너 말고 다른 사람도 있는 거야?”

여도준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응. 여자 숨겨뒀는데 볼래?”

허이서는 여도준이 자신을 괴롭히려 한다고 생각하며 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여도준은 그녀를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

사진을 들고 그와 담판하러 온 사람이 착한 사람일 리가 없지 않은가?

“진짜야?”

여도준은 허이서의 귀를 깨물었고 허이서는 아파서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녀는 몸을 잔뜩 움츠리면서 저도 모르게 그의 옷을 꽉 쥐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송은호는 안쪽으로 두어 걸음 걸었다. 여도준이 턱에 힘을 풀자 허이서는 몸을 웅크리며 여도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허이서는 여도준에게 완전히 가려졌고 욕실 안은 수증기로 가득한 상태였다.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말했다.

“누가 들어오래?”

송은호는 여자를 보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본론만 얘기할게. 약 주면 바로 떠날 거야. 나도 널 방해할 생각은 없어.”

여도준은 허이서의 목덜미를 감쌌고,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옷깃 속을 파고들었다.

“너 그 여자에게 진심인가 보네.”

허이서는 여도준의 품 안에서 몸을 흠칫 떨었다. 송은호가 대답하기도 전에 여도준이 말을 이어갔다.

“약은 못 줘. 아직 출시하지 않았으니까. 문제가 생기면 네가 책임질 거야?”

여도준의 목소리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송은호. 그 여자는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여자야. 그런데 너는?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

송은호는 그의 말에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뭔 소리야?”

“만약 그 약이 쓸모가 없다면, 또는 그 여자 동생이 그 약을 먹고 죽는다면 그 여자는 누굴 미워할까?”

허이서는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했다. 수증기로 가득 차서 온도 또한 서서히 올라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 말이 송은호를 흔들 수 없을 거로 생각했다. 송은호는 그 약이 허이서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한참 뒤, 밖에서 더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여도준은 사람 심리를 잘 파악했고 또 그만큼 무자비했다.

“그래도 받고 싶어?”

관련 챕터

최신 챕터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