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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허이서는 두 무릎을 꿇은 채 허승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패닉에 빠진 허이서는 허승아를 일으키려고 했다.

“승아야, 나... 나 놀라게 하지 마.”

허승아는 온몸에 경련을 일으켰고 레스토랑 안의 손님들은 그 모습을 먹고 겁을 먹었다.

허이서는 허승아를 꼭 끌어안았고 허승아는 어렴풋이 말했다.

“언니, 살려줘... 다른 사람들이... 이런 내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해줘.”

허승아가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허이서는 옆에서 멍하니 서 있는 직원을 바라보았다.

“구급차 불러주세요. 어서요.”

그들의 곁으로 남녀 한 쌍이 지나갈 때, 허승아는 더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면서 눈을 뒤집으며 입에 흰 거품을 물었다.

여자는 혐오스럽다는 듯 코와 입을 막았다.

“뭐야, 역겹게.”

허이서는 서둘러 겉옷을 벗어서 허승아의 얼굴을 가려주려고 했다.

이때 남자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혀 깨물지 않게 신경 써.”

여도준이 말을 마치자마자 허승아의 치아가 주체할 수 없이 힘껏 맞물리는 게 보였고, 허이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뻗었다.

순간 날카로운 통중과 함께 허이서의 살갗이 찢어졌다. 허승아는 허이서의 손가락을 힘껏 깨물었고 허이서는 통증 때문에 잠깐 눈앞이 아찔했지만 그럼에도 서둘러 허승아를 꼭 끌어안았다.

“승아야, 괜찮아. 금방 지나갈 거야.”

두 자매는 한 명은 누워있고 한 명은 무릎을 꿇은 채로 한껏 웅크리고 있었다.

구차하고 무력하게, 절망적인 모습으로 말이다.

가만히 앉아 있는 여도준은 빛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차갑고도 고귀해 보였다.

식욕이 사라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벗어나려고 했는데 허이서가 그 모습을 보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여도준 씨, 제발, 제발 약 좀 주시면 안 될까요?”

허이서의 시야에서는 남자의 눈가와 미간을 스치는 한기만이 보였다.

“허이서, 약자라고 해서 모든 행동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야.”

애원하는 방법이 먹혔다면 동운 제약 앞에는 사람들이 줄지어서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허승아가 구급차에 탔을 때 그녀의 곁에는 언니 허이서뿐이었다.

병원에 도착한 송은호는 병실 앞에 앉아 있는 허이서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빠르게 다가갔다.

“이서야.”

넋이 나간 허이서는 송은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송은호가 병실 문을 열려고 하자 허이서가 만류했다.

“승아 지금 자고 있어.”

“들어가서 한 번 볼게.”

“그게 무슨 쓸모가 있는데?”

허이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송은호는 그제야 빨개진 그녀의 눈시울을 발견했다. 운 게 분명했다.

“의사 선생님은 심장 질환 때문에 발작이 일어났대. 특효약을 구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거라고 했어...”

허이서는 지푸라기라도 잡은 사람처럼 송은호의 손목을 힘껏 쥐었다.

“너 여도준 씨랑 친구라며. 약 구할 수 있는 거 확실하지?”

허이서도 정상적인 연애를 해보고 싶었고, 호감이 있는 사람과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잔혹한 현실은 그녀의 바람을 무참히 부서뜨렸다.

송은호는 허이서를 품 안에 꼭 안았다.

“내가 방법을 생각해 볼게.”

“하지만 내 동생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해.”

허이서는 힘주어 그를 밀쳤다.

“승아는 언제든 죽을 수 있다고.”

송은호는 짜증 난 표정으로 서성거렸다.

“내가 인맥을 다 동원해 봤는데 여도준이...”

송은호 또한 미칠 것 같았고 차라리 직접 빼앗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송은호는 결국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안 되면 강하게 밀어붙여야지.”

“그게 무슨 말이야?”

송은호는 심각해진 허이서의 표정을 보고 그녀를 달랬다.

“남자 간의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마.”

허이서는 그날 밤 허승아를 데리고 퇴원했다. 엄마가 걱정할까 봐 두 사람은 집에 돌아온 뒤 오늘 있었던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주일 뒤 허이서는 여전히 약을 구하지 못했다.

조금이나마 생겼던 희망은 그렇게 점차 사라졌고 남은 것은 오직 절망뿐이었다.

앰버카운티.

허이서는 입구에 한 시간가량 서 있었다. 경호원들은 참지 못하고 그녀를 힐끔댔지만 그녀를 쫓아내지는 않았다.

비서 강태윤이 아래층을 힐끗 보았다.

“도련님, 안으로 모셔 올까요?”

“자기도 다리가 있는데 알아서 하게 놔둬.”

허이서는 발밑에 깔린 풀들을 지그시 밟았다. 그러다 발을 살짝 들면 풀이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고 그러면 또다시 풀을 밟았다.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하던 허이서는 결국 마음을 먹고 경호원을 향해 말했다.

“여도준 씨를 만나고 싶어요.”

잠시 뒤 강태윤이 직접 허이서를 위층으로 안내했다.

3층에는 휴게실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허이서는 길쭉한 인영이 당구 테이블에 기대있는 걸 보았다.

여도준은 당구봉을 들고 흩어진 공들이 놓인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련님, 허이서 씨께서 오셨습니다.”

여도준은 검은색의 깊게 파인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얼마나 많이 파였는지 가슴골이 은은히 보일 정도였다.

허이서는 휴대전화를 꼭 쥐고 앞으로 두어 걸음 나서서 여도준의 곁에 섰다.

“여도준 씨와 거래를 하고 싶어요.”

여도준의 옷깃은 흐트러져 있었다. 관능적인 목소리와 함께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마음먹은 거야?”

허이서에게는 패가 많지 않았고, 어쩌면 이번이 끝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했다.

허이서는 갤러리를 클릭해 그중 사진 한 장을 골라 여도준에게 보여줬다.

허이서의 손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여도준은 그 모습을 보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떨면 내가 어떻게 봐?”

허이서는 여도준의 안색을 살폈다. 여도준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처럼 버럭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갑자기 샘솟는 불안감 때문에 허이서는 평정심을 잃었고 실수라도 할까 봐 두려워졌다.

“직업이 뭐야?”

여도준이 갑자기 물었다.

“기자요.”

“어쩐지 사진이 선명하게 잘 나왔더라.”

여도준은 당구봉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더니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으며 몸을 살짝 앞으로 숙였다.

“이 사진과 약을 맞바꾸겠다고?”

“네.”

“욕심이 많네. 욕심이 과하면 큰일 나는 법인데.”

여도준은 실눈을 뜨면서 무감정한 눈빛으로 허이서를 바라봤다. 그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사진 속에서는 그냥 끌어안고만 있을 뿐이지 다른 스킨십은 하지 않았어.”

“여하윤 씨 얼굴인 것만 확실하다면 이건 엄청난 기삿거리가 될 거예요. 여하윤 씨는 여도준 씨 친누나이며 유부녀죠.”

여도준은 맞은편으로 걸어가서 당구봉으로 공을 조준했다. 상의 옷깃이 너무 벌어져서 그의 한쪽 쇄골이 드러났다.

“누나랑 매형은 각자의 인생을 즐기는 것뿐이야.”

그의 말에 허이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여도준 씨, 이 사진들로 약을 바꾼다고 해서 손해 볼 건 없어요.”

쿵.

흩어진 공들이 빠른 속도로 굴렀고 여도준은 허이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허이서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연신 뒷걸음질 쳤고 여도준은 손을 뻗어 그녀의 목덜미를 잡았다.

“내가 무서워?”

팔에 별로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허이서는 앞에 있는 테이블에 심하게 부딪혔다.

“아파, 아파요. 여도준 씨, 화내지 마세요.”

여도준은 밑에 깔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부러 엄살 부리는 거야?”

여도준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그는 허이서의 다리 사이를 파고 들면서 몸을 밀착시키더니 손을 뻗어 허이서의 휴대전화를 빼앗으려고 했다.

허이서는 휴대전화를 꽉 쥐었다.

“원본은 따로 있어요. 삭제해 봤자 소용없어요.”

여도준은 코웃음을 치더니 오른손을 허이서의 등에 내려놓고 그녀의 휴대전화를 빼앗았다.

여하윤의 사진은 겨우 두 장뿐이었다. 여도준은 사진을 넘겨보다가 젊은 여자를 보았다.

얼굴은 볼살 하나 없이 야위었고 뼈만 앙상한 모습에, 침대 옆에는 인형 하나가 놓여 있었고 벽에는 허이서가 직접 접어준 종이학들이 가득했다.

여도준은 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종이학들을 본 순간 그의 눈빛이 살짝 누그러졌다.

그는 허이서에게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정말로 나랑 거래를 하고 싶다면 조건을 바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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