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이서는 여도준이 뒤로 물러난 걸 발견하고는 일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여도준이 손을 들어 그녀의 허리를 살짝 쳤다.“얌전히 굴어.”허이서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엎드렸다.여도준은 당구봉을 쥐고 옆으로 걸어갔다. 그가 허리를 숙였을 때 허이서는 허리까지 이어지는 그의 단단한 근육을 보게 되었다.허이서는 포기할 수 없었기에 끝까지 시도해 볼 생각이었다.“여씨 일가와 조씨 일가는 정략결혼을 했죠. 이 사진을 사람들이 보게 된다면 여도준 씨는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남들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을까요?”여도준이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에 허이서는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그가 힘을 주어 치자 붉은색 공이 빠르게 굴러왔다.만약 그 공이 허이서의 머리와 부딪힌다면 분명 아플 것이다. 허이서는 뼛속부터 치밀어 오르는 치욕감에 주먹을 꽉 쥐었다.공은 허이서의 가슴에 부딪혔고, 여도준은 웃음을 터뜨렸다.“보기 좋네.”여도준은 빨갛게 된 허이서의 얼굴을 바라보며 앞으로 몇 걸음 걸었다.그는 차가운 표정에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협박하는 거야?”“여도준 씨, 겨우 약일 뿐이에요. 약이 출시되면 다시는 여도준 씨를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그러나 여도준은 줄 생각이 없었다.“사진 퍼뜨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된다면 조씨 일가가 절대 널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허이서는 몸을 일으키며 깊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전 최악의 상황까지 각오했어요.”“그러면서 날 찾아온 거야?”여도준은 날카롭고 냉담했다. 그의 진득한 시선에 허이서는 입술뿐만 아니라 얼굴까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졌다.허이서는 힘겹게 미소를 지었지만 보기 좋은 미소는 아니었다.“시도조차 해보지 않는다면 동생이 죽는 걸 그냥 지켜봐야 하니까요.”허이서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그러나 여도준은 몹시 냉정했다.다른 사람의 생사 문제는 그의 차가운 심장을 녹일 수가 없었다.“내가 원하는 건 너야. 얼마나 간단해? 널 주면 네 여동생을 살려줄게.”여
허이서는 치아가 덜덜 떨렸다. 이를 악물었지만 떨림이 잦아들기는커녕 더욱 심해질 뿐이었다.송은호는 난감하다는 어투로 말했다.“난 이서랑 이미 약속했어. 나보고 이서에게 어떻게 설명하라는 거야?”여도준의 목소리가 정수리 위에서 들려왔다.“내가 주지 않았다고 해.”송은호는 잠깐 고민했다. 만약 허승아가 약을 먹고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허이서가 과연 그를 만나줄까?구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공범’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발소리가 점점 멀어졌고 곧 송은호는 방에서 나갔다.강태윤은 차분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제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허이서는 송은호가 이렇게 떠날 줄은 몰랐다.허이서는 비틀거리면서 뒷걸음질 치다가 욕조에 다리가 부딪혀서 욕조 안에 풍덩 빠지게 되었다.넘쳐흐른 물이 여도준의 바짓자락을 적셨고 허이서는 물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죄송해요.”허이서의 눈시울이 조금 빨갰다. 여도준은 젖은 바지를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물이 아주 뜨거웠는데 허이서의 체온이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허이서는 서둘러 욕조 밖으로 빠져나갔다.“여도준 씨, 오늘 약을 주시면 안 될까요? 한 팩이라도 좋아요.”허이서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다.“난 송은호에게 기회를 줬어. 너도 봤잖아.”허이서는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말했다.“저에게도 기회를 주세요. 제 동생을 구해주신다면 평생 고마워할게요.”여도준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로 그녀를 바라봤다.“강하게 밀어붙여도 소용없으니까 이번에는 가여운 척하는 거야?”허이서는 아주 처연해 보였다. 여도준은 허이서의 턱을 한 손으로 쥐고 그녀를 잡아당겼고, 손가락으로 허이서의 입술을 쓱 만졌다.허이서는 그의 눈빛에서 일렁이는 욕정을 보고 그의 손을 힘껏 쳐냈다.여도준은 눈을 감고 욕조에 기댔다.“거절도 한두 번이어야 재밌지. 계속 거절하면 재미없어.”여도준이 그녀에게 흥미를 잃는다면 가지고 노는 건 둘째 치고 만나는 것조차 성가셔 할 것이다.허이서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마지막으로
허이서는 손을 거두어들였다.송은호는 흥분하여 앞으로 나섰다.“지금 이곳에서 물어봐. 내가 거짓말을 한 건지, 아니면 여도준이 약을 주지 않으려고 했는지 말이야.”송은호는 어젯밤 그와 여도준이 나눈 대화를 허이서가 들었다는 걸 꿈도 꾸지 못했다.허이서가 떠나려고 하자 송은호가 그녀를 붙잡았다.“물어보라니까.”허이서의 표정이 굳었다.“그만해.”송은호는 어렸을 때부터 오냐오냐 자랐기에 허이서를 짝사랑하는 것에만 참을성이 있었다.그는 순간 짜증을 냈다.“난 누구보다도 네 동생을 구하고 싶어. 네 동생이면 내 동생이야.”’공허한 눈빛으로 여도준을 바라본 허이서는 여도준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했다.여도준은 메뉴판을 닫았다.“할 얘기 있으면 앉아서 하자고.”송은호는 허이서의 어깨를 내리눌렀고 두 사람은 여도준의 맞은편에 앉게 되었다.“여도준, 질문 하나 할게. 요즘 내가 계속 뻔뻔하게 널 찾아가서 약을 달라고 했었지?”송은호는 자신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걸 증명하기에 급급했다.여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래. 네가 좀 뻔뻔하긴 하지.”허이서는 고개를 들지 않아도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도준에게서 느껴지는 압박감을 느낄 수 있었다.그러다 여도준이 갑자기 물었다.“약 효과 있었어?”허이서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옷을 쥐어뜯었고 송은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누구랑 물어보는 거야?”여도준은 허이서를 향해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송은호의 시선이 허이서에게 고정되었다.“약은 어디서 구한 거야?”허이서는 애가 탔다. 여도준은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모습을 즐겼고 허이서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여도준을 빤히 바라보았다.마치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듯이, 그냥 솔직하게 말해버리겠다는 듯이 말이다.여도준은 그녀의 속셈을 꿰뚫은 것처럼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예전에 그 약들 효과 있었냐고.”송은호는 눈을 흘겼다.“효과 있었으면 너한테 이렇게 부탁했겠어?”여도준은 아주 작게 웃음을 터뜨린
굳이 허이서여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는데 그때마다 거절했으니 인내심도 점점 닳아가고 있었다.허승아는 며칠 연속 약을 먹게 되자 상태가 점점 좋아졌고 심지어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산책도 할 수 있게 되었다.열흘째가 되자 약이 동났다.허이서는 허승아를 재운 뒤 몰래 집을 나섰다.그녀는 앰버카운티에 도착해서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집에서 여동생이 발작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그곳에 가서 무릎이라고 꿇고 있는 편이 나았다.그녀의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기에 허이서는 계단을 따라서 내려갔다.남자 한 명이 위층으로 올라오면서 그녀와 지나쳤다. 허이서는 그의 손에 아주 무거워 보이는 통이 하나 들려있는 걸 보았다.허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1층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허이서는 곧바로 걸음을 멈췄고 갑자기 불안감이 치솟았다.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위층으로 달려갔다.“승아야, 문... 열면 안 돼.”그러나 한발 늦었다. 허승아의 비명을 들은 허이서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짙은 피비린내와 함께 허승아의 몸을 적셨고 허이서는 헐레벌떡 집 앞에 도착했다.남자는 허승아를 가리키며 흉악한 표정으로 욕설을 내뱉었다.“이건 네 아버지가 진 빚이야. 네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으면 너희도 편히 못 살 줄 알아.”허이서는 남자의 팔을 잡아당겼고 허승아는 코와 입에서 모두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걸 느꼈다.“오늘은 개 피지만 다음에는 무슨 피일지 나도 장담 못 해!”허이서는 순간 멈칫했다. 허승아는 집 안을 향해 외쳤다.“두부야!”그녀가 키우던 강아지는 오늘 오후 집에 없었다. 허승아는 두부가 나가서 놀고 있는 줄 알았다.허승아는 미친 듯이 두부의 이름을 불러대면서 입안을 적신 피를 삼켰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힘껏 부여잡았다.남자는 그 틈에 허이서를 밀쳤다.“이건 너희 업보야.”허이서는 부랴부랴 집 안으로 들어가서 쓰러지려는 허승아를 부축했다.“언니...”
허이서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동생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었기에 그녀는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여도준은 가운을 벗었고 겉으로 드러난 구릿빛 피부에서 강한 공격성이 느껴졌다.허이서는 위로 몸을 움직였다. 휴대전화 화면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엄마가 복도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허이서의 엄마는 강태윤을 바라보았다.“혹시... 우리 딸 보셨어요?”강태윤은 휴대전화를 쥐고 고개를 저었다.“아뇨, 못 봤습니다.”“집중 좀 해.”여도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전화 너머에서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강태윤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허이서의 엄마에게서 멀어졌다.강태윤은 지금 이런 상황이 몹시 난처했다. 그러다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휴대전화가 바닥에 떨어졌다.허이서의 엄마는 그를 알지 못했지만 그를 은인으로 생각했다. 강태윤이 허리를 숙이기도 전에 허이서의 엄마가 빠르게 다가와서 대신 휴대전화를 주웠다.허이서는 긴장 때문에 몸도 뻣뻣해졌고 여도준이 그런 그녀를 다그쳤다.허이서의 엄마는 본능적으로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았지만 잘 보이지는 않았다. 카메라가 사람 정수리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전화를 끊는 걸 잊은 건 아니세요?”강태윤은 순간 얼굴이 창백해 지면서 전화를 건네받았다. 그러나 감히 전화를 끊을 수가 없었다.허이서의 엄마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허이서는 손을 뻗어 통화를 끊으려고 했다. 두 사람은 잠깐 다퉜고 여도준은 티 나게 화를 냈다.“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보네.”“이렇게 하면 아무 느낌 없어요.”“그래? 어떻게 하면 느낌이 있는데?”여도준은 허이서의 손을 뿌리치더니 카메라로 허이서의 얼굴을 비췄다. 허이서는 상반신을 일으켜서 휴대전화를 빼앗느라 여도준이 자기 위에 있다는 걸 잊었다.허이서의 뒤통수가 여도준의 코를 강타했고 여도준은 통증 때문에 앓는 소리를 했다.“허이서!”여도준의 말투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허이서는 상황을 파악하고 눈치 빠르게 얌전히 엎드렸다.고개를 돌린 허이서는 여도준의 얼굴에 어린
허이서는 밤새 잠을 잘 자지 못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깐 눈을 붙였다. 남회시는 비가 자주 내려서 창밖에 축축한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갑자기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허이서는 화들짝 잠에서 깼다. 고개를 들자 여도준이 침대 위에 앉아서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 게 보였다.허이서는 침대 위에서 헐레벌떡 일어났다. 그가 입을 열려고 하자 허이서는 남자의 손목을 붙잡더니 다른 손으로 빠르게 그에게서 휴대전화를 빼앗았다.그녀의 새끼손가락 손톱 때문에 여도준의 얼굴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여도준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고 허이서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그러나 곧 벨 소리가 미친 듯이 울려댔다.그녀는 옆에 있던 이불을 끌어당기면서 휴대전화를 귀에 가져다 댔다.“여보세요, 엄마.”“너 어떻게 된 거야? 왜 밤새 돌아오지 않은 거야? 어딜 간 거야?”허이서는 아무렇게나 둘러댔다.“저 지금 밖에 있어요. 볼 일이 있었거든요.”“네 여동생이 지금 이 지경인데 외박할 마음이 드니? 너 같은 언니가 세상에 어디 있니?”여도준은 허이서가 아무 변명 하지 않고 조용히 시선을 내려뜨리는 걸 바라보았다.“알겠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녀가 덮고 있던 이불을 빼앗은 뒤 여도준은 손을 뻗어 허이서의 발목을 잡은 뒤 그녀를 확 끌어당겼다.허이서는 뼈가 말라서 발목이 여도준의 손목에 다 잡힐 정도였다. 왼쪽 다리가 자연스럽게 들리면서 다소 민망한 자세가 되자 허이서는 서둘러 미안한 듯 웃어 보였다.“얼굴은 괜찮아요?”“내 얼굴을 망치려는 거야?”조금 전 허이서는 여도준의 위로 엎어져서 그를 물어버릴 것 같았다.“제가 어떻게 감히 그러겠어요.”여도준은 손에 힘을 주었다. 허이서의 자세는 굉장히 보기 좋지 않았다. 그녀는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저 늦었어요.”여도준은 허이서를 침대로 끌어당긴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여도준은 소파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소파 위에서 약을 챙겼다.허이서가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옷을 줍고 있
두 사람은 비록 친구라고 하지만 여도준은 여러모로 송은호를 완전히 압도했다.안으로 들어가서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자기가 점 찍어둔 여자랑 잤다고 여도준에게 따지기라도 해야 할까?허이서의 말대로라면 그녀가 먼저 자자고 했을 것이다.송은호는 기가 죽은 얼굴로 말했다.“두고 봐. 넌 결코 꼴을 못 볼 거야.”송은호는 여도준과 대치하지 않고 휠체어를 타고 룸에서 나갔다.그가 조금 전 언급했던 것은 여도준의 금기어였기에 송은호는 더는 여도준의 심기를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여도준은 담배를 하나 다 태운 뒤 병풍 뒤에서 걸어 나오더니 말 한마디 없이 허이서를 지나쳐 나갔다.허이서는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갔고, 주차장에 도착해서 여도준은 그녀에게 차에 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허이서가 차 문을 열어 보았지만 문은 잠겨있었다.차가 아주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이서는 어쩔 수 없이 차의 옆에서 걸어야 했고 그렇게 한참을 걸어서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이때 여도준이 창문을 내렸다.“송은호 말이 맞아. 넌 확실히 뻔뻔해.”허이서는 지금 차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지금 절 탓하는 거예요?”“네 잠자리 스킬이 좋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널 향한 내 흥미가 언제까지 이어질 것 같아?”어쩌면 한두 번 더 자고 나면 질릴지도 몰랐다. 반대로 허이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진흙탕으로 끌어들였다.강태윤은 조수석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는 허이서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누구라도 그런 말을 들으면 상처를 받을 것이다.“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허이서는 여도준을 통해 높이 올라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해 의기양양했던 적이 없었다.“전 송은호와 확실히 연을 끊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하지만 송은호는 절대 포기하지 않고 날 괴롭히려고 하겠죠. 그래서 그냥 다 얘기한 거예요. 송은호는 여도준 씨를 감히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요. 앞으로 절 찾아오지 않겠죠.”허이서는 그렇게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녀의 그림자가 거리에 길게 늘어졌다.적
허이서는 감히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병상 옆에는 여러 장치가 있었고 조서희의 모습을 보니 잠든 것 같지도 않았다.송은호가 말한 산송장은 아마도 식물인간일 것이다.여도준은 허이서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입을 열었다.“밖에서 기다려.”“네.”병상은 흰색 커튼으로 가려져 있어서 마치 공주님의 방 같아 보였다. 여도준은 그녀를 진심으로 아끼는 듯했다.“가라니까?”허이서는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간 뒤 그녀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복도는 아주 썰렁하고 추웠다. 허이서는 그곳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렸지만 여도준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허이서는 굳게 닫힌 병실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녀는 여도준에게서 부드러운 눈빛을 보았다.차갑고 냉담한 여도준의 얼굴에 부드러운 표정이 드리워지니 아주 잘생겨 보였다.허이서는 왠지 모르게 조서희가 부러웠다. 조씨 일가는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서희가 정신을 차리고 별을 따달라고 한다면 여도준은 아마 그녀의 말대로 별을 따다 줄 것이다.허이서는 너무 추워서 눈이 뻑뻑해지기 시작했고 눈꺼풀도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다음 날 아침, 여도준은 일어났을 때도 조서희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등을 쓸었지만 조서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병실 안에 여도준의 세면도구가 갖춰져 있었기에 여도준은 그것으로 씻고 난 뒤 병실에서 나왔다.허이서는 어젯밤 너무 피곤해서 의자에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여도준은 그녀의 곁을 지나칠 때 잠깐 걸음을 멈췄다.그는 허이서를 발로 툭 찼고 허이서는 하마터면 의자 위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이제 가도 돼요?”허이서는 자신이 그곳에서 밤새워 기다렸다는 걸 알지 못했다.“누가 여기 남아있으라고 했어?”허이서는 정신만큼은 멀쩡했다.“여도준 씨가요. 밖에서 기다리라면서요.”여도준은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추위 때문에 창백하게 질린 허이서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가봐.”허이서는 여도준을 따라서 병원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