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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허이서는 검은색 벤틀리 안에 앉아서 가는 길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차는 앰버카운티 안으로 들어갔고 곧 대문 앞에 멈춰 섰다.

허이서는 시선을 들었다. 안으로 들어간다면 끝도 없는 심연이 펼쳐질 것이다. 그럼에도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여도준 씨, 그 약은 언제쯤 출시하나요?”

허이서는 여도준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침실로 들어간 여도준은 옷장 안에서 옷 한 벌을 꺼내 허이서에게 건넸다.

“샤워하고 나서 갈아입고 나와.”

허이서는 두 손을 등 뒤로 감췄다.

“아니...”

“뭐가 아니라는 거야?”

여도준은 허이서를 꿰뚫어 보았다.

“송은호랑 잘 돼가나 보네.”

“저희는 시작도 하지 않았어요.”

“그것참 아쉽겠네.”

여도준의 말투에서 아쉬움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허이서에게 옷을 집어 던졌다.

“역겨운 냄새 나지 않게 깨끗하게 씻고 나와.”

조금 전 룸 안에서 다들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의 말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허이서는 몸을 돌려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도준이 그녀에게 건넨 옷은 짧은 편이었다. 옷의 주인은 체구가 꽤 작았던 것 같았다.

허이서는 서둘러 샤워하고 난 뒤 욕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여도준은 흰색 가운을 입고 소파 위에 앉아서 카드를 손에 들고 있었고, 손가락 두 개로 카드 뭉치를 쥐고 고개를 숙인 채 게임에 열중했다.

허이서는 입고 있던 옷을 아래로 잡아당기면서 몇 걸음 만에 여도준의 곁에 섰다.

“앉아.”

치마도 짧았던 터라 허이서는 자리에 앉은 뒤 손을 허벅지 위에 올렸다.

“카드게임 할 줄 알아?”

남자가 물었다.

“아뇨. 잘 몰라요.”

여도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들고 있던 카드들을 테이블 위에 내던지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동생 심장이 안 좋아?”

“네.”

여도준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는 연민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여동생을 위해서 날 찾아오다니, 눈물 나는 가족애네.”

허이서는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가까운 거리에서 여도준의 시선은 거리낄 것 없다는 듯 거침없이 그녀의 얼굴에서부터 시작해 아래쪽으로 향했다.

허이서는 몸매가 좋았고 그건 여도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허이서는 꽤 매력적이라서 남자들이 밤 상대로 가장 원하는 스타일이었다.

“카드 섞어.”

여도준은 몸을 뒤로 젖혔다.

허이서가 입고 있는 상의는 워낙 짧았던 터라 손을 뻗으려니 옷이 위로 말려 올라가면서 가녀린 허리가 드러났다.

여도준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매만졌다.

“부드럽고 매끈하네.”

허이서는 서둘러 옷을 아래로 잡아당기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도준이 갑자기 날을 세우며 말했다.

“만지는 것도 안 돼? 난 강요하는 거에 관심 없으니까 나가.”

“그게 아니라...”

“나가라고.”

여도준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허이서는 그냥 이렇게 나갈 수 없었다.

“신약을 개발한 목적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잖아요. 제 여동생은 수술조차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에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요.”

여도준의 눈빛은 몹시 날카로웠다.

“그게 내 탓이야?”

허이서는 말문이 턱 막혔다. 여도준은 손가락 두 개로 카드 한 장을 뽑더니 카드 모서리로 허이서의 뺨을 쓸어내렸고 카드는 곧 허이서의 입가에 멈췄다.

“입 열어.”

허이서는 여도준의 손목을 쳐냈다. 허이서로서는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년 전 그날 밤, 그녀는 아무런 경험도 없었다.

여도준은 들고 있던 카드로 침대를 가리켰다.

“여동생 구하고 싶지? 보심단은 얼마든지 줄 수 있어.”

하지만 그 대가는...

허이서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당연히 대가가 무엇인지 알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여도준 씨는 송은호 씨 친구잖아요.”

그가 자비를 베풀어주길 바랐던 걸까?

여도준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걔 여자를 가지고 놀지 못할 건 없지.”

허이서는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안 돼요.”

여도준은 짜증이 난 듯 손가락으로 미간을 두 번 주물렀다.

“너 똑똑하잖아. 차에 탔을 때 이미 내가 뭘 원하는지 알았을 텐데.”

“하지만 전 여도준 씨가 마음 약해질 거로 생각했어요.”

“내가 왜?”

허이서는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여도준 씨의 신약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여도준 씨에게 분명 자비로운 마음이 있을 거로 생각했어요.”

여도준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우스웠다.

차라리 그에게서 후광이 비친다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여도준은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나가.”

허이서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 약은...”

여도준은 테이블 위에 카드를 던졌고 더는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허이서는 당장 무릎을 꿇고 애원하고 싶은 심장이었다. 그러나 여도준은 뼛속까지 차가운 사람이라 오히려 더 큰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허이서가 몸을 돌리고 두어 걸음 내디뎠을 때 여도준이 그녀를 불렀다.

“허이서.”

허이서는 약간의 기대를 품고 걸음을 멈췄다.

“잘 생각해.”

위협적인 단어는 하나도 없었으나, 그 말은 허이서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허이서는 황급히 도망쳐 나왔다. 앰버카운티에서 뛰쳐나왔을 때 서늘한 밤바람 때문에 소름이 돋았다.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송은호는 본인이 여도준과 친구라고 했었다.

허이서는 더는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았으나 여도준이 원하는 걸 줄 수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허이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오래된 느낌이 가득했고 벽 페인트도 여러 군데가 벗겨진 상태였다.

“언니야?”

방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이서는 겉옷을 하나 걸친 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여동생은 창문 옆 의자에 구부정하게 기대고 앉아 있었다.

“왔어?”

“엄마는 또 야근 나가신 거야?”

“응.”

“약은 먹었어?”

허승아는 고개를 저을 힘조차 없었다.

“먹고 싶지 않아. 너무 써. 어차피 먹어도 소용없고...”

허이서는 서랍을 열어 약병을 꺼낸 뒤 약 두 알을 허승아에게 건넸다.

“얼른 먹어.”

동생의 병은 완치할 방법도 없었고, 수술 얘기를 꺼내는 의사도 없었다.

“언니, 나 어젯밤에 엄청 졸려서 힘들었거든. 누워보려고 해봤는데 숨을 쉴 수가 없었어...”

허이서는 허승아를 껴안았다. 품속에 안긴 허승아는 뼈만 앙상했다.

“승아야, 약 먹어. 약 먹으면 나을 거야.”

허승아는 허이서의 말을 잘 들었다. 그녀는 물과 함께 약을 삼켰다.

그런데 너무 급하게 삼키는 바람에 물과 약 모두 토해내고 말았다.

허이서는 마음 아픈 얼굴로 허승아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먹지 말자. 약 안 먹어도 돼. 승아야, 나랑 내일 같이 스테이크 먹으러 가자.”

“스테이크 맛있어?”

허이서는 마음이 아렸다. 허이서의 병 때문에 그들은 형편이 좋지 못했고, 그때 그 1억이 아니었다면 그들은 지금까지 버티지도 못했을 것이다.

“당연하지. 오늘은 이만 자고 내일 언니랑 같이 가자.”

허이서는 그날 밤 잘 자지 못했고, 잠깐 눈을 붙여도 악몽 때문에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날이 밝았을 때,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여동생이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까 봐 무서웠다.

엄마는 점심쯤에야 돌아왔는데 며칠간 이어진 밤샘 근무로 많이 지친 얼굴이었다.

허이서는 택시를 부른 뒤 허승아를 부축하며 외출했다.

허이서는 특별히 고급 레스토랑을 선택했는데 자리에 앉은 허승아는 안절부절못했다.

레스토랑 안에서는 피아노 연주자가 라이브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너무도 감미로운 음악이었지만 두 자매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테이블 위에는 연노랑의 장미꽃이 비스듬히 꽂혀 있었다. 허승아는 초조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언니, 우리 다른 데 갈까?”

“여기 마음에 안 들어? 나 주문 마쳤는데.”

허이서는 직원에게 메뉴판을 건네면서 허승아를 향해 미소 지어 보였다.

“나 여기 할인 쿠폰 있어서 그렇게 비싸지 않을 거야.”

문가 쪽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소리를 따라가 본 허이서는 누군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들어오는 걸 보았다.

허이서는 서둘러 고개를 숙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듯한 발소리에 허이서는 테이블 커버를 꽉 쥐었다. 곁눈질로 기다란 두 다리가 곁에 멈춰 서는 게 보였다.

여도준이 멈춰 섰다.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는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여자를 매료시킬 수 있었다.

허승아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여도준을 바라보았다.

“언니, 혹시... 아는 사람이야?”

이번에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도준 씨, 우연이네요.’

그 말을 내뱉기도 전에 여도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사람들도 들어오게 내버려둔 거야?”

그렇게 말한 뒤 여도준은 자리를 떴다.

허이서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언니?”

허이서는 상관하지 말라고, 그냥 미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여도준은 그들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아 있었고, 또 신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의 심기를 건드릴 수가 없었다.

주문했던 요리가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허이서는 허승아를 위해 스테이크를 잘라줬다.

“넌 술 마시면 안 돼. 네가 마실 음료수 따로 시켰어.”

맞은편에서 유리잔이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허이서는 곧 붉은색 음료수가 바닥에 쏟아지는 걸 보았다.

마치 피가 번지듯 빨간색이 서서히 퍼져 나갔다.

허승아가 무엇을 봤는지는 그녀로서는 알 수 없었다. 허승아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얼굴이 종잇장처럼 창백해졌다.

“승아야?”

허이서는 서둘러 그녀의 손을 잡았다.

“왜 그래?”

허승아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곧 몸이 한쪽으로 기울면서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허승아가 테이블 커버를 쥐고 있었기에 스테이크와 음료 등 음식들이 줄줄이 쏟아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그 소리를 들은 여도준은 그저 시선을 살짝 들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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