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6화

허이서는 손을 거두어들였다.

송은호는 흥분하여 앞으로 나섰다.

“지금 이곳에서 물어봐. 내가 거짓말을 한 건지, 아니면 여도준이 약을 주지 않으려고 했는지 말이야.”

송은호는 어젯밤 그와 여도준이 나눈 대화를 허이서가 들었다는 걸 꿈도 꾸지 못했다.

허이서가 떠나려고 하자 송은호가 그녀를 붙잡았다.

“물어보라니까.”

허이서의 표정이 굳었다.

“그만해.”

송은호는 어렸을 때부터 오냐오냐 자랐기에 허이서를 짝사랑하는 것에만 참을성이 있었다.

그는 순간 짜증을 냈다.

“난 누구보다도 네 동생을 구하고 싶어. 네 동생이면 내 동생이야.”’

공허한 눈빛으로 여도준을 바라본 허이서는 여도준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했다.

여도준은 메뉴판을 닫았다.

“할 얘기 있으면 앉아서 하자고.”

송은호는 허이서의 어깨를 내리눌렀고 두 사람은 여도준의 맞은편에 앉게 되었다.

“여도준, 질문 하나 할게. 요즘 내가 계속 뻔뻔하게 널 찾아가서 약을 달라고 했었지?”

송은호는 자신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걸 증명하기에 급급했다.

여도준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래. 네가 좀 뻔뻔하긴 하지.”

허이서는 고개를 들지 않아도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도준에게서 느껴지는 압박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여도준이 갑자기 물었다.

“약 효과 있었어?”

허이서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옷을 쥐어뜯었고 송은호는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누구랑 물어보는 거야?”

여도준은 허이서를 향해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송은호의 시선이 허이서에게 고정되었다.

“약은 어디서 구한 거야?”

허이서는 애가 탔다. 여도준은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모습을 즐겼고 허이서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여도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듯이, 그냥 솔직하게 말해버리겠다는 듯이 말이다.

여도준은 그녀의 속셈을 꿰뚫은 것처럼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예전에 그 약들 효과 있었냐고.”

송은호는 눈을 흘겼다.

“효과 있었으면 너한테 이렇게 부탁했겠어?”

여도준은 아주 작게 웃음을 터뜨린 것 같았다.

“이 여자를 엄청 돕고 싶나 봐?”

“당연하지. 앞으로 내 아내가 될 사람인데.”

여도준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내 손님 곧 도착할 텐데 같이 식사나 하자.”

허이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송은호가 그녀를 붙잡았다.

“왜 가려고 해? 어쩌면 잠시 뒤에 약을 준다고 할지도 모르잖아?”

그 말을 하는 사이 여도준의 손님이 도착했다.

고개를 든 허이서는 상대방의 얼굴을 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배유나는 허이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낯이 좀 익네요.”

“그래요? 어디서 본 적 있어요?”

여도준이 물었다.

배유나는 허이서를 보다가 여도준을 바라보았다.

1년 전 그날 밤, 허이서는 배유나와 함께 갔었다.

허이서에게 있어서는 지옥에 발을 들인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허이서는 호흡이 가빠졌고, 송은호는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헛소리하지 말아요. 내 여자 친구는 깨끗해요!”

“어머, 은호 씨. 전 그냥 낯이 익다고 했을 뿐이에요. 깨끗하지 않다고 한 적은 없어요.”

허이서는 당장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녀는 여도준이 거리낌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의 시선을 마치 날카로운 갈고리가 되어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을 찢을 듯했다.

배유나는 고개를 돌려 여도준을 바라보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사실 전 그동안 여자들을 수도 없이 봐왔었죠. 그중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던 건 1년 전 그 여자였어요.”

허이서는 순간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배유나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여도준 씨, 기억하세요?”

여도준은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하죠. 잊었을 리가.”

“어땠어요?”

“부드럽고 향긋한 게 최상이었죠.”

“하하하.”

배유나의 웃음소리가 허이서에게는 더없이 날카롭게 들렸다.

송은호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손을 들어 허이서의 두 귀를 막았다.

그는 곧바로 허이서의 귀에 대고 말했다.

“난 여도준이랑은 달라. 난 좋은 남자야. 그리고 여도준이 말한 여자들은 전부 천박한 여자들이고.”

허이서는 입술이 창백해졌고 표정 또한 굳었다.

천박하다니.

맞는 말이었다.

허이서는 송은호의 손을 밀어냈다. 그녀는 주제도 모르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연애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배유나는 허이서의 표정을 보고 말했다.

“은호 씨, 그런 말씀은 좋지 않아요. 사람들이라면 저마다 고충이 있는 법이잖아요.”

“됐어요.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오염되는 기분이네요.”

허이서는 찻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하마터면 눈물이 쏟아질 뻔했는데 애써 삼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죄송해요. 잠깐 화장실에 가봐야겠어요.”

허이서는 빠르게 걸어서 조금 전 봐뒀던 화장실로 향했다. 그런데 이때 여도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허이서는 잠깐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고 곧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 지금 있는데 줄까?”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여도준은 약 하나를 송은호의 앞에 내밀었다.

“허이서 씨 꽤 급해 보이던데.”

송은호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

“이서 동생... 오래 살 것 같지 않아.”

“시도해 봐.”

여도준은 다리 위에 올려둔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통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누가 시도할 수 있겠어? 그러다가 죽으면 난 책임 못 져.”

송은호는 약을 여도준에게 던졌다.

“넌 그냥 못 준다고 잡아떼. 괜한 희망 주지 마.”

여도준은 허이서가 희망을 포기하지 못한 걸 알고 그녀의 마음을 사정없이 들쑤시려는 걸까?

전화를 끊은 뒤 허이서는 찬물로 세수했다.

허이서가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송은호는 서둘러 그녀를 위해 의자를 잡아당겼다.

“저녁 먹은 뒤에 같이 너희 동생 보러 가자...”

“됐어.”

허이서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앞으로는 나 찾아오지 마.”

“왜?”

“너랑 만나고 싶지 않아. 노력해 봤는데 널 좋아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 미안.”

송은호는 너무 초조한 나머지 자리에서 펄쩍 뛰고 싶었다.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넌 여러모로 훌륭해. 그래서 나도 노력해 봤어. 그런데 안 되더라.”

허이서의 차가운 말이 송은호를 상처 입혔다. 게다가 표정이 너무 차가웠던지라 여도준조차 그녀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었다.

송은호는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그의 친구 앞에서 말이다.

송은호는 버럭 화를 내면서 의자를 걷어찼다.

“그래. 그렇게 잘났으면 앞으로 절대 나한테 부탁하지 마.”

의자가 다리에 부딪힌 탓에 허이서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송은호가 떠나자 배유나는 더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

“허이서 씨, 그... 송은호 씨는 그 일 모르는 거죠?”

“알 필요 없어요. 이젠 아무 사이 아니니깐요.”

허이서는 옆에 놓인 가방을 들고 통증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일은 비밀로 해주신다고 저랑 약속하셨죠.”

배유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약속 지켰잖아요. 난 아무 말 안 했어요. 당사자는 이서 씨와 도준 씨지, 난 그저 이어주는 역할만 했잖아요.”

허이서가 떠난 뒤 배유나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도준 씨, 저 여자에게 신경을 꽤 많이 쓰시네요.”

“재미있으니까요.”

여도준의 눈동자에서 별다른 흥미는 보이지 않았다.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몸은 부드럽지만 성격은 아주 억척스러운 데가 있어요.”

여도준은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고, 라이터 하나가 나타나 그의 담배에 불을 붙여줬다.

“몰아붙일 생각은 없어요. 잠자리는 서로 원해서 할 때 재미있는 법이니까요.”

관련 챕터

최신 챕터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