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허이서여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는데 그때마다 거절했으니 인내심도 점점 닳아가고 있었다.허승아는 며칠 연속 약을 먹게 되자 상태가 점점 좋아졌고 심지어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산책도 할 수 있게 되었다.열흘째가 되자 약이 동났다.허이서는 허승아를 재운 뒤 몰래 집을 나섰다.그녀는 앰버카운티에 도착해서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집에서 여동생이 발작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그곳에 가서 무릎이라고 꿇고 있는 편이 나았다.그녀의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기에 허이서는 계단을 따라서 내려갔다.남자 한 명이 위층으로 올라오면서 그녀와 지나쳤다. 허이서는 그의 손에 아주 무거워 보이는 통이 하나 들려있는 걸 보았다.허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1층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허이서는 곧바로 걸음을 멈췄고 갑자기 불안감이 치솟았다.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위층으로 달려갔다.“승아야, 문... 열면 안 돼.”그러나 한발 늦었다. 허승아의 비명을 들은 허이서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짙은 피비린내와 함께 허승아의 몸을 적셨고 허이서는 헐레벌떡 집 앞에 도착했다.남자는 허승아를 가리키며 흉악한 표정으로 욕설을 내뱉었다.“이건 네 아버지가 진 빚이야. 네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으면 너희도 편히 못 살 줄 알아.”허이서는 남자의 팔을 잡아당겼고 허승아는 코와 입에서 모두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걸 느꼈다.“오늘은 개 피지만 다음에는 무슨 피일지 나도 장담 못 해!”허이서는 순간 멈칫했다. 허승아는 집 안을 향해 외쳤다.“두부야!”그녀가 키우던 강아지는 오늘 오후 집에 없었다. 허승아는 두부가 나가서 놀고 있는 줄 알았다.허승아는 미친 듯이 두부의 이름을 불러대면서 입안을 적신 피를 삼켰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힘껏 부여잡았다.남자는 그 틈에 허이서를 밀쳤다.“이건 너희 업보야.”허이서는 부랴부랴 집 안으로 들어가서 쓰러지려는 허승아를 부축했다.“언니...”
허이서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동생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었기에 그녀는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여도준은 가운을 벗었고 겉으로 드러난 구릿빛 피부에서 강한 공격성이 느껴졌다.허이서는 위로 몸을 움직였다. 휴대전화 화면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엄마가 복도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허이서의 엄마는 강태윤을 바라보았다.“혹시... 우리 딸 보셨어요?”강태윤은 휴대전화를 쥐고 고개를 저었다.“아뇨, 못 봤습니다.”“집중 좀 해.”여도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전화 너머에서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강태윤은 침을 꿀꺽 삼키면서 허이서의 엄마에게서 멀어졌다.강태윤은 지금 이런 상황이 몹시 난처했다. 그러다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휴대전화가 바닥에 떨어졌다.허이서의 엄마는 그를 알지 못했지만 그를 은인으로 생각했다. 강태윤이 허리를 숙이기도 전에 허이서의 엄마가 빠르게 다가와서 대신 휴대전화를 주웠다.허이서는 긴장 때문에 몸도 뻣뻣해졌고 여도준이 그런 그녀를 다그쳤다.허이서의 엄마는 본능적으로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았지만 잘 보이지는 않았다. 카메라가 사람 정수리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전화를 끊는 걸 잊은 건 아니세요?”강태윤은 순간 얼굴이 창백해 지면서 전화를 건네받았다. 그러나 감히 전화를 끊을 수가 없었다.허이서의 엄마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허이서는 손을 뻗어 통화를 끊으려고 했다. 두 사람은 잠깐 다퉜고 여도준은 티 나게 화를 냈다.“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보네.”“이렇게 하면 아무 느낌 없어요.”“그래? 어떻게 하면 느낌이 있는데?”여도준은 허이서의 손을 뿌리치더니 카메라로 허이서의 얼굴을 비췄다. 허이서는 상반신을 일으켜서 휴대전화를 빼앗느라 여도준이 자기 위에 있다는 걸 잊었다.허이서의 뒤통수가 여도준의 코를 강타했고 여도준은 통증 때문에 앓는 소리를 했다.“허이서!”여도준의 말투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허이서는 상황을 파악하고 눈치 빠르게 얌전히 엎드렸다.고개를 돌린 허이서는 여도준의 얼굴에 어린
허이서는 밤새 잠을 잘 자지 못하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깐 눈을 붙였다. 남회시는 비가 자주 내려서 창밖에 축축한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갑자기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허이서는 화들짝 잠에서 깼다. 고개를 들자 여도준이 침대 위에 앉아서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 게 보였다.허이서는 침대 위에서 헐레벌떡 일어났다. 그가 입을 열려고 하자 허이서는 남자의 손목을 붙잡더니 다른 손으로 빠르게 그에게서 휴대전화를 빼앗았다.그녀의 새끼손가락 손톱 때문에 여도준의 얼굴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여도준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고 허이서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그러나 곧 벨 소리가 미친 듯이 울려댔다.그녀는 옆에 있던 이불을 끌어당기면서 휴대전화를 귀에 가져다 댔다.“여보세요, 엄마.”“너 어떻게 된 거야? 왜 밤새 돌아오지 않은 거야? 어딜 간 거야?”허이서는 아무렇게나 둘러댔다.“저 지금 밖에 있어요. 볼 일이 있었거든요.”“네 여동생이 지금 이 지경인데 외박할 마음이 드니? 너 같은 언니가 세상에 어디 있니?”여도준은 허이서가 아무 변명 하지 않고 조용히 시선을 내려뜨리는 걸 바라보았다.“알겠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녀가 덮고 있던 이불을 빼앗은 뒤 여도준은 손을 뻗어 허이서의 발목을 잡은 뒤 그녀를 확 끌어당겼다.허이서는 뼈가 말라서 발목이 여도준의 손목에 다 잡힐 정도였다. 왼쪽 다리가 자연스럽게 들리면서 다소 민망한 자세가 되자 허이서는 서둘러 미안한 듯 웃어 보였다.“얼굴은 괜찮아요?”“내 얼굴을 망치려는 거야?”조금 전 허이서는 여도준의 위로 엎어져서 그를 물어버릴 것 같았다.“제가 어떻게 감히 그러겠어요.”여도준은 손에 힘을 주었다. 허이서의 자세는 굉장히 보기 좋지 않았다. 그녀는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저 늦었어요.”여도준은 허이서를 침대로 끌어당긴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여도준은 소파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소파 위에서 약을 챙겼다.허이서가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옷을 줍고 있
두 사람은 비록 친구라고 하지만 여도준은 여러모로 송은호를 완전히 압도했다.안으로 들어가서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자기가 점 찍어둔 여자랑 잤다고 여도준에게 따지기라도 해야 할까?허이서의 말대로라면 그녀가 먼저 자자고 했을 것이다.송은호는 기가 죽은 얼굴로 말했다.“두고 봐. 넌 결코 꼴을 못 볼 거야.”송은호는 여도준과 대치하지 않고 휠체어를 타고 룸에서 나갔다.그가 조금 전 언급했던 것은 여도준의 금기어였기에 송은호는 더는 여도준의 심기를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여도준은 담배를 하나 다 태운 뒤 병풍 뒤에서 걸어 나오더니 말 한마디 없이 허이서를 지나쳐 나갔다.허이서는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갔고, 주차장에 도착해서 여도준은 그녀에게 차에 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허이서가 차 문을 열어 보았지만 문은 잠겨있었다.차가 아주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이서는 어쩔 수 없이 차의 옆에서 걸어야 했고 그렇게 한참을 걸어서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이때 여도준이 창문을 내렸다.“송은호 말이 맞아. 넌 확실히 뻔뻔해.”허이서는 지금 차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지금 절 탓하는 거예요?”“네 잠자리 스킬이 좋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널 향한 내 흥미가 언제까지 이어질 것 같아?”어쩌면 한두 번 더 자고 나면 질릴지도 몰랐다. 반대로 허이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진흙탕으로 끌어들였다.강태윤은 조수석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는 허이서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누구라도 그런 말을 들으면 상처를 받을 것이다.“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허이서는 여도준을 통해 높이 올라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해 의기양양했던 적이 없었다.“전 송은호와 확실히 연을 끊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하지만 송은호는 절대 포기하지 않고 날 괴롭히려고 하겠죠. 그래서 그냥 다 얘기한 거예요. 송은호는 여도준 씨를 감히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요. 앞으로 절 찾아오지 않겠죠.”허이서는 그렇게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녀의 그림자가 거리에 길게 늘어졌다.적
허이서는 감히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병상 옆에는 여러 장치가 있었고 조서희의 모습을 보니 잠든 것 같지도 않았다.송은호가 말한 산송장은 아마도 식물인간일 것이다.여도준은 허이서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입을 열었다.“밖에서 기다려.”“네.”병상은 흰색 커튼으로 가려져 있어서 마치 공주님의 방 같아 보였다. 여도준은 그녀를 진심으로 아끼는 듯했다.“가라니까?”허이서는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간 뒤 그녀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복도는 아주 썰렁하고 추웠다. 허이서는 그곳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렸지만 여도준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허이서는 굳게 닫힌 병실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녀는 여도준에게서 부드러운 눈빛을 보았다.차갑고 냉담한 여도준의 얼굴에 부드러운 표정이 드리워지니 아주 잘생겨 보였다.허이서는 왠지 모르게 조서희가 부러웠다. 조씨 일가는 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서희가 정신을 차리고 별을 따달라고 한다면 여도준은 아마 그녀의 말대로 별을 따다 줄 것이다.허이서는 너무 추워서 눈이 뻑뻑해지기 시작했고 눈꺼풀도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다음 날 아침, 여도준은 일어났을 때도 조서희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등을 쓸었지만 조서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병실 안에 여도준의 세면도구가 갖춰져 있었기에 여도준은 그것으로 씻고 난 뒤 병실에서 나왔다.허이서는 어젯밤 너무 피곤해서 의자에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여도준은 그녀의 곁을 지나칠 때 잠깐 걸음을 멈췄다.그는 허이서를 발로 툭 찼고 허이서는 하마터면 의자 위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이제 가도 돼요?”허이서는 자신이 그곳에서 밤새워 기다렸다는 걸 알지 못했다.“누가 여기 남아있으라고 했어?”허이서는 정신만큼은 멀쩡했다.“여도준 씨가요. 밖에서 기다리라면서요.”여도준은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추위 때문에 창백하게 질린 허이서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가봐.”허이서는 여도준을 따라서 병원 식
허이서는 감히 여도준을 바라볼 수 없었다. 아무리 화장을 짙게 했다고 한들, 여도준이 그녀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오정식은 마치 상품을 고르듯 여자들을 쭉 훑어보더니 마지막에 허이서의 앞에 섰다.그는 허이서를 빤히 바라보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이 아이 괜찮네요. 딱 봐도 아주 사람을 홀릴 아이예요.”여도준은 진지하게 카드를 바라보면서 차갑게 대꾸했다.“오정식, 여자에게 환장했어? 이런 상황에서도 여자가 생각나?”“대표님, 이게 유흥이라는 거예요.”“그중에 기자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허이서는 흠칫 놀랐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오정식 같은 사람들은 기자를 가장 혐오했다. 만약 여기서 정체가 까발려진다면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게 뻔했다.오정식은 여도준의 말을 듣더니 빛이 번쩍이는 머리를 만지면서 음흉하게 웃어 보였다.“대표님 말씀이 맞네요. 이 애들 몸에 카메라라도 숨겨져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다들 지금 당장 옷 벗어! 당장!”허이서는 만짐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해 보았지만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게 될 줄은 몰랐다.옆에 있던 여자들은 아주 태연했다. 그들은 원래도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다들 가녀린 허리를 움직이면서 짧은 치마를 바닥에 툭 던졌다. 허이서는 그들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여도준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허이서는 아마 이런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얼마나 자극적인가?허이서는 가슴이 컸는데 그녀가 입고 있는 짧은 원피스의 가슴 쪽에 브로치가 하나 달려 있었다.오정식의 부하들이 다가와서 바닥에 떨어진 옷들을 주워 룸 밖으로 던졌고 나머지 사람들의 시선은 허이서에게로 향했다. 오정식은 음흉한 눈빛으로 허이서를 바라보았다.“너도 벗어.”허이서는 치맛자락을 손에 꼭 쥐었다.“오빠, 제가 기자일 리가 없잖아요.”“벗으라니까!”오정식에게는 먹히지 않았다.여도준은 테이블 위에 카드를 내려놓으면서 시선 한 번 들지 않았다. 허이서는 바짝 긴장한 채 깊이 숨을 들이마셨
오정식은 침을 꿀꺽 삼켰다.“대표님, 천천히 즐기세요.”허이서는 답답해서 괴로웠지만 감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여도준을 바라보다가 그가 손을 정장 안으로 뻗어서 바지 안에 넣었던 셔츠를 빼내는 걸 보았다.그의 허리 쪽 복근이 확연하게 보이자 허이서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허이서의 머리가 정장 아래서 계속 움직이다 보니 머릿속에 화면이 생생하게 그려졌다.여도준은 옆에 있는 사람들과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허이서는 숨을 쉴 수가 없어서 머리를 빼고 싶었다.여도준은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경고했다.“이빨 다 뽑히고 싶지 않으면 조심해.”조롱 어린 목소리들이 귓가에 울려 퍼지자 허이서는 그의 다리에 엎드린 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한참 뒤, 여도준은 떠날 때쯤이 되어서야 허이서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정장을 치워줬다.오정식은 굽신굽신거리면서 여도준을 배웅했지만 그의 시선을 줄곧 허이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대표님, 오늘 밤은 제가 기쁘게 해드릴게요.”여도준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허리를 숙이며 차 안으로 들어갔고 허이서는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오정식은 어쩔 수 없이 차 문을 닫아준 뒤 차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허이서는 창문에 기대어 있었는데 손바닥이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직업을 바꾸기라도 한 거야?”여도준이 갑자기 물었다.허이서는 옆에 여도준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걸 깜빡할 뻔했다. 여도준은 그녀의 가슴 앞에 달린 브로치를 바라보며 말했다.“예쁜 브로치네.”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뻗어 그것을 만지려고 했고, 허이서는 서둘러 손으로 그것을 가렸다. 여도준이 눈썹을 치켜올리자 허이서는 브로치를 더욱 꼭 쥐었다.“여도준 씨, 약 거의 다 먹었어요.”“그러면 나랑 같이 가서 가져가.”“고마워요.”허이서는 룸살롱에 가방을 두고 왔다는 걸 떠올렸다.“기사님에게 얘기해서 다시 룸살롱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왜?”“아주 중요한 물건을 두고 왔거든요.”여도준은 별로
허이서는 누군가 여도준의 휴대전화에 손을 댈 줄은 몰랐다.“여도준 씨에게 할 얘기가 있어요.”“그래요? 그쪽이 누군데요?”허이서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허이서라고 해요.”전화 너머에서 대화 소리가 잠깐 들렸다. 여도준이 온 듯했다.여자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도준 씨를 찾는다는데? 급한 일인가 봐.”여도준은 전화를 받은 뒤 화면을 보았다. 허이서의 번호를 따로 저장해 두지 않아서 그냥 숫자로 떴다.“잘못 건 전화일 거야.”“아냐. 도준 씨를 찾는댔어.”허이서는 거리를 두려는 듯한 여도준의 말투를 들었다.“신경 쓰지 마. 약을 구하려는 사람일 테니까.”말을 마친 뒤 전화를 끊었다.약을 구하려는 사람이라니, 이보다 더 정확한 말이 있을까?그녀는 옆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 황정아를 바라보았다.“남자들은 다 이래? 손에 넣기 전까지는 흥미가 가득하다가 손에 넣으면 바로 질려?”황정아는 입에 음식을 한가득 물고 있었기에 말하기가 힘들었다.“일반적으로 쓰레기 같은 남자들이 그렇지. 쓰레기 중에서도 진짜 쓰레기 말이야.”그는 허이서를 힐긋 보더니 먹고 있던 걸 삼켰다.“아니면 상대가 정말로 매력 없는 여자일 수도 있어. 매력 없는 여자에게 체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야.”“...”허이서는 여도준이 쓰레기라는 것에 동의했다.잠시 뒤 여도준에게서 문자가 왔다.[저녁에 앰버카운티로 와.]다행히 여도준은 그녀에게 약을 줘야 한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허이서는 퇴근한 뒤 앰버카운티로 향했다. 경호원은 그녀를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밤을 보냈던 여자라서 경호원은 허이서를 바로 들여보냈다.그러나 허이서는 곧 차우차우 두 마리에 의해 가로막혔다. 개들은 우렁차게 짖어댔고 허이서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문이 딸깍 소리와 함께 열리더니 안에서 휠체어를 탄 여자가 나왔다.“진저야, 모카야. 손님에게 짖어대면 안 되지!”차우차우는 아주 얌전히 바닥에 엎드렸다.허이서는 그 여자가 눈에 익었다. 자세히 살펴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