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이서는 누군가 여도준의 휴대전화에 손을 댈 줄은 몰랐다.“여도준 씨에게 할 얘기가 있어요.”“그래요? 그쪽이 누군데요?”허이서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허이서라고 해요.”전화 너머에서 대화 소리가 잠깐 들렸다. 여도준이 온 듯했다.여자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도준 씨를 찾는다는데? 급한 일인가 봐.”여도준은 전화를 받은 뒤 화면을 보았다. 허이서의 번호를 따로 저장해 두지 않아서 그냥 숫자로 떴다.“잘못 건 전화일 거야.”“아냐. 도준 씨를 찾는댔어.”허이서는 거리를 두려는 듯한 여도준의 말투를 들었다.“신경 쓰지 마. 약을 구하려는 사람일 테니까.”말을 마친 뒤 전화를 끊었다.약을 구하려는 사람이라니, 이보다 더 정확한 말이 있을까?그녀는 옆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 황정아를 바라보았다.“남자들은 다 이래? 손에 넣기 전까지는 흥미가 가득하다가 손에 넣으면 바로 질려?”황정아는 입에 음식을 한가득 물고 있었기에 말하기가 힘들었다.“일반적으로 쓰레기 같은 남자들이 그렇지. 쓰레기 중에서도 진짜 쓰레기 말이야.”그는 허이서를 힐긋 보더니 먹고 있던 걸 삼켰다.“아니면 상대가 정말로 매력 없는 여자일 수도 있어. 매력 없는 여자에게 체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야.”“...”허이서는 여도준이 쓰레기라는 것에 동의했다.잠시 뒤 여도준에게서 문자가 왔다.[저녁에 앰버카운티로 와.]다행히 여도준은 그녀에게 약을 줘야 한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허이서는 퇴근한 뒤 앰버카운티로 향했다. 경호원은 그녀를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밤을 보냈던 여자라서 경호원은 허이서를 바로 들여보냈다.그러나 허이서는 곧 차우차우 두 마리에 의해 가로막혔다. 개들은 우렁차게 짖어댔고 허이서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문이 딸깍 소리와 함께 열리더니 안에서 휠체어를 탄 여자가 나왔다.“진저야, 모카야. 손님에게 짖어대면 안 되지!”차우차우는 아주 얌전히 바닥에 엎드렸다.허이서는 그 여자가 눈에 익었다. 자세히 살펴본
조서희는 여도준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여도준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냉담한 얼굴로 덤덤하게 말했다.“그런 적 없어.”조서희는 그제야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그래야 할 거야. 도준 씨, 절대 여자랑 괜히 엮이지 마. 나 그런 거 못 견뎌.”“그럴 일 없어.”허이서는 앰버카운티 밖에서 기다리다가 다리가 저려서 쭈그려 앉았다.한참 뒤 강태윤이 약 몇 개를 그녀에게 건넸다. 허이서가 손을 뻗어 약을 받으려는데 강태윤은 갑자기 손을 내려뜨렸다.“허이서 씨...”“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요. 절 믿어주세요. 전 그렇게 주제 파악 못 하는 사람 아니에요. 여도준 씨가 약만 준다면 전 꼭 비밀을 엄수할 거예요. 저와 여도준 씨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거예요.”강태윤은 허이서에게 약을 건넸다. 허이서는 상황 파악이 빨랐기에 그가 뭐라고 할 필요가 없었다.허이서는 이제부터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확실히 그러했다. 그 뒤로 보름 동안 편안하고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그날 쉬고 있던 허이서는 저녁을 다 만든 뒤 황정아의 연락을 받았다.“여보세요? 이서야. 얼른 소원 카페로 와.”“왜?”“오라면 얼른 와! 내가 얼마나 어렵게 대단한 분의 인터뷰를 땄는데!”허이서는 빠르게 방으로 들어가서 옷장 문을 열었다.그녀에게는 괜찮은 옷이 별로 없었기에 그녀의 시선은 곧 가장 구석 자리에 있는 원피스로 향했다. 그것은 여도준이 입혀 보낸 옷이었다.허이서는 조심스럽게 먼지 커버를 벗기고 옷을 꺼낸 뒤 그 원피스를 입었다.허이서는 소원 카페의 룸에 도착한 뒤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황정아가 문을 연 순간까지도 그녀는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그녀는 곧장 안으로 들어갔고 병풍을 지나친 순간 걸음을 멈췄다.룸 안에는 짙은 향의 디퓨저가 놓여 있었고, 한 남자가 눈에 띄지 않는 의자에 앉아서 염주를 들고 긴 손가락으로 한 알 한 알 굴리고 있었다.그는 비록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기세가 위압적이었다.그리고
“저 옷은 원래 내 거야.”조서희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허이서가 입은 옷은 팔이 짧고 허리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그녀의 몸매가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허리가 너무 얇아서 두 손으로 완전히 감쌀 수 있을 것 같았다.조서희는 주먹을 꽉 쥐었다.“이러는 거 괴롭히는 거는 아니지?”그것이 여도준의 말에 달린 일일까?“이쪽으로 와요.”조서희가 허이서를 향해 입을 열었다.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황정아는 머리를 감싸고 있었는데 손이 피범벅이었다.허이서가 눈치 없게 행동한다면 두 사람 모두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그녀는 조서희의 앞에 섰고 휠체어에 앉아 있는 조서희는 허이서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조서희는 그 때문에 더욱더 불만스러워졌다.조서희는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더니 천천히 일어났다. 강태윤은 그 모습을 보고 그녀를 부축하려고 했다.“비켜.”조서희의 목소리에서 언짢음이 느껴졌다.“내가 진짜 다리를 못 쓰는 것도 아니고!”그녀는 제대로 서지 못해서 손을 놓자 비틀거렸다.조서희는 넘어지려고 하는 순간, 허이서의 옷깃을 잡았다.그 순간 허이서의 어깨가 옷 안으로 삐져나오면서 검은색 레이스가 달린 속옷의 어깨끈도 나왔고 그로 인해 쇄골이 더욱 잘 보였다. 여도준은 눈에 뭔가가 들어간 것처럼 눈이 불편해졌다.두 사람 모두 중심을 잡지 못했고 조서희가 넘어질 것 같자 여도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안았다.그러나 조서희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녀는 허이서를 의자 옆으로 끌고 왔다.“고집부리지 마. 아직은 일어나기엔 무리야.”여도준의 말투에서 언짢음이 느껴졌다.자극을 받은 조서희는 두 손을 마구 움직이다가 허이서의 귀를 때렸다.허이서는 귀가 머는 줄 알았다.“도준 씨, 난 춤을 추고 싶어. 난 도준 씨 앞에 서 있고 싶어. 난 무능력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조서희는 울기 시작했고 여도준은 그런 그녀를 껴안으면서 참을성 있게 그녀를 달랬다.“그럴 수 있을 거야. 의사 선생님이 그랬잖아. 침 맞으면 된다
허이서는 서둘러 황정아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을 뿐이다.강태윤은 헛숨을 들이켰다. 이건 정말 큰 일이었다. 여도준의 표정은 알쏭달쏭했다. 그는 들고 있던 염주를 책상 위에 내려놓더니 그것으로 옆에 놓인 장식품을 톡톡 치기 시작했다.2층 침실. 조서희는 도우미들 도움으로 샤워를 마쳤고 여도준은 책을 두 권 들고 와서 침대맡 서랍에 놓았다.조서희는 코를 찡그렸다.“난 책 읽는 거 안 좋아해.”“너 심심해할까 봐. 시간 때우라고 가져온 거야.”“도준 씨, 얼굴에 뭐가 있어.”“어디?”조서희는 팔에 힘을 주어 일어나 앉았다.“이리 와봐.”여도준이 앞으로 몸을 숙이자 조서희는 두 손으로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그의 뺨을 가까이했다.“혼자 자는 거 무서워. 오늘 밤엔 나랑 같이 자주면 안 돼?”여도준은 그녀의 허리를 쥐었다.“내가 바로 옆 방에 있는데 뭐가 두렵다고.”“안돼. 눈만 감으면 우리 엄마, 아빠가 뛰어내리던 장면이 떠올라. 나 요즘 계속 악몽을 꿨어.”조서희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여도준의 손을 이불 안, 자신의 다리 위로 끌어왔다.여도준은 뼈의 감각을 느꼈다. 살집이라고는 전혀 없었다.조서희가 그의 입가에 입을 맞출 때 여도준은 왠지 모르게 허이서의 보드랍고 따뜻하던 다리가 떠올랐다.그는 조서희의 한쪽 팔을 풀었다.“서희야, 움직이지 마.”“싫어...”조서희는 그의 얼굴에 힘껏 입을 맞췄지만 여도준의 욕구를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여도준은 조서희의 양쪽 팔을 전부 풀었다.“움직이지 말라니까.”조서희는 당황한 얼굴로 여도준을 바라보았다.“내가 싫은 거야?”“너 아직 다 안 나았어. 이런 거 하면 안 돼.”“안 된다니. 도준 씨가 원한다면...”여도준은 그녀의 어깨를 쥐며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몸이 다 나은 뒤에 하면 되잖아.”“내가 혼수상태였던 지난 1년간 어떻게 버틴 거야?”여도준은 이불을 잡아당겨서 그녀에게 덮어주었다.“그냥 이렇게 버텼지.”“진짜 다른 여자랑 잔 적 없어?”여도준은 다정하
허이서는 속으로 여도준의 험담을 했다.그에게는 여자 친구가 있는데 이런 얘기를 해도 되는 걸까?허이서는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저 가슴 안 예뻐요.]여도준에게서 한동안 답장이 오지 않아서 이모티콘을 보냈는데 1이 계속 지워지지 않았다.자세히 보니 그녀를 차단한 듯했다.여도준은 회의를 하는 와중에 심심해서 잠깐 장난을 친 것뿐이었다. 회의가 끝난 지금은 그녀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허이서는 기사를 내보내야 했다. 여도준이 도와주든 도와주지 않든 오정식이 저지른 악행을 까발리는 사람은 꼭 있어야 했다.다음날, 오원동 강제 철거 사건에 관한 기사가 나갔고 황정아는 긴장한 얼굴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어. 이제 어떡할 거야?”“조금 더 화제를 끌어모아야 해. 공유량도 많아야 하고 댓글도 많아야 해.”허이서는 처리 작업이 된 녹음을 들었다. 그녀는 여도준의 목소리를 지우고 오정식이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는 부분만 남겨두었다.황정아는 여러 SNS 계정에 바이럴을 돌렸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퇴근할 때가 되어서 황정아는 허이서를 데려다주려고 했다.“저녁에 같이 밥이라도 먹을까?”“너 병원 들러서 치료받아야 하는 거 아냐? 난 신경 쓰지 마. 난 백화점에 갔다 올 거야.”“백화점은 왜?”허이서는 책상 위에 놓인 가방을 들었다.“동생 옷 좀 사주려고.”허승아는 약을 먹은 덕에 몸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그래서 허이서는 주말에 그녀를 데리고 외출할 생각이었다.젊은이들은 예쁜 옷을 좋아했다. 예전에는 외출할 일이 없어서 입을 기회도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허이서는 백화점을 쭉 둘러보았는데 괜찮은 옷을 찾기도 전에 누군가 자신의 뒤를 밟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그녀는 기자였기에 그런 면에서 촉이 좋았다.허이서는 다른 매장으로 들어갔는데 그 젊은 남자는 여전히 그녀를 뒤따랐다.백화점은 사람이 많아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지만, 잠시 뒤에 어떤 일어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도준 씨는 다른 남자와 다르잖아요. 당연히 약속을 지키겠죠.”여도준은 허이서가 일부러 아부하는 거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침대 위에서 그런 얘기를 한 남자들이 많았나 봐.”“없어요.”허이서는 그를 따라서 가장 안쪽에 있는 룸에 도착했고 그제야 사람이 있음을 눈치챘다.허이서는 곁눈질로 여자가 한 명 있는 걸 보고는 제때 걸음을 멈추었다.그런데 그 여자가 허이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허이서 씨, 들어오세요.”허이서는 옆에 있는 여도준을 바라보았다. 여도준은 조금 전까지 그녀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지금은 평온해 보였다.“도준 씨, 허이서 씨 아직 저녁 안 먹었을 텐데 우리 같이 먹어요.”여도준은 이미 조서희의 곁으로 다가갔고 허이서는 서둘러 손을 저었다.“아뇨. 전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허이서 씨를 곤란하게 한 사람이 떠난 건가요?”조서희는 여도준이 자리에 앉자 자연스럽게 그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다.“아까 강태윤 씨가 그러던데. 허이서 씨가 미행을 당하고 있는데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다고요. 그래서 제가 도준 씨에게 나가보라고 했어요. 그런데 도준 씨가 귀찮아하더라고요.”조서희는 그렇게 말하면서 여도준의 다리를 꼬집었다.“사람을 구하는 일인데 왜 하기 싫어해?”“난 오지랖 부리는 거 싫어.”여도준은 덤덤한 얼굴이었다.허이서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여도준은 원래 그녀를 도울 생각이 없었다. 여도준이 그저 말 몇 마디만 해줘도 사람들은 알아서 도망갔지만, 그의 말처럼 그에게 있어 허이서의 일에 간섭하는 것은 오지랖을 부리는 것이었다.“이리 와서 앉아요.”조서희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허이서를 데려오려고 했다.결국 여도준이 서둘러 그녀의 팔을 잡았다.“움직이지 마.”허이서를 향한 여도준의 말투가 사나워졌다.“널 여기까지 모셔 와야 해?”허이서는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건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다가갔다.“감사합니다, 조서희 씨.”“앞으로는
둘이 분위기도 좋지 않은데 왜 자꾸 그녀를 끌어들이는 걸까?허이서가 위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여도준이 계속 따라가려고 했다.“이젠 괜찮으니 이만 돌아가요.”남자는 그녀의 말에 대꾸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복도는 아주 좁았고 여도준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허이서는 빨리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2층에 도착했을 때 전등이 고장 나서 주위가 어두컴컴했다. 허이서는 그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휴대전화 손전등을 켜주었다.하지만 이미 늦었다.여도준은 발이 걸렸고 허이서는 등에 뭔가 무거운 걸 업은 느낌이 들면서 그대로 넘어져 바닥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여도준이 입을 열기도 전에 허이서는 후다닥 일어났다.“여도준 씨, 괜찮아요?”약을 주는 소중한 사람이니 떠받들어야 했다. 혹시라도 넘어져서 상처라도 난다면 큰일이었다.여도준은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이딴 곳에 사람이 살 수가 있는 거야?”허이서는 손바닥이 화끈거렸고 두 무릎도 아팠다.“남회시에는 별장과 화려하게 꾸며진 오피스텔만 있는 게 아니에요.”허이서의 걸음걸이는 부자연스러웠다. 계단을 하나 오를 때마다 상처가 벌어져서 아픈 탓이었다.집 문 앞에 도착해서 열쇠를 꺼내는데 여도준은 여전히 뒤에 서 있었다.“저 도착했어요.”“문 열어.”허이서는 순간 목덜미가 뻐근해졌다. 설마 집 안까지 들어오려는 걸까?“엄마랑 동생 다 있어요.”여도준의 커다란 몸이 뒤에 있어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가 손을 들어 벨을 누르려고 하자 허이서는 허둥지둥 열쇠를 꽂았다.문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허승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왔어?”힘없는 목소리가 아니라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였다. 그 약은 확실히 효과가 있는 듯했다. 몇 걸음 다가온 허승아는 안으로 들어온 여도준을 보고 잠깐 당황하더니 곧이어 흥분한 얼굴로 주방을 향해 외쳤다.“엄마, 언니가 남자 친구를 데리고 왔어.”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주방에서 나온 배윤주는 허이서가 허승아에게 설명하는 모습을 보았다.“그런 거 아니야...
허이서는 누군가에게 밀쳐져 찬물에 빠진 것처럼 머리가 띵해졌다.“조서희 씨랑 사이좋으시면서...”여도준은 허이서의 허리 위에 올린 손을 움직이며 물었다.“여기 오래 있으면 어머님이 올라오실까?”“당연하죠.”“우리 처음 할 때 얼마나 걸렸는지 세봤어?”변태도 아니고 그걸 세볼 리가 없었던 허이서는 허리를 짓누르던 여도준의 손이 사라지자 재빨리 몸을 일으켰지만 여도준은 듣고자 하는 말이 있는 사람처럼 물었다.“어차피 금방 끝날 건데, 뭘 그렇게 무서워해?”“누가 금방이래요, 굳이 자기비하는 하지 마세요.”뒤끝이 길었던 여도준은 그날 허이서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저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걸 듣고 같은 말을 반복해보았지만 허이서는 그 일을 까맣게 잊은 듯했다.허이서는 어릴 때부터 오냐오냐 자라온 여도준 같은 사람은 이런 자존심에 스크래치 나는 말은 절대 못 참는 걸 알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해주었다.“감히 여도준 씨한테 그런 말 할 사람 없는 거 알잖아요, 물론 나도 포함이고요.”그 말에 여도준은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을 터뜨렸다.그런데 그때 기다리다 못한 조서희가 여도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조서희는 불이 켜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허이서의 방을 바라보며 물었다.“왜 아직도 안 내려와?”“갈게 금방.”“나 허리 아파, 빨리 와.”조서희의 전화를 받은 여도준은 곧바로 방에서 나왔고 배윤주는 가려는 여도준을 보고 다급히 무언가를 챙기기 시작했다.“벌써 가게요? 좀 더 있다 가시지.”하지만 여도준은 배윤주에게 인사도 없이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허이서가 방에서 나올 때 배윤주는 이미 검은 비닐봉지를 여도준 손에 쥐여주고 있었다.“친척이 준 유정란인데 여기에선 사기 힘들 거니까 들고 가요.”하지만 여도준이 그걸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허이서는 엄마가 그 앞에서 고개 숙이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성치도 않은 다리를 끌고 가서 말했다.“됐어, 엄마. 이런 거 안 챙겨도 돼.”하지만 배윤주는 허이서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다른 걸 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