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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굳이 허이서여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는데 그때마다 거절했으니 인내심도 점점 닳아가고 있었다.

허승아는 며칠 연속 약을 먹게 되자 상태가 점점 좋아졌고 심지어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산책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열흘째가 되자 약이 동났다.

허이서는 허승아를 재운 뒤 몰래 집을 나섰다.

그녀는 앰버카운티에 도착해서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집에서 여동생이 발작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그곳에 가서 무릎이라고 꿇고 있는 편이 나았다.

그녀의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기에 허이서는 계단을 따라서 내려갔다.

남자 한 명이 위층으로 올라오면서 그녀와 지나쳤다. 허이서는 그의 손에 아주 무거워 보이는 통이 하나 들려있는 걸 보았다.

허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1층에 도착하자마자 위층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허이서는 곧바로 걸음을 멈췄고 갑자기 불안감이 치솟았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위층으로 달려갔다.

“승아야, 문... 열면 안 돼.”

그러나 한발 늦었다. 허승아의 비명을 들은 허이서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짙은 피비린내와 함께 허승아의 몸을 적셨고 허이서는 헐레벌떡 집 앞에 도착했다.

남자는 허승아를 가리키며 흉악한 표정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이건 네 아버지가 진 빚이야. 네 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으면 너희도 편히 못 살 줄 알아.”

허이서는 남자의 팔을 잡아당겼고 허승아는 코와 입에서 모두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걸 느꼈다.

“오늘은 개 피지만 다음에는 무슨 피일지 나도 장담 못 해!”

허이서는 순간 멈칫했다. 허승아는 집 안을 향해 외쳤다.

“두부야!”

그녀가 키우던 강아지는 오늘 오후 집에 없었다. 허승아는 두부가 나가서 놀고 있는 줄 알았다.

허승아는 미친 듯이 두부의 이름을 불러대면서 입안을 적신 피를 삼켰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가슴을 힘껏 부여잡았다.

남자는 그 틈에 허이서를 밀쳤다.

“이건 너희 업보야.”

허이서는 부랴부랴 집 안으로 들어가서 쓰러지려는 허승아를 부축했다.

“언니...”

“승아야, 무서워하지 마. 언니 여기 있어.”

허승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아파. 언니, 심장이 너무 아파. 난 죽고 싶지 않아...”

심한 통증과 함께 눈앞이 까매졌다.

남자는 이미 도망쳤고 허이서는 구급차를 부른 뒤 허승아를 등에 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밖에서 비까지 내리고 있어 허이서는 어쩔 수 없이 허승아를 꼭 끌어안고 입구에서 기다렸다.

어렵사리 병원에 도착했는데 의사가 해준 말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못 살려요. 수술할 수가 없어요.”

“살릴 수 없다고요? 제 동생은 지금 혼수상태예요. 의사 선생님...”

허이서는 홀로 외롭게 침대 위에 누워있는 허승아를 보았다. 그녀는 의사를 쫓아가서 붙잡았지만 의사는 짜증 난 표정으로 그녀를 밀쳤다.

응급실 안에는 의사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응급 환자가 너무 많았고, 허이서의 동생은 그곳에서 그저 죽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병원에 도착한 허이서의 엄마는 비굴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아무런 능력도 없었기에 그저 병상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제발요. 제발 저희 딸을 구해주세요...”

오가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중에서 걸음을 멈추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허이서는 허승아의 손을 꼭 잡았다. 병상에 누운 허승아는 꼼짝하지 않았고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호흡마저 미약했다.

“엄마, 승아 지켜보고 있어요.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네가 뭘 할 수 있겠니...”

허이서는 비틀거리면서 복도로 나갔다. 지금 떠오르는 건 송은호뿐이었다.

전화를 걸자 전화 너머로 송은호의 비아냥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왜 전화한 거야?”

“송은호, 우리 동생 좀 구해줘. 지금 병원에 왔는데 의사 선생님이 치료를 안 해줘...”

“뭐? 어느 병원인데? 지금 당장 갈게!”

허이서는 주소를 읊었고 지푸라기라도 잡은 심정으로 그를 기다렸으나 한참이 지나도 송은호는 오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송은호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허이서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쏟아지는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앰버카운티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커다란 대문이 그녀를 막아섰고 화려하게 조각된 큰 기둥에는 사나운 차우차우 두 마리가 묶여 있었다.

허이서의 얇은 옷이 몸에 딱 달라붙었있는데 개보다 사람이 더 천해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녀의 등 뒤에서 차가 급히 멈춰 섰고 곧 검은 우산이 펼쳐졌다. 긴 다리의 남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비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앞으로 걸어갔다.

여도준은 허이서의 곁에서 멈춰 섰다. 빗줄기는 우산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고 빗방울이 허이서의 옷깃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도련님!”

남자는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간 뒤 계단을 올랐고, 사나웠던 차우차우들은 곧 얌전히 바닥에 엎드렸다.

허이서는 다급히 그를 따라가서 그의 옷깃을 잡았다.

“도와주세요.”

“도와달라고? 아, 약 다 먹었어?”

“아뇨. 제 여동생이 발작해서 병원으로 데려갔는데 아무도 치료를 안 해줘요.”

여도준은 처마 밑에 섰다. 그의 조각된 듯한 이목구비에 한기가 어렸다.

“병원은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곳인데 아무도 치료를 안 해준다니?”

허이서는 너무 초조한 나머지 목까지 쉬었다.

“제 여동생은 병원에 실려 간 뒤 가장 기본적인 응급처치도 받지 못했어요. 저희 집에서 다른 집안의 미움을 사서 치료받는 걸 막은 거예요. 저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어요...”

허이서는 고개를 들었다.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얼굴이 아팠다.

“여도준 씨...”

“사람을 구하는 게 우선이지.”

여도준은 옆에 있던 강태윤에게 분부했다.

“가서 처리해.”

“네.”

허이서가 발을 옮기려는데 여도준이 입을 열었다.

“따라가려고?”

“병원 쪽은 불안해서요.”

여도준은 문을 열었다.

“날 찾아온 게 단지 그것 때문이야?”

이때 허이서는 스스로가 너무 비참하게 느껴졌다.

“동생이 정신을 차리면 여기로 올게요.”

여도준은 안으로 들어간 뒤 문 앞에 섰고 조명이 그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병원에서조차 치료를 거부한 거지?”

여도준은 혀를 찼다.

“갑자기 끼어들면 괜히 나한테 성가신 일이 생기는 거 아냐?”

허이서는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녀가 아무리 초조해도 소용없었다.

그녀는 여도준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고, 몸에 피 냄새가 배어 한참을 씻어야 했다.

허이서는 널찍한 가운을 입어서 길을 걸을 때마다 날씬한 다리가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흰 다리가 허리를 감는 상상을 하게 되었다.

“엄마한테 연락 한 통 하고 싶어요.”

여도준은 앞으로 두 걸음 나섰다. 그의 머리는 반쯤 마른 상태였다.

“그렇게 번거롭게 할 필요 없어.”

여도준은 영상 통화를 했고 곧 건너편에서 강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다 처리했습니다.”

“허이서가 불안해해서 말이야. 직접 보고 싶다네.”

강태윤은 카메라를 허승아 쪽으로 돌렸고 곧 의료진들이 허승아를 응급실로 데리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여도준은 휴대전화를 침대 위에 던지더니 허이서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를 데리고 침대로 걸어갔다.

“도련님, 제가 계속 지켜볼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강태윤은 말을 마친 뒤 여도준이 통화를 끊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여도준은 휴대전화를 가까이 가져와서 허이서의 정수리 위에 놓았다.

“끊지 마. 허이서가 안심할 수 있게 계속 영상 켜고 있어.”

허이서가 입을 열려고 했지만 여도준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여도준의 질척한 키스는 곧 그녀의 귀로 향했다.

허이서는 휴대전화를 치우려다가 여도준에게 손이 잡혔다.

“이렇게 하면 더 자극적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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