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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허이서는 치아가 덜덜 떨렸다. 이를 악물었지만 떨림이 잦아들기는커녕 더욱 심해질 뿐이었다.

송은호는 난감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난 이서랑 이미 약속했어. 나보고 이서에게 어떻게 설명하라는 거야?”

여도준의 목소리가 정수리 위에서 들려왔다.

“내가 주지 않았다고 해.”

송은호는 잠깐 고민했다. 만약 허승아가 약을 먹고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허이서가 과연 그를 만나줄까?

구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공범’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고 곧 송은호는 방에서 나갔다.

강태윤은 차분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제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허이서는 송은호가 이렇게 떠날 줄은 몰랐다.

허이서는 비틀거리면서 뒷걸음질 치다가 욕조에 다리가 부딪혀서 욕조 안에 풍덩 빠지게 되었다.

넘쳐흐른 물이 여도준의 바짓자락을 적셨고 허이서는 물에서 빠져나오며 말했다.

“죄송해요.”

허이서의 눈시울이 조금 빨갰다. 여도준은 젖은 바지를 벗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물이 아주 뜨거웠는데 허이서의 체온이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허이서는 서둘러 욕조 밖으로 빠져나갔다.

“여도준 씨, 오늘 약을 주시면 안 될까요? 한 팩이라도 좋아요.”

허이서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난 송은호에게 기회를 줬어. 너도 봤잖아.”

허이서는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말했다.

“저에게도 기회를 주세요. 제 동생을 구해주신다면 평생 고마워할게요.”

여도준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로 그녀를 바라봤다.

“강하게 밀어붙여도 소용없으니까 이번에는 가여운 척하는 거야?”

허이서는 아주 처연해 보였다. 여도준은 허이서의 턱을 한 손으로 쥐고 그녀를 잡아당겼고, 손가락으로 허이서의 입술을 쓱 만졌다.

허이서는 그의 눈빛에서 일렁이는 욕정을 보고 그의 손을 힘껏 쳐냈다.

여도준은 눈을 감고 욕조에 기댔다.

“거절도 한두 번이어야 재밌지. 계속 거절하면 재미없어.”

여도준이 그녀에게 흥미를 잃는다면 가지고 노는 건 둘째 치고 만나는 것조차 성가셔 할 것이다.

허이서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마지막으로 타협했다.

“조건을 다른 걸로 바꾸면 안 될까요?”

허이서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움직였고, 여도준은 그녀의 말에 기가 막혔다.

“그 사진들, 퍼뜨리고 싶으면 퍼뜨려. 기다리고 있을게.”

허이서는 희망을 거의 품지 않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약을 주든 안 주든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지는 않을 거니까요.”

거래에 실패한다고 해서 스스로 무덤을 팔 수는 없었다.

조씨 일가든 여씨 일가든 건드리게 되면 죽음뿐이었다.

여도준은 허이서가 주저앉은 채 움직이지 않자 한마디 했다.

“안 가?”

흥미를 잃은 여도준의 얼굴에서는 욕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싸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욕망을 표현하거나 자제하는 것에 있어서 그는 절대 다른 이들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원래 본인의 감정을 잘 제어하는 사람이었다.

허이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강태윤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인 허이서에게 귀띔해주었다.

“송은호 씨 차 아직 밖에 있습니다. 떠나지 않으셨어요.”

허이서는 팔을 감싸안으며 추워했다.

“여기 잠깐 숨어 있어도 될까요?”

강태윤은 난처했다.

“도련님께서는 깔끔하신 분이라...”

허이서가 지나친 집안 곳곳이 물에 젖었다. 허이서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면 마당에 있어도 될까요?”

허이서는 계단을 찾아서 앉았고 강태윤은 담요 한 장을 가져와서 그녀에게 건넸다. 허이서는 추위에 덜덜 떨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허이서는 전형적인 미인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강태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담요를 꽉 쥔 허이서는 치아가 덜덜 떨렸음에도 불구하고 떠보듯 말했다.

“혹시...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강태윤은 아주 단호히 대답했다.

“없습니다. 이 일은 도련님밖에 결정할 수 없어요.”

강태윤은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고 허이서는 그곳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떠나려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쯤 강태윤이 다가왔다.

강태윤은 곧장 그녀를 향해 오더니 물건을 하나 건넸다.

확인해 보니 약이었다. 허이서는 잠깐 멈칫하다가 서둘러 약을 빼앗았다.

“저 주시는 거예요?”

허이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도련님께서 일단 한번 써보시라고 했습니다.”

순간 허이서의 얼굴이 활짝 폈다. 그녀는 약을 손에 꼭 쥐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덜덜 떨면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강태윤은 그녀의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고개를 젓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여도준이 마침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갔어?”

“네.”

강태윤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련님, 왜 갑자기 약을 주신 겁니까?”

설마 자비라도 베풀려는 걸까?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여도준은 실눈을 뜨며 말했다.

“효과를 보여줘야 그 약이 쓸모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으니까.”

허이서가 약의 효과를 모른다면 그걸 위해 모든 걸 포기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허이서는 집으로 돌아온 뒤 방에 들어서자마자 여동생이 문가에 기대어 있는 걸 보았다.

“승아야, 나 왔어.”

허승아는 입을 열기 전에 잠깐 숨을 골랐다.

“언니, 앞으로는 일찍 와. 나 무서워.”

허이서는 약을 꺼내더니 허승아에게 약을 두 알 건넸다.

“이건 내가 새로 사 온 신약이야. 효과 있다던데 얼른 먹어.”

허승아는 항상 말을 잘 들었기에 조용히 물과 함께 약을 삼켰다.

“계속 이렇게 앉아 있어도 안 좋아. 침대에 잠깐 누워있어.”

허이서는 이불을 정리했다. 깊은 밤, 두 자매는 한 침대 위에 누웠다. 요즘 허이서는 매일 같이 기사를 써내느라 너무 힘들었기에 곧바로 잠에 빠졌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이상함을 눈치채고 옆을 바라보았다. 허승아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허이서는 손을 뻗어 허승아의 코에 가져다 댔다. 숨을 쉬는 것 같지 않았다.

목 끝까지 차오른 눈물을 삼키며 허승아의 어깨를 흔들었다.

“승아야.”

허승아는 눈을 떴다.

“언니, 왜 그래?”

허이서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면서 코끝이 찡했다. 허이서는 약간 흐느끼며 물었다.

“어젯밤 좀 잤어? 어때?”

“언니, 그 신약 효과 진짜 좋은 것 같아.”

허승아는 이렇게 편히 잘 줄은 몰랐다.

“나 살 수 있는 거 아닐까? 안 죽어도 되는 거 아닐까?”

허이서는 멈칫하다가 그녀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우리 승아는 100살까지 살 거야.”

허이서는 약을 힐끗 보았다. 열흘 치는 될 듯했다.

다음 날,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허이서는 회사 건물 앞에서 송은호의 차를 보았다.

안색이 어두워진 허이서는 못 본 척하려고 했다.

“이서야.”

송은호는 차 문을 열고 내려서 서둘러 그녀를 막아섰다.

“같이 저녁 먹자.”

“아니. 나 바빠.”

송은호는 허이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고 억지로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동생 일 때문에 걱정 많은 거 알아. 그래도 몸은 챙겨야지.”

허이서는 송은호의 옆얼굴을 보더니 그와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돌아가는 길 내내 송은호는 입을 한시도 쉬지 않았다.

“승아 치료받게 하려고 내가 두 다리 부러지도록 힘들게 다녔어. 그런데 여도진 걔 정말 너무 매정하더라. 걔를 설득하려고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입술이 퉁퉁 부었다니까.”

송은호는 허이서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에게 뽀뽀하려고 했다.

허이서는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정말 찾아갔어?”

“무슨 뜻이야...”

송은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날 의심하는 거야?”

“송은호.”

허이서의 입가에 조롱 어린 미소가 걸렸다.

“날 위해 여도준 씨 심기를 건드리는 건 수지타산이 맞지 않지?”

송은호가 핸들을 돌리자 차는 원래 가려던 방향에서 벗어났다.

그는 서둘러 브레이크를 밟았고 차는 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송은호는 억지로 허이서를 끌고 차에서 내렸고, 허이서는 그의 걸음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거 놔.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

송은호의 안색은 아주 어두웠다. 두 사람은 마당을 지나 한 집 앞에 도착했다.

남자는 문을 열었고 허이서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를 안에 밀어 넣었다.

허이서는 비틀거리다가 앉아 있는 남자와 부딪혔다. 그녀가 넘어지려고 하자 여도준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여도준의 조금 차가운 손가락이 허이서의 손바닥을 잡았다.

“똑바로 서. 외간 남자 덮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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