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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뿐인 사랑이라면
상처뿐인 사랑이라면
작가: 고수아

제1화

“어디 한번 보자. 커야 할 곳은 다 컸는지.”

허이서는 두 팔에 의해 단단한 벽에 밀어붙여졌다.

“사... 사람 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깡마른 어깨로 애써 반항해 보았지만 소용없었고 오히려 어깨에 깊은 홈이 생겼다. 허이서는 절망에 빠진 얼굴로 눈을 감았다. 1년이란 시간이 흘러서 그녀는 여도준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다.

여도준은 또박또박 말했다.

“1년 전 침대 위에서 내가 세어봤거든. 너 내 이름을 68번 부르더라.”

너무 괴롭고 힘들어서, 미친 듯이 애원했었다.

허이서는 발가벗겨진 채로 사람들 앞에 선 기분이 들었다. 그날 밤의 모욕감이 그녀의 머리를 꾹 눌러 끓는 물 안에 넣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인정할 수 없었다.

“전 당신을 만난 적이 없어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했다.

여도준은 허이서에게 가까이 다가가더니 예리한 눈초리로 허이서의 이목구비를 구석구석 살펴보기 시작했고, 허이서는 무심결에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여도준의 눈동자는 그 어떤 감정이나 욕망이 자리할 공간이 없을 정도로 싸늘함만으로 가득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허이서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도준은 한 손으로 허이서의 가냘픈 허리를 쥐고 그녀의 청바지에 손가락을 걸었다. 잡아당기려는 의도는 없어 보였다.

허이서의 귓가에 긴 숨결이 스쳐 지나가면서 그녀의 까만색 머리카락이 살짝 휘날렸다.

남자는 결국 손을 놓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방으로 돌아왔다. 송은호가 다가가서 허이서의 손을 잡았다.

“소개할게. 이쪽은 내 여자 친구야.”

여도준은 소파에 앉더니 긴 다리를 꼬았다. 그는 허이서가 송은호의 손을 뿌리치는 걸 보았다.

“헛소리하지 마.”

송은호는 허이서의 어깨를 끌어당기더니 그녀를 데리고 여도준의 앞에 섰다.

“이쪽은 내가 얘기했던 도련님. 네 여동생을 살릴 수 있는 약을 갖고 있어.”

허이서는 순간 얼어붙었다. 충격받은 얼굴로 여도준을 바라보는 허이서의 눈동자에 흐릿한 인영이 나타났다.

여도준은 담배를 쥐고 있던 손을 얼굴 옆으로 가져갔다. 그는 외모가 출중하여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누군가 몸을 숙이며 여도준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려고 했고, 여도준은 손을 허벅지 위에 놓았다.

송은호는 그 모습을 보더니 서둘러 허이서에게 라이터를 건넸다.

“뭘 넋 놓고 있어? 얼른 여도준 담배에 불 붙여줘야지.”

허이서는 라이터를 꽉 쥐었다. 송은호는 여전히 옆에서 그녀를 부추겼다.

“여도준은 분명 우리를 도와줄 거야. 여도준이 도와주면 네 동생도 분명 살 수 있을 거야.”

그 말 때문에 결국 허이서는 여도준의 앞에 섰다. 그녀는 허리를 숙였고 여도준은 손을 들어 담배 끝을 입에 물었다.

라이터가 담배에 닿으려는 순간 여도준이 담배를 치웠다.

“무슨 약을 원하는데?”

허이서는 미처 손을 거두지 못해 화상을 입을 뻔했다.

“보심단이요.”

여도준의 시선이 허이서를 지나쳐 그녀의 뒤에 있는 남자에게로 향했다.

“송은호. 그 약은 아직 출시 안 된 거라 줄 수 없어.”

송은호는 여도준을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난 오늘 특별히 내 여자 친구를 데리고 너희를 보러 온 거라고. 그러니까 체면 좀 봐줘.”

허이서는 여전히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여도준은 몸을 뒤로 젖히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그의 상반신이 허이서에게 완전히 가려지면서 두 사람 사이에 사각지대가 생겼다.

여도준은 마치 얼음으로 빚어진 조각상처럼 차가운 얼굴로 시선을 들어 허이서를 바라보았다.

“난 이 여자랑 아무 사이 아니고 이 여자도 날 모르는데 내가 왜 도와줘야 해?”

라이터를 들고 있던 허이서의 손이 멈칫했다.

“날 도와주는 거로 생각해. 이서가 나랑 약속했거든. 오늘 네가 부탁을 들어주면 내 여자 친구가 될 거라고.”

여도준은 거리낌없이 허이서를 훑어보았다. 그의 주변에서 느껴지는 기운마저 허이서에게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여도준은 허이서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허이서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여동생은 하루빨리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것도 성 선생님이 그녀를 불쌍히 여겨서 그녀에게 보심단이라면 여동생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알려준 것이었다.

가장 난처한 점은 약이 아직 출시되지 않았고, 그 약을 여도준만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도준 씨, 그 약 얼마인가요? 제가 사겠습니다.”

허이서는 여도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다리가 소파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허이서는 여도준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여도준은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였고 곧 그의 눈동자는 연기로 인해 흐릿하게 보였다.

상당히 관능적인 모습이었다.

마치 1년 전 그날 밤처럼 여도준은 얼굴도 몸도 상당히 관능적이었다.

“그 약 안 팔아.”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한 어투였다.

허이서는 포기하지 않았다.

“얼마여도 괜찮아요.”

여도준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면 딱 1억만 받도록 하지.”

여도준은 순식간에 창백해진 허이서의 안색을 즐겼다. 그녀에게는 꽤 민감한 숫자일 것이다. 여도준은 허이서가 잊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송은호가 곧바로 나섰다.

“내가 줄게. 겨우 1억일 뿐이잖아.”

허이서는 난처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아픔, 모욕감, 무기력함, 그런 것들을 여도준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끄집어냈다.

허이서는 몸을 돌리더니 송은호를 막아섰다.

“이건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상관없다니? 넌 내 여자 친구인데...”

허이서는 송은호를 뒤로 몇 걸음 물러나게 했다. 송은호가 그럴 수록 허이서는 더욱 우스운 사람이 된다.

“송은호, 내가 알아서 해결할 거야.”

허이서는 말간 눈빛으로 송은호를 달랜 뒤 다시 여도준의 앞에 섰다.

“여도준 씨, 제발 도와주세요...”

여도준은 어둑어둑한 조명 아래서 싸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허이서를 바라보지 않았고 그녀에게 대꾸하지도 않으며 그녀를 공기 취급을 했다.

허이서는 어쩔 수 없이 허리를 더 깊이 숙였다.

“일단 조금만이라도 주시면 안 될까요?”

여도준은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아들이더니 마디마디 분명한 손가락으로 담배를 톡톡 쳤다. 허이서는 재떨이를 가져올 생각이었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뜨거운 담뱃재가 그녀의 파인 옷 안으로 들어갔고, 허이서는 깜짝 놀라서 몸을 일으키며 무의식적으로 가슴께를 툭툭 쳤다.

“왜 그래?”

송은호는 초조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무것도 아니야.”

허이서는 억지로 미소를 쥐어 짜냈다.

“벌레가 있어서...”

송은호는 불쾌했지만 여도준의 심기를 건드릴 엄두는 나지 않았다.

“약 좀 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비싼 것도 아닌데 말이야. 좀 도와주면 안 돼?”

여도준은 허이서의 얼굴로 다시 시선을 돌리더니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규칙은 어기면 안 되지.”

그렇게 그들은 기분만 상한 채 헤어졌다.

송은호는 넋이 나간 허이서를 데리고 차에 탔다.

“정말 나쁜 놈이야.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매정한지...”

허이서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본 송은호가 말했다.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 여도준 쟤 원래 저래. 인두겁을 뒤집어쓴 놈이야. 걱정하지 마.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송은호가 차에 시동을 걸자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허이서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휴대전화를 꺼내 보니 문자 하나가 와 있었다.

[나한테 와.]

허이서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운전하고 있는 송은호를 바라보았다.

송은호는 외모도 출중하고 집안 형편도 좋다. 그런데 그녀가 과연 송은호에게 어울리기나 할까?

송은호가 그녀와 여도준이 잔 사실을 안다면 아마 그녀를 혐오하게 될 것이다.

“나 혼자 돌아가고 싶어.”

“이렇게 늦은 시간에 혼자 돌아다니다가 나쁜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그래?”

허이서는 고집을 부렸다.

“일찍 돌아가봤자 소용없어. 동생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힘들어.”

송은호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

“응.”

차가 갓길에 멈춰 섰다. 허이서는 송은호의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답장을 보냈다.

[주소는요?]

밤바람을 맞으며 십여 분을 기다린 끝에 여도준의 차가 도착했다.

허이서는 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도준 씨.”

바람이 차 안으로 밀려 들어왔고, 희미함 속에서 밤의 진득함 또한 함께 느껴졌다.

차 안에 앉아 있는 여도준은 어깨가 넓고 다리가 길었다. 허이서를 본 순간 그는 그녀의 놀라웠던 감촉이 떠올랐다.

“이름이 뭐였더라?”

“허이서요.”

“허이서.”

여도준은 그녀의 이름을 곱씹었다. 마치 그녀의 이름을 배 속으로 삼키려는 듯 말이다. 그는 곧 가벼운 어조로 비아냥거렸다.

“오늘 밤 또 내 침대에 기어오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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