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서준은 약간 놀랐다. 오늘 의외인 일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최서준은 자리에 앉아 기운을 회복했다. 그의 밑에는 극상품의 영석이 가득했지만 마치 무언가에 막힌 듯, 기운을 흡수할 수 없게 되었다.게다가 이곳의 지리적 원인 때문에 왕성 안에는 영기가 없었다. 그래서 기운을 회복하려면 그저 스스로 회복할 수밖에 없었다.진원태가 말하던 것이 무슨 뜻인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기운이 회복되지 않자 확실히 어려웠다. 심지어 용문비경의 영기를 끌어 쓸 수도 없었다.이런 상황에 놓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방법이 없었기에 최서준은 그저 자리에 앉아 천천히 회복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진원태는 최서준이 기운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을 보고 같이 자리에 앉아 기운을 가다듬었다.그러다가 밤이 깊었을 때, 최서준은 그제야 통맥경의 기운을 되찾았다.성 밖에 김표는 밖에서 계속 지켜보았다. 최서준의 말대로 성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최서준이 통맥경 정도의 힘밖에 못 쓴다는 것을 알자 저도 모르게 고민이 되었다.이때를 틈타서 최서준을 해치울지 생각하다가 결국 마음을 접게 되었다. 최서준은 그를 많이 도와준 사람이 아니던가. 야밤정령의 손에서 도망칠 수 있게 해준 것도 최서준이다.최서준은 김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각할 사이도 없었다. 그는 이곳에서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기운을 회복한 후 그는 성의 안 쪽으로 들어가 한 바퀴 돌아보았다.대문만 굳게 잠겨있을 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한 바퀴 돈 후, 최서준은 다시 대문 앞으로 와 입구에 이상한 점이 없는지 관찰했다. 그러다가 노란 빛이 반짝이는 것을 발견하고 그 곁에는 세 개의 회색 구멍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외에는 다른 이상이 없었다.진원태는 먼저 이곳에 들어왔었기에 이곳의 이상한 점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는 여유로운 태도로 최서준을 향해 농담을 건넸다.“그만 봐. 내 생각에는 다섯 명이 모여야 문이 열릴 거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이곳에 오랫동안
“그중 한 명은 압니다. 주현아고요, 다른 한 명은 모르겠습니다.”김표는 숨김없이 솔직하게 얘기했다. 숨길 필요도 없었고 또 지금 숨긴다고 해도 안에 들어가면 곧 들통나니까 말이다.“주현아? 그 사람이 여길 왔어?”진원태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김표도 마찬가지로 웃었다. 최서준은 저도 모르게 궁금해졌다. 얼마나 유명한 사람이기에 진원태와 김표가 이렇게 웃는지 말이다.“최서준 씨는 모르겠지만 주현아는 우리 4대부 중에서도 유명한 사람입니다.”김표는 호기심 가득한 최서준의 표정을 보고 얘기했다.“왜 유명하지? 실력 때문인가?”최서준이 물었다.“그건 아닙니다. 주현아 씨는... 어떻게 얘기하죠. 빼어난 외모 때문에 유명한 겁니다. 게다가 음란지색이라 남자의 양기로 여태껏 수련해 왔다고 합니다. 여태까지 얼마나 많은 남자들을 홀리고 다녔을지 셀 수도 없다고 하네요. 게다가 남자랑 교합하지 않으면 실력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지만 4대부 중에는 주현아의 하룻밤 상대가 되고 싶어 하는 남자들이 수두룩합니다.”김표가 설명했다.“내가 알기로는, 김표도 주현아와 하룻밤을 보냈던 것 같은데.”진원태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마음이 동해서 한 번은 그랬지만 그 후로는 없었습니다.”김표는 대범하게 인정했다.“쯧,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한 모양이지?”진원태가 얘기했다.“그건 아닙니다. 원래 사람은 가져본 것에 대해 크게 미련을 갖지 않으니까요.”김표는 열심히 설명했다.김표와 진원태의 말을 듣던 최서준은 저도 모르게 어색해졌다. 최서준은 아직 동정이기 때문이었다.하지만 보아하니 동년배들은 이미 이런 일을 겪어본 듯했다.두 사람이 그렇게 얘기하고 있을 때, 주현아는 다른 남자와 왕성 앞에 도착해 김표와 인사를 했다.“김표 오빠, 오랜만이네.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이야. 우리의 인연이 끝난 건 아닌가 봐.”김표는 더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주현아와 엮이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하지만 주현아는 김표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안에 있던 진원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주현아와 무슨 각별한 사이라도 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유독 최서준만이 아무렇지 않았다. 주현아, 김표, 진후택, 세 사람은 안으로 들어서서 최서준을 힐긋 쳐다볼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이윽고 세 사람이 들어오자 문 쪽에서 빛이 나왔다. 원래 노란 불빛이 두 개뿐이었는데 세 사람이 들어오자 빛이 하나, 둘씩 켜지면서 이윽고 불빛 다섯 개가 모두 밝아졌다.대문이 열렸고 그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까만 어둠이 펼쳐졌다. 이윽고 보이지 않는 힘이 갑자기 다섯 명을 끌어당겼다. 그 힘은 그리 세지 않아 다섯 사람이 저항하면 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이곳에는 분명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다섯 사람은 반항하지 않고 그 힘에 이끌려 앞으로 나아갔다.다섯 명이 안으로 들어가자 그 안은 갑자기 다른 곳으로 바뀌었다.그들은 의미심장한 도안이 그려진 바위 위에 서 있었다. 그 위에는 다섯 갈래의 길이 있었는데 이 길이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통로 입구 측에는 커다란 석상이 앉아 있었다. 최서준은 많은 야수들을 봐왔고 적지 않은 책을 읽었지만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다섯 갈래의 길. 서로 다른 석상. 살아있는 것 같은 왕성.일단 지금 사람이 다섯 명이고 길이 다섯 갈래이니 서로 빼앗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최서준은 기운을 내뿜어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나 제한이 있어서 기운을 읽을 수가 없었다.이곳에 걸려있는 제한인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컨트롤하고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 것인지. 억지로 사람들을 이곳에 밀어 넣은 사람이라면 이들보다 백배, 천배는 더 무서운 존재일 것이다.최서준은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애썼다. 그리고 머뭇거리다가 중간의 길로 걸어 나갔다.뒤의 네 사람도 각자 길을 골라서 걸어갔다.바람도 없고 고난도 없는 길이었다. 최서준은 그저 그렇게 평온하게 길의 끝자락에
최서준이 그 힘에 저항하느라 진을 빼고 있을 때, 최서준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를 보고도 무릎 꿇지 않는다니. 무릎만 꿇으면 돈, 여자, 원하는 건 다 손에 넣을 수 있어!”그 말을 들은 최서준은 본능에 따라 얘기했다.“한번 무릎을 꿇으면 영원히 무릎을 꿇는 것과 같습니다. 전 하늘과 땅, 스승님께만 무릎을 꿇지, 절대 다른 사람 앞에서 무릎 꿇지 않을 겁니다.”“네가 지금 포기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잘 알고 하는 말이야?”희미한 목소리가 또 속삭여왔다.하지만 최서준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완강하게 무릎 꿇지 않겠다고 저항했다.그렇게 석상 앞에 꿋꿋하게 선 채 쓰러졌다....김표의 길도 마찬가지였다. 길의 끝자락은 최서준이 본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똑같은 절, 똑같은 석상. 유일하게 다른 것은, 김표는 그 힘에 굴복하여 최서준과 다른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김표는 석상 앞에 무릎 꿇는 것을 선택했다. 그 순간, 김표는 자기 실력이 갑자기 는 것을 발견했다. 통맥경 밖에 안 되던 그는 바로 무후로 되었다. 김표는 저도 모르게 더 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마자 그의 실력이 또 늘더니 바로 무왕이 되었다.처음 느껴보는 실력에 김표는 저도 모르게 더 강해졌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그러자 이번에는 무왕을 뛰어넘은 새로운 경계에 다다랐다. 김표는 자신이 비와 바람을 수시로 다룰 수 있는 신이 된 것만 같았다.최서준이 자기 앞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순간, 최서준이 김표 앞에 나타났다.“날 감히 네 부하처럼 굴려? 게다가 가짜 신분으로 날 속여? 이 버러지 같은 놈. 내 앞에서 뭐라도 된 줄 아나 보지?”김표는 저도 모르게 억눌러온 화를 모두 분출 해냈다.그는 바로 최서준을 향해 공격했다. 그러자 최서준은 그대로 재가 되어 사라졌다.복수를 마치자 김표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이 실력이면 정양파의 임원이 될 수도, 혹은 정양파의 주인이 될 수도 있었다.그렇게 생각하자 김표의 앞에 바로 정양파 주인과 장로들
주현아는 일부러 그 사람만 남겨두었다. 주현아는 천천히 그 사람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 사람은 몸이 굳어서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뼈가 천천히 부러지더니 피가 뚝뚝 떨어지고 피부가 한층 한층 벗겨졌다. 주현아는 눈앞의 이 사람을 죽도록 증오했다. 빨리 죽여버리는 것도 아까웠다.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고통스럽게 죽여주려고 했다. 주현아는 복수의 쾌감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마지막인 진후택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마음속의 본능에 굴복하고 원하는 것을 즐겼다. 그들은 모두 막강한 실력을 갖고 만족해했다.기절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최서준이 정신을 차렸을 때, 절은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아까 본 절은 환상인 것만 같았다. 오직 허여멀건 조각만이 허공에 떠 있었다. 조각은 약간 어두운 색이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다.하지만 최서준을 잘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 경험해 온 것은 절대 환각이 아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최서준이 어떠한 시험을 통과해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했다.그 조각은 중력에서 벗어난 것처럼 하늘에 떠 있었다. 최서준은 멍하니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운을 흘려보내니 어느새 기운이 다 회복되어 있었다. 설마 전에 제한도 이 조각이 걸어둔 것이었나? 이 모든 것의 배후가 이 조각인가?기운으로 훑어보았지만 조각에게서는 아무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두 눈으로 확실히 본 게 아니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앞으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최서준은 원래 머뭇거리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 상황은 너무도 이상했다. 처음에는 제한을 걸어놓았다가 지금 와서 갑자기 풀어버리다니. 최서준은 아무 상처도 입지 않고 다치지도 않았다.잠시 고민하던 최서준은 결국 유혹을 참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이 물건은 딱 봐도 귀한 물건 같았다.최서준의 손이 그 회색 조각을 만지는 순간, 최서준은 낯선 공간에 나타나게 되었다.“네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머뭇거릴
그 말을 들은 최서준은 바로 이해했다. 전에 겪은 힘듦이 다 시험이었다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노인은 멈칫하더니 이어서 얘기했다.“역시 조금은 아까워. 전에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이 비경에 들어왔을 때는 아무 성과도 없이 이곳에서 죽어버렸는데. 결국 너희들이 찾아내는구나. 그럼 이제 제대로 된 일을 얘기해 보자. 아마 이 비경에 대해서 잘 모르고 들어왔을 거야. 이 비경은 원래 이곳에 있는 게 아니야. 우리가 살던 그 시대에, 하늘에서 수많은 패 쪽이 떨어졌었어. 그 패 쪽들은 비경으로 들어갈 수 있는 매개물이었어. 우리는 이 비경이 수련에 적합하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수작을 부려서 억지로 이곳으로 들어왔어. 하지만 이곳에 들어온 후 나갈 수 없다는 걸 뒤늦게 알아버렸지. 결국 이곳에서 모두 죽었어. 하여간 누구 하나 살아 나간 사람이 없었어. 그래서 대하에 잘못된 정보만 남겼지.”노인의 그림자가 파르르 떨리더니 보일락말락 했다.“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구나. 일단 중요한 것만 얘기하마. 첫째, 이곳은 쉬운 곳이 아니니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해야 한다. 둘째, 이 결정은 나의 기술이 있어. 네 실력을 내 생전의 실력 정도, 혹은 무신의 경계까지 끌어올려 줄 수 있지. 하지만 이 결정을 받아들이는 건 기회이자 위기야. 선택은 너의 몫이니 제대로 생각하거라. 셋째, 앞으로 대하로 돌아간 후 잔비의 후대를 만난다면 잘 챙겨주거라. 내가 받은 은혜는 네가 갚아야 할 것 같구나. 넷째, 이곳은 내가 기운을 숨겼기에 다른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사라지면 내가 만든 진법과 환각도 다 사라진다. 너희가 본 오아시스, 왕성 등은 모두 환각이야. 그래서 너희는 바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발각될 것이다. 다섯째, 이건 다른 네 명의 욕망이다. 한번 지켜봐도 좋아. 마지막으로, 넌 나와 다른 결말을 보기를 바란다.”노인은 많은 말을 남겼다. 최서준은 알아들을 듯 말 듯 했다. 대충 그가 유언을 남기고 있다는 것과 자기가 이룬 것들을 최서준에게 전해주고 있다
남양시.해성 그룹 대표이사 사무실.김지유는 두 눈을 부릅뜨고 연신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눈앞의 젊은 남자를 바라봤다.“뭐라고? 그쪽이 내 약혼자란 말이야?”“맞아. 3년 전에 당신 할아버지가 우리의 혼약을 맺어주셨어. 이건 혼약서야. 못 믿겠으면 봐봐.”젊은 남자의 이름은 최서준이다. 그는 말하면서 옷 주머니에 넣어둔 혼약서를 꺼냈다.김지유는 혼약서를 확인한 후 죽고 싶은 충동까지 생겨났다.이 혼약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진짜였다. 위에 할아버지 김호석의 글씨체가 있고 심지어 인감까지 찍혀져 있었다.김지유는 숨을 깊게 몰아쉬고 차가운 표정으로 되물었다.“그쪽 이름이 최서준이야?”“맞아.”최서준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또렷한 이목구비에 뽀얗고 탄력 있는 피부까지 더하니 아무리 인상을 찡그려도 남심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타이트한 정장은 화끈한 몸매를 고스란히 드러냈는데 그중에서도 한 줌 되는 개미허리가 유난히 인상적이라 프로 모델이 와도 무색해질 따름이었다.그가 야릇한 눈길로 빤히 쳐다보자 김지유는 사납게 쏘아붙였다.“지금 어딜 쳐다봐?”다만 이어진 최서준의 한마디에 그녀는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트렸다.“얼굴은 90점, 몸매는 100점, 내 와이프가 되기엔 뭐 그럭저럭 봐줄 만 해.”“뭐라고...”김지유는 피를 토할 것만 같았다.그녀는 무려 재벌 가문 김씨 일가의 따님이자 해성 그룹 대표직을 맡은 하늘의 선택을 받은 완벽한 여자다.가문의 힘을 빌리지 않은 전제하에 자수성가하여 시가총액 2천억이 넘는 회사를 설립했다.그 외에도 남양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으로 불려 얼마나 많은 훌륭한 남자들이 그녀에게 푹 빠져들었는지 모른다.다만 눈앞의 이 촌놈은 검은 민소매에 헐렁한 바지, 거기에 지저분한 조리 한 켤레를 신고 있다. 잘생긴 얼굴만 빼면 아예 대놓고 촌스럽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런 촌뜨기가 감히 김지유한테 와이프로 봐줄 만 하다고 망언을 내뱉다니?그녀는 차오르는 분노를 꾹 참았다.“말해
김지유는 최서준을 빤히 쳐다보며 얼굴에 거만함이 가득 차 있었다.그녀의 옆에 있던 비서 반윤정도 시큰둥한 눈길로 최서준을 흘겨봤다. 거지 따위가 어딜 감히 대표님을 넘보려고?“그렇게 해.”최서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하지만 네 말은 소용없어. 이 혼약은 너희 할아버지가 정해주신 거니 내가 할아버님 병 치료를 다 마치거든 친히 혼약을 해지하셔야 해. 걱정 마, 할아버님만 동의해주신다면 나 절대 집착 안 해.”“아니.”김지유는 그가 미련을 못 버리는 줄 알고 점점 더 야유 어린 눈길로 돌변했다.“이건 내 결혼에 관련된 일이야. 내가 알아서 해. 우리 할아버지 병도 내가 방법 구해볼 테니까 넌 신경 쓸 필요 없어.”그녀는 냉큼 수표 한 장 건넸다.“이건 10억이야. 나랑 이 혼약 해지해주겠다면 이 돈 너 줄게. 나한테 10억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너 같은 최하층 서민들에겐 아마 평생 먹고 놀 수 있을 테니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김지유는 비난 섞인 미소를 날렸다. 마치 거지에게 돈 주듯이 그를 깔봤다.최서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됐어. 내가 아무리 가난해도 이런 거지 취급 당할 정도는 아니야.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 결혼 무르겠으면 김호석 씨더러 직접 찾아와서 얘기하라고 해.”말을 마친 최서준은 문을 박차고 뒤도 안 돌아본 채 자리를 떠났다.“대표님, 저 자식 너무 경솔한 거 아닙니까? 뭣 하러 저런 놈한테 예의 갖추세요?”비서 반윤정이 씩씩대며 물었다.“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가여운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뿐이야.”김지유는 입술을 꼭 깨물고 분노 조로 쏘아붙였다.“돈 없으면 남양에서 살아남기도 힘들어. 감히 장담하는데 저 녀석 사흘을 못 버티고 내게 돌아와 구걸할 거야. 에이 됐다, 쟤 얘긴 그만해.”김지유가 머리를 내저었다.“아참, 윤정아, 나 대신 남양 실세 최우빈이랑 약속 좀 잡아줘. 5년 전에 간경화 말기로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던데 천재 의사라고 불리는 신의의 치료를 받고 다 나았대. 그 의사를 모실 수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