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긴.”민도준은 모처럼 권하윤의 의견에 동의했다.곧이어 그의 커다란 손은 권하윤의 허벅지를 타고 점점 아래로 내려오더니 그녀의 가는 발목을 꽉 잡았다.그제야 그는 고개를 숙이며 욕망을 띤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이따가 이 다리가 얼마나 쓸모 있는지 한 번 보여줘 봐. 만약 마음에 들면 자르지 않을게. 하지만 마음에 안 들면…….”자기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권하윤은 온 힘을 다해 민도준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비록 약효가 이미 지나 아까처럼 죽을 것 같지 않았지만 마음속에 막혀 있던 응어리가 내려가서인지 마음에서부터 전해지는 즐거움이 단순한 육체적인 즐거움을 뛰어넘었다.그사이 민도준은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권하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하윤 씨 신음 소리가 아까 약 먹었을 때보다 더 야하게 들리는 거 알아?”의식이 약간 흐릿해졌던 권하윤은 한참 뒤에야 그의 말뜻을 이해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하지만 민도준이 그녀의 입술을 짓씹어 대는 바람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다시 입을 열었다. 민도준은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이 나지막하게 웃었다.“계속 소리 내지, 왜 멈췄어? 나 하윤 씨 목소리 듣기 좋은데.”…….민도준이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둔 결과 권하윤은 그의 어깨에 걸쳐진 채로 별장에 돌아왔다.오는 내내 그녀를 바로 씻겨줄 거라며 달래던 민도준은 처음에는 약속을 지키는 듯했으나 한참 동안 목욕을 하고난 뒤 역시나 그녀를 침대로 끌고 올라가 다시 뒹굴기 시작했다.결국 몸이 불편해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걸 한꺼번에 몰아 하게 되었다.그날밤 누군가는 자고 싶어도 자지 못했고 누군가는 자고 싶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이미 엉망진창으로 된 거실에서 공아름은 눈시울을 붉힌 채 눈을 떴다. 날은 점점 밝아왔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그런 그녀의 모습에 메이드들은 전전긍긍하며 감히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고 더욱이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솔직히 방금 메이드 하나가 발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공아름이 던진 물건에 머리가 깨졌었
“공…… 공아름 씨?”놀라움 뒤에는 강렬한 공포가 잇달았다.‘공아름이 왜 나를 여기로 데려왔지? 설마 내가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라는 걸 알았나?’강민정이 별의별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공아름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메시지에서 민도준 씨와 권하윤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했던데 무슨 뜻이지?”“어…….”강민정은 너무 놀란 나머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아름이든 민도준이든 모두 그녀가 감히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이기 때문이었다.만약 민도준이 그녀가 공아름한테 허튼소리를 지껄였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녀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다.한참 동안 계산기를 두드려 본 그녀는 아양 떠는 미소를 지었다.“공아름 씨,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죠? 뭔가 오해가…….”“아!”하지만 말이 끝나기 전 두피에 전해지는 고통에 그녀는 크게 소리질렀다.등 뒤에 서 있던 경호원이 그녀의 머리를 잡아당기고는 쉴새 없이 테이블에 박아댔다.“아…… 쿵…… 하지 마요…… 쿵…….”뜨거운 액체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자 강민정은 그제야 겁에 질린 듯 소리 질렀다.“말할게요, 말할게요!”경호원은 그제야 손을 놓더니 그녀를 공아름 앞으로 던져버렸다.강민정은 고아이긴 하지만 어릴 적부터 호의호식하며 걱정없이 자랐기에 갑자기 닥친 시련과 고통에 이내 흐느꼈다.“권, 권하윤이 민 사장님을 꼬셨어요. 그리고 두, 두 사람이…….”“두 사람이 뭐?”공아름의 말에 그녀는 몸을 흠칫 떨더니 과장되게 말했다.“권, 권하윤이 민 사장님 방에서 밤새 있는 걸 봤어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분위기가 쥐 죽은 듯 고요해지더니 공아름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그걸 네가 어떻게 봤지? 너도 민도준 씨 침대에 기어오르려고 한 거 아니야?”“저…… 전 그런 적 없어요. 전 화장실에 다녀오려고 했지, 아니 물 마시러…….”공아름의 싸늘하고 음침한 눈빛에 놀란 강민정은 이내 설명을 덧붙였다. 하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하면 말할수록 말도 안 되는 변명만
민시영이 마침 뭐라고 더 말하려던 찰나 다급한 전화벨이 그녀의 말을 끊었고 액정에 표시된 이름에 그녀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응. 아름아, 무슨 일이야?”한참 동안 통화를 하던 민시영은 이내 권하윤을 향해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하윤 씨, 미안해요. 아름이한테 급한 일이 생겼는지 절 찾네요. 가봐야 할 것 같아요.”“괜찮아요. 먼저 가세요. 전 조금 앉아 있다가 갈게요.”“그래요.”민시영은 몇 걸음 걸어가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권하윤을 힐끗 살폈다.그 시각 권하윤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왠지 싸늘하고도 쓸쓸한 분위기를 풍겼다.그때.“아가씨.”이미 문을 열며 민시영을 부르는 케빈의 말에 그녀는 이상함을 뒤로 한 채 차에 앉아 그곳을 떠났다.-공아름의 저택에 들어선 순간 민시영은 이미 난장판이 된 바닥을 보고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직감했다.티테이블 위에 놓인 식어버린 죽은 그 앞에 앉아있는 공아름과 마찬가지로 서늘한 한기를 뿜어내고 있었다.바닥에 널린 꽃병 조각을 지나 그녀 앞에 다가간 민시영은 이내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아름아? 왜 그래?”그 말에 고개를 든 공아름의 눈은 이미 빨간 핏발이 서 있었다.“민도준 씨와 권하윤 무슨 사이야?”그녀의 말에 놀란 것도 잠시 민시영은 곧바로 상황을 알아차렸다.‘이렇게 물어본다는 건 아직 증거를 잡지 못했다는 거겠지. 그저 의심하는 단계인가보네. 그렇지 않으면 공아름의 성격에 벌써 하윤 씨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도 남았을 테니까.’“무슨 사이냐니?”민시영은 일부러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몇 초간 멈춰있다가 입을 열었다.“권하윤 씨가 승현이랑 약혼했으니까 도준 오빠한텐 제수씨지.”“그거 말고!”밤을 꼬박 새운 공아름은 점점 이성을 잃어갔다. 그녀는 민시영의 팔을 꽉 잡으며 따져 물었다.“두 사람 부적절한 관계야? 민도준 씨가 그 여자 건드린 적 있어?”그 말에 민시영은 피식 웃으며 그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아름아, 그게 무슨
말을 하려던 권하윤은 순간 목이 메어왔다. 민도준이 자기를 뭐라고 저장했는지 모르는 데다 전화를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지라 순간 불안했다.때문에 몇 초간 머뭇거린 끝에 엄숙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네, 민 사장님한테 볼일 있거든요.”그 시각, 전화를 받은 여자는 [제수씨]라는 세 글자를 힐끗 보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응? 도준 오빠가 언제부터 집안사람들이랑 이렇게 가깝게 지냈었지? 제수씨마저 아무 때나 전화 오고? 아니면 두 사람 혹시 업무적인 왕래가 있나?’생각할수록 답을 알 수 없자 여자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입을 열었다.“저기 혹시 급한 일이에요? 급하면 제가 바로 오빠 불러올게요.”“급한 일은 아니에요.”여자의 익숙한 말투에 권하윤은 마음이 무거워져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바쁘지 않을 때 다시 전화할게요.”“그래요, 그럼 뭐라고 전할까요?”“아닙니다. 고마워요.”-전화를 끊자마자 차폐실에서 나오는 민도준을 보자 여자애는 곧바로 그에게 달려갔다.“오빠, 방금 전화 왔었어.”“응? 네가 대신 받았어?”민도준은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핸드폰을 보더니 입꼬리를 씩 올렸다.그 모습을 본 순간 여자애는 등골이 오싹했다. 이윽고 예전에 겪었던 일들이 머리 속으로 흘러들자 그녀는 이내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뒤로 물러났다.“나, 나 일부러 받은 거 아니야. 오빠도 알잖아. 나 심심한 거 못 참는다는 거. 하하하…….”점점 뒤로 물러나고 있던 그녀는 속으로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진소혜.”“나 다시는 안 그럴게.”고개도 들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서 자기를 부르는 민도준의 소리에 진소혜는 억장이 무너졌다.하지만 민도준은 그녀를 무시한 채 최근 통화기록을 뒤적거리더니 이름을 확인한 순간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었다.“두 사람 무슨 대화 했어?”“뭐?”갑자기 전환된 화제에 진소혜는 몇 초 흘러서야 반응했다.“뭐, 그냥 오빠한테 할 말이 있다던데?”그 말을 하고 난 뒤 진소혜는 민도준의 입가에 걸
권하윤이 안으로 들어가자 진소혜도 이내 뒤따랐지만 민도준이 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문에 얼굴이 부딪치고 말았다.‘무슨 비밀 이야기를 하려고 난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는 거야?’그녀는 아픈 코를 부여잡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하지만 문에 바싹 붙어 안에서 오가는 대화를 엿들으려 할 때 마침 한민혁이 그녀에게 다가왔다.“소혜 씨, 칩을 꺼냈으니 차폐실에 가보세요.”“쉿. 급할 거 없어요.”진소혜는 문을 가리키며 소곤거렸다.“저기, 도준 오빠와 하윤 언니는 대체 무슨 업무 왕래가 있는 거예요?”“네?”‘그걸 나더러 어떻게 말하라는 거야?’“아마, 출입……국 무역에 관한 업무일 거예요…….”-방 안.권하윤은 사뭇 진지한 말투로 강민정이 공아름에게 모든 걸 고자질한 사실을 얘기했다.만약 그녀가 민도준의 다리 위에 앉아있다는 사실만 무시하면 꽤 무역 관련 보고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이게 다 도준 씨 때문이니까 나 혼자 모든 걸 뒤집어쓰게 하면 안 돼요.”권하윤은 손가락으로 민도준의 단단한 가슴을 쿡쿡 찌르며 억울한 듯 중얼거렸다.그러자 민도준은 자꾸만 움직이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눈썹을 치켜떴다.“할 거 다 했으면서 억울한 척하기는.”“매번 당하는 건 저였잖아요.”시무룩해서 불만 섞인 말투로 투덜거리던 권하윤은 남자의 눈빛에 이내 수그러들었다.“그럼 그냥 내버려 두겠다는 거예요?”남자의 긴 손가락은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를 느긋하게 누볐다.“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그냥, 저 보호해 줘요.”권하윤은 말하면서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며 애교를 부렸다.‘하. 원하는 게 있으면 발톱을 숨긴 채 온갖 애교를 부리다가 위기가 지나가면 다시 발톱을 드러내고 하악질을 해대는 꼴이 딱 영락없는 고양이라니까.’민도준은 그녀의 애교에 아무런 흔들림도 없는 듯 입을 열었다.“하윤 씨 평소에 잔머리 잘 굴리잖아. 내가 굳이 보호해 줄 필요까지 있을까?”“제가 언제 잔머리를 굴렸다고 그래요?”권하윤은 민도준의 다리 위에서 편한 자세로 바꿔 앉
민도준이 원하는 대로 침대에서 다양한 즐거움을 주기 위해 권하윤은 며칠간 이것저것 찾아보며 “학습”을 해댔다.하지만 그 뒤로 며칠 동안 민도준은 그녀에게 연락도 하지 않았다. 한민혁에게 슬쩍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민도준이 요즘 엄청 바삐 보내고 있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아주 건강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걸 강조했다.가뜩이나 “학습”에 흥미가 없던 차에 민도준이 바쁘다는 소식을 듣자 권하윤은 얼씨구 좋다는 식으로 “공부”를 내팽개쳤다. 공아름 쪽도 별 움직임이 없는 것 같으니 보호해달라고 민도준을 귀찮게 굴 필요도 없었다.그리고 오랫동안 권희연을 만나지 않았다는 생각에 권씨 저택에 들으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녀가 반쯤 도착했을 때 갑자기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여보세요? 누구시죠?”“권하윤 씨, 저 공아름이에요.”공아름이라는 세 글자에 권하윤의 심장은 쪼그라들었다.“공아름 씨가 웬일로 저한테 전화를 다 주셨죠?”“제가 오후에 민씨 집안사람들과 같이 리조트로 갈 생각인데 하윤 씨도 같이 가요.”권하윤은 본능적으로 거절하고 싶었지만 입을 여는 순간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물론 이번 한 번은 거절할 수 있었지만 공아름이 그녀를 시험하려는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 뒤로도 이런 전화가 끊이지 않을 게 뻔했다.게다가 너무 티 나게 굴면 오히려 의심받을 거라던 민시영의 말이 생각나 그녀는 일부러 기쁜 듯 대답했다.“어머, 저도 초대해 주시는 거예요? 고마워요. 그럼 리조트 위치 알려줄래요?”흔쾌히 승낙하는 권하윤의 반응에 공아름은 눈살을 찌푸렸다.“제가 메이드한테 일러둘 테니 곧 연락 갈 거예요.”“그래요. 꼭 갈게요. 전화까지 해서 직접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공씨 가문의 리조트라니 기대되네요…….”공아름은 권하윤의 수다에 짜증이 났는지 바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됐어요. 전 바빠서 이만 끊을게요. 전화 기다려요.”하지만 전화를 끊는 순간 의심이 반으로 줄었다.권씨 가문에 관한 소문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모든 여자가 남자
민지훈은 권하윤과 민도준의 사이를 알고 있었기에 대답 없는 권하윤을 보자 곧바로 농담조로 말했다.“형이 정 보고 싶다면 못 만날 것도 없죠.”그의 말에 권하윤은 억지 미소를 지었다.“보고 싶다니요. 저 화장실 잠시 다녀올게요.”이곳의 화장실은 통나무집 모양으로 되어 있어 무척 정교했다.하지만 권하윤은 그걸 감상할 겨를이 없었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이상한 점을 모두 상세하게 써서 전송했다.하지만 장편으로 된 문장을 보내려니 또 지난번처럼 무시당하거나 민도준이 보지 못 할까 봐서 걱정이었다. 게다가 그가 공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있는 지금 전화를 할 수도 없었기에 급한 마음에 제자리를 뱅뱅 맴돌았다.그 시각, 리조트의 반대편 사격장.“슉-”“역시 민 사장님 솜씨는 알아줘야 한다니까요.”공기를 가르며 날아가던 화살이 정중앙에 꽂히자 주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손뼉을 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하지만 민도준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듯 활을 옆에 던져버렸다.“살아 있는 사냥감이 아니라서 재미없네요.”‘살아 있는 사냥감…….’그 말을 들은 주위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그때 프로젝트 매니저인 주상현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여긴 살아 있는 사냥감이 없어요. 기회가 되면 해원에 있는 사격장으로 오세요. 그곳엔 뭐든 있으니 제대로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그래요.”민도준의 긍정적인 대답에 주상현은 겨우 이대로 위기를 넘겼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때 민도준이 갑자기 그를 바라보봤다.“아니면, 주 매니저님이 희생하시는 게 어때요?”갑자기 들려오는 충격적인 한마디에 주상현은 뻣뻣하게 굳어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그 모습에 벤치에 앉아 휴식하던 민도준이 활짝 웃었다.“농담이에요. 뭘 또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요?”‘농담이라고? 진짜 안 해본 것도 아니면서 농담이라면 누가 믿을까?’민도준 때문에 잔뜩 겁을 먹은 주상현은 주르륵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대충 닦더니 아부 섞인 웃
갑자기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고개를 홱 돌린 공아름은 예쁜 눈을 부릅뜨며 주상현을 쏘아보았다.하지만 그는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민도준이 계속 지켜보고 있어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그, 민 사장님께서 산 사냥감을 보고 싶다고 하셔서 낚시하러 왔습니다.”공아름은 속으로 일을 그르친 주상현에게 욕설을 퍼붓고는 그를 한 번 노려본 뒤에야 민도준에게 눈길을 돌렸다.민도준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녀의 독기 서린 눈빛은 이내 원망으로 변했다.“민도준 씨가 사격보다 낚시에 관심 있는 줄 몰랐네요. 설마…….”공아름은 권하윤 쪽을 힐끗 바라봤다. 하지만 그 시각 그들과 한참 떨어진 곳에 서 있던 권하윤과 민지훈은 민도준이 왔다는 걸 보지 못한 채 여전히 연습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그때 공아름의 질투 섞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여기에 도준 씨가 보고 싶은 풍경이 있거나……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건 아니ㅈ죠?”“맞아요.”민도준은 한 치의 만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모든 게 하찮다는 듯 흘겨보던 그의 눈빛이 끝내 공아름에게 떨어졌다.곧이어 그의 잇새 사이로 낮고도 허스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일부러 공아름 씨 찾아온 거예요.”“저를요?”언제 화를 냈냐는 듯 고아름은 이내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의 말을 다시 곱씹은 순간 말 못 할 기쁨이 마음속에 퍼졌다.하지만 가문의 고위 간부들이 있는 자리였기에 그녀는 이내 흥분을 가라앉히며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러면서 부러움과 놀라움이 담긴 여직원들의 눈빛을 받으며 입을 열었다.“저는 뭐 하러 찾아왔어요?”“아, 별일은 아니고. 지난번에 너무 인정사정없이 거절했던 것 같아 나쁜 생각이라도 할까 봐 위로해 주러 온 거예요.”민도준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가 자기한테 들이대다가 대차게 차였던 일을 그대로 사람들 앞에서 말해버렸다. 그리고 그 말을 꺼냄과 동시에 공아름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다.어릴 때부터 이런 모욕을 당한 적
연말이 되자, 하윤은 사람들 다 같이 경성에서 새해를 맞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진가연과 한성운도 그러고 싶어 했다.남은 사람은 양현숙이었다.하윤은 원래 양현숙을 데리고 경성에 오려고 했는데, 양현숙이 해성시의 집을 떠나기 싫어했다. 양현숙은 집을 지켜야 한다면서 오래 집을 비우면 너무 처량한 느낌이 난다고 했다.하윤은 양현숙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집뿐만이 아니라 이성호와의 추억이다.그래서 하윤은 그렇게 요구하지 않고 도윤을 데리고 자주 보러 갔다.이번에 하윤의 요청에 양현숙이 기분 좋게 동의하면서 31일에 같이 새해를 맞이하기로 했다.하윤은 손님 맞을 준비를 했고 곧 새해가 다가왔다. 양현숙이 하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조금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하윤에게 물었다.“하윤아, 네 오빠 귀국한다는데, 만나볼래? 싫으면 너희 방해하지 말라고 할게.”그때 병원에서 기분 나쁘게 헤어진 뒤로 만난 적이 없었다.승우는 도윤의 나이를 잘 기억하고 있어 가끔 나이에 맞는 장난감을 보내주었다.이렇게 여러 해 지나고 하윤은 전의 일을 마음에 담아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한 것에 대해 조금 자책했다. 양현숙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하윤은 양현숙이 중간에서 힘들까 봐 가볍게 말했다.“오빠 돌아왔으면 같이 오세요. 우리 한 가족 되게 오래 같이 못 만났잖아요?”양현숙은 기뻐서 대답했다.“알았어, 그렇게 오빠한테 전달할게.”...통화를 마친 하윤은 이 일을 도준에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승우가 하윤의 오빠지만, 하윤이 이 이년 사이에 아무 이성과 접촉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컷 모기까지 도준은 하윤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도준은 승우를 항상 경계해 왔다.도준이 동의하지 않을까 봐 그날 저녁 도준이 돌아왔을 때, 하윤은 120%로 잘 보이려고 했다.하윤은 발꿈치를 들고 도준의 외투를 벗겨주었다.“여보 왔어요? 어땠어요? 오늘 일은 힘들지 않았어요?”도준이 하윤을 힐끔 쳐다보고 소파에 앉아
하윤은 요즘 아들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았다.도윤은 다른 애들과 달리 장난감으로 놀기 좋아하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장 많이 하는 일이 책을 보는 일이었다.가끔 하윤은 도윤이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힘들까 봐 텔레비전 앞에 데려와서 애니메이션을 틀어줬다.그러나 하윤이 할 일을 하고 돌아오니, 도윤이 뉴스 채널을 돌려서 재밌게 보고 있었다.소파 위에 있는 작은 아들을 보고 하윤은 걱정이 앞섰다.‘설마 내가 너무 연습에 몰두해서 아들을 소홀히 했나? 그래서 아들이 상처를 받아서 저런가? 안 돼! 도윤에게 완벽한 동년을 줄 거야!’하윤은 이 일이 엄청나게 큰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동안 생각하고 도윤을 데리고 나이가 비슷한 아이들과 많이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많이 만나면 도윤의 동심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었다.하윤은 어디를 가던 도우미가 자기를 보는 것이 싫어, 그냥 아파트에 살았다. 이곳에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터가 있었고 그중에 모래로 촉감놀이 하는 곳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하윤은 그곳에 도윤을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날씨가 좋아 하윤은 도윤의 손을 잡고 그를 집 밖으로 데리고 갔다.모래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윤은 모래를 뿌리며 재밌다고 웃어대는 친구들을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하윤은 도윤의 표정을 보지 못하고 신나게 말했다.“도윤아, 친구들 얼마나 재밌게 놀아, 우리도 얼른 들어가서 놀자.”도윤은 눈썹이 붙을 정도로 찌푸렸지만, 하윤이 기대에 찬 모습에 하윤과 함께 놀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도윤은 하윤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은 채로 하윤과 함께 모래에 들어갔다.도윤의 눈썹과 눈은 하윤을 닮았고 나머지는 도준과 똑같았다. 너무 잘생겨서 순식간에 다른 애들의 주의를 끌었다.한 아이가 도윤에게 말했다.“우리 같이 모래 파서 궁전 만들자!”그 아이가 손을 잡으려고 하자 도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미안, 난 엄마랑 놀아야 해서.”하윤은 도윤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하는 줄 알고 마음속으로
하윤이 해성시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는데, 소혜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혜는 딸 민효연이 첫돌 생일을 쇠는 김에 미뤘던 결혼식도 같이 한다고 했다.지훈이 산을 구매해서 이제 산속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했다.하윤이 깜짝 놀랐다.“결혼식 한다고?”“네!”소혜는 간식을 먹으며 말했다.하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혜를 불렀다.“소혜야.”소혜가 목을 쭉 뻗었다.“네?”지훈이 욕실에서 몸을 내밀자, 빛나는 눈은 여우처럼 사람을 홀렸고 머리가 젖어 더욱 섹시해 보였다.지훈의 보조개는 아주 귀여웠다.“수건 가져다줘.”지훈의 섹시한 모습에 소혜가 다급히 말했다.“언니, 오빠한테 언제 시간 되는지 물어봐 줄래요? 그럼, 이렇게 정하고 저는 남자 만지러, 아, 아니, 수건 가져다주러 갈게요!”‘헤헿.’통화를 마친 하윤이 소혜가 보낸 웨딩사진을 보고 마음이 조금 찡했다.소혜를 보고 그런 것이 아니라 지훈을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저녁 식사를 할 때, 하윤이 이 일을 도준에게 말했다.“지훈이 소혜랑 결혼식 올린대요. 다음 달에 한다는데, 당신이 언제 경성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던데.”도준이 하윤을 바라봤다.“그건 당신한테 달린 거 아닌가? 당신이 자꾸 밖으로 돌아다니니까 내가 힘을 좀 써서 당신을 잡아와야지.”“말하는 것 좀 봐요. 제가 무슨 나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말하네요? 다 연습하러 가는 거지.”하윤은 젓가락을 입에 물고 일부러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소혜랑 지훈이 결혼식 한대요.”도준은 물을 마시고 콧소리가 섞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도준이 눈치채지 못하자, 하윤은 더 선명하게 눈치를 줬다.“아니, 쟤네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미뤘던 결혼식 올리는 거네요?”도준이 웃으며 말했다.“아니면? 아기를 배속에 다시 밀어 넣고 결혼식 할 수는 없잖아?”하윤은 화가 나 그릇에 담겼던 완자에 구멍을 뚫었다.“맞아요! 맞는 말이죠!”도준이 눈치가 없자, 하윤은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도준과 한마디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을 봤다.
경성에서 하윤이 자기 전에 핸드폰을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침대에서 급히 일어나 욕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여보!”“도준 씨!”“도준 씨!!”욕실의 안개가 도준의 넓은 어깨에 흩어졌고 도준은 가운을 걸치고 나왔다. 가슴팍이 보였고 물기를 채 닦지 않아 가슴팍과 근육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도준은 하윤의 다급한 부름에 어디 부딪힌 줄 알고 급히 나왔는데, 나와보니 하윤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리고 있었다.도준은 들고 있던 수건으로 하윤의 엉덩이를 때렸다.“왜 그래? 무슨 귀신이라도 봤어?”하윤은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도준의 어깨에 놓고 핸드폰을 도준에게 들이밀었다.“빨리 봐봐요! 빨리!”하윤이 너무 날뛰어 핸드폰을 너무 가까이 대는 바람에 도준은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도준은 하윤의 손목을 뒤로 잡아당겼지만 하윤이 손을 흔드는 바람에 인내심이 없어 하윤의 허리를 안고 침대에 눕혔다. 혹시라도 너무 흥분해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보기 귀찮으니까 얘기해 줘.”“고은지가 결혼한대요! 누구랑 하는지 맞혀 봐요!”도준이 물어보기도 전에 하윤은 참지 못하고 얘기했다.“곽준호! 곽도원의 아들 말이에요! 세상에,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결혼하게 된 거죠?”도준은 침대에 기대며 말했다.“아무 연관이 없진 않지. 전에 곽도원이 고은지를 새 아내로 맞이한다고 술자리를 열었었어.”“네?”하윤이 깜짝 놀랐다.‘그럼, 고은지가 곽준호 새엄마? 세상에! 나보다 더 용감하네?’하윤은 참지 못하고 도준을 밀었다.“얼른 얘기해 봐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도준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팔을 하윤의 다리에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하윤은 도준의 팔을 치워버렸다.“쳇, 당신도 몰라요?”하윤의 귀여운 모습에 도준이 하윤의 볼을 꼬집으며 그녀를 돌렸다.“그렇게 알고 싶으면 결혼식에 가면 되겠네.”하윤은 볼이 꼬집혀서 말을 똑바
준호는 가볍게 물었지만, 눈빛에는 긴장함이 깃들어 있었다.준호는 은지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그녀의 마음도 자신처럼 뜨거운지 보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은지가 왜 준호를 찾지 않고 준호가 왔을 때 그에게 기회를 주는지 알지 못했다.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수도 없이 많아진다. 은지를 볼 수 없을 때는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또 만나니까 가지 말라고 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지 말라고 잡으면 은지 마음속에 준호가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준호의 마음은 조각조각으로 나뉘어 흩어져 버렸다.준호의 손에는 점점 힘이 들어갔고 자신의 기분을 은지가 느끼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난 너 속이기 싫어, 난 너 없어도 잘 살아.”준호의 손에 힘이 빠졌고 빛나던 눈도 빛을 잃었다.준호가 기분이 처져 손을 떼려고 하는데, 은지의 차가운 손이 준호의 손등을 감쌌다.“근데 네가 있으면 난 더 기분이 좋아서 매일 행복하게 살 거 같아.”실망했던 준호는 조금 희망을 얻고 말했다.“왜 말을 그렇게 늦게 해! 날 그렇게 힘들게 할 거야?”은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마도?”준호는 은지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고, 이렇게 정말 기뻐서 나오는 웃음은 더 본 적이 없었다.준호는 성큼성큼 은지에게 다가가 입맞춤했다.“고은지, 너 이번에 또 가면 너 절대 안 놔줄 거야!”“응.”비음이 섞인 은지의 목소리에 준호의 몸은 순식간에 타올랐고 준호는 은지를 품에 안았다.“더 이상 나 화나게 하면 안 된다?”“될수록 그렇게 해볼게.”은지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네 성격에는 문제가 없어?”“너!”준호는 화를 내고 싶었지만 계속 품에 안고 싶었던 은지를 안고 있어 화를 낼 수 없었다.“성격 안 좋은 거 나도 알아, 차근차근 알려주면 나 다 고칠 수 있어.”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도 말은 잘 듣네.’“다 고쳐도 나 좋아해야 된다? 안 그러면 너 안 놔줄 거야!”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될
아까는 은지에게 핍박을 당해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차에 앉아 있었고 은지가 준호를 지그시 바라보자, 준호는 그 물음을 다시 물어볼 수 없었다.그러나 준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생각한 적 있어.”아까까지 겨울의 추위에 덜덜 떨던 준호가 은지의 대답에 봄으로 끌려온 것 같았다.준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기분이 좋아 다시 물었다.“뭐라고?”은지는 담담하게 바로 대답했다.“이 6개월 동안 너 생각한 적 있다고.”이 6개월 동안 은지는 준호처럼 어린 사람, 준호처럼 무모한 사람, 은지를 마음에 들어한 사람,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 중에 준호처럼 진심으로, 물을 끼얹어도 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은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은지는 30여 년간 계속 연기를 했었다. 이성희한테서 귀염을 받으려고, 고씨 집안의 사랑을 받으려고, 곽도원의 귀염을 받으려고 말이다.은지가 수많은 자태를 뽐냈지만, 준호는 은지가 가장 악독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고도 좋아한 사람이다. 그래서 준호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생각났다.“그럼, 앞으로 생각 안 할 거야.”“너!”준호가 다급히 말했다.“왜? 아까는 내 생각 했다며?”은지는 대답하지 않고 준호를 바라보았다. 은지는 준호의 화가 차츰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준호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나, 나도 네 생각 했어.”이때 차의 라디오에서 로맨틱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준호는 평소에 이런 노래를 듣기 싫어했는데, 지금 들으니 아주 로맨틱했다.준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은지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가게는 저기 있어.”은지가 물어보지 않자, 준호도 은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나랑 가는 거야, 마는 거야?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용기가 안 나!’마을이 너무 작아 노래 한 곡이 채 끝나지 않았는데, 목적지에 도착했다.은지가 차에서 내리자, 준호도 따라서 내렸고 은지가 계단으로 올라가자, 준호도 따라
호텔 내부의 뜨거운 공기에 준호는 재채기를 했고 곧이어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은지를 발견했다.반년이 지나 은지의 머리는 좀 길었지만 조금 헝클어진 상태로 풀어 놓았다.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고 전에 비해 가벼운 느낌이었다. 준호는 뜨거운 공기 때문에 목이 말랐다. 열정 넘치는 아저씨가 준호 보고 얼른 와서 앉으라고 하면서 술을 부어주었다.“은지 남자 친구죠?”준호는 은지가 또 전처럼 새엄마라고 할까 봐 경계했다.그러나 은지는 그저 간결하게 대답했다.“아니요.”준호는 한숨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준호는 또 짜증이 났다.이제 은지가 준호의 새엄마도 아니니 정말 아무런 사이가 아니다.희현은 은지에게 귓속말했다.“저 사람은 왜 또 언니 잡으러 온 거예요? 제가 문 지킬 테니까 도망갈래요?”말을 채 하지 못했는데, 은지가 희현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왜요? 이 계획 별로예요?”“아니, 너 목소리 너무 커서 저 사람이 너 보고 있어.”과연 고개를 돌리자, 준호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희현을 바라보고 있었다.희현은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제 막 유명해지려고 하는데, 죽으면 안 되지.’희현이 한 말 때문인지, 은지가 준호를 불러 놓고 준호랑 말을 안 해서인지, 밥을 채 먹지 못했는데, 그는 은지가 화장실을 갔을 때 막아섰다.은지가 손을 씻고 돌아섰는데, 준호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지는 놀라지 않았고 오히려 준호가 지금까지 버틴 것이 기적 같았다.“손 씻으려고?”준호는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은지의 말에 또 화가 났다.“손 씻는다고? 내가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왔는데, 손 씻으러 왔겠어?”은지는 준호의 손에 묻은 양념을 가리키며 말했다.“그건 아니겠지만, 손은 씻어야 할 거 같아.”준호는 은지가 한 말에 반박할 수 없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씻었다.손을 다 씻은 준호는 은지가 자리에 돌아갔을 줄 알았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은지가 옆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두 사람은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은지가 준호를 보자,
‘설마 고은지?’곧이어 여자가 목도리를 벗자, 얼굴이 보였다.은지가 아니라, 전에 은지와 함께 준호를 속였던 배우 희현이었다.연말이 되자, 밖에서 일하던 자녀들이 다 무진으로 돌아왔기에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많이 세워져 있어 희현은 준호의 차를 의심하지 않고 차 주변을 돌며 통화를 했다.“여보세요? 언니, 저 도착했는데, 어디 계세요?”“호텔 쪽에 있어요? 아, 그럴 줄 알았으면 택시 타고 호텔로 갔죠.”준호는 희현의 통화를 듣고 마음이 다시 뜨거워졌다.‘언니? 고은지인가? 고은지도 여기 있나?’...무진에 호텔이 하나밖에 없었지만, 항상 손님이 별로 없었다. 연말이라 손님이 더 없어서 주인장은 일 층에 탁자를 다 붙여서 음식을 해놓았다. 아이들이 모여 있어 희현이 왔을 때 아이들이 희현에게 달려왔다.“희현 언니!”희현은 통쾌하게 용돈을 나눠줬다.“이리와, 언니 돈 많이 벌어서 너희 용돈 줄게!”아이들을 보내고 희현은 창 옆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로 다가갔다.“언니, 저 왔어요!”은지가 처음에 무진에 왔을 때는 준호를 피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필요가 없어져 사탕 가게를 책방으로 바꾸고 알바생을 찾았다. 이 책방에서 책을 보면 사탕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했다.이 반년 동안 은지는 여행을 다니면서 지냈다.며칠 전, 호텔 주인이 은지보고 무진에 와서 연말을 보내라고 했고 아이들이 은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오기로 했다.희현은 옆 마을에서 드라마를 찍다가 같이 식사하러 왔다.식탁에는 맛있는 음식이 한 상 차려져 있었고 사람들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둘러앉았다.밖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호만이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차가워진 도시락을 들고 화를 냈다.준호는 은지가 외롭게 연말을 보낼 줄 알고 도시락까지 싸서 왔는데, 이렇게 화목하게 모여서 보낼 줄 몰랐다.준호는 몇 시간을 운전해서 여기까지 온 자신이 참 바보 같았다.이렇게 도시락을 건네주기는 좀 그렇고, 아무 말도 안 건네고 가자니 아쉬
준호도 그동안 못 완성했던 임무를 마저 수행해야 했다.전에는 은지를 찾는 데만 집중해서 임무는 뒷전이었다. 이번에는 각 지역을 하나씩 제대로 돌아봐야 했다.돌아본 곳이 많아질수록 준호의 마음도 점차 평온해졌다.마을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자연과 마주하니 준호의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다.3개월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준호는 남한성에 돌아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냈다.팀장은 준호가 전과 달라진 모습에 칭찬했다.“이런 일 많이 하니까 좋은 점이 있네.”...그 후로 준호는 예전처럼 훈련하고 임무를 수행했다.이곳에 있으면 외계의 간섭을 덜 받기에 사람들이 준호의 집안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 개의치 않았다.그저 매일 밤 침대에 누우면 준호는 신옥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은지 씨가 정말 차가운 사람이라면 날 위해 비밀을 지켜주지 않았을 거야.’신옥영도 이 비밀을 준호가 알게 되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은지처럼 작은 일도 따지는 사람은 무조건 알았을 것이다.준호는 전에 은지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냉혈 동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고은지 나한테 정은 있었나?’준호는 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뜨겁기도 했다.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만약 고은지가 나한테 마음이 없다면 이미 놔줬으니까 다시 가서 방해하면 안 돼. 근데 혹시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면?’...눈 깜짝할 사이에 연말이 되어 길거리는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준호는 신옥영이 머무는 저택으로 갔는데, 집안이 시끄러웠다.하나가 장원수를 지휘하며 집을 꾸몄고 하나는 신옥영과 함께 음식을 만들며 신옥영에게 애교를 부렸다.올해에 준호는 신옥영의 저택에서 이 부녀를 자주 봤는데,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살기 가득한 눈으로 장원수를 쏘아보며 일자리며 가족 관계까지 다 물어봤었다. 나쁘지 않았다.그러나 신옥영은 재혼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준호는 신옥영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자기는 신옥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