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연신은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날 위해 그렇게 할 필요 없어요.”“알아요. 하지만 나도 연신 씨를 위해 뭐라도 해주고 싶어요.”성씨 가문을 도울 기회가 생긴다면 당연히 도와야 한다.성연신이 복잡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에 팔을 감쌌다.홍자덕은 창백해진 얼굴로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딸의 미래와 비교한다면 그깟 돈이 뭐가 대수겠는가.심지안과 성연신은 이번 일을 성수광에게 알리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할아버지에겐 심장병이 있으니 자극을 받는 건 피해야 하니 말이다.“일단 병원에 가요. 열이 나면 안 되잖아요.”“그래요. 추웠다가 더웠다가 하는 것이 몸이 좀 불편한 것 같아요.”심지안이 연신 재채기를 하며 말했다. 머리도 조금 무거워진 듯한 느낌이었다.성연신이 그녀에게 눈길을 돌렸다. 창백한 얼굴에 이상한 붉은빛이 돌았고 목소리도 모두 잠긴 것이 독감 전조증상이 분명했다.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오늘 많이 힘들었죠?”심지안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그런 말도 할 줄 알아요?”참 쉽지 않은 일이다.자기밖에 모르는 남자가 그런 말을 내뱉다니.성연신의 입꼬리가 격렬한 경련을 일으켰다.“지안 씨 마음속에서 난 도대체 어떤 사람이에요?”“장난이에요. 당신은 내 마음속에서 가장 완벽하고, 따뜻하고, 멋있는 남자예요!”물론... 성격도 가장 더럽기도 하고요.심지안은 조용히 한마디 더 보탰다.성연신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마음에 드네요.”“참, 수영 잘해요? 저수지에 뛰어들어 날 구하려고 했잖아요.”심지안이 진지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정말 많이 감동받았어요. 하지만 다음엔 그러지 말아요. 날 구하다가 오히려 당신 몸이 상할 수도 있잖아요.”“그 입 다물어요. 다음이란 없어요!”“맞아요. 다음은 없어야죠. 내가 괜한 말을 했네요.”“당신을 구하는 건 내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당신은 법률상 내 아내잖아요. 당연히 구해야죠.”심지안이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돌연 눈앞의 이 남
심지안은 깊은 밤이 되어서야 잠에서 깼다. 혼미한 정신의 그녀의 눈에 어렴풋이 간호사의 모습이 들어왔다.“고열이 지속되고 있어서 링거를 계속 맞아야 해요. 오늘은 일단 입원해 지켜봐요.”“몇 도인데요...”“39도요.”진유진이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며칠 동안 푹 쉬어. 아무것도 하지 말고.”“그럼 회사 일은... 그리고 연신 씨의 생일, 내일 모레는 재판이 있는데...”“연신 씨가 보광 그룹의 대표인데 회사일 걱정은 왜 해. 그리고 생일은 이번 한 번 밖에 있는 거 아니잖아. 다음 기회에 잘 축하해 주면 돼. 선물은 내가 이미 전해줬어. 모레쯤이면 네 몸도 괜찮아질 테니까 재판엔 참석할 수 있을 거야.”“응... 연신 씨는?”“회사에 일이 있는 것 같았어. 조금 전에 갔어.”“내가 준 선물을 보고 좋아했어?”그에게는 너무나도 저렴한 선물이다. 너무 하찮은 물건이라 얼굴을 찌푸리진 않았을까...진유진이 선물을 받던 성연신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말했다.“표정은 평온했는데 자세히 보니까 입이 귀에 걸렸던데?”심지안이 입을 삐죽거렸다.“홈웨어는 그다지 귀중한 물건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좋아했다고?”“맞아. 내 생각에 성연신 씨는 널 좋아하고 있어.”그녀의 눈동자가 순간 반짝거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냥 할아버지가 날 좋아하니까 그것만으로 내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아니. 정말이야. 날 믿어. 감정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좋아하는 건 확실해. 저수지에서 널 봤을 땐 어떤 반응이었어? 긴장한 모습이었어? 두려워하는 모습이었어?”“너무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 못했어. 그냥 저수지에 뛰어들어 날 구하겠다는 말만 들었어.”진유진이 화들짝 놀라며 무릎을 탁 쳤다.“이건 좋아하는 것뿐만이 아니야. 이건 사랑이야.”“허튼소리 하지 마.”심지안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 사람이 날 사랑하는지 아닌지 내가 느끼지 못할 것 같아?”“때론 당사자보다 주위 사람의 눈에 더 잘 보
심지안은 입을 삐죽거렸다. 임시연이라는 이 여자는 글씨도 잘 쓰네.그녀는 편지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사진을 찍어 성연신에게 보냈다.성연신은 오후가 되어서야 ‘알겠어요’라는 간단한 네 글자로 답장했다.심지안이 심통이 났다. 꿈에 그리던 여자가 편지를 보내왔는데 반응이 왜 이렇게 뜨뜻미지근하단 말인가?이럴 리가 없다.심지안은 처음 임시연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만큼 호기심이 생기진 않았다. 어찌 됐든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 성연신과는 헤어지게 될 테니 말이다.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여자가 누구인지, 앞으로 누구와 결혼할지는 그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그저 마음이 조금 쓰라릴 뿐이다.함께 생활한 시간이 기니 감정이 생기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하물며 원이와도 감정이 생기지 않았던가.성연신의 오늘 퇴근 시간은 심지안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빨랐다.하지만 그와 함께 장학수도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연신아, 섭섭하게 왜 생일을 몰래 보내려고 그래. 우리 형제들을 모두 모아 함께 놀아야지.”“입 다물어.”성연신이 차가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장학수는 곧바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심지안이 난처한 얼굴로 그를 보며 말했다.“장 변호사님도 오시는 걸 알았다면 음식을 더 준비했을 텐데 지금은 다섯 개 요리밖에 차리지 못했어요. 부족할 것 같은데 몇 개 더 할까요?”장학수가 밥상을 슥 훑어보고는 말했다.“확실히 좀 부족하긴 하네요.”집에서 혼자 먹을 때에도 십여 개의 요리를 차려놓고 한 요리 당 두 번씩 집어먹는다.성연신은 그들 사이에서도 가장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이었다.“너 돼지야?”성연신이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요리가 다섯 개나 되는데 세 명이 먹기에 모자라다고? 너 위가 도대체 몇 개야?”심지안이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음식을 차렸는데 오자마자 투정이라니.장학수가 억울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난 돼지가 아니야...”“그럼 입 다물어. 먹기 싫으면 옆에서 기다리고.”“안 돼. 나 아직 밥 먹기 전이라 배고프단
심플한 디자인의 홈웨어를 입고 완벽한 몸매를 뽐내고 있는 그에게선 그 누구보다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성연신은 무언가를 느낀 듯 심지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두 쌍의 눈동자가 서로 마주쳤다.심지안은 순간 그의 깊은 눈동자에 깊이 빨려 들어갔다.돌연 정신을 차린 그녀는 어색하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곽준위 씨한테 그렇게 함부로 했는데 가만히 있을까요?”“가만히 안 있으면 어쩔 건데요, 나한테 도전이라도 하겠어요?”성연신이 가소롭다는 듯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쳇.”심지안도 곽준위가 감히 성연신의 말에 토를 달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다만 무서워는 하겠지만 뒤로 무슨 짓을 꾸밀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이 합의서와 심전웅이 은행에서 자산과 보석을 꺼내온 기록이 모두 있으니 반드시 승소할 거예요. 심지안 씨가 감정에 휘둘려 마음이 약해지지만 않으면 돼요.”장학수가 당부했다.이건 증거를 찾는 것에 어려움이 있는 사건이 아니다. 가장 힘든 건 부녀 관계라는 문턱을 넘어서는 것이다.“그러지 않을 거예요. 그 사람과 저 사이에 이젠 감정 따위 없어요.”장학수는 단호한 그녀의 모습에 성연신의 선택에 대한 걱정의 마음이 피어올랐다. 설마 또다시 모두에게 버려진 가여운 사람이 되진 않겠지.“이 협의서의 내용에 의하면 엄마는 저에게 4억을 남겨주셨어요. 정말 이렇게 많아요?”십여 년 전의 4억은 적은 돈이 아니다. 작은 규모의 회사를 차리기에도 충분한 액수다.장학수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재판이 끝난 뒤 심전웅에게 가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봐요.”그 4억은 그녀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그들의 딸에게 남겨준 재산일 수도 있을 것이다.“그래요. 알겠어요.”한 시간 동안 더 이야기를 나누니 어느덧 10시가 되었다. 장학수는 서류 봉투를 들고 집을 나섰다.심지안이 저도 모르게 탁자에 시선을 돌렸는데 위에 놓여 있던 편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아마 성연신이 침실로 가져갔을
“재판장님, 저흰 그런 적 없어요. 저 사람의 말은 믿으면 안 돼요.”심연아가 다급함에 소리쳤다.법관이 엄숙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그럼 심지안 씨와 끝까지 재산 다툼을 하겠다는 건가요? 하지만 제가 이해한 정황으론 당신과 심지안 씨는 이복 자매예요. 심지안 씨의 생모가 남긴 재산을 가질 자격은 당신에게 없어요.”처음부터 끝까지 조목조목 일리 있는 말이었다.심연아가 창백하게 변한 얼굴로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그 뜻이 아니라... 전 그냥 제 아버지를 대신해 설명했을 뿐이에요.”“피고인 스스로 설명해야 합니다. 심연아 씨는 발언 차례가 오기 전엔 조용히 하세요.”법관이 심전웅에게로 시선을 돌렸다.“피고인, 발언해 보세요.”“전 이 재산의 일부 소유권을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그건 저와 제 아내의 공동재산이었으니까요.”고민하는 듯한 법관의 모습에 심전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 패를 남겨둔 건 정말 천만다행이다.심지안이 입술을 꽉 깨물고 주먹을 힘껏 말아 쥐었다.“그 재산은 확실히 공동재산이에요. 저도 조사한 바 있어요.”장학수가 말했다.심전웅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맞아요. 그래서 제가 그 권리를 주장하는 건데 뭐 문제 있나요?”“정상적인 상황에선 문제없죠.”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는 씩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당신은 2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책임을 다한 적이 없어요. 그러니 그 돈을 받을 자격이 없는 거죠!”“아버지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면 대체 어떻게 저만큼 자란 건데요?”심전웅이 덤덤하게 말했다.“젊은 사람이 억지가 심하네요.”장학수 역시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재판장님, 저한테 증거가 있습니다.”“제출하세요.”“제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심지안 씨의 곁에서 지켜봐 온 친구분 몇 명을 모셔왔습니다. 그들은 과연 심전웅이라는 아버지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들어보시죠.”“그렇게 하세요.”이어 진유진과 심지안의 대학 동기, 그리고 회사 동료가 안으로 들어왔다.심지안은 익숙한 얼굴들을 본
이 말이 나오는 순간 다들 급 조용해졌다.굳이 장학수의 고소로 인해, 법정까지 가서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었다.심연아는 멈칫했고, 그 고운 얼굴에는 순간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본인이 한 말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는 말을 더 보충했다.“저는 우영 변호사님한테 저렇게 말한 적 없습니다. 청구 부분 관련해서도 제가 말한 부분이랑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충분히 의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판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충분히 의심할 만합니다. 하지만 증거를 제출해 주셔야 합니다.”“저는... 저는 증거가 없습니다.”심전웅은 테이블을 힘껏 내리치며 심지안을 향해 분노 섞인 말투로 말했다.“너 그깟 돈 때문에 가족들한테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니!”심지안은 비웃으며 말했다.“제가 아니라, 당신들이 지금까지 우리 어머니의 재산을 빼돌리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거죠!”진짜 백만 번 양보한다 쳐서, 만약 예전에 심 씨 가문이 어려움에 닥쳤다면, 그녀는 기꺼이 도와줬을 거지만 지금은 그냥 단순히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굳이?그들한테 빚진 거도 없는데?소위 양육이라는 빚을 졌다고 해도, 그건 오래전의 일이다.심전웅은 심지안을 노려보았으며,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그녀를 때릴 기세였다.몇 달 동안은 잠잠했기에, 이건 지금 감히 본인한테 맞먹는 거라고 생각했다.장학수는 상대 쪽에서 화난 상태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짜릿함을 느꼈다.소송의 낙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그는 몸을 일으키면서, 판사에게 계속 진행해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판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심연아를 향해 말했다.“방금 말씀하신 내용에서, 물증이나 증인이 없다면 증거로 인정되지 않습니다.”이어서 판사는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심전웅은 합의된 숫자대로 심지안의 어머니가 남긴 자산을 3개월 이내에 반납해야 하며, 3개월 이내에 자산을 반납하지 않을 경우, 심전웅의 명의로 된 자산
“아니요.”“네, 그러면 질문 바꿔서 물어볼게요. 물에 빠진 이유가 성연신 씨 때문이죠?”심지안은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횡설수설했다. “그만 물어봐요. 그분이 고의로 그런 건 아니고, 이건 그분 문제가 아니에요.”이건 홍교은이 너무 극단적이었던 것이다.하지만 진현수의 귀에는, 이건 그냥 편들어 주는 거로밖에 안 들렸고, 그는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지안 씨, 제 말 좀 들어봐요. 그냥 빨리 그 한테서 벗어나세요. 빚진 거 있으면 제가 대신 갚아줄게요. 저는 지안 씨가 불행해지는 걸 바라지 않아요.”“아니요, 저 대신 갚아준다고 해서 그게 빚진 게 없어지나요?”빚진 상대가 바뀔 뿐이지, 빚진 건 똑같기 때문에 그녀한테 있어서 별 의미가 없었다.“네, 갚지 않아도 돼요. 저는 지안 씨가 행복하길 바랄 뿐입니다.”심지안은 그의 이글거리는 눈을 마주하더니,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저한테 시간 낭비하지 마세요. 저희는 이어질 수 없어요.”그녀는 한때 강우석의 삼촌과 결혼하여 그에게 복수하려고 애를 썼지만, 지금은 아니었다.장학수는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찼다.저렇게나 당당하다고?그는 얼른 가서 저 상황을 마무리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그 이유는 변호사 비용도 아직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만약 성연신과 심지안의 사이가 틀어지기라도 한다면, 성연신 성격으로는 본인이 한 푼도 못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일단은 그건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심지안 씨, 잠깐 저 좀 봐요. 앞으로의 사항에 대해 논의 드릴 게 있습니다.”심지안은 곁눈질로 보고는, 고개를 끄떡이며 답했다.“네, 알겠습니다.”장학수는 진현수를 한번 훑어보고는 직설적으로 말했다.“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기다리실 필요는 없습니다.”진현수는 장학수의 불친절함을 느꼈지만, 그 이유가 뭔지는 몰랐다. 단지 심지안과 관련된 일이라고 하니, 일단은 방해하기 싫어서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떡였다.그가 강우석과 함께 법원을 떠난 지 몇 분 만에 성연신이 도착했다.휴게실.심지안
앞에 앉아있던 정욱은 적절한 타이밍에 입을 열었다.“대표님, 저 일단 먼저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그들의 일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들은 할 거 하고, 본인은 농땡이 피울 수 있는 좋은 찬스이지 않은가!“혹시… 차 안에서?”심지안은 머뭇거리며 말했다.봄이라 남자들도 발정기인가 싶었다.성연신은 기분 나쁘게 웃으며 말했다.“아니 둘이 지금 뭘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하?”아마 그 둘이 생각했던 낯부끄러운 그 일은 아닌가 보다.“저 몰래 다른 남자와 연락했으니, 벌을 줘야겠어요.”“저희는 그냥 정상적인 대화만 했을 뿐이에요!”“아직도 말대꾸할래요?”그는 장학수가 방금 분명히 그에게 힌트를 준 거라고 생각했다.끝까지 인정하지 않는 이 바보 같은 여자 때문에 성연신 가슴에는 울화가 치밀어 올랐고, 히터를 틀지 않은 차 안은 냉기로 가득했다.심지안은 추워서 덜덜 떨었고, 난처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최대한 정욱의 존재는 무시하려고 노력했고, 먼저 그를 껴안았다. 작은 손으로 그의 등을 토닥였고, 순진한 척하며 대화 주제를 돌렸다.“저를 어떻게 벌줘도 괜찮으니 화내지 마요. 자꾸 화내면 연신 씨 건강에도 안 좋으니까, 제가 많이 속상할 거예요.”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한테 이런 소리를 듣고 나니, 성연신의 화는 반쯤 가라앉았다. 그는 눈앞에 있는 이 작은 여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눈같이 흰 피부, 반짝이는 눈망울에 흰 치아, 얼굴에 젖살까지 더해져 순수함과 부드러움이 더 부각돼 보이는듯했다.그의 목젖은 미세하게 움직였고,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했다.그의 다리에 앉아있던 심지안은 불편한 듯 엉덩이를 움직였고, 성연신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유난히 뜨거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그의 뜨거운 눈빛 때문에 그녀의 귀는 빨갛게 달아올랐다.“왜 그러세요?”성연신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는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그녀의 유혹을 당해낼 순 없었다.그는 그녀
흥분을 가라앉힌 후, 심지안은 자신이 5년 전 해외에서 살았던 작은 별장과 흡사한 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외부 경관이 달라 의아해하며 말했다.“5년 전과 똑같은 별장을 지었어요?”고청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기침을 몇 번 하며 대답했다.“맞아요. 거의 차이가 없죠?”심지안은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둘러보며 고청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조금 부드러워졌고, 마치 그를 가족으로 생각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어떻게 하지원을 설득했어요?”그녀는 고청민이 하지원을 이용하여 완벽한 알리바이를 만든 것에 의아함을 감추지못했다.“한마디 했더니 바로 승낙했어요.”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하지원은 이처럼 온 마음을 다해 고청민을 따랐다.심지안은 복잡한 마음으로 물었다.“하지원 씨에게 미안하지 않아요?”고청민은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보상해 줄 거예요.”‘보상? 어떻게 보상할 건데? 여자의 청춘을 어떻게 보상할 건데...’심지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하지 않았다.하지원에게는 그저 사랑이었으니까...“밤새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죠? 지안 씨가 좋아하는 비빔면을 준비해 뒀어요. 게살 비빔면이요.”고청민은 웃으며 심지안에게 말했다.“지안 씨가 분명 좋아할 거예요.”심지안은 배가 고파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다가가기 전, 그녀는 게살 비빔면의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고청민은 게살 비빔면을 그녀 앞에 놓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먹어요. 제철 대게는 정말 맛있거든요.”심지안은 망설임 없이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정말 맛있었다. 커다란 게살이 면과 어우러져 입안 가득 풍미를 더했다.고청민의 뜨거운 시선에 심지안은 불편해하며 말했다.“청민 씨도 먹어요. 나만 보지 말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을 들어 면을 집어 먹으려 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기침이 그를 멈추게 했다.연달아 몇 번의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점차 그의 가냘프고 쇠약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침이 점점 심해지자 그
집에 돌아온 후, 성연신은 성우주를 재우고 나서 긴급한 회사 업무를 처리했다.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성연신은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어 고청민의 상황을 물어볼까 했지만, 숙면을 방해할까 봐 포기했다.다음 날 아침, 성연신은 일찍 깨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 30분이었다. 그는 심지안이 오늘 세움의 신제품 출시 준비로 일찍 출근할 거로 생각하고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으려 했다.이때 손이 미끄러져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고, 주어 보니 액정이 나가 있었다.갑작스러운 실수에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깨진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불안감이 스며들었다.성연신은 다른 휴대폰으로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결국 부재중으로 받지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성씨 가문으로 출발했다.성씨 가문에 도착했을 때, 성동철은 막 깨어나서 정원에서 산책 중이었다.성연신으로부터 두 사람이 지난밤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직전에 했던 말이 떠올라 이마를 찡그렸다.‘그 녀석이 설마...’성연신은 성동철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물었다.“어르신, 혹시 지안 씨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어디죠?”“해외에 있을 가능성이 크네.”성연신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무슨 말씀입니까?”성동철은 고청민이 출발 전에 했던 특별한 부탁을 성연신에게 말해주고, 동시에 고청민에게 전화를 걸었다.성연신은 주먹을 꽉 쥐고 심지안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신호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었다.“지안 씨, 어디에 있어요?”“성연신 대표님, 접니다.”고청민의 평온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고, 성연신의 신경을 자극했다.성연신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이 자식아, 지안 씨를 어디로 데려간 거야?”“우리는 해외에 있어요. 안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고청민은 계속해서 말했다.“지안 씨를 며칠만 빌리는 셈이에요. 너무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테니, 흥분하지 마세요
“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막지 말아 주세요.”“지금 나와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구나!”“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성동철은 입을 열었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고, 무력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말했다.“해외 전문가와 이미 연락을 취했으니, 너는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해라.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청민은 그의 고집을 읽고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갑자기 젖어 들었다.사실, 그도 할아버지와 몇 년 더 함께하고 싶었다.집에 돌아오니, 성동철이 연락한 해외 전문가로부터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그들은 신의라 불리는 의사가 이미 고청민을 치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고청민은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성동철을 안심시키며 주제를 돌렸다.“할아버지, 해외로 며칠 다녀오고 싶어요. 오랫동안 여행을 못 갔어요.”“안 돼. 네 몸 상태로는 그렇게 멀리 갈 수 없어!”성동철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아직 민채린의 스승에게 도움을 청해 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러나 고청민은 말했다.“민채린이 해외에 있어요. 그녀가 옆에 있으면 할아버지도 안심하실 거예요.”“민채린?”성동철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그렇다면 민채린의 스승에게 직접 찾아갈 수 있는 거니?”“제 병에 대해 이미 채린이의 스승님께 여쭤봤어요.”“결과는 어땠니?”“스승님께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알려 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치료하기 어려운 병이래요.”성동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꼈다.결국,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그래. 가고 싶다면 가도 좋아. 다른 환경에서 지내는 것이 네 몸에도 좋을 거다.”게다가 민채린이 옆에 있으니, 문제가 생기더라도 신속히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오늘 바로 떠나려고 해요.”“이렇게 갑자기?”“그냥 즉흥적으로 생각한 거예요. 가고 싶을 때 가야죠.”고청민은 말하며 눈치를 보지 않았다
30분 후, 성동철과 고청민이 병실에서 나왔다. 성동철은 걱정스럽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의사가 병원에 며칠 더 있으라 했잖니? 왜 말을 안 들어? 적어도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되잖아. 치료 시간을 늦출 수도 있다고...”고청민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햇살처럼 부드러워 보였다.“괜찮아요. 집에 있는 의료 장비로도 충분해요.”성동철은 한숨을 쉬며 더 이상 고집하지 않았다.‘집에 있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집에 있으면 이 녀석을 더 볼 수 있잖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고...’성동철은 운전기사에게 차를 병원 앞에 대라고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는 병원 입구의 벤치가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둘러보며 의아해했다.“지안이 여기 앉아 있지 않았니? 어디 갔지?”고청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고운 속눈썹은 한껏 아래로 드리워 있었다. 눈에 감춰진 복잡한 감정이 보이지 않게 덮여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지원이도 보이지 않네. 네가 전화를 걸어 연락해 봐. 이제 집에 가야 한다고...”성동철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청민에게 말하며, 심지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 부재중이었다.고청민은 하지원에게 전화를 걸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원이 오빠가 찾으러 왔어요. 아마도 지안 씨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 것 같아요. 저희 먼저 집에 가죠.”성동철은 방금 의사가 자신에게 따로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빨리 집에 가서 외국의 의료 전문가들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 우리라도 먼저 가자.”‘성연신이 지안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어. 어쨌든 지안이는 다 큰 어른이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넓은 승용차 안에서, 고청민이 갑자기 성동철에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죽으면 제 심장을 지원이에게 주세요.”어차피 죽으면 남겨둘 이유가 없으니, 필요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덕을 쌓는 일일 것이다.성동철은 얼굴빛이 변하며 호통쳤다.“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심지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지원을 바라보며 말했다.“모든 사람이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아니야.”심지안은 사랑의 위대함에 감탄했지만, 그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는 없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왜냐하면 난 인간미가 있고, 지안 씨는 없으니까요. 임시연이 당신 앞에서 죽었을 때, 살아있던 한 생명이 죽었는데도 지안 씨는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관심했잖아요.”심지안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의 무심한 태도를 거두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하지원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맞아요. 임시연은 내 아이를 훔치고, 내 남자를 빼앗고, 내 결혼을 망쳤어요. 게다가 여러 번 나를 죽이려고 했었죠. 이번에 죽은 사람이 임시연이 아니었다면, 다음번에 죽을 사람은 나일 수도 있어요. 지금 임시연이 죽어서 폭죽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마음이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런 쉬운 소리 하지 마세요!”처음에는 임시연의 죽음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곧 심지안은 깨달았다. 임시연의 죽음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녀는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임시연은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해치려 했기에 어쩌면 이렇게 죽는 것이 더 나은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원은 심지안의 큰 목소리에 깜짝 놀라 얼굴이 창백해졌고, 잠시 말을 잃었다.“지원 씨는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난 아니에요. 날 냉정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심지안은 하지원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하지원도 불쌍한 사람일 뿐이었다. 심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로 들어가려 했다. 한 발을 내딛자, 하지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정말로 청민 선배를 도와줄 생각이 없는 거예요? 사람 하나 구한다고 생각해 줘요... 평생 고마워할게요.”심지안은 잠시 멈칫했지만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그건 도움을 청하는 게 아니라 도덕적 강요에요.”심지안은 친구로
성동철은 깜짝 놀라 지팡이도 잊은 채 급히 움직였다. 카펫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휘청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집사는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전화를 걸었고, 남은 하인들은 손님들을 휴식 공간으로 안내했다. 연회 내내 활기찼던 분위기가 갑자기 혼란스럽고 긴장된 분위기로 바뀌었다.심지안은 찡그린 얼굴로 성동철의 뒤를 따라 고청민의 방으로 들어갔다.커튼은 빛 한 줄기도 들어오지 못하게 꽉 닫혀 있었지만, 문을 열자 짙은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하인이 먼저 한 발 앞으로 나서서 전원 스위치를 켜자, 방 안은 갑자기 밝아졌다.우드톤 가구들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옷들도 정리되어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심지안은 방 안을 둘러보았지만, 고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심지안은 약간 열려 있는 화장실 문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이때, 하지원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안에 있어요.”성동철은 떨리는 손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가득했다.고청민은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옷은 물에 젖어 축축하게 몸에 붙어 있었고, 두 손은 욕조 가장자리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머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어 원래 창백한 피부가 더욱 하얗게 보였다.고청민은 말라비틀어진 채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성동철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손가락을 고청민의 코 밑에 대어 보았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하인들에게 소리쳤다.“구급차가 일찍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니, 빨리 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데리고 가!”하인들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럽게 고청민을 욕조에서 꺼냈다.심지안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겁에 질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녀는 혼이 나간 하지원을 바라보았다.“청민 씨... 어쩌다 이렇게 된 거죠? 왜 이렇게 피를 많이 흘린 건가요?”이 상황이 마치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았지만, 하지원은 그 말을 입 밖에
심지안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말 좀 해봐요. 정말 시연 씨가 죽길 바란 거예요? 시연 씨가 죽으면 속 시원할 것 같았냐고요!”변석환은 심지안에게 소리쳤다. 울부짖는 변석환의 두 눈은 심하게 충혈되어 무섭게 보였다. 그리고 그의 큰 목소리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변요석과 성연신이 먼저 달려왔다. 성연신은 심지안을 보호하며 변석환을 몇 걸음 뒤로 밀어냈다. 성연신의 행동은 냉담하면서도 약간의 분노가 섞여 있었다.“지안 씨 앞에서 임시연 그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다시 한번 실수하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하하하! 살인범을 감싸고 도는 건가요?”변석환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맞아요. 시연 씨의 죽음에는 당신과 심지안 씨도 책임이 있어요.”“퍽!”변요석은 변석환의 얼굴을 한 대 때렸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정신 차려. 임시연은 원래 죽어 마땅한 여자야! 더 이상 나를 창피하게 만들지 마!”변석환은 변요석을 바라보며, 맞은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원래 죽어야 했고... 맞아... 나를 속이고 이용했어... 죽어 마땅한 여자야...”하지만 변석환은 스스로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 없었다.임시연이 죄를 지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변석환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를 미워하면서도 그녀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변요석은 주변에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며 분노를 억누르고 변석환에게 경고했다.“지금 당장 성씨 가문을 떠나. 네가 정신 차리고 지안 씨에게 사과할 준비가 되면... 그때 돌아와.”변석환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사람들 사이로 문득 익숙한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변석환은 그 그림자를 쫓아갔지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변석환은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고, 그제야 그것이 자신의 착각임을 깨달았다.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 임시
자책하는 심지안을 보는 성연신은 가슴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당연히 아니죠. 임시연의 죽음은 지안 씨와 아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그런 생각 하지 마요.”심지안도, 성연신도, 그 누구도 임시연이 거기서 뛰어내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다.임시연이 심지안 앞에서 그리고 성원 그룹에서 죽은 건 심지안과 성연신에게 트라우마를 남겨주기 위해서였다.만약 제가 잘못되어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사람들도 마음이 편하진 않을 테니까 그걸 노리고 뛰어내렸던 것 같다.성연신도 놀라긴 했지만 직접 본 게 아니니 그리 큰 충격은 받지 않았는데 문제는 심지안이었다.물론 임시연도 죽을 줄은 모르고 뛰어내렸겠지. 그냥 크게 다쳐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게 감옥에 있는 것보단 나으니까 뛰어내린 걸 텐데 이렇게 죽어버려서 심지안만 힘들어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공허한 눈으로 성연신을 보며 웃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잔뜩 굳어있어서 웃는 게 우는 것보다 더 이상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임시연은 천벌 받아서 죽은 건데 내가 기뻐하는 게 맞죠.”“그래요, 안 뛰어내렸어도 경찰한테 잡혀서 자유롭진 못했을 거예요.”성연신은 심지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내가 지안 씨더러 임시연 잡아놓으라고 한 거잖아요. 귀신이 되어도 날 찾아올 거니까 지안 씨는 아무 걱정 하지 마요.”그때 오지석이 사실은 사람들을 데리고 올라오려 했지만 임시연이 미리 눈치를 채고 송준에게 도움을 청할까 봐 성연신이 말렸었는데 임시연이 이렇게 극단적인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심지안을 절대 혼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알겠어요.”긴장이 풀렸는지 심지안이 눈을 살짝 감으며 말했다.“나 아까 제대로 못 쉬어서 좀 잘래요.”“그래요, 내가 옆에 있을게요.”“네, 할아버지랑 우주한테는 나 병원에 있단 말 하지 마요.”“네.”가족들이 괜히 걱정할까 봐 신신당부를 하고서야 심지안은 침대에 누웠다.제 앞에 앉아있는 듬직한 성연신을 보니 안심이 되는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한편 성연신은
그렇게 회의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누구는 임시연을 구하겠다고 1층으로 달려 내려가고 누구는 창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아직 살아있어요!"그 모습을 보고 있던 심지안은 사람들의 인영이 환영처럼 눈 앞을 스쳐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머리도 어지럽고 귀에 까지 이명이 들려 온 세상이 흐릿하게 보였다.임시연이 뛰어내리는 결말을 예상해본적은 없었는데, 3층이 아주 높진 않지만 그렇다고 낮은 층수도 아니었다.조금 정신을 차린 심지안은 사람들의 질책이 담긴 시선을 느꼈다. 그들은 저들끼리 수군대며 심지안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사모님도 너무 하시지, 어떻게 사람을 뛰어내릴 때까지 몰아붙여? 저러면 밤에 악몽 안 꾸나?""그리고 왜 자꾸 연다빈 씨한테 임시연이라고 하는 거야? 너무 간 거 아니야?""다빈 씨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럼 사모님이 살인자 되는 거야?""다빈 씨가 귀신 돼서 사모님한테 복수하겠다고 찾아올 것 같아요."그 말을 듣고 있던 심지안은 이마에 힘을 주며 소리질렀다."내가 몰아붙인 거 아니고 본인이 뛰어내린 거야. 나랑 상관 없다고."심지안의 호통에 수군거림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매정했다.다들 "연다빈"에게 일이 생기면 심지안 책임으로 돌릴 준비가 되어있는 듯 싶었다.심지안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현기증을 이겨내려 했다. 그리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뒤를 돌 때 마침 이곳으로 뛰어오는 성연신과 오지석을 발견했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성연신이 빠르게 다가와 심지안의 어깨를 잡으며 주드럽게 다독였다."괜찮아, 내가 왔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속눈썹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심지안은 마침 다가오는 성연신을 보고 무슨 말이 라도 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말을 채 내뱉기도 전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시간이 조금 흘러 심지안이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흰 벽과 소독약 냄새, 그리고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성원 그룹 직원 자살 사건은 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