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혁은 체념한 듯 고개를 저었다. 눈앞의 사람은 딱 봐도 취한 것 같았다.성원의 미간이 눈에 띄게 찌푸려졌다. 얼굴에는 이미 짜증이 가득 쓰여 있었다.안수연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취했으면 집에 기어들어가 쳐 자기나 해, 깔짝거리지 말고.”남지유는 이민혁에게 기대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정장남은 화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기도 전에 그의 등 뒤에 선 두 남자가 안수연에게 소리쳤다.“건방진 것, 우리 형님이 누군 줄 알아?”“내 알 바 아니고, 빨리 꺼져.”안수연이 차갑게 답했다.“씨발, 우리 이 형님은 상무국 사람이야. 우리 모두 여기선 이름있는 사람이라고. 감히 이런 식으로 우리 형님을 대해?”“하, 그렇게나 대단하신 분이셔?”안수연은 더 이상 화를 참기 힘든 듯 했다. 하지만 이 몇 사람은 이미 매우 화내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깎인 데다가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형님이라 불린 남자가 차갑게 말했다.“친절한 내가 알려줄게, 내게 밉보인 사람들은 네가 뭘 하든 안 좋은 꼴을 당하게 될 거야.”“우리 형님과 노래나 몇 곡 부르러 가, 하룻밤 놀고 나면 이 일은 없던 거로 해줄게. 그러지 않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이 말을 들은 이민혁과 서원의 얼굴이 굳었다. 남지유만이 이민혁의 옆에서 조용히 웃고 있었다. 그들 앞에서 이렇게 설치는 사람들은 얼마 없었다.참지 못한 안수연이 주먹을 날려 남자의 눈을 강타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고꾸라졌다. 그가 완전히 넘어지기도 전에 안수연의 주먹이 다시 남자의 복부를 파고들었다.아!남자가 그제야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져 뒹굴었다.안수연의 두 주먹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이 광경을 보던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여자 한 명이 이렇게나 싸움을 잘하다니? 남자의 뒤에 있던 부하들이 망설이며 싸울 태세를 취했다.이때 서원이 소리쳤다.“씨발, 죽고 싶어?”“너 씨발 누구야?”한 부하가 물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컸지만, 기세에서 밀리는 게
만약 정말 그 집 친척이라면, 이동수의 인생은 끝장이었다.이동수는 온몸의 아픔을 무릅쓰고 기어 일어나 바닥에 꿇어앉은 채 성원 일행에게 사과했다.“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눈이 삐었습니다.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당장 꺼져, 밥 먹는 데 기분 잡치게 하지 말고.”성원이 차갑게 말했다.이동수는 본능적으로 더 이상 사과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계속 이들을 언짢게 했다가는 회사에서 잘리는 정도로 넘어가기도 힘들 터였다. 그는 아픔을 참고 일어나 성원 일행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다시 한번 사과한 뒤 황망히 자리를 떴다.이 광경은 식당의 모든 손님을 놀라게 했다. 이 여자의 실력도 심상찮았고, 저 소년의 말 몇 마디만으로 이렇게나 놀라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이때 안수연이 직원에게 물었다.“방은 청소했어요?”직원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수연과 그 일행은 급히 방으로 들어가 손님들의 시선을 피했다. 방에 들어선 네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웃고는 고개를 내저었다.정말 별사람이 다 있구먼. 조그마한 권력을 쥔 주제에 취해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다니. 진정한 권력자에게 그들은 그저 한주먹거리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네 사람은 먹고 마시며 방금 있었던 일을 잊어버렸다.방금 일을 생각할수록 무서워하던 이동수가 그만 심장병으로 병원에 실려 간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네 사람은 배불리 먹은 후 해호섬에 돌아가 잠들었다....이 시각, 김지현의 사무실.김지현은 한숨을 내쉬고는 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전화가 통하자, 김지현이 일어나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 최도현이 죽었습니다. 불필요한 일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 고급세력범위를 포기했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얼마 후 힘 있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알았어. 별일 아니야. 지금은 M계획이 가장 중요해. M계획은 별일 없지?”“M계획은 무사합니다.”“응, 하지만 이 일에 대해서는 징계를 내려야 해
그는 오른손에 가방 하나를 들고 왼팔에 붕대를 감은 채 꼿꼿이 서 있었다.이민혁은 그의 얼굴을 보고는 놀라 물었다.“양예찬?”그가 빠른 걸음으로 양예찬의 앞에 와 그의 팔을 보며 물었다.“왜 이렇게 빨리 왔나?”“초자연현상 연구 방위국, 1급 전투 인원 양예찬, 이 대표님께 인사드립니다.”양예찬이 거수경례하며 말했다.이민혁은 뒤의 차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이건 뭔데?”“우리 방위국의 기구와 직원들입니다.”“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고?”“국장님께서 진무도의 관련 부문에 명령하셔서 알게 되었습니다.”이민혁의 말문이 막혔다. 그럼 틀림없이 서영광일 터였다. 동시에 놀라기도 했다. 방위국 권리가 너무 큰 거 아닌가? 서영광은 진무도의 총독이고 총책임자였다. 상경 고위층에서도 내로라하는 인물인데, 고상도가 직접 그에게 명령할 수 있다니?그는 양예찬 뒤의 차들을 보며 말했다.“일단은 기다리라고 해. 넌 따라오고.”이민혁은 양예찬을 자신의 방으로 데려온 뒤 그의 팔을 보며 물었다.“크게 다친 거로 아는데, 얼마나 됐다고 벌써 복귀한 거야?”“방위국에서 생물 기술로 근육을 재건해 줬어요. 지금은 그저 골절이 문제일 뿐, 별 영향은 없어요.”이민혁은 조금 놀랐다. 이 생물 기술은 정말 대단했다. 그때 양예찬의 한쪽 팔은 거의 못 쓸 지경이었는데.얼마 후 이민혁이 입을 열었다.“네가 사람들을 데리고 여기 온 건 무슨 뜻이야?”“일할 장소가 필요해서요. 어떤 기구들은 설치도 해야 하고요.”“설마 내가 그걸 허락할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저흰 비밀스럽고 조용한 환경이 필요해요,”“방위국이 알아서 다른 곳을 찾으라고 해. 여긴 내 개인적인 공간이야.”“임대료가 있어요. 매달 2,000만 원이요.. 활동 경비 4,000만 원도 따로 지급하고요.”“임대료고 뭐고는 안 중요하고, 업무 때문에 어렵게 허락하는 거야.”“네, 대표님.”“그리고, 활동 경비는 뭔데?”“매달 고정적인 경비입니다. 특별 행동이 있으면 특별 경비
네 명의 직원들은 이미 기구를 설치하고 있었다. 먼저 지붕에 원형 레이더를 설치하고는 각종 기구를 방 안에 늘어놓기 시작했다.“이게 다 뭔데?”이민혁이 묻자 양예찬이 답했다.“위성신호접수기, 수사망 시스템, 방위국 전용 슈퍼컴퓨터요.”“아아.”위성접수기는 당연히 위성 신호를 접수할 때 쓸 것이었다. 이는 전용 선로보다 더 안정적이었다.수사망 시스템도 알고 있었다. 이는 국가의 보안 계획으로 전국의 모든 공공 CCTV를 연결해 언제나 영상을 돌려볼 수 있었다.슈퍼컴퓨터에 대해선 잘은 몰랐지만 아주 빠른 컴퓨터라는 것은 알았다.이 기구들은 진무도청의 기구보다도 강했다. 방위국의 권리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최고부문의 허락이 없다면 이는 범법행위였다. 국민의 프라이버시를 침범하는 일이었기에 결코 작은 일이 될 수 없었다.양예찬의 지휘하에 그들은 하루 종일 기구를 설치했다.이때 남지유, 성원, 안수연이 소식을 듣고 궁금해 달려왔다. 양예찬은 누군가 들어온 것을 보고는 방에서 걸어나가 성원 일행에게 말했다.“방위국 근무 지점입니다. 반경 10미터 이내 출입을 금지합니다.”성원 일행은 제자리에 멍하니 선 채 상황 파악을 하고 있었다.이민혁이 급히 말했다.“여긴 성 총독님의 아들 성원이고, 여긴 형사수사대 부대장 안수연, 여긴 내 여자친구야. 모두 우리 편이니, 걱정하지 마.”“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저와 대표님을 제외하곤 국장님의 허락이 없는 이상 그 누구도 진입할 수 없습니다.”양예찬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민혁도 민망해져 어떤 말을 할지 쩔쩔매고 있었다.이때 성원이 궁금한 듯 물었다.“방위국은 어떤 조직이에요? 전 왜 모르고 있죠?”“특수권리가 있는 곳이지, 아주 대단해.”안수연은 조금 씁쓸하게 답했다.이민혁이 웃으며 말했다.“됐어, 내 방에 가 얘기하자.”몇 사람은 이민혁을 따라 그의 방에 들어갔다. 이민혁이 자신의 사원증을 꺼내 두어 번 흔들고는 책상에 툭 내려놓으며 말했다.“알아서 봐.”서원이 급히 사
“제길,”이민혁의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들어와.”양예찬이 걸어들어왔다.이민혁은 양예찬을 한참 바라보다 물었다.“무슨 일을 하려고?”“요구에 따라, 지금 사무실로 가셔서 비밀번호를 설정하시길 바랍니다.”이민혁은 놀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놀랐잖아.”이민혁은 남지유 일행더러 기다리라고 한 뒤 양예찬을 따라 사무실로 왔다. 직원들은 기구를 모두 설치하고 떠났기에 그들 둘밖에 없었다.양예찬은 먼저 이민혁에게 기구의 사용법을 알려준 뒤 비밀번호를 설정하게 했다. 위성 연결 비밀번호, 컴퓨터 비밀번호, 개인 조작 2급 비밀번호, 기계 초기화 비밀번호까지. 이민혁은 일여덟 개의 비밀번호를 설정했다. 게다가 모두 길고 어려운 번호들이었다. 그가 엄청난 기억력이 있지 않았다면 그는 진작에 모두 잊어버렸을 것이다.설정이 모두 끝나자 양예찬은 됐다는 신호를 보냈다.이민혁이 물었다.“너 밥 할 줄 알아?”“식사는 저 혼자 해결할 수 있습니다.”양예찬이 차갑게 답했다.이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쌀쌀맞기는.“그래, 일 봐. 나 방해하지 말고.”말을 맺은 이민혁은 몸을 돌려 떠났다.양예찬은 인상을 쓰고 이민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이민혁은 방으로 돌아와 남지유 일행과 방금 있었던 일을 말했다. 그들은 모두 양예찬이 특이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이 조직은 너무도 신비해 그들도 엮이고 싶지 않았기에 화제는 자연스럽게 돌려졌다.“형, 내일 홍보팀이 방송국에 간대요. 형은 안 가세요?”성원이 물었다.이민혁은 멍해졌다.“내가 가선 뭘 하게?”“거기서 오지윤을 복귀시키고 상까지 준대요. KP를 위해 이렇게나 고생했는데, 가서 인사라도 하고 오시죠?”이민혁은 잠깐 생각하고는 남지유를 보며 말했다.“그럼 가야지. 당신이 다녀와요. KP를 알릴 기회이기도 하고.”“네, 제가 갈게요.”남지유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다음 날 오전.KP와 홍보팀의 차량 몇 대가 서경 방송국에
국장 사무실에 앉은 배향미는 아직도 얼떨떨했다. 커다란 책상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얼굴에 차차 웃음이 떠올랐다.모든 노력은 값진 것이었다.하지만 그녀는 곧 냉정하게 이 일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생각은 정소희가 올린 영상 속 모자이크된 남자에게로 행했다.이 사람은 꼭 무언가 있었다. KP에서도 내로라하는 인물일 것이었다.이 일에 서원까지 연루됐으니, 평범한 사람일 수 있겠는가?생각하던 그녀는 곧 KP와의 인터뷰 자리를 마련하고, 오지윤더러 이 일을 맡게 했다. 기획안을 쓴 그녀는 득의양양해졌다. 그녀와 오지윤은 모두 이 일의 수혜자였다. 그럼 이참에, KP에 좋은 이미지로 기억돼야지. 이 일로 그 신비한 남자를 알게 된다면 그녀에게 출세의 길이 열릴 테니 더없이 좋을 것이었다.남지유에 대해서는, 그녀와 아는 사이가 됐더라도 별다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남지유가 만약 여자를 좋아한다면...배향미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지며 입술을 축여댔다.이때, 오지윤도 자신의 사무실에 앉아 감격에 겨워 있었다. 짧은 며칠 사이에 그녀의 인생을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빠르게 변했다. 실직부터 부국장이 되기까지,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이 일을 통해 오지윤도 신념이 생겼다. 그녀는 좋은 사람에겐 꼭 좋은 일이 따른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오지윤은 조용히 기자로서의 신념을 다졌다....저녁.남지유는 해호섬에 돌아와 이민혁의 방에 들어갔다. 이민혁은 막 명상을 끝낸 참이었다.“왔어요?”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오늘 소영 씨와 얘기했는데, 기분이 안 좋아 보였어요. 한 번 가보는 건 어때요?”“소영이가 왜요?”이민혁은 이제야 최근 일이 바빠 유소영을 신경 쓰지 못한 게 생각났다.남지유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물어도 대답하지 않아요. 저도 계속 묻기가 뭐해서...”“네, 내일 가볼게요.”이때 남지유가 이민혁에게 기대 그의 팔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잘해요.”“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모를 거로 생각했어요? 소영 씨는 민혁
“아니, 아니.”손여진이 급히 손을 내저었다.이민혁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아무리 그해도 손여진은 이 회사의 사장인데, 누가 감히 그녀를 괴롭힌단 말인가?“그럼, 대체 어떻게 된 일인데?”이민혁이 의문스레 물었다.손여진은 기회를 틈타 이민혁에서 신호를 보냈다. 두 사람은 외진 구석으로 이동했다. 손여진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내가 사장이 된 뒤로 회사에 안 좋은 헛소문이 퍼져서, 널 보기가 조금 그래.”이민혁은 한참을 생각해서야 그녀의 말을 이해했다. 그가 손여진에게 사장 자리를 마련해줬으니, 회사에 그들의 추문이 퍼진 것이었다. 이 바닥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었다.이민혁이 작게 웃었다.“마음대로 말하라 해. 입을 막아버릴 수도 없잖아.”손여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요즘 어떻게 지내, 일은 잘되고?”이민혁이 애써 화제를 찾았다.“어떤 업무는 익숙하지 않아서, 적응 중이야.”“괜찮으니까 천천히 해. 유 사장과 할 얘기가 있어서, 이만 간다.”헛소문을 막기 위해 이민혁은 재빨리 몸을 피했다.손여진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빨리 가, 내 내일 휴가야. 할아버지 기일이기도 해서 집에 가보려고.”말을 마친 손여진은 심장이 철렁했다. 그와 상관도 없는 일을 왜 말한 거지?하지만 이민혁의 생각은 손여진의 말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그들은 학창 시절 짝꿍이었다. 같은 마을 사람이기도 했다. 이민혁의 할아버지도 그곳에 묻혀있는데, 그는 오랜 시간 동안 할아버지를 보러 가지 않았었다.이민혁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내일 나도 함께 갈게, 내 할아버지도 찾아뵐 겸.”“좋아.”손여진은 새빨개진 얼굴로 승낙했다.이민혁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유소영의 사무실.이민혁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소영아, 잠깐 시간 괜찮아?”유소영은 책상에 가득 쌓인 서류를 보다가 이민혁을 보고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네, 오빠가 어떻게 오셨어요?”이민혁은 옅게 웃으며 앉았다. 유소영이 물 한 잔을 들고는 그의 옆에
이민혁도 이 얘기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이혼했기에 유소희가 무엇을 하든 그녀의 자유였다. 그는 유소영을 조금 위로하고 LP와 KP의 합병에 대해 몇 가지 물어보고는 나왔다.해호섬에 돌아온 이민혁은 방 안에서 하루를 꼬박 명상했다. 다음 날 아침 손여진이 전화를 걸어왔다.“저기, 민혁아, 본가에 갈래?”손여진의 작고 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응, 가야지. 너 어디야? 잠깐만 기다려, 금방 갈게.”이민혁은 곧바로 손여진이 말한 주소로 달려갔다. 그녀는 이미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손여진은 하얀 셔츠에 스키니진을 입었는데, 성공한 여성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이민혁은 웃으며 그녀를 차에 태우고는 그들의 본가인 도유 마을로 향했다.차 안에서 그들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두 시간 가까이 달려 드디어 도착했다.이민혁은 손여진을 그녀의 집 앞에 내려주고는 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러 가려 했다.손여진이 급하게 말했다.“점심에 와서 밥 한 끼 해.”“알겠어.”이민혁은 짧게 대답하고는 할아버지의 묘소로 향했다. 그는 할아버지의 묘 앞에 앉아 낮은 소리로 말했다.“할아버지, 죄송해요. 할아버지가 정해주신 여자와는 잘 안됐어요. 하지만 제 탓이 아니라, 그 사람이 절 싫다고 했어요. 그러니 제 탓을 하시면 안 돼요.”이민혁은 생각에 빠졌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어릴 적 실종돼 그는 할아버지와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도 부모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고 말해고 될 터였다.“아직 내 곁에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이민혁이 중얼거렸다. 아직 살아계셨다면 지금 그의 재력으론 여생을 풍요롭게 보낼 수 있을 것이었다.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상상 속에만 남아있는 것이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손여진이 전화로 빨리 밥 먹으러 오라고 재촉해댔다.이민혁은 할아버지께 절을 드리고는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 다다르니 손여진과 그녀의 부모님, 그리고 낯선 중년의 여인까지 모두 문어구에 서 있었다.이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