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선...”조유진은 조선유가 배현수의 친딸이라고 말하고 싶었다.이때 배현수는 깨끗한 거즈로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그녀의 상처를 꾹 누르더니 이를 꽉 깨물면서 말했다.“닥쳐! 조유진, 내 말 잘 들어. 곧 병원에 도착하니까 이대로 죽지 않을 거야! 지금 해야 할 것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는 거야!”조유진은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다.배현수는 그녀의 손을 꽉 잡더니 귓가에 위협적인 말을 했다.“조유진, 나 아직 너 용서하지 못해. 나한테 빚진 거 다 갚고 죽어! 이대로 죽는 모습으로 속죄하는 거 두고 못 봐! 너무 쉽게 속죄하는 거잖아!”“칼받이 해준 거, 현수 씨가 옥중에서 칼에 찔린 그 일을 갚은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현수 씨, 난 현수 씨처럼 운 좋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내가... 죽어도 꼭 알아야 하는 사실이 있어요. 더는 내 탓 하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마요. 나는 현수 씨가 다시 새로운...”말을 끝내기도 전에 반지를 쥐고 있던 손이 아래로 축 처지고 말았다.“딸깍.”은목걸이에 걸려있던 반지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배현수는 그래도 얼어붙고 말았다.온몸이 굳어버린 채 조유진이 정신을 잃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유진아...”조유진을 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배현수의 두 눈은 마치 피가 흘러내릴 것만 같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그녀를 다치지도 못하고 그저 옆에서 하염없이 이름을 부르기만 했다.“유진아... 깨어나봐... 유진아... 깨어나라고... 대부도 가고 싶다며? 같이 가줄테니까... 빨리 일어나...”하지만 조유진은 그대로 가만히 누워있었다.배현수는 조유진의 피가 묻어있는 두 손으로 정처 없이 바닥에 떨어진 반지를 찾았다.반지를 다시 주워 조유진의 손에 쥐어주었다.하지만 조유진의 손에는 힘이 없었다.결국 반지가 다시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아무것도 잡을 수가 없었다.숨 막힐 듯한 상실감이 밀물처럼 밀려와 배현수에게 덮쳤다.털썩 무릎을 꿇고 두
서정호는 단 한 번도 이토록 모순적인 배현수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마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굳건한 신념이 조유진에 의하여 세차게 흔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오늘 밤 조유진이 배현수를 대신해 맞게 된 칼은 배현수 마음속의 그 단단한 벽을 부숴버리는 데 충분했다.…한편 조유진은 기나긴 꿈을 꾸었다. 꿈속의 그녀는 늪지에 빠져있는 것만 같았다.조유진이 발버둥을 칠수록 더욱 깊이 빠져들기만 할 뿐이었고 가슴에는 둔탁한 통증이 전해져왔는데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이윽고 조유진은 온통 희고 아득한 빛으로 감싸진 곳에 놓였다.그리고 그녀의 뒤편에서 선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가지 마!”조유진이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조선유가 조유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조유진은 선유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선유는 그러한 그녀가 보이지 않는지 그대로 조유진의 몸을 관통하여 지나갔다.조유진은 얼떨떨하게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몸은 어느새 점점 투명해져 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같은 시각, 수술실.“큰일 났습니다! 환자분 혈압이 40까지 떨어졌습니다.”“삐—”…‘나 곧 죽는 건가?’‘하지만, 나 아직 못해본 것들이 너무 많은데.’선유와 남초윤이 조유진의 생일을 축하해주던 날, 조유진은 촛불을 불기 전 케이크에 대고 세 가지 소원을 빌었었다—배현수가 자신에 대한 원망을 내려놓기.돈을 모아 선유와 어머니를 모시고 대제주시를 떠나 아무도 그들을 모르는 곳으로 가 영원히 함께하는 것.그리고, 배현수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랬었다.하지만 죽기 직전까지도 배현수는 그녀를 용서해주지 않았고 또한 조유진이 죽게 된다면 홀로 남겨질 그녀의 어머니와 선유는 또 어떻게 산단 말인가.여러가지 생각이 미치자 조유진은 너무 슬퍼졌다.그 순간 사방이 삽시에 어둠에 휩싸였다.그리고 조유진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배현수를 보았다. 배현수는 차가운 얼굴로 한 글자 한마디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조유진, 난 영원히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이윽고
수술이 끝난 뒤, 조유진은 온종일 혼수상태에 빠졌었다. 그리고 이튿날 밤이 되어서야 겨우 의식을 회복했다.배현수는 침대 머리맡에 엎드려 그대로 잠이 든 것 같았다.조유진은 순간 자신의 상처를 잊은 채 양팔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고 애를 쓰다가 왼쪽 가슴에 박힌 상처를 건드려 몰려오는 극심한 고통에 연신 숨을 토해냈다.얕은 잠을 자고 있던 배현수는 곧 조유진의 동정에 잠에서 깨어났다.배현수는 조유진을 눌러 침대에 다시 눕힌 뒤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 “왜 멋대로 움직여?”“대표님이 제 곁을 쭉 지켜주셨어요?”배현수는 단번에 부정했다. “아니. 전에는 서정호가 계속 지켰어.”‘정말?’하지만 배현수의 눈 밑에는 잠을 잘 자지 못한 듯 회청색의 다크써클이 깊이 드리워져 있었고 이는 전의 그의 모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배현수는 조유진의 핸드폰을 전해주며 입을 열었다. “네가 혼수상태일 때 전화가 울려서 내가 대신 받았어.”‘설마 선유가 전화한 건 아니겠지?’조유진은 가슴이 철렁하여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누가 전화한 거예요?”“네 그 베프, 남초윤. 그리고 난 네가 다쳤다는 사실을 알려줬어.”그렇다면 배현수는 아직 전화 건너편에 선유도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조유진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유진이 남초윤에게 전화를 하여 안부를 전하려고 하자 배현수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나 대신 칼 맞았어?”왜?조유진도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모든 것이 갑작스럽게 발생했고 조유진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의식 간에 배현수의 앞에 막아섰다…그 순간, 조유진은 그 어떤 결과도 생각하지 않았다.“빚진 거잖아요. 현수 씨가 감옥에서 칼을 맞았으니 이건 제가 돌려드리는 거예요.”조유진은 고개를 떨군 채 핸드폰을 바라보며 마치 칼을 맞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가벼운 말투로 답했다.“네가 이렇게 한다고 내가 널 용서할 것 같아?”조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입술을 달싹이며 조용히
배현수는 이제 도대체 어느 것이 진짜 조유진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아마 매 순간이 진실일 수도 있고 모두 그녀의 진심이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유진의 진심이라고 하여 또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사랑을 말하면서도 그를 배신했었던 인간인데.조유진이 바로 그런 인간이었다. 뒤를 돌아서면 순식간에 얼굴이 바뀌었다.배현수가 한창 허공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고 있을 때 그의 핸드폰 벨 소리가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은 다름 아닌 육지율이었다.배현수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는 지금 그 누구의 전화도 받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육지율의 전화는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하여 걸려왔다.결국, 전화가 연결되자 육지율은 버럭 화를 내며 물었다. “잘났다. 이 시간에 내 전화도 안 받고. 너 설마 조유진과 벌써 침대까지 올라가서 미래까지 약속한 거 아니야?”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화가 가득 담겨 귀가 울릴 지경이었다.배현수는 쩌렁쩌렁 울리는 육지율의 목소리에 핸드폰을 저 멀리 치우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싸늘하게 답했다. “무슨 소리야? 잤다고 해도 이젠 한두 번도 아니고.”“...”육지율은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전에 누가 같은 곳에서 두 번 넘어지지 않는다고 그렇게 당당하게 선언했는데! 현수야 현수야, 이젠 두 번이 아니라 셀 수 없이 여러 번 넘어진 건 아니야? 듣자 하니 조유진이 너 대신 칼을 맞았다는데 너 지금 그것 때문에 또 마음 약해졌지?”“나도 걔가 내 앞에 막아설 줄 몰랐어.”하지만 육지율은 여전히 조유진을 믿지 못했다. “그것도 걔 수법이면 어떡하게? 한번 배신하면 평생 안 본다는 것, 이 말 그 잘난 배현수 네 명언 아니냐? 만약 당시 다른 사람이 법정에서 널 지목해서 감옥에 들어가 3년 동안 갇혀있게 했으면, 네 성격대로라면 진즉에 그 사람 갈기갈기 찢어놨어. 그런데 왜 조유진이 그 짓 하니까 계속해서 봐주는 건데?”배현수는 피식 씁쓸한 비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조유진은 슈크림 빵을 손에 쥐고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자 빵 속의 강한 크림 향이 입안을 맴돌았고 달콤하지만 느끼하지도 않고 폭신하고 쫄깃한 식감이 더욱 돋보이는 빵이었다.배현수의 말에 조유진은 동문서답으로 갑자기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다. “이 슈크림 빵 엄청 맛있는데 드셔보실래요?”조유진의 반응은 배현수의 말을 못 들은 듯 너무나도 담담했다. 그녀의 미지근한 반응에 배현수는 미간을 찌푸렸고 검고 깊은 그의 동공은 더욱 깊은 빛을 발했다.배현수는 마지 못하여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조유진, 넌 이제 자유야.”이것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원하던 것 아닌가? 그러니 지금, 조유진이 가장 원하던 것을 이루었으니 그녀는 지금 기뻐해야 마땅한 것이다.조유진은 빵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꽉 막혀오는 듯한 느낌에 죽을 몇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배현수의 깊은 눈빛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사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현수 씨의 뜻은 절 이제 원망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아니면 저에게 복수하지 않으시겠다는 건가요?”하지만 조유진은 이것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배현수를 대신하여 칼을 한번 맞았다고 하여 배현수가 그녀를 용서했을 리는 없었다.배현수의 올곧고 거대한 몸집이 빛과 그림자의 경계 속에 싸여 다소 적막한 분위기를 풍겼다.“난 너를 원망하지 않을 수는 없어. 하지만 복수라 하면 네가 나를 대신하여 칼을 맞았으니 6년 전의 원한과 함께 퉁치자.”퉁친다고.몇 개월 전의 조유진은 꿈속에서도 배현수와의 모든 빚을 청산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하지만 정작 배현수가 정말 그녀를 놓아주었으니 조유진은 응당 기뻐해야 마땅한 것인데 왜인지 가슴으로부터 둔탁한 통증이 밀려오더니 파도처럼 몰려와 어느새 조유진의 몸을 삼키며 그녀를 괴롭혔다.숨이 턱 막힐 정도로 너무 아팠다.조유진은 애써 고통을 삼키며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럼...저 계속하여 SY 그룹에서 일할 수는 있나요?”배현수는 순간
이 점에서만큼 배현수와 조유진은 서로 합이 정말 잘 맞았다.배현수는 조유진의 오른쪽 가슴에 옅은 갈색 점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녀의 몸 곳곳의 모든 민감 점을 알고 있다. 하지만 유독 그녀의 번호가 없는 것이다.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의 낯선 사람이 아닐까.배현수는 그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시선으로 조유진을 내려다볼 뿐이었다.조유진은 아려오는 눈가를 애써 참으며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맞다. 배 대표님께서 이제 저를 상관하지 않으시겠다고 한 말씀 정말입니까?”“이제 네가 죽든, 살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그럼 저도 마음이 놓이네요. 앞으로 제가 결혼을 하든 아이를 낳든 대표님께는 일일이 보고하지 않겠습니다. 전애인은 죽은 듯이 지내야 마땅하니까요.”자유를 허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자녀를 낳을 생각을 하다니. 신준우라는 그 사람인가? 아니라면 강이찬인가?하지만 이 모두 배현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배현수는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고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결국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널 보고 싶지도 않고 너의 그 어떤 소식도 전해 듣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 강이찬한테서도 멀리 떨어지는 게 좋을 거야.”‘강 선배?’조유진은 확실히 강이찬과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이는 배현수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전에 조유진과 강이찬이 사이좋게 지낸 것도 전부 배현수 때문이었다.만약 조유진과 배현수가 헤어졌다면 조유진도 강이찬을 찾아갈 리가 없었다.오히려 조유진은 최선을 다해 강이찬의 범위를 벗어날 것이다.“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제가 돈을 충분히 모으면 대제주시를 떠나 이곳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갈 겁니다.”배현수는 그저 조유진이 그에게 겁주는 것이라 여기고 조유진의 말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대제주시가 이리도 큰데 특별히 만나려고 약속한 것이 아니라면 만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때문에 조유진이 대제주시에 있든 없든 별다른 차이가 있지는 않았다.
병원 아래, 맞은 켠 도로에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서 있었다.이윽고 운전석의 차창이 3분의 2 정도 내려갔다.뼈마디가 뚜렷한 커다란 손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두고 아무렇게나 차창밖에 걸치고 있었다.그 차갑고 흰 긴 손가락 사이로 선홍색 불빛 한 점이 유난히 눈부셨다.바람이 반쯤 불어오면 배현수도 담배를 반 모금 피웠다.선홍색의 담배 불빛이 흘러가는 바람 속에서 아슬아슬 빛을 발했다. 마치 배현수의 감정처럼 한순간 파도처럼 일으켜 세워졌다가도 그의 이성에 의해 억눌려지는 반복이었다….배현수의 음울한 안색이 담배 연기 속에 파묻혀졌고 흰 연기가 그의 날카로운 눈빛을 가려 쓸쓸한 적막만이 허공에 머물 뿐이었다.배현수는 마지막으로 남은 한 가닥의 침향목을 꺼내 들어 담배에 끼워 넣어 불을 지폈다.담백하고 은은한 침향목 향이 참으로 조유진을 닮아 있었다.희미하고 담담한 존재감이지만 순식간에 사람을 중독시켰다.어디가 그리도 좋은지 꼭 짚을 수는 없었지만, 결코 잊을 수가 없는 그러한 존재였다.하지만 조유진이 선물해준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제 배현수는 침향목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중독된 건 끊으면 그만이었다. 이는 결코 어렵지 않았다.담배가 그러했다. 침향목도 그러했다. 조유진도, 그럴 것이다.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던 담뱃불이 희미하게 자신의 종말을 고했다.배현수는 손가락으로 담배를 짓이겨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불빛을 껐다. 담뱃불에 데인 살결이 아려왔고 곧이어 그 통증은 살을 파고들었다. 이윽고 담배꽁초가 하찮게 창밖으로 버려졌다.그리고 배현수는 계속하여 병원 맞은 편에 30분 동안 머물렀다.차에 시동을 걸기 전, 배현수는 병원 정문을 다시 한번 힐끗 바라보았다. 하지만 배현수는 이내 그러한 자신을 비웃듯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 배현수가 직접 조유진에게 자유를 주기로 했으면서 지금, 어떻게 조유진이 다시 쫓아 나와 그를 붙잡아주길 바란단 말인가.배현수는 항상 알고 있었다. 감정방면에 있어서 그는 줄곧 운이
전화 건너편으로부터 남초윤의 초조한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그리고 조유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남초윤을 위로해주었다. “그래도 나 지금 잘 살아있잖아. 그러니까 멀쩡하게 네 전화도 받고 있고. 나 정말 괜찮아. 조금 아픈 것 빼고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그래도 아픈 건 또 알아?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거기에 덤벼. 내가 정말 못 말려.”“나도 당시에 무슨 용기가 있어서 그런 건진 모르겠어.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조금 후회되네, 하하. 나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면 절대 안 달려들 거야.”조유진의 말투는 매우 경쾌하게 들렸고 그녀의 기분도 상당히 좋아 보였다.하지만 남초윤은 조유진을 너무 잘 알았다. 남초윤은 그러한 조유진이 마음이 아픈 듯 불만을 토로했다. “너 말은 그렇게 해도 몸은 또 얼마나 성실한데. 다시 한번 기회를 줘도 넌 아마 배현수 앞에 막아섰을 거야. 내가 널 몰라? 배현수는? 네 곁에 있어? 널 보살펴주기는 했어?”“현수 씨는 대제주시로 돌아갔어.”남초윤은 이제 더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네가 배현수 대신 칼까지 맞았는데!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넌 배현수 생명의 은인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그런 널 버리고 도망갈 수 있어?”“현수 씨가 떠나기 전에 간병인을 찾아줬어. 똑같아. 게다가 간병인분이 오히려 현수 씨보다 날 더 잘 케어해주시잖아.”“내가 정말...화가 나서 미치겠다. 네가 걔한테 빚졌다고 쳐, 그래도 지금은 거의 다 갚았잖아, 안 그래? 유진아, 너 제발 배현수 앞에서 자꾸 주눅 들지 마. 네가 배현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배현수는 아무것도 아니야.”조유진은 더는 배현수에 관해 얘기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려 남초윤에게 물었다. “선유는? 요 며칠 내가 대제주시에 없었는데 선유는 말 잘 들어?”“선유는 당연히 말 잘 듣지. 걱정하지 마. 나 요즘은 내 작은 아파트에서 지내고 선유가 학교 끝나자마자 데리러 가. 우리 둘이 지금 얼마나 멋지게 잘살고 있는지 모른다니까.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