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현수는 이제 도대체 어느 것이 진짜 조유진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아마 매 순간이 진실일 수도 있고 모두 그녀의 진심이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유진의 진심이라고 하여 또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사랑을 말하면서도 그를 배신했었던 인간인데.조유진이 바로 그런 인간이었다. 뒤를 돌아서면 순식간에 얼굴이 바뀌었다.배현수가 한창 허공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고 있을 때 그의 핸드폰 벨 소리가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은 다름 아닌 육지율이었다.배현수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는 지금 그 누구의 전화도 받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육지율의 전화는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하여 걸려왔다.결국, 전화가 연결되자 육지율은 버럭 화를 내며 물었다. “잘났다. 이 시간에 내 전화도 안 받고. 너 설마 조유진과 벌써 침대까지 올라가서 미래까지 약속한 거 아니야?”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화가 가득 담겨 귀가 울릴 지경이었다.배현수는 쩌렁쩌렁 울리는 육지율의 목소리에 핸드폰을 저 멀리 치우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싸늘하게 답했다. “무슨 소리야? 잤다고 해도 이젠 한두 번도 아니고.”“...”육지율은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전에 누가 같은 곳에서 두 번 넘어지지 않는다고 그렇게 당당하게 선언했는데! 현수야 현수야, 이젠 두 번이 아니라 셀 수 없이 여러 번 넘어진 건 아니야? 듣자 하니 조유진이 너 대신 칼을 맞았다는데 너 지금 그것 때문에 또 마음 약해졌지?”“나도 걔가 내 앞에 막아설 줄 몰랐어.”하지만 육지율은 여전히 조유진을 믿지 못했다. “그것도 걔 수법이면 어떡하게? 한번 배신하면 평생 안 본다는 것, 이 말 그 잘난 배현수 네 명언 아니냐? 만약 당시 다른 사람이 법정에서 널 지목해서 감옥에 들어가 3년 동안 갇혀있게 했으면, 네 성격대로라면 진즉에 그 사람 갈기갈기 찢어놨어. 그런데 왜 조유진이 그 짓 하니까 계속해서 봐주는 건데?”배현수는 피식 씁쓸한 비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조유진은 슈크림 빵을 손에 쥐고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자 빵 속의 강한 크림 향이 입안을 맴돌았고 달콤하지만 느끼하지도 않고 폭신하고 쫄깃한 식감이 더욱 돋보이는 빵이었다.배현수의 말에 조유진은 동문서답으로 갑자기 엉뚱한 말을 늘어놓았다. “이 슈크림 빵 엄청 맛있는데 드셔보실래요?”조유진의 반응은 배현수의 말을 못 들은 듯 너무나도 담담했다. 그녀의 미지근한 반응에 배현수는 미간을 찌푸렸고 검고 깊은 그의 동공은 더욱 깊은 빛을 발했다.배현수는 마지 못하여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조유진, 넌 이제 자유야.”이것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원하던 것 아닌가? 그러니 지금, 조유진이 가장 원하던 것을 이루었으니 그녀는 지금 기뻐해야 마땅한 것이다.조유진은 빵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꽉 막혀오는 듯한 느낌에 죽을 몇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배현수의 깊은 눈빛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사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현수 씨의 뜻은 절 이제 원망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아니면 저에게 복수하지 않으시겠다는 건가요?”하지만 조유진은 이것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배현수를 대신하여 칼을 한번 맞았다고 하여 배현수가 그녀를 용서했을 리는 없었다.배현수의 올곧고 거대한 몸집이 빛과 그림자의 경계 속에 싸여 다소 적막한 분위기를 풍겼다.“난 너를 원망하지 않을 수는 없어. 하지만 복수라 하면 네가 나를 대신하여 칼을 맞았으니 6년 전의 원한과 함께 퉁치자.”퉁친다고.몇 개월 전의 조유진은 꿈속에서도 배현수와의 모든 빚을 청산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하지만 정작 배현수가 정말 그녀를 놓아주었으니 조유진은 응당 기뻐해야 마땅한 것인데 왜인지 가슴으로부터 둔탁한 통증이 밀려오더니 파도처럼 몰려와 어느새 조유진의 몸을 삼키며 그녀를 괴롭혔다.숨이 턱 막힐 정도로 너무 아팠다.조유진은 애써 고통을 삼키며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럼...저 계속하여 SY 그룹에서 일할 수는 있나요?”배현수는 순간
이 점에서만큼 배현수와 조유진은 서로 합이 정말 잘 맞았다.배현수는 조유진의 오른쪽 가슴에 옅은 갈색 점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녀의 몸 곳곳의 모든 민감 점을 알고 있다. 하지만 유독 그녀의 번호가 없는 것이다.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의 낯선 사람이 아닐까.배현수는 그저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시선으로 조유진을 내려다볼 뿐이었다.조유진은 아려오는 눈가를 애써 참으며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맞다. 배 대표님께서 이제 저를 상관하지 않으시겠다고 한 말씀 정말입니까?”“이제 네가 죽든, 살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그럼 저도 마음이 놓이네요. 앞으로 제가 결혼을 하든 아이를 낳든 대표님께는 일일이 보고하지 않겠습니다. 전애인은 죽은 듯이 지내야 마땅하니까요.”자유를 허가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자녀를 낳을 생각을 하다니. 신준우라는 그 사람인가? 아니라면 강이찬인가?하지만 이 모두 배현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배현수는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고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결국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널 보고 싶지도 않고 너의 그 어떤 소식도 전해 듣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 강이찬한테서도 멀리 떨어지는 게 좋을 거야.”‘강 선배?’조유진은 확실히 강이찬과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이는 배현수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전에 조유진과 강이찬이 사이좋게 지낸 것도 전부 배현수 때문이었다.만약 조유진과 배현수가 헤어졌다면 조유진도 강이찬을 찾아갈 리가 없었다.오히려 조유진은 최선을 다해 강이찬의 범위를 벗어날 것이다.“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제가 돈을 충분히 모으면 대제주시를 떠나 이곳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갈 겁니다.”배현수는 그저 조유진이 그에게 겁주는 것이라 여기고 조유진의 말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대제주시가 이리도 큰데 특별히 만나려고 약속한 것이 아니라면 만나기 매우 어려울 것이다. 때문에 조유진이 대제주시에 있든 없든 별다른 차이가 있지는 않았다.
병원 아래, 맞은 켠 도로에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서 있었다.이윽고 운전석의 차창이 3분의 2 정도 내려갔다.뼈마디가 뚜렷한 커다란 손이 담배 한 대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두고 아무렇게나 차창밖에 걸치고 있었다.그 차갑고 흰 긴 손가락 사이로 선홍색 불빛 한 점이 유난히 눈부셨다.바람이 반쯤 불어오면 배현수도 담배를 반 모금 피웠다.선홍색의 담배 불빛이 흘러가는 바람 속에서 아슬아슬 빛을 발했다. 마치 배현수의 감정처럼 한순간 파도처럼 일으켜 세워졌다가도 그의 이성에 의해 억눌려지는 반복이었다….배현수의 음울한 안색이 담배 연기 속에 파묻혀졌고 흰 연기가 그의 날카로운 눈빛을 가려 쓸쓸한 적막만이 허공에 머물 뿐이었다.배현수는 마지막으로 남은 한 가닥의 침향목을 꺼내 들어 담배에 끼워 넣어 불을 지폈다.담백하고 은은한 침향목 향이 참으로 조유진을 닮아 있었다.희미하고 담담한 존재감이지만 순식간에 사람을 중독시켰다.어디가 그리도 좋은지 꼭 짚을 수는 없었지만, 결코 잊을 수가 없는 그러한 존재였다.하지만 조유진이 선물해준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이제 배현수는 침향목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중독된 건 끊으면 그만이었다. 이는 결코 어렵지 않았다.담배가 그러했다. 침향목도 그러했다. 조유진도, 그럴 것이다.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던 담뱃불이 희미하게 자신의 종말을 고했다.배현수는 손가락으로 담배를 짓이겨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불빛을 껐다. 담뱃불에 데인 살결이 아려왔고 곧이어 그 통증은 살을 파고들었다. 이윽고 담배꽁초가 하찮게 창밖으로 버려졌다.그리고 배현수는 계속하여 병원 맞은 편에 30분 동안 머물렀다.차에 시동을 걸기 전, 배현수는 병원 정문을 다시 한번 힐끗 바라보았다. 하지만 배현수는 이내 그러한 자신을 비웃듯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 배현수가 직접 조유진에게 자유를 주기로 했으면서 지금, 어떻게 조유진이 다시 쫓아 나와 그를 붙잡아주길 바란단 말인가.배현수는 항상 알고 있었다. 감정방면에 있어서 그는 줄곧 운이
전화 건너편으로부터 남초윤의 초조한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그리고 조유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남초윤을 위로해주었다. “그래도 나 지금 잘 살아있잖아. 그러니까 멀쩡하게 네 전화도 받고 있고. 나 정말 괜찮아. 조금 아픈 것 빼고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그래도 아픈 건 또 알아? 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거기에 덤벼. 내가 정말 못 말려.”“나도 당시에 무슨 용기가 있어서 그런 건진 모르겠어.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조금 후회되네, 하하. 나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면 절대 안 달려들 거야.”조유진의 말투는 매우 경쾌하게 들렸고 그녀의 기분도 상당히 좋아 보였다.하지만 남초윤은 조유진을 너무 잘 알았다. 남초윤은 그러한 조유진이 마음이 아픈 듯 불만을 토로했다. “너 말은 그렇게 해도 몸은 또 얼마나 성실한데. 다시 한번 기회를 줘도 넌 아마 배현수 앞에 막아섰을 거야. 내가 널 몰라? 배현수는? 네 곁에 있어? 널 보살펴주기는 했어?”“현수 씨는 대제주시로 돌아갔어.”남초윤은 이제 더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네가 배현수 대신 칼까지 맞았는데!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넌 배현수 생명의 은인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그런 널 버리고 도망갈 수 있어?”“현수 씨가 떠나기 전에 간병인을 찾아줬어. 똑같아. 게다가 간병인분이 오히려 현수 씨보다 날 더 잘 케어해주시잖아.”“내가 정말...화가 나서 미치겠다. 네가 걔한테 빚졌다고 쳐, 그래도 지금은 거의 다 갚았잖아, 안 그래? 유진아, 너 제발 배현수 앞에서 자꾸 주눅 들지 마. 네가 배현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배현수는 아무것도 아니야.”조유진은 더는 배현수에 관해 얘기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돌려 남초윤에게 물었다. “선유는? 요 며칠 내가 대제주시에 없었는데 선유는 말 잘 들어?”“선유는 당연히 말 잘 듣지. 걱정하지 마. 나 요즘은 내 작은 아파트에서 지내고 선유가 학교 끝나자마자 데리러 가. 우리 둘이 지금 얼마나 멋지게 잘살고 있는지 모른다니까.
오후가 되자 호흡기과와 흉부외과가 빠른 시간안에 연합 진료를 마쳤다.그리고 조유진은 최종적으로 폐암을 확진 받았다.진료를 도맡았던 의사가 병실로 들어와 한차례의 면담을 끝내고 조유진을 위로해주었다. “아직 젊으시기도 하고 말기도 아니기에 화학요법을 적극적으로 진행한다면 여전히 큰 희망이 있습니다.”“화학요법을 하지 않고 제 저항력과 면역력에만 의존한다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자신의 여생을 묻는 조유진의 모습은 너무나도 침착하고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 의사마저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의사는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을 뒤로 한 채 그녀의 물음에 답해주었다. “상황을 조금 더 지켜봐야 하지만 반년에서 1년 정도 될 겁니다. 물론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진 않습니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4, 5년정도 더 살수도 있고요.”반년?그렇다면 시간이 너무 극박한것은 아니었다. 후사를 준비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선생님, 제 외상은 얼마나 더 회복하면 퇴원할 수 있나요?”“환자분 몸에 난 상처는 심각해 보여도 외상에 불과합니다. 수술 뒤 상처 회복속도가 빠르다면 일주일이면 퇴원하실 수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뒤 물에만 닿지 않게 조심해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병원에 방문하여 약을 갈아주시면 되고요.”조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응했다. “네,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환자분…폐 문제는 가족분들한테 알려야 하실 것 같습니다.”가족?조유진에게 가족이라 하면 이제 두 명밖에 남지 않았다.한 명은 나이 드신 어머니였고, 다른 한 명은 너무 어린 선유였다. 만약 이 일을 그들에게 알린다면 그들에게 걱정거리와 슬픔을 안겨줄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하여 조유진은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릴 생각은 없었다.“치료한다면 생존확률은 얼마나 되나요?”“이것도…확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구체적으로 개인의 체질이나 병의 확산상태를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환자분은 젊으시기에 저희는 치료를 권장해 드리는데 혹시 치료비용에
조유진은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그럼 육 변호사님 지금 선유 신분을 아신 거야?”“나 아직 아무것도 안 말했어. 근데 걔가 이미 알아차렸을까 봐 걱정돼…아, 일단 이만 끊자. 쟤 또 왔어.”조유진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남초윤 쪽에서 다급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급하게 끊겨버린 통화에 조유진은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택시를 불렀다. “기사님, 천아캐슬로 가주세요. 빨라요!”…천아캐슬안.육지율과 조선유는 눈을 부라리며 장장 3분 내내 서로를 바라보았다. 역시 선유가 먼저 이 정적을 깨뜨렸다. “아저씨, 계속 이렇게 저를 쳐다만 보시면 엄청나게 변태 같아요. 제가 예쁜 건 알지만 제 얼굴엔 꽃이 없는데요. 왜 자꾸 쳐다봐요?”“…”육지율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고 육지율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남초윤에 물었다. “얜 대체 누구네 애길래 입이 이렇게 독해? 너 계속 제대로 설명 안 하면 나 얘 벙어리로 만들어 버릴 거야.”하지만 조선유는 두려운 기색 하나 없이 눈을 똑바로 치켜뜨고 육지율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아저씨, 아이를 벙어리로 만들어 버리는 건 불법이에요. 감옥 가고 싶으세요?”“허, 네가 불법이 뭔지도 알아?”“제가 세 살도 아니고 저 이제 여섯…”선유가 자신이 여섯 살이라는 것을 입 밖에 꺼내려 하자 남초윤이 다급하게 선유를 자신의 몸 뒤에 숨기고는 말을 가로챘다. “육지율, 선유는 내가 밖에서 우리 강아지랑 낳은 거예요. 만약 불공평하다고 생각되면 당신도 밖에서 아무 여자나 찾아서 아이를 낳아달라고 하세요. 저도 더는 한마디도 더 하지 않을 거예요. 아니면…우리 이…”“이혼”이라는 두 글자를 채 말하기도 전에 육지율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육지율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남초윤에게 점점 다가갔고 육지율의 날카로운 눈빛은 이내 남초윤 몸 뒤에 숨겨진 아이에게 머물렀다. “꼬맹이, 너 아까, 몇 살이라고 했지?”선유가 입을 열려고 하자 남초윤이 다급하게 선유의 작은 입을 틀어막
“사실 이 아이는…나와 김성혁의 아이예요.”김성혁이 이름을 듣자마자 육지율이 쓰고 있는 안경 뒤에 숨겨진 검은 눈동자에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육지율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남초윤은 계속하여 말을 늘어놓았다. “사실 나와 김성혁은 고등학교 때부터 연애를 했었죠. 이건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수능이 끝난 그 겨울날 저, 저와 김성혁이 멋도 모르게 잠자리를 가졌고 전 임신을 했어요. 이 일이 어머니의 귀에 들어갔고 어머니는 저에게 당장 지우라고 협박했었죠. 그렇게 병원에 갔다가 전 너무 무서워서 도망쳐 나왔어요. 결국, 우리 어머니도 제가 간절하게 비니 마음 약해져서 저를 도와 이 일을 숨겨줬죠. 그 겨울 전 어머니와 해외로 여행 간다는 핑계로 몰래 이 아이를 낳았어요…그리고 어머니의 유일한 요구는 김성혁과 당장 헤어지는 것이었어요. 그 뒤의 일들은 당신도 아마 잘 알 거예요.”남초윤은 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육지율의 표정을 살폈다.육지율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점점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이 형세를 보아하니 그가 정말 믿은 것 같기도 했다.‘유진아 유진아, 내가 정말 너의 둘도 없는 베프로서 모든 걸 놨다.’남초윤은 눈을 딱 감고 계속하여 거짓말을 이어갔다. “엄마한테 물어볼 필요도 없어요. 우리 엄마는 당연히 이를 인정할 리가 없겠죠. 어찌 됐건 이건 자기 딸의 허점과도 같으니까요. 만약 이걸 받아드릴 수가 없어서 이혼하고 싶다면…”육지율은 냉소를 터뜨리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남초윤, 이렇게 많은 거짓말을 늘어놓고 결국 네 목적은 이혼인 거야?”“…”남초윤은 정말 하늘에 대고 아니라고 맹세할 수 있었다.육지율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계속하여 남초윤을 밀어붙였다. 남초윤은 육지율의 주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기압에 등골이 서늘해지고 무서워졌다. “당신 그냥 이혼하고 싶은 거지? 김성혁 때문에.”남초윤은 그녀의 말이 육지율을 화나게 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전, 전 이혼하고 싶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