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진은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그럼 육 변호사님 지금 선유 신분을 아신 거야?”“나 아직 아무것도 안 말했어. 근데 걔가 이미 알아차렸을까 봐 걱정돼…아, 일단 이만 끊자. 쟤 또 왔어.”조유진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남초윤 쪽에서 다급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급하게 끊겨버린 통화에 조유진은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택시를 불렀다. “기사님, 천아캐슬로 가주세요. 빨라요!”…천아캐슬안.육지율과 조선유는 눈을 부라리며 장장 3분 내내 서로를 바라보았다. 역시 선유가 먼저 이 정적을 깨뜨렸다. “아저씨, 계속 이렇게 저를 쳐다만 보시면 엄청나게 변태 같아요. 제가 예쁜 건 알지만 제 얼굴엔 꽃이 없는데요. 왜 자꾸 쳐다봐요?”“…”육지율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고 육지율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남초윤에 물었다. “얜 대체 누구네 애길래 입이 이렇게 독해? 너 계속 제대로 설명 안 하면 나 얘 벙어리로 만들어 버릴 거야.”하지만 조선유는 두려운 기색 하나 없이 눈을 똑바로 치켜뜨고 육지율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아저씨, 아이를 벙어리로 만들어 버리는 건 불법이에요. 감옥 가고 싶으세요?”“허, 네가 불법이 뭔지도 알아?”“제가 세 살도 아니고 저 이제 여섯…”선유가 자신이 여섯 살이라는 것을 입 밖에 꺼내려 하자 남초윤이 다급하게 선유를 자신의 몸 뒤에 숨기고는 말을 가로챘다. “육지율, 선유는 내가 밖에서 우리 강아지랑 낳은 거예요. 만약 불공평하다고 생각되면 당신도 밖에서 아무 여자나 찾아서 아이를 낳아달라고 하세요. 저도 더는 한마디도 더 하지 않을 거예요. 아니면…우리 이…”“이혼”이라는 두 글자를 채 말하기도 전에 육지율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육지율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남초윤에게 점점 다가갔고 육지율의 날카로운 눈빛은 이내 남초윤 몸 뒤에 숨겨진 아이에게 머물렀다. “꼬맹이, 너 아까, 몇 살이라고 했지?”선유가 입을 열려고 하자 남초윤이 다급하게 선유의 작은 입을 틀어막
“사실 이 아이는…나와 김성혁의 아이예요.”김성혁이 이름을 듣자마자 육지율이 쓰고 있는 안경 뒤에 숨겨진 검은 눈동자에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육지율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남초윤은 계속하여 말을 늘어놓았다. “사실 나와 김성혁은 고등학교 때부터 연애를 했었죠. 이건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리고 수능이 끝난 그 겨울날 저, 저와 김성혁이 멋도 모르게 잠자리를 가졌고 전 임신을 했어요. 이 일이 어머니의 귀에 들어갔고 어머니는 저에게 당장 지우라고 협박했었죠. 그렇게 병원에 갔다가 전 너무 무서워서 도망쳐 나왔어요. 결국, 우리 어머니도 제가 간절하게 비니 마음 약해져서 저를 도와 이 일을 숨겨줬죠. 그 겨울 전 어머니와 해외로 여행 간다는 핑계로 몰래 이 아이를 낳았어요…그리고 어머니의 유일한 요구는 김성혁과 당장 헤어지는 것이었어요. 그 뒤의 일들은 당신도 아마 잘 알 거예요.”남초윤은 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육지율의 표정을 살폈다.육지율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점점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이 형세를 보아하니 그가 정말 믿은 것 같기도 했다.‘유진아 유진아, 내가 정말 너의 둘도 없는 베프로서 모든 걸 놨다.’남초윤은 눈을 딱 감고 계속하여 거짓말을 이어갔다. “엄마한테 물어볼 필요도 없어요. 우리 엄마는 당연히 이를 인정할 리가 없겠죠. 어찌 됐건 이건 자기 딸의 허점과도 같으니까요. 만약 이걸 받아드릴 수가 없어서 이혼하고 싶다면…”육지율은 냉소를 터뜨리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남초윤, 이렇게 많은 거짓말을 늘어놓고 결국 네 목적은 이혼인 거야?”“…”남초윤은 정말 하늘에 대고 아니라고 맹세할 수 있었다.육지율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계속하여 남초윤을 밀어붙였다. 남초윤은 육지율의 주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저기압에 등골이 서늘해지고 무서워졌다. “당신 그냥 이혼하고 싶은 거지? 김성혁 때문에.”남초윤은 그녀의 말이 육지율을 화나게 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전, 전 이혼하고 싶지
하지만 이것 또한 마지막이 될 것이다.육지율은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니라면, 정말 무언가를 마음먹고 “이혼”이라는 단어를 입 밖에 꺼냈을 때는 절대 생각 없이 흘려보내는 결정이 아니라는 것이다.선유는 남초윤의 소맷자락을 끌어당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모, 아니면 우리 육 삼촌한테 다시 설명해볼까?”하지만 남초윤도 뼛속까지 도도한 사람이었다.초반에는 그저 조유진을 도와 선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입에서 나오는 대로 거짓말을 한 것뿐이다. 남초윤은 육지율이 이를 신경 쓰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육지율이 이리도 불같이 화를 내고 그녀와 이혼까지 하려고 할 줄 꿈에도 몰랐다.바로 그때, 조유진이 헐레벌떡 달려왔다.“어떻게 된 일이야? 육 변호사님은, 가셨어?”선유는 조유진이 도착한 것을 보자마자 쪼르르 조유진의 품속에 달려가 안겼다.“엄마, 이모와 삼촌 싸우셨어. 육 삼촌이 이모와 이혼하자고 하셨어.”조유진은 선유의 말에 멈칫했다. “이게 무슨 말이야? 초윤아, 무슨 일 있었어?”남초윤은 조유진과 선유를 등지고 손을 들어 올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고는 몸을 돌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혼? 그까짓 거 하면 되지 뭐. 누가 무섭대? 육지율과 나 사이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 뭐.”조유진은 자초지종을 들은 뒤 자책하기 시작했다.“내가 육 변호사님한테 가서 설명할게. 선유는 네 아이가 아니라고. 변호사님이 지금 오해를 하셔서 너와 이혼하시겠다는 거잖아.”남초윤은 다급하게 조유진을 말렸다. “그러지 마. 그냥 이혼하면 되지. 나도 육지율과 잘해볼 생각은 없었어. 원래부터 비즈니스로 맺은 혼인인데 뭐. 육지율이 먼저 제기한 이혼은 우리 부모님도 만회할 수는 없을 거야. 내가 먼저 제기한 이혼이었다면 평생 이혼할 수 없었을 거야. 선유 핑계로 이혼하게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아.”조유진은 남초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난 왜 이게 네 진짜 마음이 아닌 것 같지? 너
엄마는 버리고 아이만 데려간 다라.조유진도 이를 고려해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조유진은 이미 마음의 준비마저 끝낸 상황이었다. 그저 배현수가 그녀로 하여금 가끔이라도 선유를 보러 가게만 해준다면 감사할 따름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데리고 있는 것보다 배현수가 데리고 있는 것이 선유한테는 더 좋은 일일 수 있었다.조유진은 자신을 비웃듯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만약 배현수가 선유를 키웠다면 2000만 원의 개입 수술도 못 받고 있지는 않을 거야. 초윤아, 나 이제 선유 못 키우겠어. 선유는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물질적인 조건이 필요해.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어.”만약 조유진에게 건강한 몸만 있었다면 배현수와 이를 악물고 양육권을 다퉜을 것이다.배현수에게 밀리는 한이 있더라도 죽을힘을 다해서라도 다퉜을 것이다.“하지만 선유가 너와 함께 있어야 정신세계가 더욱 풍부해질 수 있을 거야. 선유 아직 여섯 살이야. 아이에게 아빠는 없어도 되지만 엄마가 없다면 정말 집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야. 배현수에게 뭐가 있는데, 돈 말고 선유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있긴 해? 게다가 만약 송인아와 결혼한다면….”“선유와 배현수는 사이좋아. 선유도 배현수 엄청나게 좋아하고.”“뭐? 선유와 배현수가 어떻게….”조유진은 배현수와 선유가 서로 알게 된 과정을 남초윤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남초윤은 그대로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역시 피는 못 속인다 이거야?”“그러게. 나도 선유가 이토록 배현수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 하지만 이렇게 미리 적응해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이렇게 되면 미래에 이별해야 하는 순간에도 선유가 너무 심하게 울지 않을 것이다.만약 선유가 끊임없이 운다면 조유진도 마음이 약해지고 말 것이다.남초윤은 의심의 눈초리로 조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유진아, 너 정말 양육권을 배현수에게 넘겨줄 생각인 거야?”“넘겨주기 싫다고 해도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배현수도 언젠가는 선유의 존재를 알게 될 텐데. 그리고
배현수는 보드카 한 잔을 따라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뼈마디가 뚜렷한 긴 손가락이 술잔을 쥐고 톡톡 두드렸다. “말해봐, 무슨 일이야?”육지율이 이렇게까지 술을 마시는 광경은 아주 드물었기 때문이었다.배현수의 물음에 육지율은 독한 술을 한입에 삼키고는 이를 악물며 말을 꺼냈다. “나 이혼해.”“이 소식은 들어본 적 없는데. 꽤나 새롭네.”배현수는 눈썹을 치켜들며 나른한 자세로 의자에 기대앉아 술잔을 들어 육지율의 잔에 건배하고는 다시 한 모금 음미했다.술의 맵고 독한 향이 목구멍을 자극해오자 배현수가 눈살을 찌푸렸다.배현수의 반응은 마치 육지율이 “오늘 밤 조금 춥다.”라며 부리는 투정을 대하고 있는 듯 침착했다.‘내 말에 이리도 아무런 리액션도 없고 침착한 건 조금 실례되는 행위 아닌 건가?’“야, 너 진짜 사람 맞냐? 내가 말하고 있잖아! 나 이혼한다고.!”배현수는 울부짖는 육지율을 그저 가볍게 힐끗 곁눈질하고는 돌직구를 던졌다. “결혼한 적이 없어서 이혼하면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르겠네.”“…켁!”육지율은 하마터면 사레들릴뻔했다.“너 지금 이게 이혼하는 사람 위로하는 방식이야? 근데 듣고 보니 네가 나보다 더 불쌍한 것 같기도 하고. 적어도 난 누울 관이라도 있지. 넌 정말 곁에 아무도 없다 못해 아예 황지에 놓인 거네.”“보아하니 너도 딱히 그렇게 슬퍼 보이지도 않는데 게다가 나한테는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업무도 있고 나 이만 갈까?”배현수는 몸을 일으켜 바로 자리를 뜰 태세를 취했다. 그러자 육지율은 다급히 배현수의 팔을 잡으며 그에게 매달렸다. “가지 마! 네가 가면 나더러 누구한테 이 슬픔을 털어놓으라고.”“네가 먼저 제기한 거야? 아니면 남초윤이 먼저 제기한 거야?”“내가 제기한 거야. 남초윤도 내가 이혼까지 제기할 줄 몰랐을 거야.”“원인.”배현수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을 한 채 육지율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았고 마치 심문이라도 하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육지율은 이 상황이 우스운 듯 입
“조유진,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 거야?”‘설마 남초윤이 조유진에게 다 털어놓은 건가?'하지만 육지율이 조유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남초윤도 분명 알고 있을 터인데 남초윤은 조유진을 중재인으로 삼을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육 변호사님, 지금 시간 되시나요?”“아니.” 육지율은 단칼에 거절해버렸다.전화 건너편의 조유진은 몇 초간 침묵을 유지하더니 진지하게 다시 말을 꺼냈다. “변호사님께서 저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신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변호사님을 찾은 건 변호사님께 매우 중요한 일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직접 만나 뵙고 얘기하고 싶은데 괜찮으신가요?”매우 중요한 일…육지율은 자신의 곁에 앉아 그대로 얼어붙은 배현수를 힐끗 쳐다보더니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불야성 바 알지? 나 지금 불야성 바에서 술 마시고 있거든. 할 말 있다면 여기로 와.”전화를 끊은 뒤, 육지율은 얄밉게 배현수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곧 있으면 조유진이 여기로 올 텐데. 나한테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할지 궁금하지 않아?”배현수는 육지율의 손을 쳐내고는 여전히 침착하게 무뚝뚝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네가 조유진과 할 중요한 얘기가 있다면 나도 너희들을 방해하지 않을게.”육지율은 배현수의 팔을 덥석 잡으며 언성을 높였다. “거짓말하지 마! 네가 알고 싶어 하는 거 다 알거든? 너 못 가. 너 지금 가면 나 취했다고 조유진이 그 틈을 타 내 몸이라도 탐하면 난 죽어도 결백을 증명할 수 없다고.”배현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조유진한테 눈이 없는 줄 알아?”“너 그거 몰라? 친한 친구는 남자 보는 눈도 결국 비슷하다잖아. 만약 조유진도 나한테 반하면 어떡해?”“남초윤도 딱히 널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던데?”“…”‘배현수, 이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라고.’…15분 뒤, 조유진이 불야성 바에 도착하자 육지율이 조유진을 향해 손가락을 딱 치며 손을 흔들었다. “여기
“괜찮은데, 왜? 이것때문에 또 신경 쓰여?”육지율은 일부러 말을 애매하게 하며 배현수가 신경 쓰는 대상이 육지율인지 조유진인지 알수 없게 만들었다.배현수가 돌아왔다. 따라서 조유진도 더이상 이 자리에 오래 머물기 곤란했다. “육 변호사님, 저도 여기까지만 말하겠습니다. 믿든 안 믿든 이건 변호사님 자유시니까요. 하지만 변호사님께서 정말 초윤이를 오해하셨습니다.”“됐어. 너도 이만 가봐. 나와 남초윤 사이의 일은 외부인인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남초윤이 정말 이 일에 해명하고 싶다면 직접 오라고 해.”조유진도 더이상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바를 나왔다....대제주시의 여름은 항상 한치 앞도 예측할수가 없었다.한밤중에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조유진은 바 입구의 복도에 서서 휴대폰을 켜 택시를 잡고 있었다.그녀 뒤의 바 입구에서는 끊임없이 사람들이 몰려나왔고 그 사람들은 술에 잔뜩 취해 길을 가다가도 앞이 흐릿하게 잘 보이지 않는지 계속하여 조유진에게 부딪쳐왔다.계속된 타격에 상처를 건드린듯 싶었다.조유진은 급격하게 밀려오는 통증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왼쪽 가슴을 움켜쥐고 천천히 그 자리에 웅크려 앉았다.그때 검정색의 마이바흐 한 대가 그녀의 앞을 지나쳤다.차 내부, 배현수는 백미러로 조유진의 모습을 힐끗 쳐다보고는 더이상 관여하지는 않았다.차가 그대로 또 한 구간 앞으로 나아갔다.콩알만큼 굵은 빗방울이 끊임없이 앞유리에 부딪쳐 부지런히 움직이는 와이퍼에 의해 빠르게 튕겨져 날아갔다.이 길은 번화가이고 술집도 많았다. 게다가 이토록 큰 비가 오는데 이 시간에 택시를 잡는건 거의 하늘의 별 따기 격이었다.배현수는 무의식간에 다시 한번 백미러로 뒷켠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조유진이 한 손으로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왼쪽 가슴을 움켜쥐고 힘겹게 비바람속에서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수척한 그녀의 몸은 마치 바람만 불어도 바로 부러져버릴듯 가냘펐다.배현수의 미간이 더욱 보기좋게 구겨
이때, 의사가 반창고를 가져왔다.“먼저 이거 붙이세요. 상처가 매우 깊숙해서 다 나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실 겁니다. 절대 물이 닿으면 안 됩니다.”“네.”조유진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의사가 배현수에게 말했다.“여자친구분이 샤워하실 때 방수 반창고를 붙여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냥 몸을 닦아내는 것이 좋기 때문에 한동안은 참으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선생님, 제 남...”남자친구라는 호칭이 차마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조유진은 옷을 챙겨 이미 뒤돌아 떠난 배현수의 뒤를 따랐다.“의사 선생님께서도 이미 봐주셔서 이제 정말 괜찮아요. 혼자 집에 갈 수 있어요.”앞에서 걷고 있던 배현수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자 조유진은 그대로 그에게 부딪힐 뻔했다.배현수는 뒤돌아서더니 강제적으로 키스를 퍼부었다.“데려다주겠다고 했으니 약속 지킬 거야. 난 너처럼 변덕이 심한 사람은 아니야.”“그저... 번거로우실까 봐...”조유진은 시무룩한 채 땅을 쳐다보고 있었다.한번 잘못했으면 무엇을 하든 잘못을 거듭 반복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이것이 바로 인과응보였다.예전의 조유진이라면 배현수 앞에서 이 정도로 비굴한 사람은 아니었다.배신만 아니었다면 배현수는 얼마든지 그녀가 마음대로 애교부리고 떼쓰는 모습을 받아줄수 있었다.조유진이 직접 자신을 향한 사랑을 짓밟은 것이다.차에 올라타고, 주소를 알려주었다.가는 길 내내 분위기는 차갑기만 했다.동네 입구에 도착했을 때, 조유진이 갑자기 물었다.“만약 제가 죽는다고 해도 저를 미워할 거예요?”배현수는 멈칫하더니 비웃었다.“다 죽게 되는 마당에 내가 미워하든 말든 너랑 뭔 상관이야. 어차피 죽은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잖아.”조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일리가 있네요.”다만 욕심일 수도 있었지만 죽어도 여한이 없었으면 했다.그러다 생각을 바꿔보기로 했다.‘죽어도 여한이 있으면 또 뭐 어때? 죽으면 그만인데.’하지만 그래도 욕심이 났다. 어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