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 미니밴의 문이 ‘스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남재원은 하마터면 손을 낄 뻔했다.승합차가 먼지를 날리며 가버리자 남재원은 자리에 서서 욕했다.“죽으러 가는 거야. 뭐가 그렇게 급해!”이때 육지율과 남초윤도 경찰서에서 나왔다.남초윤이 말했다.“아까 아빠 뒷수습해 주셔서 고마워요.”유설영과 매니저가 책임을 묻는다면 그 엄청난 광고 위약금을 남재원이 물어줄 수 없다.육지율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갑자기 왜 이렇게 예의를 차려요?”남초윤이 또 소란을 피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렇게 덤덤하니 좀 의아했다.남초윤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나중에 아빠가 돈 달라고 하면 그냥 무시하세요.”남재원이 육지율한테서 너무 많이 가져갔다. 남재원도 그녀도 갚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육지율도 남재원을 더 이상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남재원의 핸드폰 번호를 차단했으니 앞으로 나도 상관하지 않을 거예요.”이 사람은 봐주면 봐줄수록 문제를 일으킨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다.그는 사실 남초윤더러 마음을 독하게 먹고 남재원과 인연을 끊어버리라고 말하고 싶었다.그러나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다시 삼켰다.부녀 관계를 끊을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남초윤도 짐작하고 있었다. 육지율은 남재원에게 3년 동안 뒷수습을 해줬고 진작 짜증이 난 상태였다.남재원을 돕는 것은 정 때문이었지 의무가 아니었다. 하지만 흡혈귀는 멀리하는 것이 좋다. 남재원은 거머리처럼 그의 몸에 붙어 3년 동안 피를 빨아 먹었다. 남초윤도 이 점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진짜 이렇게 덤덤한 육지율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조금 아팠다.남초윤이 말했다.“그동안 남재원이 진 빚은 다 갚을게요.”육지율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그깟 돈 필요 없어요. 당신에게 백 사줬다고 생각하면 돼요.”가벼운 말투는 별로 큰일이 아닌 듯했지만 남초윤의 가슴은 사실 피가 흘렀다.힘들이지 않고 청산할 수 있는 빚을 그녀는 힘껏 갚아야 하는 이 사실...예전에 망상에 빠져 그의 세
“너는 말이야 이런 관계가 있으면 이용할 줄도 알아야지. 조금만 힘을 쓰면 너의 잡지사에서 이미 편집장으로 승진했을 거야! 사장님이 됐을지도 몰라!”육성일, 육성일! 그해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저녁 뉴스에 나오던 사람이다.딸이 멍청해 이득 볼 줄도 잘난 척할 줄도 모른다고 생각한 남재원은 참지 못하고 몇 마디 투덜거렸다.“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육지율의 비위를 아주 잘 맞췄을 거야. 너는 적극적이기는커녕 걸핏하면 이혼하겠다고 하고! 그러니까 밖에서 저런 요염한 여자나 만나지! 너는 너의 어머니에게 잘 못 배웠어. 바깥 사회가 얼마나 난잡한지 모르지? 그래서 하루 종일 꿈만 꾸는 것이고. 육지율을 잡았는데 평생 먹고살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 휴, 기회를 줘도 쓸 줄 모르니 정말 소용이 없어!”남재원은 조수석에 앉아 계속 중얼거렸다.운전하는 남초윤은 너무 귀찮아 경적을 눌렀다.“그럼 본인이 직접 하든가요!”“만약 내가 여자고 어느 정도 몸매가 되면 바로 했겠지! 너에게 기회를 주지도 않았어! 네 엄마는 너를 예쁘게 낳기만 하고 머리는 그렇게 멍청하게 낳았으니 쯧쯧!”남초윤은 너무 화가 나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었다.“내 머리가 좋으면 돼지로 환생했겠죠. 당신 딸이 아니라!”“너! 아버지에게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어?”“당신한테서 배운 거예요!”...한편 저녁에 남초윤은 소정 별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육지율은 본인이 유설영과 작업하는 것을 남초윤이 신경 쓴다고 생각해 전화를 걸었다.첫 번째 통화 연결음은 오랫동안 울렸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두 번째 통화에서 저쪽 남초윤은 느릿느릿 말했다.“여보세요?”육지율은 씩 웃었지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아직도 안 돌아와요? 여기에서 나 혼자 두고 소리 없이 항의하는 거예요?”남초윤은 무력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무슨 항의를 했다고요?”요 며칠 집에 큰 변화가 생겨서 낮에 짐을 싸고 이사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육지율은 그녀가 화가 난 줄 알고 달랬다.“말했잖아요.
밤 9시 반, 불야항 바.배현수가 뒤늦게 도착했을 때, 육지율은 담배를 입에 문 채 바에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금방 나온 칵테일 두 잔의 색깔은 선명하고 유혹적이었다.육지율은 그중 한 잔을 배현수에게 내밀며 말했다.“내가 얼마나 체면을 세워주는지 봐봐. 직접 술까지 따라 주고.”배현수가 말했다.“이거 마실 수 있는 거야?”지난번에 용맹스러웠던 75도 공업용 알코올은 목구멍에서 뱃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위를 태울 뻔했다.육지율은 배현수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죽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사람이 독주를 마시는 게 뭐가 두려워? 배현수, 조유진과 화해하더니 갑자기 쫄기 시작한 거야?”칵테일을 한 모금 마신 배현수는 칵테일의 부드러움을 느끼며 말했다.“이제 가족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목숨을 아껴야 해.”육지율은 담뱃갑과 라이터를 그에게 던졌지만 배현수는 받지 않았다.“집에 가면 유진이가 검사할 거야.”육지율은 배현수의 멀쩡한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와이프가 엄격하네! 앞으로 나와서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안 마시니 여자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안 보겠지. 배현수, 너 이제 끝났어. 앞으로 무슨 낙으로 살아?”육지율이 동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자 배현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총탄이 빗발치는 곳에 오래 있으면 안정감과 든든함이 얼마나 소중한지 너는 몰라.”그는 7년 동안 외로운 나날을 보냈고 이걸로 충분히 고통받았다.총탄과 전우 이제 필요 없다.조유진만 있으면 이 세상 다 가진 것 같다.육지율은 얼음을 입에 물더니 독한 술로 입안을 가득 채우며 뜨거움과 찬 자극을 즐겼다.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눈밭의 불꽃은 따뜻하고 칼끝의 꿀은 달콤하지. 그 어떤 이런 자극 앞에서는 가치가 없어.”배현수가 가볍게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얇은 입술로 두 글자를 뱉었다.“천한 놈.”“사람이 한평생밖에 살지 못하잖아. 천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겠지? 조유진과 그렇게 오랫동안 밀당한 너야말로 천한 놈이겠지?”육지율의 말도 일리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면 그게 사람이든 일이든 어렵지 않다. 육지율처럼 돈이 부족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가장 간단했다.하지만 어느 날, 돈도 필요 없고 가방도 필요 없다고 하며 사랑 이야기를 나누면 곤란해진다.사랑의 빚은 갚기가 가장 어렵다.배현수는 전혀 놀라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더 이상 함부로 행동하지 마. 그러다가 무릎 꿇고 울어야 할 수 있어.”그는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누가 감히 나에게 무릎을 꿇기고 울게 할 수 있는데?”그 집 할아버지도 그럴 능력이 없는데 남초윤에게 있다고?어린 나이에는 할아버지의 매에 울었지만 나중에는... 대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몇 년 동안, 그는 누구에게 진 적이 없다. 감히 누구 그를 건드리겠는가?아마 배현수밖에 없을 것이다.719부대의 사격 연습장에 10발의 총알이 전부 과녁을 맞혔다. 정말 대단했다.사령관과 육성일은 한쪽에 서서 주시하고 있었다. 판사가 되어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로 했다.고개를 숙인 것은 그 한 번뿐이었다.육지율이라는 사람은 어릴 때부터 육성일을 따라다녔기에 권력의 힘을 알고 있었다.주변 사람들은 관계를 맺기 위해 그에게 굽실거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호불호 의도를 알아낼 수 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룰에 따라 움직였다.습관적으로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은 육씨 집안의 뼈에 새겨진 유전자와 같다.권력은 산이다. 누구도 넘을 수 없다.그것에 복종하든지, 아니면 배현수처럼 규칙을 깨고 질서를 새로 짤 정도로 강하든지였다.술을 마신 배현수는 대리운전을 불러 막 떠나려던 참이었다.이때 뒤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배 대표님! 정말 배 대표네요.”배현수는 돌아서자마자 낯익은 여인을 보았지만 왠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누구?”“주명은이에요. 배 대표님, 기억 안 나세요? 전에 저한테...”주명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그러자 육지율은 장난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배현수,
주명은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배현수는 대리운전이 오자마자 남자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가버렸다.주명은은 서러워하며 눈물을 흘리자 육지율은 우스운 얼굴로 물었다.“배현수가 어떻게 했는데 이렇게 서러워하는 거야?”한참을 울던 주명은은 누군가 와서 ‘관심’을 보이자 눈물을 왈칵 쏟았다.“내, 내 처음을 모두 준 사람이에요. 설날 요 며칠 동안 줄곧 나를 무시했어요. 오늘 어렵게 만났는데 이제는 관심을 보여야 하지 않아요? 조유진과 대학 때부터 같이 있었고 두 사람 갈라놓을 생각이 없었어요. 나도 처음이니까...”육지율은 멍해진 얼굴로 다시 한번 물었다.“너의 말은 배현수가... 배현수가 너와 잤다고?”주명은은 눈물을 훔치며 울먹였다. “네, 못 믿는 거 알지만 진짜예요...”“증거가 있어?”주명은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이자 육지율은 멍해졌다.‘배현수 이 자식! 대체 어쩌자는 거야?’...산성 별장.조유진은 밤새도록 선유와 보드게임을 한 뒤 녀석을 씻긴 후 핑크색 가운을 두르고 껴안고 자기 방으로 갔다.시간을 보니 11시인데 배현수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막 전화를 걸어 물어보려고 할 때 휴대전화에서 메시지가 하나 왔다.주명은이 보낸 것이다.[유진아, 나 임신했어.]밑도 끝도 없는 한마디에 조유진은 어리둥절했다.[?]주명은은 무관심한 조유진의 태도에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내일 만나서 얘기할 수 있을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네가 감당하지 못할까 봐 걱정돼.]주명은이 임신했는데 그녀 감당 못 할 게 뭐가 있겠는가?조유진이 답장했다.[아이가 내 아이도 아닌데 내가 감당 못 할 게 뭐가 있어.]만약 조유진이 주명은을 임신시켰다면 조유진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한바탕 놀랄 일이다.주명은이 답장했다.[나 원망하지 마, 나도, 나도 어쩔 수 없이...]그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유진의 호기심을 자극했다.하지만 조유진은 워낙 수다스러운 사람이 아니었기에 주명은에 대해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조유진이 답장했
배현수는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조유진을 껴안고 은은한 향기를 맡으며 말했다.“샤워했어? 너무 향기롭네.”조유진은 대답한 후 그의 품에서 몸을 돌리고는 그를 마주 보고 말했다.“배현수 씨, 둘째 아이가 생겼다고 들었어요.”순간 멍해 있던 배현수의 눈빛이 이내 반짝였다.“몇 주 됐대?”설레임 뒤에 걱정들이 몰려왔다...그는 조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고는 큰 손으로 아랫배를 만지며 고개를 숙이고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지난번 유산한 것도 아직 몸조리 안 했는데 지금 임신하면 몸이 버틸 수 있겠어?”그리고 조유진이 유산한 후부터 관계를 가질 때마다 계속 조치를 취하고 있다.배현수는 또다시 사고가 생긴 줄 알았다.“내일 아침 병원에 같이 가자.”“내가 아니고요.”배현수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물었다.“네가 아니면 누가 내 아이를 가질 수 있는데?”“주명은.”여자 혼자 아이를 낳는다고?조유진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사진을 보여줬다.“사진 속 남자가 현수 씨와 똑같이 생겼어.”유일한 차이점은 이 사진 속 남자는 왼쪽 가슴에 칼자국이 없고 Y자 문신도 없다는 것이다.배현수는 눈빛을 반짝였다.예지은의 실종이 주명은에게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조유진이 웃으며 물었다.“어떡해요, 주명은이 이 사진을 가지고 다니면 배 속의 아이를 모른 체할 수 없잖아요. 그러면 진짜 배신자가 될 테니까? 이 사진 속의 사람이 현수 씨를 너무 닮은 것 같아요. 포토샵 한 것일까요?”“포토샵이 아니라 진짜로 나를 사칭하는 사람이야. 드래곤 파에서 주명은과 몰래 접촉했을 가능성이 커.”조유진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그들은 예지은을 납치한 뒤 주명은과 접촉했다... 발이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조유진은 오랫동안 답장하지 않았다.그러자 주명은이 또 메시지를 보냈다.[유진아, 배 대표님은 뭐래? 설마 자기 자식도 모른 척하는 것은 아니지?]이 일은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만약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주명은은 반드시 사진을 가지고 인터넷에서 소란을 피울
조유진은 그의 목을 껴안고 남자의 얇은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배 대표님이 자꾸 상기시키는데 그깟 혼인신고 정도는 뭐가 두려워요?”두렵냐고?배현수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더니 웃으며 말했다.“도망칠까 봐 무섭다면?”“그런데 오늘 구청이 문을 열지 않네요.”게다가 그녀에게 줄 ‘선물’은 반드시 혼인신고서를 받기 전에 서명해야 했다.조유진은 은은한 술 냄새를 맡으며 오늘 밤 그에게 줬던 미션을 떠올렸다.“참, 육 변호사의 생각은 어때요? 처음 집에 이렇게 큰일이 생겼는데 상황을 알고 있었어요?”“남초윤에게 기대하지 말라고 일러두는 게 좋을 거야.”배현수는 딱 잘라 말하지 않고 주의만 주었다.그 뜻을 알아차린 조유진은 육지율이 생각보다 덤덤하다고 생각했다.“결혼한 지 3년이나 됐는데 정이 하나도 없어요?”지독한 사람이다.배현수는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돈이 전부니까. 육지율은 돈과 권력을 제일 좋아해.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만 선택하라면 주저 없이 권력을 선택하고 돈과 사랑을 포기할 거야.”조유진은 몇 초를 생각하다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그럼 당신은요?”생각지도 못한 반문에 배현수는 잠시 멍해졌지만 이내 말했다.“나는 육지율과 달라. 권력에 대한 갈망은 가문에서 비롯됐으니 그는 평생 위해 가문을 저버리지 못할 거야. 어느 날 권력보다 더 탐나는 것을 찾아내지 않는 한 말이야. 하지만 나는 권력에 대한 갈망이 전적으로 조유진이라는 사람에게서 나와. 조유진을 포기하면 권력을 쫓을 동력이 없어져.”어찌 보면 조유진이 배현수를 만든 셈이다.조유진은 일부러 배현수에게 난처한 질문을 던졌지만 오히려 그녀가 감동을 받았다. 권력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극한의 권력은 거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육지율은 가문에서 권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권력을 갈망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권력이 가져다주는 우월함을 너무 많이 누렸다. 그러다 보니 감정에 있어서 대수롭지 않았다.그는 영원히 가족을 등질
조유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이게 말로만 듣던 생존 본능인가?...다음날 오전, 찻집.이 찻집의 주인은 육지율로 환경의 비밀성이 매우 좋다.조유진과 주명은이 룸에 마주 앉아 중간중간 차를 끓이고 있었고 차 향기가 모락모락 났다.주명은은 참지 못하고 룸 입구를 여러 번 쳐다보면서 말했다.“어젯밤 배 대표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다며? 그런데 배 대표님은 왜 안 오셨어? 조유진, 너 지금 거짓말한 거야?”조유진은 찻잔을 들고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물어봤는데 필요 없대.”주명은은 독이 오른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배 대표가 원하지 않는 게 아니라 네가 원하지 않는 거겠지.”조유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본인 아이가 아닌데 왜 필요하겠어?”“뭐라고?”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던 주명은은 이내 승리를 확신하고 득의양양하게 웃기 시작했다.“조유진,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주명은이 언젠가 너의 약혼자와 잘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지? 그래서 내 뱃속의 아이가 배현수의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것이고!”조유진은 집요한 척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말했다.“그 남자와 언제 사귄 거야? 임신한 지 얼마나 됐어?”주명은은 입꼬리를 올렸다.“네가 립스틱을 돌려준 다음 날, 배 대표가 술을 마시고 한밤중에 직접 우리 집 문을 두드렸어. 네가 단속이 너무 심하다고 몰래 나를 찾아올 수밖에 없다고 했어.”잠깐 멈칫한 주명은은 계속 말했다.“그리고 배 대표님이 그러는데 네가 매일 차가운 얼굴로 있어서 재미없대. 침대에서 나무처럼 딱딱하고 전혀 흥미롭지 않다고 했어! 나 같은 여자가 좋다고 했어!”조유진은 담담한 얼굴로 욕을 내뱉었다.“너 같은 걸 좋아한다고? 너처럼 남자 뒤나 찾아다니는 사람?”“조유진! 너!”늘 덤덤하고 차분한 조유진이 욕설을 내뱉는 경우는 드물었다.하지만 지금 최악의 욕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위협을 느껴 화가 났다는 뜻이다.여기까지 생각한 주명은은 이내 입을 열었다.“조유진, 배 대표님이 그날 밤 나와 몇 번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