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원은 소파에 앉아 담배를 태우며 속이 타는 듯 말을 뱉었다. “그럼 난 네 엄마랑 어디로 이사 가야 하는 거냐? 대제주시에서 조금 괜찮은 집은 월세가 만만치 않은데.”남초윤이 말했다. “전에 아빠가 저한테 줬던 그 아파트는 이미 내놨어요. 그리고 차도 빨리 파세요. 앞으로는 큰돈 벌 생각 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살아요.”남재원은 한숨을 쉬며 달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사위에게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군달 로펌 사무실.유설영은 매니저 유현 언니와 함께 육지율에게 상황을 설명한 뒤 통신문과 실시간 검색어 자료를 건넸다.사실을 왜곡하고 인신공격을 한 기사는 스타 잡지사에서 발행한 것이었다.육지율은 어딘가 익숙한 느낌에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유설영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명예훼손으로 소송 가능해? 이 잡지사에서 한두 번 자극적인 기사를 쓴 것도 아니고, 이젠 욕설까지 기사에 실었어. 더는 참을 수 없어.”“가능해.”유설영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정중하게 물었다. “정말? 근데 보니 출처가 스타 잡지사야. 네 가족이 그 잡지사에서 일하는 걸로 아는데, 괜찮아?”육지율은 딱히 영향 없을 것 같아 덤덤하게 말했다.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내가 이 사건 맡는 게 불편하면 다른 변호사한테 맡길게.”명예훼손 소송은 승소하기 쉬운 편인 데다 승소할 경우 사무소에 상당한 수익이 들어오기 때문에 굳이 피할 필요가 없었다.유설영은 붉은 입술을 살짝 말아 올리며 미소 지었다. “네가 곤란하지 않으면 돼. 그냥… 혹시 네 가족이 쓴 기사는 아닐지 생각이 들어서, 우리 관계를 오해한 건지도 모르잖아?”육지율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지며 냉정하게 말했다. “아마 KPI 때문에 함부로 쓴 것 같아. 사무소에서 먼저 잡지사와 협상을 시도할 거야. 만약 협상에 실패하면 소송으로 갈게.”“그래, 네 말대로 할게.”...로펌 카운터.남재원은 결국 로펌으로 찾아와 소란을 피웠다. “우리 육지율 변호사님을 만나야겠어!”카운
남재원은 구석에 숨어 전부 사진으로 남기며 욕설을 내뱉었다. “이 죽일 놈! 어쩐지 장인어른 전화는 안 받더라니, 여기서 바람을 피우고 있었구나!”‘우리 딸과 이혼하려고? 게다가 내 딸을 빈손으로 내쫓으려고 해?’‘이게 다 네 불륜 증거야!’…한편, 육지율은 유설영의 말을 듣고 무심하게 웃으며 말했다. “난 기억력이 별로 안 좋아서, 아무리 깊은 과거도 나한테는 전혀 가치 없어.”아이슬란드가 뭐가 특별한가?예전에 연애할 때는 계획하기도 싫어서 그냥 아이스란드에 데려가곤 했다.오로라도 수도 없이 봤으니, 사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기억이다.굳이 탓하자면 충분히 넓지 않은 세상 때문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전 세계를 다 돌아보게 된다. 그중에서 다시 갈 가치가 있는 곳을 찾았을 뿐이다.그는 스카이다이빙이나 번지점프 같은 극한 스포츠를 좋아한다. 하지만 여자들이 낭만적인 데이트를 원할 때는 대부분 극한 스포츠에는 관심이 없으니 여자 친구를 데리고 두바이로 스카이다이빙하러 갈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면 여자한테 뺨 맞지 않겠나?그의 말에 유설영은 얼굴이 약간 굳어졌으나 이내 풀리며 동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지금 넌 결혼에 묶여 있잖아. 육지율, 예전의 넌 그렇게 자유로웠는데, 지금은 답답하지 않아?”육지율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장난스레 말했다. “사람은 늘 모순적이지. 자유에 익숙해지다 보면 무덤에 들어가 눕고 싶어지거든.”“…”육지율은 드디어 유설영을 돌려보냈다.카운터 쪽에서 육지율의 모습을 본 직원이 그를 불러 세웠다. “육 변호사님! 아까 어떤 중년 남자가 변호사님을 뵙겠다고 억지로 들어가려고 했어요. 변호사님 장인어른이라고 하더군요.”육지율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람은 어디 있죠?”카운터 직원이 사방을 둘러보며 의아한 듯 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는데 지금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어요.”육지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대리석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앞으로 장인
남재원은 찰칵하는 소리에 손을 풀더니 핸드폰을 뺏으려고 매니저를 향해 덮쳤다.“X발, 감히 사진을 찍어? 당장 삭제해!”매니저는 핸드폰을 꼭 쥐고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당신이 무고한 사람을 때려놓고, 뭐가 그렇게 당당해!”유설영은 상황을 보고 급히 핸드폰을 꺼내 육지율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율아, 나 지금 지하 주차장인데, 어떤 미친 중년 남자한테 맞았어, 빨리 와줘!”전화를 끊고 유설영은 옷을 조금 더 내려뜨리고 단추도 풀어 헤치며 치마 단추까지 하나 풀었다. 유설영은 놀란 토끼처럼 육지율의 품에 달아가 안겼다.그녀는 두 손으로 육지율의 허리를 감싸며 눈시울이 붉어진 채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변태가 날 폭행하려고 했어. 거절하니까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마구 때렸어!”남재원은 두 눈을 부릅뜬 채 깜짝 놀랐다. 그는 손가락으로 유설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경고하는데, 헛소리하지 마! 내가? 내가 너를 강간하려고 했다고? 네가 내 사위를 먼저 유혹했잖아! 이 여우 같은 년아!”유설영은 육지율의 품에 안긴 채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율아, 저 사람이... 네 장인어른이야?”그는 자신의 허리에 두른 유설영의 손을 떼어냈다. 그녀의 옷은 흐트러져 있었고 얼굴에는 자국이 남아 있었다. 누구라도 수상하게 여길 만한 상황이었다.그때 매니저가 눈치 빠르게 말했다. “육 변호사님, 전 변호사님 장인인 줄도 모르고 이미 경찰에 신고했어요. 근데 저 사람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우리 설영 씨를 이렇게 만들다니!”유설영은 육지율 뒤에 숨은 채 옷소매를 붙잡고 말했다. “지율아, 난 저 사람이 네 장인어른인지 정말 몰랐어. 그래도 네가 제때 와줘서 다행이야. 어쨌든 나에게 실질적인 해를 끼친 건 아니니까... 유현 언니, 신고 취하해주세요, 그냥 넘어가죠.”“사위, 저 여우 같은 년 말을 믿지 마! 저 여자 지금 거짓말하는 거야!”남재원은 화가 치밀어 거의 분통을 터뜨릴 지경이었다. 분노에 휩싸여 다
이내 몇몇 사람들은 경찰서에서 소란을 피웠다.황급히 달려온 남초윤은 유설영이 육지율의 코트를 어깨에 걸치고 옆에 애처롭게 서 있는 것을 보았다.유설영은 남초윤을 보자마자 손을 뻗어 육지율의 팔을 잡아당기며 흔들었다.“저 사람이 기자인데 오늘 일을 발설하지 말라고 해.”육지율은 아무렇지도 않게 팔을 빼더니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는 유설영을 스쳐 남초윤을 바라보았다.“집안일에 대한 것은 초윤 씨가 폭로하지 않을 거야.”유설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럼 됐어.”“아직도 모른 척해? 이 년이! 윤이야, 이리 와서 얘기 좀 해. 이 여자가 뻔뻔스럽게도 내가 자기를 강간했대! 분명 바기가 다른 사람의 남편을 꼬셔놓고는!”남재원은 유설영을 노려보며 남초윤을 끌어당겼다.유설영은 육지율 뒤에 서서 말했다.“지율 씨와 예전에 2년 동안 연애한 적이 있긴 하지만 우린 이제 협력관계일 뿐이에요! 우리에게 그런 오명을 씌우지 마세요!”남재원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말했다.“방금까지 내 사위 품에 안겼잖아! 그런데 아직도 여기서 나약한 척하고 있어? 너 같은 사람을 내가 많이 봤어! 무슨 속셈일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 정실부인이 왔으니 이제 너의 자리에 가!”경찰은 책상을 치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하세요. 그렇게 계속 욕하지 마시고요! 여기는 경찰국서예요! 아무나 싸우는 시장이 아니라고요!”그들이 싸움은 이유를 대충 알고 있던 경찰은 유설영을 보며 물었다.“남재원이 강간이 미수로 되자 차고에서 때렸다고 했죠?”“내 머리채를 잡고 뺨을 몇 대 때리고 손찌검까지 했어요. 매니저까지 봤어요.”유설영은 CCTV가 있다는 것을 알고 말을 바꿨다.매니저도 얼른 맞장구쳤다.“네, 경찰관님. 제가 증언합니다. 우리 설영이 얼굴이 다 부었어요! 내일 아침에 광고 촬영도 있는데 이 얼굴로 내일 광고주를 어떻게 봐요?”만약 계약위반 통보가 오면 일정한 부분을 배상해야 한다.유설영의 얼굴의 상처는 남재원이 낸 것이다.매
남재원이 입을 벌리더니 또 뭔가 말하려 했다.이때 남초윤은 갑자기 손을 들어 남재원의 얼굴에 뺨을 때렸다.남재원과 유설영, 그리고 매니저도 어리둥절했다.부녀 사이에... 갑자기 내분이 생겼다고?남초윤은 굳은 얼굴로 남재원에게 말했다.“빨리 사과하지 않고 뭐해요! 남의 얼굴을 어떻게 때렸는지 보세요! 남이 내연녀가 되든 말든 우리와 상관없어요! 하지만 사람을 때린 것은 분명 잘못한 거예요!”매니저는 눈살을 찌푸렸다.“내연녀를 욕하는 거예요?”남초윤은 차가운 얼굴로 남재원에게 말했다.“본인 욕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래요.”“너...!”유설영은 매니저의 팔을 잡아당기며 잔꾀를 부렸다.남초윤이 계속 말했다.“남재원 씨, 빨리 사과하세요! 얼른 사과하면 그냥 넘어가겠다잖아요. 터무니없이 비싼 광고비를 물어줄 돈이 있어요?”배상하라는 말을 듣자마자 남재원도 어쩔 수 없이 유설영을 째려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미.안.해.”유설영은 어이가 없었다.매니저가 말했다.“그게 무슨 태도예요? 우리 설영이 얼굴을 이렇게 때려놓고.”찰싹!남초윤 또다시 남재원의 뺨을 때렸다.남초윤은 유설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우리 아빠가 뺨을 몇 대 때렸죠? CCTV 있어요? 이걸로 성의 없다고 생각하면 더 때릴게요.”배상이란 있을 수 없다.집에 있는 별장마저 넘어갈 판이라 배상할 수는 없지만 남재원의 얼굴은 마음대로 때려도 된다.유설영은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남재원은 얼굴이 아프다고 호소하면서도 다급하게 말했다.“뺨은 두세 대 때렸잖아! 다른 건 아무것도 안 했어! 내가 강간했다고 하는 것은 나를 모함하는 거야! 따지지 않을게! 사위, 나는 강간하지 않았어! 그건 나를 모욕하는 거야! CCTV가 있잖아. 한 번 봐봐. 더러운 일 같은 거 할 생각해본 적도 없어! 정말 억울해!”남초윤이 말했다.“당신은 명예는 값어치가 없어요. 이 사람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사람인데 오늘 이 일이 알려지면...”그러자 매니저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하, 파
흰색 미니밴의 문이 ‘스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남재원은 하마터면 손을 낄 뻔했다.승합차가 먼지를 날리며 가버리자 남재원은 자리에 서서 욕했다.“죽으러 가는 거야. 뭐가 그렇게 급해!”이때 육지율과 남초윤도 경찰서에서 나왔다.남초윤이 말했다.“아까 아빠 뒷수습해 주셔서 고마워요.”유설영과 매니저가 책임을 묻는다면 그 엄청난 광고 위약금을 남재원이 물어줄 수 없다.육지율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갑자기 왜 이렇게 예의를 차려요?”남초윤이 또 소란을 피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렇게 덤덤하니 좀 의아했다.남초윤이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나중에 아빠가 돈 달라고 하면 그냥 무시하세요.”남재원이 육지율한테서 너무 많이 가져갔다. 남재원도 그녀도 갚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육지율도 남재원을 더 이상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남재원의 핸드폰 번호를 차단했으니 앞으로 나도 상관하지 않을 거예요.”이 사람은 봐주면 봐줄수록 문제를 일으킨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다.그는 사실 남초윤더러 마음을 독하게 먹고 남재원과 인연을 끊어버리라고 말하고 싶었다.그러나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다시 삼켰다.부녀 관계를 끊을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남초윤도 짐작하고 있었다. 육지율은 남재원에게 3년 동안 뒷수습을 해줬고 진작 짜증이 난 상태였다.남재원을 돕는 것은 정 때문이었지 의무가 아니었다. 하지만 흡혈귀는 멀리하는 것이 좋다. 남재원은 거머리처럼 그의 몸에 붙어 3년 동안 피를 빨아 먹었다. 남초윤도 이 점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진짜 이렇게 덤덤한 육지율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조금 아팠다.남초윤이 말했다.“그동안 남재원이 진 빚은 다 갚을게요.”육지율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그깟 돈 필요 없어요. 당신에게 백 사줬다고 생각하면 돼요.”가벼운 말투는 별로 큰일이 아닌 듯했지만 남초윤의 가슴은 사실 피가 흘렀다.힘들이지 않고 청산할 수 있는 빚을 그녀는 힘껏 갚아야 하는 이 사실...예전에 망상에 빠져 그의 세
“너는 말이야 이런 관계가 있으면 이용할 줄도 알아야지. 조금만 힘을 쓰면 너의 잡지사에서 이미 편집장으로 승진했을 거야! 사장님이 됐을지도 몰라!”육성일, 육성일! 그해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저녁 뉴스에 나오던 사람이다.딸이 멍청해 이득 볼 줄도 잘난 척할 줄도 모른다고 생각한 남재원은 참지 못하고 몇 마디 투덜거렸다.“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육지율의 비위를 아주 잘 맞췄을 거야. 너는 적극적이기는커녕 걸핏하면 이혼하겠다고 하고! 그러니까 밖에서 저런 요염한 여자나 만나지! 너는 너의 어머니에게 잘 못 배웠어. 바깥 사회가 얼마나 난잡한지 모르지? 그래서 하루 종일 꿈만 꾸는 것이고. 육지율을 잡았는데 평생 먹고살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 휴, 기회를 줘도 쓸 줄 모르니 정말 소용이 없어!”남재원은 조수석에 앉아 계속 중얼거렸다.운전하는 남초윤은 너무 귀찮아 경적을 눌렀다.“그럼 본인이 직접 하든가요!”“만약 내가 여자고 어느 정도 몸매가 되면 바로 했겠지! 너에게 기회를 주지도 않았어! 네 엄마는 너를 예쁘게 낳기만 하고 머리는 그렇게 멍청하게 낳았으니 쯧쯧!”남초윤은 너무 화가 나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었다.“내 머리가 좋으면 돼지로 환생했겠죠. 당신 딸이 아니라!”“너! 아버지에게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어?”“당신한테서 배운 거예요!”...한편 저녁에 남초윤은 소정 별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육지율은 본인이 유설영과 작업하는 것을 남초윤이 신경 쓴다고 생각해 전화를 걸었다.첫 번째 통화 연결음은 오랫동안 울렸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두 번째 통화에서 저쪽 남초윤은 느릿느릿 말했다.“여보세요?”육지율은 씩 웃었지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아직도 안 돌아와요? 여기에서 나 혼자 두고 소리 없이 항의하는 거예요?”남초윤은 무력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무슨 항의를 했다고요?”요 며칠 집에 큰 변화가 생겨서 낮에 짐을 싸고 이사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육지율은 그녀가 화가 난 줄 알고 달랬다.“말했잖아요.
밤 9시 반, 불야항 바.배현수가 뒤늦게 도착했을 때, 육지율은 담배를 입에 문 채 바에서 장난을 치고 있었다.금방 나온 칵테일 두 잔의 색깔은 선명하고 유혹적이었다.육지율은 그중 한 잔을 배현수에게 내밀며 말했다.“내가 얼마나 체면을 세워주는지 봐봐. 직접 술까지 따라 주고.”배현수가 말했다.“이거 마실 수 있는 거야?”지난번에 용맹스러웠던 75도 공업용 알코올은 목구멍에서 뱃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위를 태울 뻔했다.육지율은 배현수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죽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사람이 독주를 마시는 게 뭐가 두려워? 배현수, 조유진과 화해하더니 갑자기 쫄기 시작한 거야?”칵테일을 한 모금 마신 배현수는 칵테일의 부드러움을 느끼며 말했다.“이제 가족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목숨을 아껴야 해.”육지율은 담뱃갑과 라이터를 그에게 던졌지만 배현수는 받지 않았다.“집에 가면 유진이가 검사할 거야.”육지율은 배현수의 멀쩡한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와이프가 엄격하네! 앞으로 나와서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안 마시니 여자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안 보겠지. 배현수, 너 이제 끝났어. 앞으로 무슨 낙으로 살아?”육지율이 동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자 배현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총탄이 빗발치는 곳에 오래 있으면 안정감과 든든함이 얼마나 소중한지 너는 몰라.”그는 7년 동안 외로운 나날을 보냈고 이걸로 충분히 고통받았다.총탄과 전우 이제 필요 없다.조유진만 있으면 이 세상 다 가진 것 같다.육지율은 얼음을 입에 물더니 독한 술로 입안을 가득 채우며 뜨거움과 찬 자극을 즐겼다.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눈밭의 불꽃은 따뜻하고 칼끝의 꿀은 달콤하지. 그 어떤 이런 자극 앞에서는 가치가 없어.”배현수가 가볍게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얇은 입술로 두 글자를 뱉었다.“천한 놈.”“사람이 한평생밖에 살지 못하잖아. 천하지 않으면 재미가 없겠지? 조유진과 그렇게 오랫동안 밀당한 너야말로 천한 놈이겠지?”육지율의 말도 일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