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문에 계단교실 맨 뒷줄에 앉은 조유진은 심장이 벌렁거렸다.남초윤이 다가와 빙그레 웃었다.“배 대표님, 이젠 실명을 거론할 때가 됐지?”조유진은 갑자기 대인기피증이 심해졌다.너무 큰 계단교실이 한눈에 봐도 온통 사람뿐이다. 적어도 500명은 된다.조유진이 물었다.“촬영 다 했어?”남초윤은 그녀의 마음을 한눈에 꿰뚫어 봤다.“다 찍었어, 왜, 도망가려고?”교탁 위에서 배현수는 맨 뒷줄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사람 머리 너머로 조유진과 배현수의 시선이 마주쳤다.배현수가 학생 질문에 답하려 할 때, 조유진은 남초윤은 허리를 숙인 채 도둑질하듯 뒷문으로 슬그머니 빠져나갔다.마이크를 들고 있는 배현수는 몰래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대답했다.“우리 학교 학생이에요. 여러분들의 선배님입니다.”그러자 한 학생이 물었다.“선배님 이름이 뭐예요? 어느 학번 어느 학과인가요?”조유진은 ‘무사히’ 교실을 빠져나왔다.배현수는 웃으며 말했다.“구체적인 이름은 말하지 않을게요. 수줍어하는 편이라 유명해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추후 결혼생활이 상관없는 사람에게 방해받는 것도 원하지 않아요. 방금 말한 사적인 감정은 그저 재밌는 이야깃거리라고 생각하세요.”계단교실 안은 여유로운 분위기였지만 공부를 하는 곳에서 사랑 타령은 적절치 않았다....조유진과 남초윤은 계단교실을 나와 학교 커플 동산에 들러 연인들을 찍으러 갔다.학교 내부 도로를 건너자 검은 벤틀리 한 대가 그녀들 앞에 멈춰 섰다.뒷좌석 유리창이 천천히 내려왔다. 김성혁이다.남초윤을 바라보며 물었다.“지금 시간 돼? 할 말이 있어.”남초윤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김 대표님, 제가 어떤 상황인지 방금 봤잖아요?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이 불편...”김성혁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5년 전, 내가 왜 갑자기 대제주시를 떠났는지 궁금하지 않아?”남초윤은 목이 메었다. 순간 온몸이 얼어붙은 듯했다.망설이는 남초윤을 보자 김성
조유진은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물은 사람이겠지.”이 말을 들은 방시아의 아버지 방지운은 얼굴이 굳어졌다.“학생, 무슨 욕을 그렇게 하나?”조유진이 대답했다.“방 구청장님, 따님이 먼저 저더러 남의 내연녀를 하라고 꼬드겼어요.”방지운은 딸을 바라보며 물었다.“정말이야?”“아빠, 그런 적 없어요! 평소에 아빠가 나를 얼마나 엄격하게 교육했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조유진이에요. 조유진은 열여덟 살에 남자랑 놀아나고 아이까지 가졌어요. 열여덟 살에 혼전임신을 한 여자예요. 아빠, 조유진은 교양이 없는 사람이에요. 조유진이 먼저 저를 욕했어요!”방지운은 당연히 자신의 귀한 딸을 믿는다.게다가 열여덟 살에 혼전임신을 했다는 얘기를 들은 방지운은 미덥지 않은 눈빛으로 조유진을 바라봤다.눈빛은 금세 변했고 그녀에 대해 안 좋은 인상을 갖게 되었다.방지운은 관리자로서 지휘하기를 좋아했다.너그러운 표정으로 조유진을 가리키며 말했다.“사과해, 이 일은 그러면 없던 것으로 할게. 우리 시아가 성격이 급해. 그쪽이 이해하지.”방시아는 방지운의 팔짱을 낀 채 턱을 치켜들었다. 눈빛은 득의양양했다.조유진은 피식 웃었다.“제가 왜 사과를 해야 하죠? 따님을 달래고 싶으시면 직접 사과하세요. 왜 제가 저렇게 큰 자이언트 베이비를 달래야 하나요?”방시아가 벌컥 화를 냈다.“조유진, 누가 자이언트 베이비라고!”방지운도 분을 삭이지 못했다. 관리자로서 그리고 어른으로서 지적했다.“학생, 지금 얘기하고 있잖아. 그게 무슨 태도야? 내가 오늘 대제주시에 온 이유도 우리 딸의 체면을 봐서 모교 축제에 참석하러 온 거야. 학교 관리자들과도 잘 알고 지내. 저녁에 모두 함께 식사도 할 거야. 같은 대제주시 대학을 졸업했는데 너는 왜 이렇게 교양이 없니?”방시아는 웃으며 말했다.“아빠, 농담하지 마세요. 조유진 신분상 저녁에 우리와 한 상에 앉아 밥 먹을 자격이 어디 있겠어요. 겨우 십만 원 기부했어요. 유명한 동문도 아니고 모교에서 조유진을 수치
방시아는 교만한 사람이지만 매우 대범하다.“그래. 우리 아버지께 얘기해서 학교에 말해 좌석 하나 더 달라고 할게. 젓가락 하나 더 놓는 일인데 뭘!”“시아야, 넌 정말 좋은 친구야!”방시아는 돈을 별로 기부하지 않았지만 대신 좋은 아버지를 뒀다.하지만 주명은은... 아버지도, 그녀 자신도 잘 나가지 못했다. 하지만 엘리트들을 만나고 싶어 했다.예를 들면... 배현수 같은 거물에게 자신의 명함 한 장을 건네주거나, 배현수 옆에 서 있는 여자가 어떤 여신인지 보는 것이다.정말 너무 궁금했다.그때 조유진과 친한 이유도 조유진과의 이런 사이를 이용해 배현수를 몇 번 더 보기 위해서이다.한 번은 조유진이 배현수에게 책을 빌렸다. 돌려주기 전에 주명은은 몰래 가져가 그 사이에 연애편지를 끼워 배현수에게 돌려주었다.연애편지에 그녀는 배현수에 대한 애정을 잔뜩 담았다.조유진처럼 대담하기만 하면 배현수가 받아주지는 않더라도 자기를 쳐다볼 줄 알았다.그 연애편지를 보낸 후, 그녀는 뜨거운 가마솥 위의 개미처럼 초조하게 하루하루를 기다렸다...하지만 일주일 뒤 조유진과 같이 식당에서 배현수를 만났을 때, 식판을 들고 있는 배현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유진의 재잘거리는 말소리를 들으며 이따금 고기를 집어줬다.심지어 주명은을 쳐다보지도 않았다.그저 주명은만 바늘방석에 앉아 안절부절못했다.지금까지도 주명은은 확실하지 않다. 배현수가 그 책을 다시 봤는지, 그 안에 숨겨진 연애편지를 보았는지...그렇게 뒤척이며 거의 한 달을 보냈지만 이 일은 결국 아무런 하이라이트 없이 끝났다.조유진도 그녀가 배현수에게 연애편지를 쓴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후로도 같이 친하며 밥도 자주 먹었다.하지만 그녀가 조유진이었어도 당시의 주명은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그때의 주명은은 까맣고 촌스러워서 조유진 옆에 서면 오징어가 된 것 같았다. 오히려 조유진이 더 돋보였고 예뻤다. 그러니 위협이 될 리가 있겠는가?당시 조유진이 자신의 팔을 잡는 것도 싫었다.조
반 교장은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정말 나를 속이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고요?”배현수는 피식 웃었다.“반 교장님을 왜 속이겠어요. 결혼식 하면 초대장 보내드릴게요. 꼭 오세요.”반 교장은 배현수와 저기 서 있는 여학생을 번갈아 보았다.그 여학생은 옅은 색의 캐주얼한 양모직 코트를 입고 있었다. 청순하면서도 대범해 보였고 온화하고 명랑해 보였다.그냥 예쁜 것이 아니라 너무 예뻤다.대제주대학의 몇 기수 퀸카보다 더 예뻤다.반 교장은 왠지 낯이 익은 느낌에 의아한 얼굴로 배현수에게 물었다.“우리 학교를 졸업했나요?”배현수는 손을 들어 조유진을 불렀다.조유진은 배현수가 학교 관리자와 이야기 하는 것을 보고 교실 뒤에서 서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수가 손짓하자 당당하게 걸어갔다.배현수는 조유진의 손을 잡은 뒤 반 교장에게 소개했다.“저의 약혼녀 조유진입니다.”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조유진을 바라봤다.“반 교장 선생님이야.”조유진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반 교장 선생님, 안녕하세요.”조유진을 보고 있는 반 교장은 순간 정신을 못 차렸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아쉽네.”이렇게 좋은 사윗감이 남의 사위가 되다니.조유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뭐가 아쉽지?의심스러운 듯 배현수를 바라보았다.배현수는 바로 반응했다.“반 교장 선생님은 우리가 일찍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것이 아쉬운 것 같아.”반 교장은 얼른 웃으며 대꾸했다.“맞아요. 맞아요. 결혼식 날, 축의금 두둑이 챙겨가겠습니다. 참, 저녁에 학교 근처에 있는 주상 호텔에서 연회가 열릴 거예요. 와서 한잔하세요.”배현수는 조유진을 바라봤다.아내의 동의를 구하는 눈빛이었다.반 교장은 피식 비웃었다.“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벌써 아내 눈치를 보는 거예요. 조유진 학생, 얼른 허락해 주세요.”조유진은 그 농담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오늘은 개교기념일이다. 일이 많은 반 교장은 몇 마디 하고 자리를 떴다.아직 식사 시간이 되지 않아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캠퍼스
배현수는 노을을 등진 채 그녀를 안고 서서 한참 동안 입을 맞추었다.옆에는 행인이 가끔 지나갔다.조유진이 살짝 밀어도 멈추지 않았다.이곳은 커플 동산이다. 커플들이 키스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기에 유별난 것은 아니었다.하지만 조유진은 배현수의 키스에 얼굴이 점점 시뻘게졌다. 점차 숨을 헐떡였다.배현수는... 점점 더 거칠고 방자해졌다.조유진은 문득 그들의 첫 키스 장면이 떠올랐다.처음엔 아주 딱딱했다. 하지만 남자는 이런 면에 선수인 것 같다.점점 배현수는 단순히 키스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통제 불능으로 만지기 시작했다.그때 어린 나이의 조유진은 이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욕망에 얼떨떨해하며 저도 모르게 그의 뺨을 때렸다.두 사람 모두 멍해졌다.이후 조유진은 며칠째 그를 상대하지 않았다.배현수만 보면 숨었다.참다못한 배현수는 여자 기숙사 아래층에서 그녀를 막아서며 진지한 얼굴로 사과했다.조유진이 물었다.“앞으로도 그럴 거예요?”배현수는 씩 웃으며 말했다.“뭘?”조유진은 목까지 시뻘게진 상태로 씩씩거리며 말했다.“키스할 거면 키스만 해요. 왜 갑자기 만지작거리는데요?”서로가 처음이었다.솔직히 말해서 조유진만 놀란 게 아니다.배현수 자신마저도 주체할 수 없는 무의식적인 욕망에 놀랐다.남자 기숙사에는 매일 같이 학생들이 야동을 보며 자위를 한다.조유진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배현수는 그들의 저급한 욕망에 비하면 본인은 상대적으로 마음이 비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정말 그녀와 마주쳤을 때, 통제하기 어려웠다.조유진이 저지하지 않았더라면 더 심하고 거칠었을 것이다.자신의 그런 욕망을 알아차린 배현수는 허탈했다.조유진은 화난 상태로 경고했다.“다시는 그러지 마세요!”배현수는 조유진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솔직히 말했다.“장담 못 해.”조유진이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배현수는 정색한 얼굴로 자기 의견을 말했다.“아니면 너도 나를 만질래?”그때 조유진은 화가 나서 3일 동안 그와 말을 하지 않았
김성혁은 그녀의 손가락이 가볍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손을 뻗어 예전처럼 그녀의 손을 잡고 품속으로 끌어안고 달래고 싶었다.우스운 것은 더 이상 그에게는 그럴만한 신분과 입장이 없다.심호흡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내가 잘못했어. 작별인사도 안 하고 떠나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헤어지는 게 아니었는데.”남초윤은 고개를 살짝 들더니 피식 웃었다.“인제 와서 이런 얘기 해봤자 의미 없어요. 하지만 성혁 씨의 말이 맞아요. 우리가 명확하게 끝낸 게 아니잖아요. 이제 확실히 마침표를 찍을 때가 되었죠. 안 그러면 뭔가 마무리가 안 된 것 같잖아요. 솔직히 말해봐요. 그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아니면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었어요?”김성혁은 피식 웃었다.“더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 5년 전이나 5년 후인 지금이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단 한 명 너 남초윤이야. 나도 더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 그러면 귀국해서 너를 찾아갈 필요도 없고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네가 나처럼 5년 전의 감정에 머물러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김성혁의 한마디 한 글자는 남초윤의 심장을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너무 아팠다.남초윤의 꼭 쥔 주먹 때문에 손톱이 손바닥을 찔렀다. 그 아픔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무표정하게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성혁 씨가 뭔데, 왜 내가 성혁 씨를 계속 기다릴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다가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동안 사라지면...”김성혁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가슴 아파하는 것을 그의 눈빛에서 볼 수 있었다.“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면 나도 마음이 아파 견딜 수 없어!”남초윤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고개를 들고 물었다.“무슨 뜻이에요?”그녀를 바라보는 김성혁도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때 너의 아빠가 그랬어. 현금 200억을 주면 우리 사이를 허락하겠다고. 그때의 나에게는 너무 큰 돈이라 당연히 어려웠어. 그래서 생각했어.
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당시 한 교수님이 나를 좋게 봐줬어. 너도 알 거야. 나를 위해 해외 유학 전액 장학금 신청도 해주고 돈도 지원해주고... 나보고 제주시를 떠나라고 했어. 다 알고 계셨거든. 그때 내가 만약에... 여기 남으면 한평생 망칠 거라는 것을. 그때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어. 엄마가 돌아가신 지 이틀도 안 됐는데 너의 아버지가 다시 찾아오셨어. 비수 같은 말들로 나를 모욕했고... 초윤아, 미안해. 그때 너무 힘들어서 내가 주먹을 날렸어. 너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더라고. 그때 나는 완전히 무너졌어. 빚쟁이들이 하마터면 학교까지 찾아올 뻔했어. 그러면 내 스스로를 마주할 수 없었을 거야. 너의 얼굴은 더더욱 볼 수 없었을 거야. 다행히 교수님이 사람을 찾아서 이 모든 일을 해결해 주시고 나더러 빨리 떠나라고 했어. 긴급으로 비자를 신청하고 비자가 나온 후 바로 떠났어. 가기 전에 너를 볼 엄두가 안 났어. 네가 이 일을 알까 봐, 너를 보면 내가 흔들릴까 봐 두려웠어. 그래서 가장 나약한 방식을 선택했어.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는 거...”김성혁의 목소리는 매우 억압적이다. 이미 음 이탈이 되어 떨리고 있었다.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두 눈은 빨갛게 달아올랐다.남초윤의 눈은 진작 촉촉해졌다.두 사람은 좌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어둠 속에서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분명히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지금은... 단 한 마디도 묻지 못했다.그녀는 애써 감정을 억제하고 있었지만 떨리는 심장은 주체할 수 없었다.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김성혁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또 들렸다.“윤이야, 미안해.”5년이나 늦은 사과이다.엄청난 내용들 때문에 남초윤은 정신을 못차렸다.마치 밧줄에 꽁꽁 묶인 듯 숨이 막힐 것 같았다.꽉 쥔 주먹에 새파란 핏줄이 선명히 드러났다.천천히 두 팔을 껴안으며 몸을 웅크렸다.고개를 숙인 채 신발을 내려다보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울다가 웃으며 말했다.“그런데... 너무 늦었어요.
남초윤은 어리둥절할 정도로 울었다.차에서 내릴 때, 사람 전체가 흐리멍덩했다.손에 쥔 휴대전화 화면이 몇 번이나 밝아졌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천근만근인 두 다리로 찬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도저히 버티기 어려워 천천히 몸을 웅크리고 자신을 끌어안고 목놓아 울었다.세상은 왜 이렇게 그녀를 조롱하는 것일까?검은색 벤틀리 차 안, 김성혁의 비서 정동민이 차에 올랐다. 백미러로 뒷좌석 남자의 시뻘게진 눈을 보았다.사람들 앞에서의 김성혁은 냉정하고 차분하고 신사적이다. 사람들과 어느 정도 거리도 둔다.오늘처럼 실성한 것은 처음이다.차 안의 분위기는 침울하기 짝이 없다.김성혁은 한참 후에야 그나마 진정되었다. 가슴속 화산은 폭발하기 직전인 듯 이마의 핏줄이 심하게 뛰었다.손을 번쩍 들어 문손잡이를 잡았다.정동민은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채고 황급히 고개를 돌려 말했다.“대표님, 동진 과학이 곧 상장합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주시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러다가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 찍힌다면...”김성혁은 시뻘게진 눈으로 백미러를 바라봤다. 남초윤은 100m쯤 떨어진 곳에 있다.만약 그저 남초윤 아가씨였다면 그는 거리낌 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위로하고 심지어 포옹까지 할 수 있다.하지만 이제 그녀는 남초윤 아가씨가 아니라 또 다른 신분과 직함을 가지고 있다.육지율의 마누라, 육씨 집안의 며느리.문고리를 잡고 있던 김성혁은 천천히 손을 놓았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정동민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대표님, 빨리 떠납시다. 오늘 개교기념일에 참석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기자들이 와 있을지 몰라요.”남초윤도 기자이다. 그녀가 왔다는 것은 기자들도 적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김성혁은 시트에 있는 카메라를 응시했다.남초윤이 빠뜨린 것이다.조금 전, 서로의 감정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남초윤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울었다. 카메라를 챙기는 것마저도 잊었다.100m 떨어진 곳에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본 김성혁은 도저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