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배현수 때문에 목이 간지러웠다.“예삐랑 점점 닮아가요? 내가 일할 때만 와서 괴롭히냐 말이에요.”배현수는 깨끗한 그녀의 옆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나도 예삐처럼 여주인을 좋아하나 봐.”조유진은 가스 불을 끄고 야채와 달걀을 건져냈다.먹음직스럽고 영양가 있어 보이는 청경채 계란국수 두 그릇이 완성되었다.“들고 가서 먹어요.”배현수는 가만히 있었다. 두 손은 그녀의 허리를 감싼 채 그녀의 목덜미에 기대 말했다.“유진아, 우리 혼인신고 하러 가자.”그는... 하루라도 빨리 행복해지고 싶다.조유진이 여기에 서서 그의 셔츠를 입고 간단한 국수 한 그릇 끓여주는 것만으로도 이런 상황에 빠져들었다.결혼 생활을 시작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조유진은 어리둥절해 하며 고개를 돌렸다.“그런데 호적등본도 여기 없어요. 혼인신고 하기 전에 아빠께 말씀드려야죠.”배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하지. 섣달 그믐날에 찾아뵐게.”“아빠가 허락하지 않으면 어떡해요?”배현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그럼 엄씨 사택에서 허락할 때까지 눌러 있을 거야.”조유진은 피식 웃었다.“배현수라는 사람이 떼를 쓸 줄도 안다고요?”“유진아, 너와의 결혼 생활을 8년 동안 생각했어.”8년, 충분히 긴 시간이다.분명 달콤하리라 생각했다.조유진은 코가 찡했다.두 사람은 오픈 키친의 테라스에 앉아 국수를 먹었다.지난번 조유진이 국수를 만들어준 지가 벌써 반년 전이다.서로 그렇게 깊은 갈등을 겪었지만 이런 평범한 일상은 극히 드물다.하지만 조유진은 밥을 거의 하지 않는다. 폐가 안 좋아 기름 연기만 맡아도 기침이 많이 나기 때문이다. 같이 있을 때 배현수가 그녀에게 요리를 못하게 했다. 가끔 국수를 삶는 것만 했다.조유진은 고개를 숙여 면을 먹었다. 배현수는 젓가락을 들지 않고 대신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조유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국수가 불겠어요. 찍을 게 뭐가 있다고...”배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현수는 그녀의 허리를 받쳐 가볍게 안았다. 그녀의 허리에 쌓여 있던 셔츠가 천천히 미끄러져 떨어졌다.몸이 갑자기 싸늘해졌다.배현수의 목을 감싸고 있는 조유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코알라가 아이를 안고 있는 자세에서 키스를 나눴다.서로를 오랫동안 기다린 탓에 불타오른 불꽃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펑' 하는 소리가 났다.조유진은 냉장고 문에 밀쳐졌다. 등 뒤로 전해지는 차가운 촉감에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주방은 어둡고 창문은 늘 블라인드 커튼이 쳐져 있다. 이 일대는 단독 빌라 구역으로 낮이든 밤이든 사생활 보장이 아주 잘 된다.어두운색의 냉장고가 그녀의 피부를 더욱 눈부시고 하얗게 보이게 했다.배현수는 거의 통제력을 잃었다.조유진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은 남자의 목덜미에 감겨 있었다. 손끝에 힘을 주자 손등의 가느다란 힘줄이 조금씩 솟아올랐다.조용한 부엌에서 들려오는 숨소리에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뛰었다.조유진의 목에 뜨거운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한쪽 다리에 힘이 빠져 미끄러질 것 같았지만 큰 손에 잡혀 다시 그를 감싸 안았다.배현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살짝 시선을 피했다.이때 주방 입구에서 때아닌 ‘야옹’하는 소리가 들렸다.조유진은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그녀의 목덜미와 가슴 앞에 엎드린 사람도 순간 멈칫했다.하지만 잠깐 멈추었을 뿐 배현수는 이내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잡더니 얼굴을 돌려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왜 쟤를 봐, 나 좀 봐.”두 입술이 다시 포개졌다.한참 동안 입을 맞추던 배현수는 뭔가 생각난 듯 동작을 멈췄다. 그녀를 위로 받쳐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꼭 잡아. 안고 침실로 갈 테니.”인제야 침실이 생각난 것인가?조유진을 안고 계단을 오르자 예삐도 따라왔다.배현수는 호통쳤다.“꺼져!”예삐는 순간 멍해졌다. 맑은 눈을 동그랗게 뜬 예삐는 너무 놀라 어쩔 줄 모르는 듯했다. 온몸을 움츠리며 반걸음 물러섰다.조유진도 깜짝 놀랐다.“괜히 고양이에게 스트레스 주지 마요.”고양이가 깜짝
배현수는 이런 활동에 흥미가 없다.특히 부드러운 그녀의 품속에서 학교 행사 같은 것은 더더욱 참석할 마음이 없다.조유진은 어리둥절했다.“안 가요? 하지만 나는 초윤이와 같이 가기로 약속했어요.”배현수가 그녀의 등을 짓누르며 몸을 앞으로 움직였다. 부드러움과 거침이 동반했다. 온몸이 산산조각이 날 것 같았다.“네가 가면 나도 갈게.”조유진은 발등에 힘을 줬다. 당장 탈진하기 일보 직전이다....이튿날, 겨울날의 쓸쓸하고 따뜻한 햇볕이 방안을 비췄다.조유진은 아직 자고 있다. 얼굴이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배현수가 장난치는 줄 알았다. 손을 뻗어 밀치려 할 때 손에 보송보송한 털이 잡혔다.눈을 뜨자 예삐는 침대에 올라가 그녀의 얼굴을 핥았다.조유진은 ‘으’ 하고 탄식하며 예삐를 밀었다.예삐는 사람을 잘 따른다. 특히 조유진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다. 얼굴을 핥지 못하게 하자 벗은 그녀의 팔뚝 옆으로 다가갔다.조유진은 침대에 누운 채 머리를 비웠다.팔을 굽혀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자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이 시큰시큰했다.욕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배현수가 사람이 되지 않으려 할 때는 진짜 늑대보다 더 못한 짐승이 되는 것 같다.손을 뻗어 협탁의 핸드폰을 집어 시간을 보니 벌써 11시가 되었다.다행히 개교기념일은 오후 2시에야 정식으로 시작한다.조유진은 서두르지 않았다. 예삐를 품에 안고는 무의식적으로 고양이 털을 만졌다.이때 문을 밀고 들어온 배현수는 예삐가 조유진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유진의 목을 핥으려 하는 행동을 보고 성큼성큼 다가가 옆으로 내동댕이쳤다.예삐는 구석에 움츠린 채 억울한 듯 울었다.야옹.조유진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예삐에게 왜 그렇게 매섭게 굴어요? 놀란 거 봐요...”“마음이 불순해.”조유진은 피식 웃었다.“고양이 한 마리가 무슨 나쁜 마음을 가지겠어요?”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몸에 있는 이불이 살짝 흘러내리며 아름다운 각선미를 자랑하는 하얀 어깨와 팔을 드러냈다.배현수는 이불을
예전에는 왜 몰랐을까? 배현수의 머릿속이 온통 쓰레기 같은 생각으로 가득 찬 것을?배현수는 계란 베이컨 샌드위치를 만들어 조유진에게 건넸다.조유진은 샌드위치를 들고 주방에 서서 바로 한 입 먹었다.배현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어때? 맛이.”조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맛있어요.”그녀는 자연스럽게 한 입 베어 문 샌드위치를 그의 입가에 갖다 댔다.배현수는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분명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한참이 지나도 입을 벌리지 않았다.“내가 더러워요?”조유진이 샌드위치를 다시 가져가려 할 때 배현수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머리를 숙이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는 한 입 베어 문 자리 위로 한 입 물었다.그녀가 먹은 것이 더러울 리가 있겠는가? 그녀는 온몸에 입을 맞추지 않은 곳이 없다.그녀의 허벅지에 심지어 어젯밤에 그가 남긴 흔적도 있다.다만 이 순간, 그들은 7년의 공백이 없었던 것 같이 느껴졌다. 평범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조유진은 조리대에 기대었다. 그의 셔츠를 입고 긴 다리를 구부린 채 그가 만든 샌드위치를 먹었다. 옆에 예삐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왠지 두 사람은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브런치를 다 먹었을 때쯤, 조유진에게 여러 통의 메시지가 왔다.남초윤이 언제 학교에 가느냐고 메시지로 물었다.주명은도 그녀가 언제 오는지 묻고 있었다. 도착하는 김에 한 번 모이자고 했다.조유진은 배현수에게 고개를 돌렸다.“학교 축제는 언제 갈 거예요?”배현수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더니 시선을 내리고 말했다.“힘들다며? 학교 축제에 갈 힘이 있어? 나에게 거짓말한 거야?”조유진은 겁이 났다.“다리는 정말 아파요.”배현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인지 모르는 듯했다.“다리가 아프다고?”“그곳이요.”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일부러 계속 물었다.“어디?”조유진은 대답하지 않고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옷을
조유진과 배현수가 도착했을 때 학교 앞은 이미 인산인해를 이뤘다.차가 많이 막혀 근처 주차장에 주차했다.남초윤도 방금 도착했다며 사인하는 곳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입구에 있던 자원봉사자들이 조유진과 배현수를 데리고 사인하는 곳으로 갔다.사인하는 곳에 다다랐을 때, 배현수의 핸드폰이 또 울렸다.발신자는 반 교장이다.반 교장은 배현수를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부탁할 일이 있다며 거듭 요청했다.배현수는 조유진 보며 물었다.“나랑 같이 갈래?”조유진은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초윤이가 사인하는 곳에서 기다린다고 했어요. 나는 반 교장님과 아는 사이도 아닌데 현수 씨가 가서 얘기 나눠요. 좀 이따 만나요.”배현수는 귀띔했다.“그러면 휴대폰 무음으로 하지 말고. 이따가 못 찾을 수도 있으니까.”조유진은 항상 무음으로 한다. 잠들기 전에는 거의 켜놓지 않고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 켜는 것을 잊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전화가 안 통하는 일이 잦다.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알겠습니다. 배 대표님. 내가 전화를 안 받으면 초윤이에게 해요. 초윤이는 전화를 잘 받으니까.”배현수는 그제야 안심하고 반 교장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조유진이 사인하는 곳에 도착했지만 남초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있던 한 여자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조유진? 정말 너야.”조유진은 고개를 돌렸다. 몇 초 동안 멍하니 바라봤지만 누군지 알아보지 못해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혹시라도 사람을 착각하면 우스운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그저 예의 바르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그 여자는 조유진을 보더니 기쁨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몇 년이나 지났는데 너는 거의 변하지 않았네. 여전히 예뻐!”조유진은 한참 동안 생각했다. 눈앞의 여자는 분명 낯이 익지만 누구인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누구...?”“나? 나 주명은! 잊었어?”조유진은 깜짝 놀랐다. 누구인지 확인한 후 한참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지난날의 기억이 서서히 떠올랐다.주명은은 조유진
결제가 끝난 후 조유진과 남초윤은 떠날 준비를 했다.이때 또 한 명의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어머, 우리 학교 퀸카 조유진 아니야?”이번에는 조유진도 맞은편의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봤다.방시아는 당시 배현수의 열렬한 팬 중 한 명이었다.남초윤도 그녀를 안다.방시아는 동기들 사이에서도 유명인이었다. 시장 딸이라는 타이틀에 주변에 따라다니는 남자들이 아주 많았다.방시아는 기부금액 대장을 힐끗 바라봤다. 조유진이 겨우 십만 원 기부한 것을 보고 조롱하듯 말했다.“십만 원을 기부한다고? 체면이 있어? 조유진, 너 아직도 궁상맞게 살아? 하긴, 그때 4백만 원에 배현수도 팔았는데 뭘 못하겠니.”조유진은 웃으며 덤덤하게 말했다.“기부자 명단을 보니 유명 동기들은 수십억 원씩 기부하던데. 그럼 너는 적어도 20억은 기부해야 체면이 서겠네.”남초윤도 한마디 보탰다.“방씨 집안 따님, 20억 기부하여 우리 같은 가난한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하소서.”방시아의 집안 배경은 괜찮은 편이다. 하지만 사업하는 집안도 아닌데 개교기념일에 어떻게 20억을 기부할 수 있겠는가?기부하게 되면 오히려 문제가 있는 것이다.방시아는 잠시 당황하여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억지를 부리며 말했다.“우리 아빠는 신분이 특별한 사람이야. 내가 여기서 천만 원을 기부하는 것은 아빠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야. 감히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다니! 그나저나 조유진, 너 같은 못된 사람이 무슨 낯짝으로 개교기념일에 온 거야?”조유진은 피식 웃었다.“단톡방에서 그렇게 나를 열심히 부르니까 옛이야기를 하기 위해 안 올 수가 있나?”방시아가 말했다.“누가 너랑 옛날 얘기하재? 예전에 너를 괜찮게 본 이유는 배현수 때문이야. 지금은 배현수가 너를 버렸잖아. 네가 배현수에게 그런 양심 없는 짓을 했으니 그 사람이 돌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 조유진, 충고 하나 할게. 얼굴이 그나마 반반할 때, 재벌 집에 시집이나 가. 그 사람들이 네가 가짜 증언한 전과가 있다고 싫다고 해도 첩으
조유진과 남초윤은 학교를 한 바퀴 돌았다.몇 년 동안 학교의 모습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운동장과 농구장 같은 기본 시설은 개조되어 있었다.급식이 어떤지 알아보려고 식당으로 향하던 중, 조유진은 배현수의 전화를 받았다.배현수가 물었다.“어디야?”“초윤이와 2식당에 있어요. 우리 찾으러 올래요?”배현수가 말했다.“반 교장이 계단 있는 교실에서 후배들에게 강의하래. 바로 나갈 수는 없을 것 같아. 네가 날 찾으러 올래?”조유진은 알았다고 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남초윤에게 말했다.“현수 씨가 계단 있는 교실에서 강연한다는데 가지 않을래?”남초윤의 눈빛이 반짝였다.“가자! 이렇게 좋은 가십거리를 놓칠 수 없지. 내가 또 카메라까지 챙겨왔잖아. 오늘 이 거물들의 뉴스를 신문 1면에 실을 수 있겠네!”두 사람은 계단 있는 교실의 건물로 걸어가면서 개교기념일 게시판을 스쳐 지났다.명단에는 거액의 기부금 리스트가 있었다. 2억 이하인 것은 없다.남초윤이 감탄했다.“금융학과에는 역시 인재들이 많이 나왔네.”조유진은 몇몇 낯익은 이름을 보고 말했다.“김성혁도 기부했어. 1억.”이름을 들은 남초윤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웃음을 지어 보였다.“예전에 그렇게 가난했던 녀석들이 하나같이 사업의 거물이 되었어.”조유진이 남초윤을 보고 물었다.“김성혁도 교장 선생님에게 이끌려 계단교실에서 강연하는 것 아닐까?”어쨌든 이 사람도 꽤 전설적인 인물이다.김성혁은 배현수보다 한 기수 아래이다.다만 5년 전 김성혁과 남초윤이 갑작스럽게 헤어진 뒤 이 사람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알고 보니 김성혁은 졸업 후 대선국으로 갔다.남초윤은 어깨를 한 번 들썩였다. 절대 그런 우연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가보지 뭐, 빅뉴스가 두 개나 나올지도 모르는데. 이번 달 실적은 걱정도 안 해도 되겠네.”계단 교실 복도에 도착하는 순간 설마 했던 일이 일어났다.김성혁이 제3계단 교실에서 나와 학교 지도자와 이야기를 나누
김성혁의 시선은 남초윤의 손목을 잡고 있는 육지율의 손을 향했다.개의치 않은 척 웃으며 말했다.“외국이 오픈 마인드긴 하죠. 적어도 ‘부모가 강제로 결혼시키는 것'은 없어요.”부모가 강제로 결혼시키는 중매결혼.이 단어들은 육지율과 남초윤을 노골적으로 풍자한 것이다. 아무런 감정적 토대도 없는 허울뿐인 결혼이다.이 말에 육지율은 뺨을 맞은 듯했다.육지율의 집안은 정치가 집안이다. 이 업계에서 체면은 신분만큼이나 귀중했다.김성혁은 말 한마디는 그의 얼굴에 센 따귀를 날린 것과 다름없다.육지율은 얼굴이 얼어붙었다. 안색도 극도로 어두웠다. 당장이라도 싸울 것 같은 기세로 말했다.“원해서 한 것인지 아닌지 그쪽이 어떻게 알죠? 김 대표님, 해외에 오래 있다 보니 국내에 있었던 일을 잊은 것 같네요. 그럼 국내에서의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가르쳐 드리죠. 다른 부부들이 어떻게 결혼했는지 상관하지 마.세.요.”육지율은 김성혁을 흘겨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그러고는 남초윤의 손목을 잡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긴 팔이 남초윤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남초윤은 무의식적으로 발버둥 치려 했다.육지율은 그녀를 내려다봤다. 눈빛은 위험했고 경고의 의미가 강했다.순간 주눅이 든 남초윤은 가만히 있었다.김성혁 앞에 갔을 때, 육지율이 말했다.“김 대표님, 좀 비켜주세요.”김성혁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초윤이의 마음을 생각한 적이 있나요?”육지율은 남초윤을 껴안고 걸어가다 김성혁의 어깨를 세게 부딪혔다. 두 사람은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육지율은 오만한 자세로 말했다.“다른 부부가 어떻게 지내는지 무슨 상관인데요?”지금 이 분위기는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김성혁이 자리를 떴다.남초윤은 어디서 용기가 나왔는지 손을 들어 어깨너머의 손을 밀치며 말했다.“연기 다 했죠?”육지율은 눈빛이 음험하고 사나웠지만 심드렁한 말투로 말했다.“왜, 옛사랑이 다시 생각난 거야? 아직 저기 있어. 쫓아가도 돼.”남초윤은 눈시울을 붉혔다.“나도 따라가고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