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너머 하늘은 온통 핑크빛 별바다처럼 현란하기 그지없다.불꽃은 ‘펑’ 소리와 함께 끊임없이 터졌다.한쪽 무릎을 꿇은 배현수는 ‘생각해 볼게요’라는 말에 얼떨떨하게 웃었다.“3초면 충분할까?”흥분한 조유진은 머릿속이 공백이라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뭐라고요?”“배현수와 결혼할지 말지 3초 안에 결정하라고. 셋, 둘...”하나를 마저 세기 전에 조유진이 말을 끊었다.“배현수 씨, 할 말이 있어요.”배현수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말해.”조유진은 심호흡한 뒤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흥분한 마음이 점차 가라앉았다.“나는 이미 성행 그룹에 남아 일하기로 했어요. 미래가 어떻든 적어도 지금은 성남에 있을 거고요. 이 결정을 내리는데, 현수 씨 때문에 일부 사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전부는 아니에요. ‘당신 때문'이라는 핑계로 당신을 끊임없이 타협하게 할 수 없어요.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 내가 먼저 현수 씨 곁으로 갈 수 있을 때, 현수 씨나 내가 이 결혼을 할 의향이 있는지 말하려 했어요. 친아버지가 엄 어르신이기는 하지만 알다시피 나는 어릴 때부터 조씨 집안에서 살았어요. 조범과 안정희의 결혼이... 결혼에 대한 첫 이미지로 각인 되었고요. 그래서 결혼 자체를 갈망하지 않아요. 단지 현수 씨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배현수이기 때문에 원해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다른 사람과 결혼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결혼하려면 무조건 현수 씨와 할 거예요. 하지만 잘 모르겠어요. 타지에서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현수 씨에게 한 걸음씩 다가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현수 씨, 그래도... 기다릴 수 있어요? 만약 현수 씨가 괜찮다면 나는 무조건 승낙이에요.”조유진은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썼다. 하지만 청량한 목소리는 벌써 음 이탈이 났고 점점 흐느끼는 톤이 역력했다.목소리는 높지 않지만 매우 똑똑히 들렸다.산속이라 찬바람 소리가 곁들어 있었지만 배현수는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전부 귀에 담았다.
현란한 불꽃놀이 속에서 배현수는 그녀의 뒤통수를 감싼 채 키스를 나눴다.산바람은 차갑지만 손가락 깍지를 끼고 있어 손바닥에 온기가 가득했다....코끼리 산에서 설을 쇠고 호텔로 돌아갔다.조유진은 프러포즈 영상과 핑크 폭죽을 반복적으로 돌려봤다.배현수가 뒤에서 백허그를 하며 그녀의 볼에 입술을 맞췄다.“늦었어. 가서 샤워해.”“이 핑크색 불꽃이 어떻게 글씨를 만들 수 있어요? 혹시 사람을 시켜 디자인한 거예요?”“맞춤제작이야. 싫어?이렇게 화려한 불꽃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조유진은 궁금한 듯 물었다.“이 폭죽 많이 비싸죠?”“별로, 너의 손가락에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보다 비싸지 않아.”말을 남긴 배현수는 몸을 돌려 욕실로 가서 샤워했다.조유진은 고개를 돌려 불었다.“보통 얼마예요?”배현수는 담담한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10억 4천만 원.”‘유진아, 나와 결혼해줘.’ 가 10억 4천만 원이라고?카메라로 영상을 촬영해서 반복적으로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한 번만 보기에는 가성비가 너무 떨어진다.조유진은 손가락에 낀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려다보더니 욕실 문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전에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는 스위스 집에 있어요. 찾으면 분명...”배현수는 이미 셔츠를 벗었다. 완벽한 복근과 근육질 라인을 자랑하며 조유진의 앞에 갑자기 나타났다.조유진은 말을 멈췄다. 몇 초 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먼저 샤워해요.”몸을 돌려 가려다가 뒤에 있는 길고 힘센 팔에 의해 한 손에 잡혔다.남자는 한쪽 팔로 그녀의 가는 허리를 감싸고 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같이 씻을래?”조유진은 귀가 뜨거워졌다. 머리를 옆으로 갸웃하며 작은 샤워부스를 바라봤다.호텔은 5성급 호텔이지만 규격과 등급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여기에 묵은 이유는 공장에 쉽게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다 보니 욕실이 크지 않다.조유진은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욕실이 좁아서 같이 씻기 불편해요.”“너처럼
욕실에서 얼마나 있었는지 모른다.배현수는 깨끗한 수건으로 그녀 몸의 물기를 닦아줬다. 가운을 두르고 그녀를 안아 침대 위에 눕혔다.조유진의 얼굴은 뜨거운 김이 나는 듯 시뻘게졌다. 목소리도 쉰 소리가 났다.“현수 씨, 많이... 괴로워요?방금 그는 그녀의 온몸에 키스했지만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그는 그녀를 껴안고 이불을 끌어당기며 말했다.“습관 돼서 괜찮아.”조유진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배현수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어이없게 웃었다.“너와 헤어진 7년 동안 다섯 손가락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제 참는 데 익숙해. 괜찮아.”확실히 힘들고 괴롭지만 배현수는 자제력이 아주 좋은 사람이다.조유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배현수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더니 귓가에 대고 말했다.“혹시 네가 괴로운 거야? 많이 괴로우면 내가...”‘도와줄게.’그의 말이 나오기도 전에 조유진이 그의 입을 틀어막고 맑은 눈으로 노려보았다.“그런 거 아니에요.”배현수는 몇 초간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 손을 잡고 입을 맞추며 말했다.“그런 거 아니면 됐어.”이런 일은 그저 한시적인 즐거움뿐이다.그녀의 몸조차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배현수는 짐승이 아니다.늦은 시간, 불을 끈 후 조유진은 그의 품에 기대어 심장 소리를 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마디 했다.“오늘 밤, 모든 게 꿈만 같아요.”배현수는 그녀의 얼굴을 꼬집으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조유진은 볼이 따끔해지는 것을 느꼈다. 배현수가 말했다.“통증이 있으면 꿈 아니야.”새해 0시가 지났다. 그들의 길지만 짧은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올해 조유진은 26살, 배현수는 31살이다.한참 후, 조유진은 그의 품에 안겨 잠들기 직전이었다.이때 배현수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유진아, 앞으로 우리 절대 헤어지지 말자.”조유진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네, 다음 8년도 함께 해요.”...대제주시, 소정 별장.남초
하지만 기분은 여전히 이 전화에 영향을 받았다. 예전에 김성혁과 함께 있을 때, 새해를 맞아 그녀가 좋아하는 가수가 콘서트를 봤던 것이 기억났다.표를 구하기 어려운 콘서트였다.김성혁은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오랫동안 모은 돈으로 겨우 표 두 장을 샀다.남초윤은 육지율만큼 집안 형편이 좋지는 않지만 물질적으로는 부자인 편이다. 당시 그녀는 김성혁과 송년회 콘서트에 갈 생각만 하고 있었다.한참 뒤에야 김성혁이 티켓 두 장을 사기 위해 오랫동안 라면을 먹은 것을 알게 되었다.아마 과거가 너무 아름다웠던 탓에 다시 회상했을 때 산산조각이 난 것 같다.눈물이 갑자기 주르륵 흘렀다.이때 서재 입구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육지율이다.“아직도 안 자요?”남초윤은 손을 들어 눈물을 훔친 뒤 휴대폰 화면을 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지금 가요.”육지율은 그녀의 시뻘게진 눈시울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친구가 프러포즈 받은 것만 봐도 감동해서 눈물이 나요?”남초윤은 차라리 그렇다고 대답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맞아요, 왜요, 울면 안 돼요? 배현수와 사귄 지 8년이에요. 헤어졌다가도 결국에는 다시 만났는데 얼마나 감동적이에요!”여자들은 이런 지루한 형식주의를 좋아하는 것 같다.안방에 도착한 후, 육지율이 콘서트 티켓 두 장을 건네며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말했다.“새해 선물이에요.”티켓을 훑어본 남초윤의 얼굴에 기쁨이 역력했다.“태진강의 콘서트 티켓이에요? 이 가수 티켓은 구하기 힘든데. 며칠 전에 예매하려다가 결국 못 구했어요. 암표를 산 거예요?”게다가 위치도 아주 좋은 자리다.육지율이 물었다.“나 같은 사람이 굳이 암표를 살 거로 생각해?”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렸다.“하긴, 당신 같은 태자 나리는 관계자이시니 어련하시겠어요.”만약 육지율이 콘서트 입장권을 구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그의 개들은 간절히 당장이라도 그의 눈앞에 나타나려 할 것이다.누가 감히 태자 어르신과 인연을 맺고 싶지 않겠는가?아마 그런 사람은 남초윤 외에 없을 것
댓글을 확인한 조유진은 배현수의 인스타 계정에 들어갔다.‘프러포즈 성공’이라는 스토리 아래에 많은 친구들이 소란을 피우는 댓글을 남겼다.엄창민도 있었다.[여자 쪽에서 동의도 안 했어요! 당장 내려요!]송지연이 말했다.[우울증 치료 이제 안 해도 되겠네. 약이 옆에 있으니. 큰 고객님을 잃었어! 와서 치료비나 결제해!]송하진도 한마디 했다.[독이 풀리고 눈도 좋아지고 청혼하고 기분이 좋겠네요. 개도 정상에 오를 때가 있네? 시원하겠어요!]선유도 댓글을 남겼다.[아빠, 왜 나 없는 사이에 몰래 프러포즈했어요? 나 삐졌어! 흥! 흥!]엄명월조차 한마디 남겼다.[나는 당연히 메인테이블에 앉아야겠죠?]조유진은 댓글들을 보며 피식 웃더니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남자는 두 팔로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정수리를 턱으로 문지르며 말했다.“왜 웃어?”조유진은 인스타 스토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내가 잠든 사이에 몰래 인스타도 올렸네요.”배현수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정정당당하게 올린 거야.”조유진이 말했다.“선유가 삐졌대요. 우리 프러포즈를 못 봐서.”“영상 촬영했잖아. 방해꾼에게는 그 영상을 보여주면 되지.”조유진이 피식 웃었다.“친딸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배 대표님, 다음에 꼬마 녀석을 만나면 어떻게 달래야 할지 잘 생각해 보세요.”배현수 고개를 숙이고 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아직도 배 대표라고 부르는 거야?”“우리가 결혼한 것은 아니잖아요.”프러포즈에 성공했을 뿐이다.남편이라는 호칭은 아직 어색한 것 같다.배현수가 물었다.“유진아, 우리 사이는 언제 공개할 거야?”“인스타 친구들은 프러포즈 성공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잖아요.”배현수는 미간을 찌푸렸다.“이게 공개한 거라고?”조유진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대충 넘어가는 것은 나와 어울리지 않아.”조유진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무슨 뜻이에요?”배현수는 그녀를 진지한 얼굴로 쳐다
배현수가 여기에 있으면 오히려 그녀의 업무 진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배현수는 한숨을 내쉬었다.“프러포즈하자마자 쫓아낸다고?”“그런 거 아니에요.”조유진은 불이 켜진 휴대폰 화면을 힐끗 바라봤다. 세수를 마치고 일어나 휴대폰을 좀 봤는데 벌써 9시가 다 되었다.배현수를 밀쳐내고 휴대전화를 가방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요. 나 먼저 공장에 갈게요. 올 때까지 있을 거예요?”배현수는 그녀를 쳐다보며 일부러 말했다.“없어.”조유진은 가방을 들고 현관까지 걸어갔다가 재빨리 되돌아와 그녀의 목을 감싸고 입술을 갖다 댔다.“그럼 배웅하지 않을게요. 기사님 데리고 온 거죠?”조유진은 서둘러 출근했다. 배현수는 호텔에 혼자 버려졌다.배현수는 손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하염없이 웃었다.이 뽀뽀는 정말 대충이다.하지만... 오후, 진주시를 떠날 때쯤 뒷좌석에 앉은 배현수는 조유진이 새로 올린 스토리를 봤다.[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앞으로도 오늘 같은 아침이 매일매일 있었으면 좋겠어요.]어젯밤에 찍은 핑크색 불꽃놀이 사진도 같이 올렸다.이를 지켜보던 배현수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그리고 댓글을 달렸다.[오늘과 같은 아침이 더 많을 거야.]댓글을 달자마자 마귀 같은 친구들이 달려들었다.육지율이 배현수의 댓글에 대댓글을 달았다.[그만해라, 단 거 너무 많이 먹으면 죽어.]엄명월이 한마디 했다.[근무시간에 사적인 스토리는 금지에요!]엄창민도 댓글을 달았다.[환희야, 새해 복 많이 받아!]남초윤도 끼어 있었다.[테러 사건 하나 말해줄게. 사랑에 빠져 죽은 사람이 꽤 있어! 너는 수영할 줄도 모르잖아. 조심해.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아. 사랑해.] 신준우도 댓글을 달았다.[유진 씨,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언제 시간이 있으면 같이 식사해요. 꽤 오래 못 만난 거 같아요. 여기는 어디예요? 불꽃 쇼인가요?]선유도 댓글을 달았다.[엄마,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오늘 밤 할아버지가 페이스 톡을 걸 거
강이찬이 대답했다.“확실합니다.”심미경도 말했다.“확실합니다.”이번에는 직원의 질문에 두 사람이 한목소리를 냈다.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다른 일 없으면 이혼서류를 발급해드리겠습니다.”이혼 수속은 그런대로 순조로운 편이다.가정법원에서 다시 나왔을 때 강이찬과 심미경의 손에는 이혼서류가 들려있었다.심미경은 피식 웃었다.“혼인 신고서와 이혼서류가 똑같아 보이네요. 그러니까 이혼도 축하할 일이죠. 강이찬 씨, 이혼 축하해요.”이 말을 들은 강이찬은 이유도 없이 심미경이 예전에 여기 서서 그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강이찬 씨, 결혼 축하해요.’그의 가슴은 고구마를 삼킨 듯 답답했다.조수석의 차 문을 열며 말했다.“차에 타세요. 같이 갈 곳이 있어요.”심미경은 어디 가는지 묻지 않고 묵묵히 차에 올라탔다. 그의 부드러운 모습도 이제 마지막일 것이다.목적지에 다다른 때, 강이찬이 말했다.“이쪽에 우리... 그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해 묘를 샀어요. 같이 가 봐요. 당신이 이번에 가면 언제 다시 대제주시에 돌아올지 모르잖아요.”앞으로 또 만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산은 높고 물은 깊다. 인연이 없으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묘소에 도착한 심미경은 묘비를 본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보물? 이찬 씨가 지어준 이름이에요?”그러자 강이찬은 약간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네, 내 마음속에 아이가 우리의 보물이니까요. 내가 잘하지 못해서 당신을 보호하지 못했어요. 아이도 지키지 못했고요. 내가 미경 씨와 아이에게 빚진 거예요.”심미경은 끝내 평온을 찾지 못했다. 묘비의 ‘보물’이라는 두 글자를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묘비에는 또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아버지 강이찬][어머니 심미경.]심미경은 훌쩍이며 말했다.“아이에게 무덤을 만들어 줄 생각을 한 거예요?”강이찬은 솔직히 말했다.“그동안 자주 악몽을 꿨잖아요.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니 아이가 너무 비참하게 죽어 제사를 지내고 안치해야 할 것 같다고 했어요. 그래서
“사실 배현수와 조유진은 꽤 오래전부터 동거했어요. 배현수가 조유진을 위해 월셋집을 구했었죠. 조유진은 토요일마다 놀러 갔고요. 나중에는 아예 학교 기숙사에서 나와서 배현수와 같이 살았어요.”그동안 심미경에게 한 번도 조유진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지 않았다.심미경 역시 조유진과 배현수의 이렇게 상세한 과거는 처음 들었다. 조금 놀라울 뿐이다.“조유진 씨가 간이 꽤 크네요.”강이찬이 말을 이었다.“유진이가 연약해 보이지만 사실은 배현수와 성격이 비슷해요. 그러면서 알았죠. 조유진을 좋아했다기보다는 조유진과 배현수가 일찍 만나 서로를 사랑하고 상처투성이가 되어도 뗄 수 없는 영혼이 부러웠어요. 두 사람은 하나의 공생체 같아요. 다른 사람이 끼어들 수도 없고 그들이 빠져나오려고도 하지 않아요. 그때 동거하다가 주말에 밥 먹으러 갔었어요. 집은 전혀 월셋집 같지 않았어요.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고 거실 벽에는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어요. 분위기가 아주 좋아 보였어요. 그때 두 사람이 고양이도 한 마리 길렀어요. 예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조유진이 공원에서 주워온 길고양이였어요. 처음에는 뼈만 앙상했는데 나중에 고양이가 아주 통통해졌어요. 나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이진이와 둘이서... 서로 의지하며 살았어요. 가족이라는 인상이 머릿속에 별로 없어요. 아마 그때 조유진과 배현수가 함께 아늑하게 꾸민 집을 보며 많이 부러웠던 것 같아요.”그도 조유진 같은 여자를 찾고 싶었다. 온통 그만 바라보는 여자를 말이다. 같이 집 안 구석구석 꾸미고 고양이와 개도 함께 키우고 싶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이를 갖게 될 것이고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 속에서 백년해로하며 평생을 함께 살 거라고 생각했다.아내와 아이 모두를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다... 자기 가족을 사랑할 거라고.하지만 이 모든 것을 그는 자신의 손으로 망쳐버렸다.강이찬은 차창 앞 유리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다가 웃으며 말했다.“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