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지율이도 이제 서른 살이에요. 자꾸 이렇게 때리시면 더욱 엇나가려 할 거예요. 그러다가 원수가 되면 어떻게 해요. 친손자에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지난 1년 동안 육지율이 본가로 돌아가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이것은 사람을 원망하게 만든 결과이다.육성일이 한숨을 내쉬었다.“때리지 않으면 엇나가지 않을 줄 알았어? 아예 생각의 싹을 잘라버릴 거야. 육씨 집안이 없으면 그 자식은 아무것도 아니야.”“지율이는 그의 형과 달라요. 정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육씨 집안이 녀석의 뒷바라지를 못 해주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핍박하세요? 증손자를 원하시면 남초윤에게 잘 말씀하세요.”“중손을 안고 싶다고요? 흥, 그래 말 한마디 맞게 한 것은 있지. 그 꼬락서니 좀 봐, 태어난 아이가 그 자식보다 더 나쁠 거야.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계속 밑 빠진 독을 붙잡고 있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본인이 더 잘 알 거야.”강란희는 한숨을 내쉬었다.“남초윤은 집안 배경이 평범하지만 그래도 효도하는 편이에요. 아이를 낳는 것은 제가 다시 얘기해 볼게요.”육성일은 피식 웃었다.“처음에 화가 나서 배경도 없고 백도 없는 사람을 골랐잖아. 그럼 앞으로 어떤 길을 갈지 알아야지. 3년 동안 내버려 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불효자식을 봐준 거야. 그 녀석이 스스로 선택한 거야. 그럼 알아서 자기 와이프를 보호해야지. 보호하지 못하는 것은 능력이 없는 거야!”...소정 별장에 도착한 육지율의 몸에서는 약간의 술 냄새가 났다.남초윤은 노트북을 들고 서재로 들어가 원고를 쓰려고 준비 중이었다. 그러다가 비틀거리며 위층으로 올라가는 그를 발견했다.최대한 그의 존재를 무시하려고 애쓰며 한눈팔지 않고 서재로 들어가려 했지만 결국 육지율에게 잡혔다.남자는 그녀의 팔을 잡더니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서재에 숨어서 김성혁과 바람피우고 있는 거야?”남초윤은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누가 몰래 바람을 피웠다고 그래요? 단어 선택에 주의하세
부부의무...육지율의 입에서 나온 네 글자가 왜 이렇게 풍자적으로 들릴까?결혼한 지 3년이 다 되어간다. 저녁에 집에 안 들어온 시간이 2년까지는 아니더라도 1년 반은 훌쩍 넘을 것이다.지금 남초윤은 이혼하고 싶다. 그런데 그는 그녀에게 부부의 의무를 언급하고 있다.하지만 지난 3년 동안, 육지율은 남초윤의 집안에 계속해서 많은 돈을 투자했다. 물론 이 돈들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서로 스무 번 하자고 약속했으니 몸으로라도 빚을 갚을 생각이었다.하지만 약속은 결국 약속이다. 어떤 독한 말도 할 수 있다.정말 해야 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컴퓨터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화면이 깨졌다.남초윤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내 노트북...!”“내일 새로 사줄게.”남초윤이 무슨 말을 더하려 할 때, 온몸이 갑자기 싸늘해졌다. 육지율은 이미 그녀가 입고 있던 홈웨어를 찢어버렸다.그녀가 일어나 앉으려고 몸부림치자 육지율은 큰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누르며 다시 침대 위로 밀었다.동시에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 키스가 이어졌다.처음에 두 사람 모두 눈을 감고 이 키스를 즐기지 않았다.남초윤은 취기 어린 눈으로 물든 육지율의 눈과 마주쳤다. 평소의 경망한 눈빛과 달리 한없이 그윽해 보였다.자기를 보고 있는 것을 느낀 육지율은 동작을 멈추었다.입술을 살짝 떼며 쉰 목소리로 물었다.“싫어요?”남초윤은 주먹을 꼭 쥐었다.“스무 번 다 하면 이혼합의서에 서명할 거예요?”그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큰 손에 살짝 힘을 주며 말했다.“그렇게 이혼을 원하는 거예요? 육씨 집안에서 눈치를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그래도 남씨 집 안에 있는 것보다 못해요?”남재원은 걸핏하면 그녀를 거칠게 대했다.육씨 집안 어른들은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바로 앞에서 그녀에게 폭언하지 않는다. 집안 어른들이 가끔 안 좋은 기색을 내비치면 그는 그 자리에서 그녀를 두둔했다.게다가 그들은 확실히 본가에 별로 가지 않았다.소정 별장에서 아주 자유롭게
남초윤의 심장은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듯 빨리 뛰었다. 결국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흐린 빛 속에서 눈빛이 반짝였다. 누가 먼저 신중함을 포기했는지 알 수 없다. 잠시 멈추었던 입술이 다시 엉켰다.진한 키스 속에 남초윤은 타락한 듯 눈을 감았다.분위기를 깨는 전화벨이 울렸다.남초윤의 핸드폰이 울렸다. 침대맡에 손을 뻗어 휴대폰을 잡으려 했다. 육지율은 오늘 밤 본전을 뽑으려고 결심한 듯 그녀의 손을 붙잡고 다시 원위치로 옮겼다. 손길은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하지만 치명적이다.휴대폰 벨 소리가 얼마나 오래 울렸는지는 모르지만 이 소리는 다른 소리를 감추는 도구로 변했다.그 후, 분위기는 점점 더 치열해졌다....다음날 오전.남초윤은 편집장이 와서 임무를 지시할 때까지 자리에 앉아 오전 내내 멍하니 있었다.“남초윤 씨, 지난번 경제신문용으로 동진의 김 사장을 인터뷰했던 건이요. 김 대표가 남초윤 씨에 대한 인상이 좋은지 방금 다시 약속을 잡았어요. 꼭 남초윤 씨가 와서 인터뷰해달라고 하네요.”순간 정신을 차린 남초윤은 완곡하게 거절했다.“하지만 아직 편집하지 못한 인터뷰 원고들이 많이 남아있어요. 제가 주로 하는 것은 예능이라 경제신문과 과학 쪽은 류진이가 잘해요. 류진아, 네가 해.”그러자 옆에 있던 동료 류진이 손을 들었다.“편집장님, 동진의 김 대표 인터뷰는 제가 할게요. 좀 이따 제가 동진에 연락하겠습니다. 초윤 언니, 김 대표님 비서의 연락처 좀 부탁해요.”남초윤이 마침 승낙하려고 할 때 편집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남초윤에게 말했다.“김 대표와 예능 신문 만들면 되잖아요. 머리가 왜 이렇게 안 돌아가요? 누가 지루한 집안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해요. 예능 기사를 쓰면 되죠. 이참에 김 대표님께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지 물어도 보고요.”남초윤은 거절하려고 일어섰다.하지만 편집장은 한 마디만 남기고 사무실로 돌아갔다.“이렇게 하기로 한 거예요. 이미 동진에게 간다고 답장을 보냈으니 괜히 바람맞히면 안 돼요!”남초윤은 주
진주시.조유진은 저녁 늦게 호텔에 도착한 뒤 남초윤의 메시지를 확인했다.공장에서 하루 종일 생산 라인을 주시하느라 휴대전화를 볼 틈이 없었다.이제야 숨돌릴 틈이 있어 남초윤에게 답장했다.[왜 그래?]남초윤은 핸드폰을 보고 있는 중인 듯 이내 답장했다.[대머리가 나보고 김성혁을 인터뷰하라고 해애애애애애! 진짜 퇴사하고 싶은 마음마저 생겼다니까! 하지만 가난한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조유진은 의아한 듯 물었다.[육지율 씨의 카드는? 긁지 말래?][돌려줬어. 이혼할 때 돈 갚으라고 할까 봐 못 쓰겠어. 그 카드가 손에 있으면 전혀 통제가 안 돼. 나중에 내가 긁은 리스트를 보고 깜짝 놀랐어. 내 월급이 겨우 160만 원인데 그 카드로 1600만 원을 쓴 거 있지? 역시 내 돈이 아니니까 긁어도 실감이 안 나. 조금만 더 함부로 긁다가는 한 달에 2천만 원을 넘을 수도...]‘이혼'이라는 두 글자를 본 조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남초윤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조유진이 물었다.“육지율과 정말 이혼할 생각이야? 육씨 집안 그 할아버지가 내버려 둔대?”육지율의 할아버지는 비록 퇴직했지만 지위가 높고 권력이 있는 사람이다. 어떤 일이든 간섭하려고 결심하는 순간 매우 쉽게 손을 쓸 수 있다.남초윤은 불편을 토로했다.“할아버지 쪽에서는 아이 낳으라고만 재촉해. 다른 건 별로 연락하지 않아서 나도 몰라. 하지만 육지율 씨와 이혼하기로 약속했고 이미 승낙했어.”“진짜 잘 생각한 거 맞아? 홧김에 그냥 하는 말, 아니야?”남초윤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다시 얼버무리며 입을 열었다.“유진아, 네가 말해봐... 이혼을 준비하던 두 사람이 갑자기 또 뭐야, 이상한 짓을 해.”조유진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뭐, 뭐라고?”“그러니까... 응...”물을 마시던 조유진은 바로 사레가 들었다.“허허... 누가 먼저 한 거야?”어젯밤의 상황을 한참 동안 생각한 남초윤은 얼굴이 뜨거워 견딜 수 없었다.“그 사람이 제안한 거
그녀와 배현수는 결혼이라는 족쇄가 없다. 왕래가 적어도 자유롭다.남초윤과 육지율... 결혼이라는 울타리에 갇힌 두 마리 짐승처럼 뒤엉켜 기어 나오려 해도 주변에 가로막는 사람이 너무 많다.예를 들어, 남초윤의 부모님, 특히 남재원 같은 속물주의자들은 남초윤이 이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면 가장 먼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결혼은 하기는 쉬워도 끝내기는 어렵다.조유진이 물었다.“초윤아, 육지율 씨를 진짜 안 좋아해?”서재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남초윤은 집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 인터뷰 원고를 정리하고 있어 휴대전화를 들고 있기가 불편해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집에 금방 도착한 육지율은 때마침 서재 앞에 다다랐을 때 스피커 폰으로 전해지는 조유진의 말소리를 들었다.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남초윤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확실히 육지율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녀의 사랑은 이미 5년 전에 김성혁과의 갑작스러운 헤어짐으로 완전히 사라졌다.그런데 육지율에게 조금도 마음이 없는지 묻는다면 그것 또한 바로 대답하기 어렵다.육지율의 훤칠한 얼굴... 얼굴을 심하게 보는 남초윤으로서는 싫어하기 힘들다.적어도 그를 배척하지 않는다.조유진은 남초윤이 대답하기 어려워하는 것을 알고 다시 물었다.“그럼 김성혁은? 마음속에 아직도 그 사람이 있는 거야?”조유진과 얘기할 때면 남초윤은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항상 솔직하게 털어놓는 편이다.“오랜 시간 거쳐 지은 빌딩 한 채가 순식간에 무너졌어. 내가 아무리 치우려고 해도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어. 아무리 원상복구를 하려고 해도 흔적들이 남아있겠지.”미세한 먼지들을 그녀는 한 번 또 한 번 쓸었다.하지만 좁은 구석마저 깨끗하게 청소하기가 어렵다.사랑이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아예 깨끗이 지운 것은 아니다.조유진이 물었다.“그때 갑자기 떠난 게 말 못 할 사정이 있었다면 용서해 줄 거야?”남초윤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아무도 그녀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없다.그래
전화를 거의 끊을 무렵 남초윤은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배현수가 프러포즈한다면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거야. 나처럼 결혼이라는 울타리에 갇히면 나중에 벗어나려고 해도 힘들 테니까”이혼 숙려기간이 60일로 바뀌었다.결혼은 더욱 신중해야 한다. 한 가지 일이 들어가기 쉬워도 나오기 어려울 때, 경계심을 높여야 한다. 어쩌면 큰 수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조유진은 남초윤이 자신을 위해 이렇게 말한다는 것을 안다.“응, 알아. 네가 정말 육지율과 이혼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초윤아, 난 영원히 네 편이야.”그 말뜻을 남초윤은 알아들었다.남초윤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가장 후회하지 않는 것이 너와 절친이 된 거야. 나를 낳은 부모님도 내 편이 아닌데 말이야. 유진아, 고마워.”“고맙긴, 너는 선유의 양어머니잖아. 나 혼자 임신했을 때도 같이 있어 줬고.”...전화를 끊은 후 남초윤은 잠시 서재에서 멍하니 있었다.인터뷰 기사에 실린 김성혁의 자료를 보는 눈빛에는 수심이 가득했다.피할 수 없는 과거라면 마주할 수밖에 없다.원고를 정리하고 기지개를 켜며 서재를 나왔다.서재 입구 대리석 바닥에 최신형 슬림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허리를 굽혀 노트북을 들었다. 별장 안을 둘러보았지만 육지율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아래층에서 진씨 아주머니가 저녁밥을 짓고 있다.노트북을 들고 2층 난간에 기대어 물었다.“아주머니, 지율 씨가 방금 다녀왔어요?”“도련님이요? 방금까지 여기 계셨는데 어느새 보이지 않네요. 사모님, 무슨 일로 도련님을 찾으세요?”“아, 아닙니다.”진씨 아주머니는 한약을 다 끓여놓고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사모님, 한약 다 끓였는데 지금 드실래요, 아니면 나중에 드실래요?”남초윤은 어이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또 한약이에요...?”진씨 아주머니는 시댁에서 보내온 하인이다. 하지만 다른 하인과는 신분이 다르다.진씨 아주머니는 육씨 집안 할아버지 쪽에서 보낸 사람이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두 사람은 아직 함께 설을 쇠거나 제대로 된 명절을 보낸 적이 없다.이날 조유진은 일찌감치 하던 일을 마쳤다.다음날이 바로 새해이다. 설날은 원래 공휴일이지만 납품 일정이 빠듯해 공장에서 일부 근로자들이 야근하도록 배치했다.저녁 7시 반, 엄명월이 갑자기 다가와 말했다.“배 대표와 설을 쇠러 가지 않아요? 다들 퇴근하는데 아직도 공장에 틀어박혀 뭐 하는 거예요?”조유진은 팔을 뻗어 엄명월의 목을 조르며 말했다.“배 대표님께서 진주시로 올 시간이 없다고 하네요. 오늘 밤은 우리 둘이 설을 쇠야겠어요.”엄명월은 ‘쳇’ 하며 조유진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차 키를 던지며 말했다.“진주시에서 대제주시까지 가는데 고작 한 시간이에요. 지금 차를 몰고 가도 늦지 않아요.”조유진은 차키를 꼭 쥐고 말했다.“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잖아요.”엄명월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내일 아침까지 돌아오면 되지 않아요?”일리가 있는 말인 것 같다.엄명월은 조유진이 계속 멍하니 서 있자 재촉했다.“뭘 망설이고 있어요? 얼른 다녀오세요!”엄명월이 그녀를 밀며 빨리 가라고 했다.조유진은 순간 착각에 빠졌다. 조유진보다 엄명월이 그녀와 배현수를 만나게 하려고 안달이 난 것 같다.차에 탄 후, 조유진은 내비게이션을 켰다.배현수에게 전화를 걸어 미리 얘기라도 할까 생각했지만 결국에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이런 일은 미리 알려주면 서프라이즈가 아니다.그렇게 차를 몰고 진제고속도로로 향했다.8시 반, 고속도로에서 거의 내려갈 때 전화가 갑자기 울렸다.배현수에게서 온 전화이다.전화를 받자마자 배현수가 물었다.“유진아, 어디야?”조유진은 일부러 호텔인 척했다.“나 호텔인데요.”전화기 너머의 사람은 어이없게 웃었다.“나 지금 너의 방 문 앞에 있는데 한참 두드려도 아무도 안 열어주네. 엄명월 씨의 말로는 차를 몰고 대제주시로 나 찾으러 갔다며?”그녀는 대제주시로, 배현수는 진주시로 달려갔다.정말 서로를 향해 달렸던 것
관광 케이블카에 도착했다.배현수는 손을 들어 그녀가 입고 있는 베이지색 코트를 여몄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유진아.”“네?”“오늘 밤 네가 대제주시로 가 허탕을 쳤지만 내 마음은 정말 기뻐.”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불타오를 정도로 뜨거웠다.조유진은 그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케이블카 유리창 너머 산을 바라봤다.“산꼭대기에 무슨 서프라이즈라도 있어요?”배현수는 뒤에서 그녀를 백허그 하며 머리 위에 입술을 맞췄다. 그리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서프라이즈니까 당연히 비밀이겠지?”그녀는 문득 남초윤의 말이 생각났다.배현수가 진짜로 프러포즈를 하는 것일까?조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오늘 배현수는 안경테가 있는 안경을 쓰지 않았다.“눈은 이제 다 나은 거예요?”“응, 거의 다 나았어.”조유진은 한참 동안 그를 쳐다봤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배현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왜 그렇게 쳐다봐?”조유진도 같이 웃었다.“아니에요. 그냥 무슨 서프라이즈인지 궁금해서요.”케이블카가 천천히 산꼭대기로 올라갔다.최근 진주시에는 큰 눈이 내렸다. 산에 눈이 가득 쌓였고 아직 녹지 않아 시야가 온통 하얗다.코끼리 산의 정상에는 거대한 전망대가 있다.케이블카에서 내리자 배현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전망대까지 안내했다.전망대에 따뜻한 오렌지색 등이 켜져 있어 밝고 아늑했다.전망대 주변 난간에는 누군가가 정성껏 배치한 다양한 장미꽃이 가득했다.조유진이 걸어가자 정밀한 천체망원경이 놓여 있었다.혹시 별을 보려는 것인지 물으려고 할 때, 배현수가 옆에서 말했다.“유진아, 발밑을 봐봐.”조유진이 고개를 숙이자 발밑 유리 바닥이 밟는 순간 핑크빛 불꽃이 터지는 것을 발견했다.유리 밑에 감지 센서가 있다.조유진은 깜짝 놀랐다.“이것은 원래 있던 거예요, 아니면...”“일주일 전부터 준비한 거야. 마음에 들어?”조유진은 신기해하며 유리 바닥을 여러 번 밟았다. 한 번 밟을 때마다 센서를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