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지율이도 이제 서른 살이에요. 자꾸 이렇게 때리시면 더욱 엇나가려 할 거예요. 그러다가 원수가 되면 어떻게 해요. 친손자에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지난 1년 동안 육지율이 본가로 돌아가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이것은 사람을 원망하게 만든 결과이다.육성일이 한숨을 내쉬었다.“때리지 않으면 엇나가지 않을 줄 알았어? 아예 생각의 싹을 잘라버릴 거야. 육씨 집안이 없으면 그 자식은 아무것도 아니야.”“지율이는 그의 형과 달라요. 정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육씨 집안이 녀석의 뒷바라지를 못 해주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핍박하세요? 증손자를 원하시면 남초윤에게 잘 말씀하세요.”“중손을 안고 싶다고요? 흥, 그래 말 한마디 맞게 한 것은 있지. 그 꼬락서니 좀 봐, 태어난 아이가 그 자식보다 더 나쁠 거야.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계속 밑 빠진 독을 붙잡고 있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본인이 더 잘 알 거야.”강란희는 한숨을 내쉬었다.“남초윤은 집안 배경이 평범하지만 그래도 효도하는 편이에요. 아이를 낳는 것은 제가 다시 얘기해 볼게요.”육성일은 피식 웃었다.“처음에 화가 나서 배경도 없고 백도 없는 사람을 골랐잖아. 그럼 앞으로 어떤 길을 갈지 알아야지. 3년 동안 내버려 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불효자식을 봐준 거야. 그 녀석이 스스로 선택한 거야. 그럼 알아서 자기 와이프를 보호해야지. 보호하지 못하는 것은 능력이 없는 거야!”...소정 별장에 도착한 육지율의 몸에서는 약간의 술 냄새가 났다.남초윤은 노트북을 들고 서재로 들어가 원고를 쓰려고 준비 중이었다. 그러다가 비틀거리며 위층으로 올라가는 그를 발견했다.최대한 그의 존재를 무시하려고 애쓰며 한눈팔지 않고 서재로 들어가려 했지만 결국 육지율에게 잡혔다.남자는 그녀의 팔을 잡더니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서재에 숨어서 김성혁과 바람피우고 있는 거야?”남초윤은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누가 몰래 바람을 피웠다고 그래요? 단어 선택에 주의하세
부부의무...육지율의 입에서 나온 네 글자가 왜 이렇게 풍자적으로 들릴까?결혼한 지 3년이 다 되어간다. 저녁에 집에 안 들어온 시간이 2년까지는 아니더라도 1년 반은 훌쩍 넘을 것이다.지금 남초윤은 이혼하고 싶다. 그런데 그는 그녀에게 부부의 의무를 언급하고 있다.하지만 지난 3년 동안, 육지율은 남초윤의 집안에 계속해서 많은 돈을 투자했다. 물론 이 돈들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서로 스무 번 하자고 약속했으니 몸으로라도 빚을 갚을 생각이었다.하지만 약속은 결국 약속이다. 어떤 독한 말도 할 수 있다.정말 해야 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일이다.컴퓨터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화면이 깨졌다.남초윤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내 노트북...!”“내일 새로 사줄게.”남초윤이 무슨 말을 더하려 할 때, 온몸이 갑자기 싸늘해졌다. 육지율은 이미 그녀가 입고 있던 홈웨어를 찢어버렸다.그녀가 일어나 앉으려고 몸부림치자 육지율은 큰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누르며 다시 침대 위로 밀었다.동시에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 키스가 이어졌다.처음에 두 사람 모두 눈을 감고 이 키스를 즐기지 않았다.남초윤은 취기 어린 눈으로 물든 육지율의 눈과 마주쳤다. 평소의 경망한 눈빛과 달리 한없이 그윽해 보였다.자기를 보고 있는 것을 느낀 육지율은 동작을 멈추었다.입술을 살짝 떼며 쉰 목소리로 물었다.“싫어요?”남초윤은 주먹을 꼭 쥐었다.“스무 번 다 하면 이혼합의서에 서명할 거예요?”그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던 큰 손에 살짝 힘을 주며 말했다.“그렇게 이혼을 원하는 거예요? 육씨 집안에서 눈치를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그래도 남씨 집 안에 있는 것보다 못해요?”남재원은 걸핏하면 그녀를 거칠게 대했다.육씨 집안 어른들은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바로 앞에서 그녀에게 폭언하지 않는다. 집안 어른들이 가끔 안 좋은 기색을 내비치면 그는 그 자리에서 그녀를 두둔했다.게다가 그들은 확실히 본가에 별로 가지 않았다.소정 별장에서 아주 자유롭게
남초윤의 심장은 당장이라도 뛰쳐나올 듯 빨리 뛰었다. 결국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흐린 빛 속에서 눈빛이 반짝였다. 누가 먼저 신중함을 포기했는지 알 수 없다. 잠시 멈추었던 입술이 다시 엉켰다.진한 키스 속에 남초윤은 타락한 듯 눈을 감았다.분위기를 깨는 전화벨이 울렸다.남초윤의 핸드폰이 울렸다. 침대맡에 손을 뻗어 휴대폰을 잡으려 했다. 육지율은 오늘 밤 본전을 뽑으려고 결심한 듯 그녀의 손을 붙잡고 다시 원위치로 옮겼다. 손길은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하지만 치명적이다.휴대폰 벨 소리가 얼마나 오래 울렸는지는 모르지만 이 소리는 다른 소리를 감추는 도구로 변했다.그 후, 분위기는 점점 더 치열해졌다....다음날 오전.남초윤은 편집장이 와서 임무를 지시할 때까지 자리에 앉아 오전 내내 멍하니 있었다.“남초윤 씨, 지난번 경제신문용으로 동진의 김 사장을 인터뷰했던 건이요. 김 대표가 남초윤 씨에 대한 인상이 좋은지 방금 다시 약속을 잡았어요. 꼭 남초윤 씨가 와서 인터뷰해달라고 하네요.”순간 정신을 차린 남초윤은 완곡하게 거절했다.“하지만 아직 편집하지 못한 인터뷰 원고들이 많이 남아있어요. 제가 주로 하는 것은 예능이라 경제신문과 과학 쪽은 류진이가 잘해요. 류진아, 네가 해.”그러자 옆에 있던 동료 류진이 손을 들었다.“편집장님, 동진의 김 대표 인터뷰는 제가 할게요. 좀 이따 제가 동진에 연락하겠습니다. 초윤 언니, 김 대표님 비서의 연락처 좀 부탁해요.”남초윤이 마침 승낙하려고 할 때 편집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남초윤에게 말했다.“김 대표와 예능 신문 만들면 되잖아요. 머리가 왜 이렇게 안 돌아가요? 누가 지루한 집안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해요. 예능 기사를 쓰면 되죠. 이참에 김 대표님께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지 물어도 보고요.”남초윤은 거절하려고 일어섰다.하지만 편집장은 한 마디만 남기고 사무실로 돌아갔다.“이렇게 하기로 한 거예요. 이미 동진에게 간다고 답장을 보냈으니 괜히 바람맞히면 안 돼요!”남초윤은 주
진주시.조유진은 저녁 늦게 호텔에 도착한 뒤 남초윤의 메시지를 확인했다.공장에서 하루 종일 생산 라인을 주시하느라 휴대전화를 볼 틈이 없었다.이제야 숨돌릴 틈이 있어 남초윤에게 답장했다.[왜 그래?]남초윤은 핸드폰을 보고 있는 중인 듯 이내 답장했다.[대머리가 나보고 김성혁을 인터뷰하라고 해애애애애애! 진짜 퇴사하고 싶은 마음마저 생겼다니까! 하지만 가난한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조유진은 의아한 듯 물었다.[육지율 씨의 카드는? 긁지 말래?][돌려줬어. 이혼할 때 돈 갚으라고 할까 봐 못 쓰겠어. 그 카드가 손에 있으면 전혀 통제가 안 돼. 나중에 내가 긁은 리스트를 보고 깜짝 놀랐어. 내 월급이 겨우 160만 원인데 그 카드로 1600만 원을 쓴 거 있지? 역시 내 돈이 아니니까 긁어도 실감이 안 나. 조금만 더 함부로 긁다가는 한 달에 2천만 원을 넘을 수도...]‘이혼'이라는 두 글자를 본 조유진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남초윤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조유진이 물었다.“육지율과 정말 이혼할 생각이야? 육씨 집안 그 할아버지가 내버려 둔대?”육지율의 할아버지는 비록 퇴직했지만 지위가 높고 권력이 있는 사람이다. 어떤 일이든 간섭하려고 결심하는 순간 매우 쉽게 손을 쓸 수 있다.남초윤은 불편을 토로했다.“할아버지 쪽에서는 아이 낳으라고만 재촉해. 다른 건 별로 연락하지 않아서 나도 몰라. 하지만 육지율 씨와 이혼하기로 약속했고 이미 승낙했어.”“진짜 잘 생각한 거 맞아? 홧김에 그냥 하는 말, 아니야?”남초윤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다시 얼버무리며 입을 열었다.“유진아, 네가 말해봐... 이혼을 준비하던 두 사람이 갑자기 또 뭐야, 이상한 짓을 해.”조유진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뭐, 뭐라고?”“그러니까... 응...”물을 마시던 조유진은 바로 사레가 들었다.“허허... 누가 먼저 한 거야?”어젯밤의 상황을 한참 동안 생각한 남초윤은 얼굴이 뜨거워 견딜 수 없었다.“그 사람이 제안한 거
그녀와 배현수는 결혼이라는 족쇄가 없다. 왕래가 적어도 자유롭다.남초윤과 육지율... 결혼이라는 울타리에 갇힌 두 마리 짐승처럼 뒤엉켜 기어 나오려 해도 주변에 가로막는 사람이 너무 많다.예를 들어, 남초윤의 부모님, 특히 남재원 같은 속물주의자들은 남초윤이 이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면 가장 먼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결혼은 하기는 쉬워도 끝내기는 어렵다.조유진이 물었다.“초윤아, 육지율 씨를 진짜 안 좋아해?”서재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남초윤은 집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 인터뷰 원고를 정리하고 있어 휴대전화를 들고 있기가 불편해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집에 금방 도착한 육지율은 때마침 서재 앞에 다다랐을 때 스피커 폰으로 전해지는 조유진의 말소리를 들었다.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남초윤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확실히 육지율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녀의 사랑은 이미 5년 전에 김성혁과의 갑작스러운 헤어짐으로 완전히 사라졌다.그런데 육지율에게 조금도 마음이 없는지 묻는다면 그것 또한 바로 대답하기 어렵다.육지율의 훤칠한 얼굴... 얼굴을 심하게 보는 남초윤으로서는 싫어하기 힘들다.적어도 그를 배척하지 않는다.조유진은 남초윤이 대답하기 어려워하는 것을 알고 다시 물었다.“그럼 김성혁은? 마음속에 아직도 그 사람이 있는 거야?”조유진과 얘기할 때면 남초윤은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항상 솔직하게 털어놓는 편이다.“오랜 시간 거쳐 지은 빌딩 한 채가 순식간에 무너졌어. 내가 아무리 치우려고 해도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어. 아무리 원상복구를 하려고 해도 흔적들이 남아있겠지.”미세한 먼지들을 그녀는 한 번 또 한 번 쓸었다.하지만 좁은 구석마저 깨끗하게 청소하기가 어렵다.사랑이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아예 깨끗이 지운 것은 아니다.조유진이 물었다.“그때 갑자기 떠난 게 말 못 할 사정이 있었다면 용서해 줄 거야?”남초윤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아무도 그녀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없다.그래
전화를 거의 끊을 무렵 남초윤은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배현수가 프러포즈한다면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거야. 나처럼 결혼이라는 울타리에 갇히면 나중에 벗어나려고 해도 힘들 테니까”이혼 숙려기간이 60일로 바뀌었다.결혼은 더욱 신중해야 한다. 한 가지 일이 들어가기 쉬워도 나오기 어려울 때, 경계심을 높여야 한다. 어쩌면 큰 수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조유진은 남초윤이 자신을 위해 이렇게 말한다는 것을 안다.“응, 알아. 네가 정말 육지율과 이혼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초윤아, 난 영원히 네 편이야.”그 말뜻을 남초윤은 알아들었다.남초윤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내가 가장 후회하지 않는 것이 너와 절친이 된 거야. 나를 낳은 부모님도 내 편이 아닌데 말이야. 유진아, 고마워.”“고맙긴, 너는 선유의 양어머니잖아. 나 혼자 임신했을 때도 같이 있어 줬고.”...전화를 끊은 후 남초윤은 잠시 서재에서 멍하니 있었다.인터뷰 기사에 실린 김성혁의 자료를 보는 눈빛에는 수심이 가득했다.피할 수 없는 과거라면 마주할 수밖에 없다.원고를 정리하고 기지개를 켜며 서재를 나왔다.서재 입구 대리석 바닥에 최신형 슬림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몇 초 동안 멍하니 있다가 허리를 굽혀 노트북을 들었다. 별장 안을 둘러보았지만 육지율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아래층에서 진씨 아주머니가 저녁밥을 짓고 있다.노트북을 들고 2층 난간에 기대어 물었다.“아주머니, 지율 씨가 방금 다녀왔어요?”“도련님이요? 방금까지 여기 계셨는데 어느새 보이지 않네요. 사모님, 무슨 일로 도련님을 찾으세요?”“아, 아닙니다.”진씨 아주머니는 한약을 다 끓여놓고 2층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사모님, 한약 다 끓였는데 지금 드실래요, 아니면 나중에 드실래요?”남초윤은 어이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또 한약이에요...?”진씨 아주머니는 시댁에서 보내온 하인이다. 하지만 다른 하인과는 신분이 다르다.진씨 아주머니는 육씨 집안 할아버지 쪽에서 보낸 사람이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두 사람은 아직 함께 설을 쇠거나 제대로 된 명절을 보낸 적이 없다.이날 조유진은 일찌감치 하던 일을 마쳤다.다음날이 바로 새해이다. 설날은 원래 공휴일이지만 납품 일정이 빠듯해 공장에서 일부 근로자들이 야근하도록 배치했다.저녁 7시 반, 엄명월이 갑자기 다가와 말했다.“배 대표와 설을 쇠러 가지 않아요? 다들 퇴근하는데 아직도 공장에 틀어박혀 뭐 하는 거예요?”조유진은 팔을 뻗어 엄명월의 목을 조르며 말했다.“배 대표님께서 진주시로 올 시간이 없다고 하네요. 오늘 밤은 우리 둘이 설을 쇠야겠어요.”엄명월은 ‘쳇’ 하며 조유진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차 키를 던지며 말했다.“진주시에서 대제주시까지 가는데 고작 한 시간이에요. 지금 차를 몰고 가도 늦지 않아요.”조유진은 차키를 꼭 쥐고 말했다.“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하잖아요.”엄명월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내일 아침까지 돌아오면 되지 않아요?”일리가 있는 말인 것 같다.엄명월은 조유진이 계속 멍하니 서 있자 재촉했다.“뭘 망설이고 있어요? 얼른 다녀오세요!”엄명월이 그녀를 밀며 빨리 가라고 했다.조유진은 순간 착각에 빠졌다. 조유진보다 엄명월이 그녀와 배현수를 만나게 하려고 안달이 난 것 같다.차에 탄 후, 조유진은 내비게이션을 켰다.배현수에게 전화를 걸어 미리 얘기라도 할까 생각했지만 결국에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이런 일은 미리 알려주면 서프라이즈가 아니다.그렇게 차를 몰고 진제고속도로로 향했다.8시 반, 고속도로에서 거의 내려갈 때 전화가 갑자기 울렸다.배현수에게서 온 전화이다.전화를 받자마자 배현수가 물었다.“유진아, 어디야?”조유진은 일부러 호텔인 척했다.“나 호텔인데요.”전화기 너머의 사람은 어이없게 웃었다.“나 지금 너의 방 문 앞에 있는데 한참 두드려도 아무도 안 열어주네. 엄명월 씨의 말로는 차를 몰고 대제주시로 나 찾으러 갔다며?”그녀는 대제주시로, 배현수는 진주시로 달려갔다.정말 서로를 향해 달렸던 것
관광 케이블카에 도착했다.배현수는 손을 들어 그녀가 입고 있는 베이지색 코트를 여몄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유진아.”“네?”“오늘 밤 네가 대제주시로 가 허탕을 쳤지만 내 마음은 정말 기뻐.”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불타오를 정도로 뜨거웠다.조유진은 그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케이블카 유리창 너머 산을 바라봤다.“산꼭대기에 무슨 서프라이즈라도 있어요?”배현수는 뒤에서 그녀를 백허그 하며 머리 위에 입술을 맞췄다. 그리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서프라이즈니까 당연히 비밀이겠지?”그녀는 문득 남초윤의 말이 생각났다.배현수가 진짜로 프러포즈를 하는 것일까?조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오늘 배현수는 안경테가 있는 안경을 쓰지 않았다.“눈은 이제 다 나은 거예요?”“응, 거의 다 나았어.”조유진은 한참 동안 그를 쳐다봤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배현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왜 그렇게 쳐다봐?”조유진도 같이 웃었다.“아니에요. 그냥 무슨 서프라이즈인지 궁금해서요.”케이블카가 천천히 산꼭대기로 올라갔다.최근 진주시에는 큰 눈이 내렸다. 산에 눈이 가득 쌓였고 아직 녹지 않아 시야가 온통 하얗다.코끼리 산의 정상에는 거대한 전망대가 있다.케이블카에서 내리자 배현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전망대까지 안내했다.전망대에 따뜻한 오렌지색 등이 켜져 있어 밝고 아늑했다.전망대 주변 난간에는 누군가가 정성껏 배치한 다양한 장미꽃이 가득했다.조유진이 걸어가자 정밀한 천체망원경이 놓여 있었다.혹시 별을 보려는 것인지 물으려고 할 때, 배현수가 옆에서 말했다.“유진아, 발밑을 봐봐.”조유진이 고개를 숙이자 발밑 유리 바닥이 밟는 순간 핑크빛 불꽃이 터지는 것을 발견했다.유리 밑에 감지 센서가 있다.조유진은 깜짝 놀랐다.“이것은 원래 있던 거예요, 아니면...”“일주일 전부터 준비한 거야. 마음에 들어?”조유진은 신기해하며 유리 바닥을 여러 번 밟았다. 한 번 밟을 때마다 센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