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밤, 밖에 큰 눈이 많이 내렸다.조유진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한밤중에 몇 번이고 일어났다.엄씨 사택 밖의 검은 차는 아직도 가지 않았다. 차 지붕에 눈이 두껍게 쌓였다.아래층에서 인기척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바스락거리는 낮은 소리였다.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모르겠다.이튿날 아침 일찍, 조유진은 세수를 마친 후 사택 현관 밖을 내다봤다.검은색 차가 보이지 않았다.가벼운 마음으로 옷을 갈아입고 아침 식사를 대충 때우고 성행 그룹으로 향했다.마당에는 눈사람 세 명 있었다.모양이 그럴듯하게 보였다.제일 작은 눈사람의 팔뚝 옆에 탕후루도 꽂혀있었다. 선유는 탕후루를 제일 좋아한다.엄씨 사택의 정원에는 많은 풀이 있다.눈사람 옆에는 머메이드 모양의 웨딩드레스 모델이 원목 레저 의자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앙상한 어깨 위에 하얀 레이스 베일이 걸쳐져 있었다.웨딩드레스 눈사람은 시원하고 단정해 보였다.굳이 얼굴이 없어도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또 하나의 눈사람이 신부 눈사람 옆에 만들어져 있었다. 그 눈사람의 목에는 짙은 색의 양털 목도리가 둘려 있었다. 남자 것이다.배현수가 가끔 코트에 맞춰 목에 걸치는 스카프이다.아침 일찍 일어난 도 집사도 마당을 들여다보았다.“아가씨, 눈사람을 없애버릴까요?”조유진은 사진 몇 장을 찍은 후, 휴대전화를 거두고 말했다.“선유가 눈사람 좋아하니까 일단 놔두세요.”좀 이따 녀석이 깨어났을 때, 이렇게 ‘놀랍고 무서운’ 작품을 본다면 두 눈이 얼마나 휘둥그레질지 모른다.도 집사가 웃으며 말했다.“하긴, 눈사람 세 개를 만드는 데에도 많은 노력이 들었을 거예요.”조유진은 한밤중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떠올랐다.“아저씨, 저 출근할게요.”“휴, 아가씨 운전 조심히 하세요. 눈 오는 날에는 길이 미끄러워요.”“알겠습니다. 아저씨.”조유진은 차 안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흰색 벤츠가 나가자 검은 그림자가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났다.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그녀를 따라다녔다.조유
이틀을 따라다닌 후, 영상이 갑자기 한 플랫폼에서 인기를 끌었다.지나가는 사람이 올린 것이다. 편집, 음악, 그리고 검은색 팬텀의 차량 번호가 너무 눈에 띄어 인터넷에 올리자마자 네티즌들의 호기심이 폭발했다.“한 대표이사가 내연녀를 따라다니는 거 아니에요?”“차량 번호가 포인트에요! 88가8888이에요!”“우연의 일치일 뿐이에요. 마침 흰색 벤츠 뒤에 있는 것이지 일부러 따라다니는 것은 아니에요. 고작 이 행동이 여자를 따라다니는 것으로 보인다고요?”“그러니까요!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에요? 검은색 팬텀을 운전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충분히 돈이 많을 거예요. 그런 사람이 여자 한 명 없겠어요?”“하지만... 벌써 이틀째예요. 이 정도로 우연이라고요?”“아니, 흰색 벤츠 번호판은 왜 아무도 신경 안 써요? 11나1111이라고요. 차가 좀 평범하기는 해도 이 번호판도 예사롭지 않다고요.”“미친, 내 머릿속은 이미 두 재벌 집 남녀가 서로 연애하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어요. 강제 사랑이라고 하죠!”“차주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내 머릿속은 이미 정상이 아닌 것 같아요!”“그런 연애가 이 세계를 지배하는 거죠. 그런데 저 사람들 운전 솜씨도 대단해요. 이렇게 오랫동안 따라다녔는데 그사이에 다른 차가 끼어들지 못한 거예요?”“팬텀을 타고 다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팬텀을 운전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흰색 벤츠를 운전하는 사람은 성남 엄씨 집안의 사람일 겁니다. 11나1111 이 차량 번호는 성행 그룹 엄씨 집안이 확실해요.”“하늘이시여! 차가 따라다니는 영상의 조회수가 이렇게 많다고요? 내가 폭스바겐을 타고 와이프의 마쓰다를 따라다니는 것은 왜 인기가 없는 거죠?”“형님, 지금 장난하는 거예요? 누가 폭스바겐이 마쓰다를 따라다니는 것을 보고 싶어 하나요?”“하하. 웃겨 죽겠어요. 저 사람들은 저 번호판을 달고 게다가 팬텀이 벤츠를 따라다녀요. 숙명 감을 갖고요. 마쓰다를 따라다니는 영상은 배경 음악부터 바꿔야 해요!”...엄명월
은빛의 차가운 총이 조유진의 허리춤을 겨눴다.휴대전화는 아직도 울리고 있었다.차를 몰던 여자가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받아, 스피커 폰으로!”조유진은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전화를 받았다.엄명월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엄환희 씨, 어디에요? 오후에 누군가가 저를 기절시켰어요. 저와 똑같이 생긴 여자가 내 사무실에 들어왔는데...”조유진이 말을 하기도 전에 운전하던 여자가 명령조로 지시했다.“배현수에게 통보해. 북쪽에 있는 오래된 화학 공장으로 오라고! 30분의 시간을 줄게. 늦으면 조유진의 시신을 수습하게 될 거야!”전화를 끊은 후,빨간색 페라리는 빠르게 블록을 지나 황량한 도시 북쪽으로 향했다.이 사람은 성남의 길을 잘 알고 있다. 손에 이렇게 위험한 무기를 들고 얼굴까지 둔갑했다. 조유진과 배현수 모두 연루시키는 것으로 봐서 아마 드래곤 파 사람일 것이다.조유진은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백소미 씨?”조유진에게 들통난 백소미는 더 이상 위장하지 않고 조유진의 이마에 총을 겨누었다. 그리고 폐가 화학 공장으로 끌어갔다.도착하자마자 얼굴에 씌웠던 얇은 가면을 벗어 옆으로 내던졌다. 그녀의 진짜 얼굴이 나타났다.“조유진 씨, 또 만났네요!”여기 바닥이 다 젖었어요.공기 중에는 코를 찌르는 휘발유 냄새가 가득했다.백소미는 라이터를 꺼냈다.‘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라이터를 켰다.불빛이 조유진의 얼굴을 스치자 긴장감과 창백함이 역력히 드러났다.백소미는 피식 웃었다.“배현수가 감히 나를 놀리다니! 그렇다면 나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려주지! 내가 이 라이터를 바닥에 던지기만 하면...”조유진은 통제 불능에 가까운 그녀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기름에 불을 붙이면 그쪽도 나도 도망갈 수 없어요! 백소미 씨, 진정하세요! 백소미 씨가 먼저 우리 아빠를 중독시켰어요! 우리가 장난친 거라고 해도 백소미 씨가 먼저라고요! 그리고 배현수 씨가 언제 장난을 쳤는데요?”말이 끝나
배현수의 모습을 본 순간, 조유진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하지만 바로 외쳤다.“현수 씨, 오지 말아요. 손에 총이 있어요!”그러나 배현수는 멈추지 않고 긴 다리를 성큼성큼 옮기며 걸음을 계속했다.휘발유를 넘어 걸어오는 남자는 진지하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조유진, 놓아줘요. 독약은 내가 일부러 준 게 아니에요. 드래곤 파 짓이에요.”백소미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드래곤 파가 준 독약이라면 배현수 씨와 엄 어르신은 왜 다 살았는데요?! 배현수 씨, 지금 날 바보로 봐요?”배현수는 차근차근 설명했다.“약 두 알을 갖고 온 것은 맞지만 한 알에 독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사실 두 알 모두 검사하여 확인한 후에 건네주려 했지만 백소미 씨가 나를 믿지 않았잖아요. 혹시라도 내가 해독약을 받은 후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봐요. 백소미 씨, 이것은 내 탓이 아니에요. 조급해한 사람은 본인이에요.”백소미는 아예 믿지 않았다.“배현수 씨의 말 대로라면 해독제는 하나밖에 없어요. 엄 어르신이 약을 먹었다면 배현수 씨는 왜 살아있는데요?”“내가 복용한 해독제는 드래곤 파 기지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해독제 성분 비율에 따라 719부대의 연구개발센터에서 개발한 것이에요.”백소미는 황망히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야... 말도 안 돼! 당신이 혁진의 해독약을 먹은 거야!”배현수는 총을 잡았다.만약 시력에 문제가 없다면 이런 상황에서 분명 백소미의 이마를 한 방에 명중시킬 수 있다.속도도 백소미보다 더 빠를 것이다.엄씨 사택에 있을 때, 백소미와 맞붙은 적이 있다.백소미는 실력이 있긴 하지만 배현수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은 안경을 끼고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어 백소미와 조유진의 모습이 그의 시선에 겹쳐져 보였다.이런 상황에서 총을 쏠 수 없다.잘못 쏘았다가는 실수로 다칠 위험이 크다.백소미는 조유진의 머리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쏘고 싶으면 쏴요. 누구의 총알이 더 빠르고 정확하게 명중하는지 보죠!”배현수는 총을 쥔 손을 단단
백소미는 벌컥 화를 냈다.“내가 아직도 당신들 말을 믿을 것 같아요? 그 독약만 아니었다면 혁진이는 죽지 않았을 거예요!”“하지만 별다른 선택이 없잖아요. 내가 알기로는 드래곤 파가 이미 백소미 씨에 대한 수배령을 내렸어요. 백소미 씨, 당신은 배신자예요. 그들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그때가 되면 혁진의 복수는커녕 본인 목숨까지 잃을 거라고요. 719부대에 가입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유일하면서도 최고의 선택이에요. 그러니까 유진이를 풀어줘야. 나는 내가 뱉은 말은 지켜요.”배현수의 한마디 한 글자는 굳건하고 힘이 있었다.이렇게 큰 유혹에 백소미가 흔들리지 않을 리가 없다.하지만 배현수를 믿지 못했다.“그렇다면 손에 있는 총을 내려놓아요. 그럼 믿을게요!”배현수는 손에 든 검은 빛이 번쩍이는 총을 그대로 바닥에 내려놓은 뒤 멀리 차버렸다.“배현수 씨, 한 말은 꼭 지키세요!”말을 마친 백소미는 조유진을 반대편으로 밀쳐냈다.그리고 옆에 있는 창문으로 훌쩍 뛰더니 눈 내리는 밤 속으로 사라졌다.조유진은 익숙한 품 안에 넘어졌다.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배현수는 그녀를 꼭 껴안았다.“다친 데 없어?”조유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아니요. 백소미...”“백소미도 별 방법이 없으면 알아서 나를 찾아올 거야.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조유진을 납치한 이상 719부대에 합류시키겠다는 약속을 지키더라도 그 전에 백소미에게 톡톡히 교훈을 줘야 했다.감히 배현수의 사람을 납치하다니? 그 대가로 혼 좀 내는 게 무슨 대수겠는가?배현수가 조유진을 끌고 떠나려 하자 조유진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조유진은 달려가 바닥에 있는 그 검은 총을 주워왔다.이런 위험한 물건을 누군가가 주우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조유진은 그에게 총을 건넸다.배현수는 바로 받지 않았다. 얼떨떨한 얼굴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조유진은 그가 왜 갑자기 그녀를 노려보는지 몰랐다. 총을 그의 손에 쥐여주려 하자 남자는 그녀의 팔을 덥석 움켜쥐더니 품
두 사람은 서로의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배현수가 고개를 숙이자 조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얼굴을 피했다.그러나 상대방은 거절할 틈을 주지 않고 뒷덜미를 잡더니 강제로 키스했다.포악하고 용맹스러웠다.조유진은 피할 수도 밀어낼 수도 없었다. 가슴이 막힌 듯 답답했지만 풀 곳도 없었다. 입을 벌려 그를 한 번 물었다.배현수는 살짝 신음소리를 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성남에 오더니 사람을 무는 법을 배운 거야? 엄명월과 같이 바가지를 씌운 것도 모자라 무는 것까지 배웠어?”조유진만 보면 배현수는 늘 무방비 상태가 된다. 이렇게 물어뜯을 줄 몰랐다.게다라 이렇게 세게 물어버릴 거라고는...입안에서 은은한 피비린내가 퍼졌다.조유진의 빛나는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험상궂게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눈시울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그러더니 또박또박 말했다.“바가지 씌우는 것도 현수 씨가 가르쳐준 거예요. 사업하려면 머리를 써야 한다고 했잖아요.”그 말에 배현수는 입꼬리를 올렸다.“무는 것은 나에게서 배운 게 아니니?”“나 물지 않은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한 번쯤 무는 게 뭐 어때서요?”배현수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고 씩 웃었다.“그래서 나에게서 배운 것을 가지고 나와 맞서려는 거야?”“현수 씨가 나를 먼저 속였어요. 중독되면 어때서요? 중독되면 선유를 납치해서 스위스로 보낼 수 있는 거예요? 중독되면 나를 따돌리고 나에게 숨기고 나 혼자 내버려 둘 수 있는 거예요?”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가볍게 대답했다.“그건 내가 잘못했어.”조유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목구멍이 메어 시큰거렸다.“현수 씨가 곧 죽을 것 같으니까 창민 오빠에게 나를 떠넘기고 스위스로 가라고 강요한 거죠? 배현수 씨, 당신 대체 뭐냐고요. 무슨 근거로 나를 속이고 나 대신 창민 오빠를 선택하냐고요?”배현수는 한마디 내뱉었다.“나야말로 너에게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반문 같기도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 같기도 했
“나 조유진, 배현수만큼 강하지 않은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왜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려요? 만약 방해된다고 생각하면 직접 얘기해 주면 되잖아요. 내가 협조해서 한국을 떠날게요. 현수 씨가 없는 6년 동안 나 혼자서 선유와 양어머니를 모시고 잘 버텼어요! 배현수 씨, 조유진은 그렇게 강하지 않지만 생각보다 약하지도 않아요.”조유진은 하이톤으로 말했다.텅 빈 황폐한 공장 안에서 배현수의 고막을 찌르는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그녀는 마음속의 불쾌함을 한꺼번에 모두 소리쳤다.며칠 동안 가슴에 묵직하게 쌓여 있던 분노가 순식간에 폭발했다.마음 깊이 드리워졌던 그늘이 강풍에 휘날려 간 듯 마음속이 순간적으로 후련해졌다.화가 나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조유진은 마치 작은 짐승처럼 배현수를 노려보고 있다.배현수는 화를 내는 대신 피식 웃었다.“말 다 했어?”조유진의 강한 펀치가 그에게는 솜사탕처럼 가벼운 듯한 공격 같았다.배현수가 그녀의 가는 손목을 잡고 살짝 잡아당겼다. 그의 얇은 입술과 그녀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했다.조유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거야?”“몇 번 더 물라고요?”조유진은 더 이상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입을 벌렸지만 움직이지 않았다.배현수는 피식 웃었다.“새끼 강아지, 왜 아직 안 물어?”“누가 강아지예요!”배현수는 큰 손으로 그녀의 귀밑에 있는 머리를 뒤로 넘겼다. 눈빛에는 사랑이 가득했다.“사람을 이렇게 무는데 강아지가 아니라고?”조유진은 그를 힐끗 쳐다봤다. 손을 뿌리치고 하이힐을 또각또각 밟으며 자리를 뜨려 했다.‘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하이힐이 바닥에 던져진 안경을 밟아 부쉈다.조유진은 깜짝 놀라 천천히 발을 떴다. 안경알은 이미 그녀의 하이힐에 깔려 산산조각이 났다...배현수는 눈을 살짝 치켜들며 물었다.“어떻게 배상할 거야?”조유진은 다급히 설명했다.“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칠흑같이 어두운 바람에 진짜로 앞을 똑똑히 보지 못했다.그런
폐허 공장을 나온 조유진은 배현수의 지팡이가 되어 그를 차로 데려갔다.배현수는 조수석에 앉았고 조유진이 운전했다.시내 거리를 지나던 조유진은 양쪽에 있는 가게들을 곁눈질로 계속 지켜봤다. 그러다가 안경원을 발견했다.“안경가게가 열려 있으니 안경을 새로 맞춰요.”그녀는 마침 주차할 자리를 찾으려던 참이었다.그러나 배현수가 거절했다.“나에게 네가 필요 없을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지금 저처럼 안 보이는 상태에서는 네가 너무 필요해.”안경을 맞출 필요가 있겠는가?그는 안경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조유진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내 말은 서로를 믿는다는 뜻이에요. 안경 하나로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오늘 밤 엄씨 사택으로 돌아가야 해요. 혼자 호텔에 안경도 쓰지 않고 있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배현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같이 안 있어 줄 거야?”“내일 아침에 진주시로 출장 가야 해요. 어떻게 같이 있어요? 가서 안경 하나 맞춰요.”조유진은 운전대를 잡고 주차공간을 찾아 머리를 기웃거렸다.‘눈먼 멋쟁이'를 부축해 안경원에 도착해 점원에게 말했다.“지금 도수를 재서 제일 좋은 안경을 맞춰주세요.”도수를 잰 후 배현수를 이끌고 안경테를 고르기 시작했다.카운터 안에 각양각색의 안경테가 놓여 있다.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많았다. 조유진은 고개를 돌려 물었다.“어떤 스타일의 안경을 좋아해요?”“네가 골라준 거면 다 상관없어.”조유진은 일부러 가장 오버스러운 검은 테두리 안경을 고른 후, 점원에게 말했다.“언니, 이거 한번 해 볼게요.”점원은 커다란 검은 뿔테 안경테를 꺼내 조유진에게 건넸다.조유진은 또 배현수에게 안경테를 건네며 말했다.“한번 써봐요.”배현수는 안경을 받는 대신 얼굴을 숙였다.“네가 해줘.”눈이 침침한 것이지 손이 부러진 것은 아니지 않나?왜 갑자기 손까지 아픈 행세를 하는 것일까?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하지 않았던가?하지만 아직 여독이 채 가시지 않은 걸 봐서 조유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