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감사합니다.”구 한의사가 돌아간 후, 엄준은 조유진을 보며 말했다. “내일 급하게 그룹에 출근할 필요 없어. 몸조리 좀 더 해. 건강이야말로 근본적인 본전이니까.”하지만 조유진은 거부했다.“엄명월 씨와 이미 약속했어요. 안 가겠다고 하면 저에 대한 인상이 안 좋아질 거예요. 회사에 놀러 온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조유진의 걱정도 일리가 있었다.엄준도 더 이상 말을 아꼈다.“어떤 일이 있어도 혼자 짊어지려 하지 마. 나는 너의 아버지야. 내가 살아 있는 한평생 너의 편이 되어줄게.”마음이 든든해진 조유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인생의 제일 밑바닥에 있을 때마다 항상 함께 해주셔서 힘이 되는 것 같아요.”바다에 뛰어들었을 때나 지금 유산을 겪은 후나 곁에 늘 엄준이 있었다.엄준은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아빠가 오늘 회사 홍보팀에 배현수와의 약혼 소식은 사실이 아니라고 기사를 내라고 했어. 내 탓 하지 않지?”조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그 약혼 기사는 처음부터 저와 낸 게 아니잖아요. 정정하는 게 당연한 도리고요. 그건 그렇고 아빠, 당분간 저의 신분을 외부에 비밀로 하면 안 될까요?”엄준은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다.“이 일에 대해 다른 생각이 있는 거야?”사실 엄창민에게 언론과 연락을 취하라고 진작 얘기했다. 다음 주에 기자회견을 열어 그녀의 신원을 밝힐 예정이었다.조유진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아시다시피 예전에 위증한 적도 있고 나중에 법원에 가서 진술을 번복했지만 인터넷에서 평판이 매우 좋지 않아요. 만약 아빠의 친딸이라고 공개하면 성행 그룹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어요. 성행 그룹이 저 때문에...”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준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환희야, 어떤 일이 있었든 네가 내 친딸이라는 사실은 바꿀 수 없어. 위증했다고 해서 아빠가 너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고. 네가 인터넷에서 평판이 나쁘다고 해서 너와 관계를 끊을 수도 없어. 그동안 배현수가 SY 주식
빨간색 페라리는 교외의 한 골프장 입구에 정차했다.엄명월은 선글라스를 벗더니 에르메스 종이봉투를 조유진에게 던졌다.“들고 내려요.”조유진도 시키는 대로 할 뿐 묻지 않았다.엄명월을 따라 골프장으로 들어갔다.“참, 골프 칠 줄 알아요?”“조금요.”옛날 조범의 집에 있을 때 그는 조유진을 좋은 ‘도구’로 키우기 위해서 부자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많이 배우게 했다. 바이올린, 승마, 골프... 그러다 보니 조유진도 조금씩은 다 할 줄 알았다.“조금이 어느 정도인데요?”조유진이 대답했다.“홀인원 정도?”이게 조금이라고?이것은 조금 많이 아는 거겠지!엄명월은 깜짝 놀라는 얼굴이었다. 눈빛이 반짝이더니 의외라는 듯한 모습으로 말했다.“이따가 솜씨 좀 보여줘요. 이 고객은 골프를 아주 좋아해요. 요리도 좋아하고 노는 타입이죠.”조유진은 고개를 끄덕인 후 물었다.“이 고객과 무슨 사업을 할 건데요?”“성행 그룹은 처음에 건축자재로 시작했어요. 부동산 시장이 급부상하면서 남쪽의 부동산 업자들이 필요로 하는 건축자재를 성행이 거의 독점으로 공급하다시피 했죠. 지난 2년 동안 부동산 개발 속도가 느려지면서 성행 그룹은 주로 에너지 및 리조트 호텔 프로젝트에 투자했어요. 얼마 전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식까지 전해지면서 건축자재 관련 협력업체들이 모두 떠나갔죠. 지금 건축자재가 성행 그룹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버는 사업은 아니지만 아버지는 물론 성행 그룹 임원들도 이 사업은 포기하고 싶지 않아 하죠. 오늘 만날 이 고객은 하민 건설의 구매 부서 책임자예요. 하민 건설은 얼마 전에 성남에 부동산 프로젝트를 하러 왔어요. 고급 주택 3개를 건설하려면 대량의 건축 자재가 필요해요.”조유진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엄명월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한마디 귀띔했다.“아무튼 먼저 술자리에 앉혀놓고 얘기해요. 술자리에 앉혀야만 오래 얘기할 수 있고 그래야 일 얘기도 할 수 있으니까. 술을 마실 줄 알아요?”“조금밖에 못 마셔요.”“잘 마신다는 뜻이에요?”조유진은
장 주임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엄 팀장, 이런 행동은 매우 위험해요. 이거 혹시 뇌물인가요?”엄명월은 웃으며 말했다.“제가 감히 그럴 수 있겠어요? 그냥 가방일 뿐이에요. 명함과 가방은 여기 둘게요. 잊지 말고 가져가세요.”눈치 빠른 조유진은 명함을 바로 에르메스 종이봉투에 집어넣었다.장 주임은 이런 작은 행동들을 모두 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엄명월은 손을 뻗어 귀밑에 곱슬머리를 쓸어넘기더니 웃으며 말했다.“장 주임님, 성남에 오신 지 얼마 안 돼서 맛있는 음식을 잘 모르시죠? 신라 호텔에 성남의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 자리를 예약해 뒀어요. 저희와 같이 가서 저녁 먹으면서 이야기 나눌까요?”“아이고! 또 안 들어갔어!장 주임은 엄명월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이 샷이 홀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이를 본 조유진은 한쪽에 있는 골프채를 들어 팔을 휘둘러 바로 홀인원을 했다.장 주임은 어리둥절해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여자애가 홀인원이라니?조유진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캐디가 고개를 숙이고 공을 줍는 틈을 타서 손에 든 골프채를 내려놓으며 박수를 쳤다.“장 주임님, 대단하십니다. 홀인원! 오늘 캐디가 팁을 받겠네요.”엄명월도 덩달아 박수를 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장 주임님, 대단하십니다! 사진 한 장 찍어드릴게요. 스토리에 꼭 올려주세요. 오늘 홀인원의 멋진 장면!”장 주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다들... 보셨나요?”“네, 봤습니다.”“네, 봤습니다.”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두 젊은 아가씨가 그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홀인원은 평생 한 번으로도 족하다!이 기세를 몰아 조유진은 생수 뚜껑을 따서 건네며 말했다.“장 주임님, 골프 치느라 지치셨죠. 물 좀 드세요.”약간 얼떨떨해진 장 주임은 말없이 생수병을 받아들었다. 앞에 있는 두 계집애를 바라보며 그저 멍해졌다.이런 수단이 너무... 체면을 구기는 것은 아닐까
어느 정도 술이 오간 후, 엄명월은 직접 장 주임에게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장 주임님, 오늘 얘기가 이렇게 잘 통하는 김에 계약서까지 가지고 왔어요. 보세요. 우리...”장 주임은 우유부단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엄 팀장, 이 일은 저 혼자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성행 그룹의 견적이 확실히 좀 높아요. 아무래도 비즈니스다 보니... 하지만 대범한 엄 팀장이니까 이 계약이 성사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의 우정은 남아 있는 거예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다음에 이야기합시다.”이 말은 분명 예의를 차리는 인사말이었다.그러나 엄명월은 굳은 표정을 짓기는커녕 오히려 미소를 짓더니 더 적극적으로 말했다.“성행 그룹에서 건축자재 가격을 조금 높게 부른 것은 사실이지만 저희 물건은 품질이 확실히 좋습니다. 보온 층 재료만 놓고 봐도 그래요. 그 뭐지… 더한인가? 비록 가격은 낮지만 물건의 품질은 우리 것과 전혀 비교할 수 없어요.”더한은 성남의 또 다른 건축 자재 기업이다.성행 그룹이 에너지와 같은 신흥 분야에 집중한 지난 2년 동안 더한은 품질이 좋으면서도 저렴한 건축자재로 성남의 일부 건축 자재 시장을 빠르게 점유했다.일부 기업은 처음에는 더한이 커진 다음에 공격하려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강해져 나중에 처리하기가 어려워졌다.더한의 급부상은 성행 그룹에 교훈을 주었다.자금력과 자질이 최상위에 있더라도 아래에서 물불 가리지 않고 행동하는 동종 업계 종사자들을 주의해야 했다. 가만히 내버려 뒀다가 세력이 진짜로 만만치 않게 되기 때문이다.하지만 장 주임은 분명 엄명월의 이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조유진을 끌어당기며 말했다.“밥상 앞에서는 사업 얘기 하지 마시죠. 골프 얘기 계속해요. 엄환희 씨, 다음에 우리 약속 잡고 홀인원 한 번 더 갑시다!”조유진은 두 손으로 잔을 들어 공손히 건배하며 말했다.“장 주임님, 원샷하겠습니다!”“시원시원해서 좋네요.”엄명월은 협상이 달성되지 않자 조유진과 시선을 마주쳤다
조유진의 프로필을 누르니 스토리에 올린 사진 한 장이 보였다.사진에는 골프장에서 쿨하게 스윙하는 낯선 남자의 뒷모습이 담겨 있었다.그 밑에는 한 마디 문구가 적혀 있었다.[대박! 홀인원!]조유진이 배현수의 전화를 끊었던 그 시간에 바로 이 남자와 함께 공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전화를 받기 불편했을까?대박?그녀의 말투는 마치 어린 팬 같았다.배현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눈빛은 조금씩 차가워졌다.서정호가 백미러로 힐끗 쳐다봤다. 배 대표 얼굴이 얼어붙을 듯했다.“배 대표님, 조유진 씨에게 한 번 더 전화해볼까요? 아마 손이 미끄러 실수로 끊었을 겁니다.”서정호는 핑곗거리를 찾았다.울분을 가라앉힌 배현수는 다시 조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이번에 조유진은 전화를 끊지 않았다.차가운 기계적인 통화연결음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지금 거신 전화기는 꺼져있으므로 잠시 후에 다시 걸어 주십시오...”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배현수는 잠시 멍해졌다.서정호는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더니 머뭇거리며 말했다.“아직도 안 받나요?”“전화기가 꺼졌어.”서정호는 어떻게든 핑곗거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혹시 드래곤 파 사람들에게 잡혀간 거 아닐까요? 세상에! 조유진 씨가 지금 위험에 처한 것은 아니겠죠?”어설프고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유였다.배현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드래곤 파에 잡혔는데 골프를 치고 있겠어?”서정호는 헛웃음을 지었다.“하긴, 그렇기는 하네요... 아마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되었나 봐요! 오죽하면 전화기가 꺼졌을까 하하하...”차 안 분위기가 어색해졌다.검은 벤틀리 한 대가 그들 차 옆을 지나갔다.서정호는 눈빛을 반짝였다.“배 대표님, 엄씨 집안 차 같은데 조유진 씨가 돌아왔나 봐요.”...조유진과 엄명월은 저녁에 술을 마셨다.엄창민이 두 사람을 마중하러 갔다.엄씨 사택에 도착한 후, 엄창민은 차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고 조유진을 부축해 들어왔다.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엄명월에게 말했다.“알코올 알레르기가 있
엄명월은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는 자세로 팔짱을 낀 채 서서 말했다.“어머, 이 시간에 배 대표님이 웬일로 성남에 오셨습니까?”배현수가 조유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다 토한 조유진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엄명월의 어깨에 기댔다.엄명월은 그녀의 팔을 툭툭 치며 말했다.“이봐요, 일어나요! 엄환희 씨, 죽었어요?”아무리 흔들어도 조유진은 깨어나지 않았다.엄명월은 고개를 들어 배현수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올리고 말했다.“배 대표님, 타이밍을 잘 못 맞춰 왔네요. 내 비서가 이미 술에 많이 취한 것 같네요. 저기, 빨리 와서 내 비서 좀 부축...”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현수는 엄명월의 어깨에 기대고 있던 조유진을 잡아당겨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바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엄명월은 엄창민을 향해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꼭 마치 속으로 ‘기회를 줘도 소용없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엄씨 사택 내부에서 인기척을 들은 선유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방에서 뛰쳐나왔다. “아빠! 어떻게 왔어요? 엄마, 왜 그래요?”“엄마가 술에 취했어. 어느 방이 엄마 방이야?”“이쪽이요!”선유가 배현수를 데리고 조유진의 방에 들어갔다.아래층, 엄명월은 소파에 기댄 채 갈 생각이 없었다.엄창민이 눈살 찌푸리며 물었다.“왜 아직도 안 가? 여기서 하룻밤을 묵을 계획인 거야?”엄명월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말했다.“이렇게 재미있는 구경을 놔두고 가긴 어디를 가? 그리고 여기도 내 집이야. 내 방도 있고. 오빠도 여기서 사는데 나라고 못 살 거 없지 않아?”엄창민은 한마디 경고했다.“환희 괴롭힐 생각하지 마.”엄명월은 마치 농담을 들은 듯 말했다.“내 비서에게 왜 심술을 부리겠어? 나도 같은 여자인데 설마 성희롱이라도 할까 봐 그래? 그런데 오빠는 왜 남자로 태어났으면서 계속 뒤에서만 이러는데? 오빠야말로 제일 무서워!”“엄명월!”엄명월은 위층을 힐끗 올려다봤다.“웃기지 않아? 맞춰봐. 배현수 씨가 지금 위층에서 뭐 할까? 설마 술 취한 사람에게 이상한 짓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엄씨 가족은 당연히 조유진의 편이었다.내부 싸움은 괜찮지만 외부인이 있을 때는 반드시 한목소리로 맞서야 했다.배현수의 옆에 서 있는 서정호는 이런 상황에 심상치 않은 예감을 받았다.“배 대표님, 오늘은 조유진 씨를 못 데려갈 것 같으니 먼저 철수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유진 씨가 깨어나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릅니다...”배현수는 날카로운 눈빛을 거두어들이고 말했다.“안 데려갈게요. 대신 술 취했으니까 돌봐드리는 것은 괜찮죠?”이 방에 있는 사람에게서 한 명도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배현수가 조유진을 강제로 끌고 갈 실력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이 방에... 장인어른, 오빠, 여동생이 한 줄로 서 있다. 혹시라도 미움을 받으면... 이 결혼은 쉽지 않다.엄준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엄씨 사택은 외부인이 묵을 수 없어요. 하지만 배 대표님은 은혜를 베풀어 준 분이니까 명월이가 신라호텔에 스위트룸을 마련해 드릴 수 있어요.”“괜찮습니다.”배현수는 좀처럼 짜증을 내지 않는다.하지만 오늘 밤 형세는 그에게 매우 불리했다.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가 조유진을 보려고 했다.그러자 엄창민이 계단에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배 대표님, 오늘은 이만 돌아가세요.”배현수는 손가락뼈를 주무르며 칼같이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엄창민은 조금도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내일 아침에 환희가 깨서 배현수 씨를 보고 싶어 하면 자연스럽게 연락할 겁니다! 배 대표님, 이만 돌아가세요.”배현수, 이 불청객은 집안에서 나왔다.차에 올랐지만 엄씨 사택 부근을 떠나지 않았다.엄창민이 말했다.“아버지, 배현수가 아직 안 갔는데 사람 몇 명 불러서 내쫓을까요?”엄준은 담담한 웃음을 지었다.“있고 싶어 하면 있게 해. 얼마나 성의가 있는지 지켜보자고.”엄창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이번에는 절대 환희를 그렇게 쉽게 대제주시로 돌아가게 놔둘 수 없어요.”...위층.조유진은 두 팔을 짚고 일어섰다.선유는
호텔로 돌아가는 길.뒷좌석에 기대앉은 배현수는 안경을 벗고 두 눈을 감았다. 미간에는 깊은 고민의 흔적이 보였다.손을 뻗어 코트 주머니에 있는 담뱃갑을 꺼내려 했지만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다.성남에 급하게 오느라 담배와 라이터를 안 가져왔던 것이다.남자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자 서정호가 말했다.“앞에 가게가 있는 것 같은데 이따가 차 세워서 담배 한 갑 사 올까요?”배현수는 ‘응’이라고 대꾸했다.잠시 후 차는 길옆에 멈춰 섰다.서정호는 담배를 사러 가게에 갔다.배현수는 뒷좌석에 몸을 기대고 안경을 쓴 채 눈을 천천히 떴다.성남의 겨울밤은 대제주시보다 습하고 춥다.창문을 열자 한 줄기 눅눅한 찬 바람이 불어와 안 좋은 기분을 약간 날려 버렸다.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가로등 밑에서 한 커플이 싸우고 있다.목청이 터져라 심하게 다투고 있었다.그와 조유진은 평생 이렇게 뜨겁게 싸우지 않을 것이다.무슨 영문에서일까? 왠지 모를 호기심에 차창을 반쯤 내렸다.여자가 말했다.“아빠가 오늘 너를 아주 못마땅해해! 너는 우리 집에 처음 오는데 어떻게 빈손으로 올 수 있어? 우리 아빠가 매우 기분 나빠하셔! 나와 우리 집을 무시한다고 생각한다고!”그러자 남자가 말했다.“너를 무시한다고? 성남에 이런 예절이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규칙이 그렇게 많아?”여자가 대꾸했다.“물어볼 줄도 몰라? 아무리 예절을 몰라도 적어도 술 두 병과 담배 두 개 정도는 갖고 올 수 있잖아. 지금 이렇게 되었어. 아빠가 우리 결혼 허락하지 않는다고!”남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했다.“그래? 그럼 헤어지자는 거야?”여자아이는 눈이 빨개진 채 입술을 깨물고 숨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무슨 뜻이야? 진짜 헤어지자는 거야?”“네가 헤어지자며? 그래, 헤어져! 그런 핑계 같은 거 대지 말고! 내가 처음 너희 집에 갔는데 빈손으로 와서 버릇이 없다고? 너의 아빠는 처음부터 내가 이 지방 사람이 아닌 것이 못마땅하겠지! 그래서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