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로 돌아가는 길.뒷좌석에 기대앉은 배현수는 안경을 벗고 두 눈을 감았다. 미간에는 깊은 고민의 흔적이 보였다.손을 뻗어 코트 주머니에 있는 담뱃갑을 꺼내려 했지만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다.성남에 급하게 오느라 담배와 라이터를 안 가져왔던 것이다.남자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자 서정호가 말했다.“앞에 가게가 있는 것 같은데 이따가 차 세워서 담배 한 갑 사 올까요?”배현수는 ‘응’이라고 대꾸했다.잠시 후 차는 길옆에 멈춰 섰다.서정호는 담배를 사러 가게에 갔다.배현수는 뒷좌석에 몸을 기대고 안경을 쓴 채 눈을 천천히 떴다.성남의 겨울밤은 대제주시보다 습하고 춥다.창문을 열자 한 줄기 눅눅한 찬 바람이 불어와 안 좋은 기분을 약간 날려 버렸다.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가로등 밑에서 한 커플이 싸우고 있다.목청이 터져라 심하게 다투고 있었다.그와 조유진은 평생 이렇게 뜨겁게 싸우지 않을 것이다.무슨 영문에서일까? 왠지 모를 호기심에 차창을 반쯤 내렸다.여자가 말했다.“아빠가 오늘 너를 아주 못마땅해해! 너는 우리 집에 처음 오는데 어떻게 빈손으로 올 수 있어? 우리 아빠가 매우 기분 나빠하셔! 나와 우리 집을 무시한다고 생각한다고!”그러자 남자가 말했다.“너를 무시한다고? 성남에 이런 예절이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규칙이 그렇게 많아?”여자가 대꾸했다.“물어볼 줄도 몰라? 아무리 예절을 몰라도 적어도 술 두 병과 담배 두 개 정도는 갖고 올 수 있잖아. 지금 이렇게 되었어. 아빠가 우리 결혼 허락하지 않는다고!”남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했다.“그래? 그럼 헤어지자는 거야?”여자아이는 눈이 빨개진 채 입술을 깨물고 숨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무슨 뜻이야? 진짜 헤어지자는 거야?”“네가 헤어지자며? 그래, 헤어져! 그런 핑계 같은 거 대지 말고! 내가 처음 너희 집에 갔는데 빈손으로 와서 버릇이 없다고? 너의 아빠는 처음부터 내가 이 지방 사람이 아닌 것이 못마땅하겠지! 그래서 결
서정호는 뒷좌석 남자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발견했다.배현수는 계속 물었다.“처음 방문했을 때도 이렇게 쫓겨났어?”“그건 아닙니다. 저는 이 정도는 아닙니다....”서정호는 혀를 깨물며 말을 삼켰다.“말해. 연말 보너스 차감하지 않을 테니까.”서정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그럼 사실대로 말할게요?”“문제점을 지적한다면 연말 보너스를 두 배로 늘려줄게.”희미하게 들리는 뒷좌석 남자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희로애락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서정호는 이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배 대표님, 대표님은 저의 대표이고 직속 상관입니다. 저에게 명령조로 지시하는 것은 아주 정상적이고요. 하지만 엄 어르신은 누구입니까? 저분은 조유진 씨의 아버지이고 앞으로 장인이십니다.”배현수는 눈살을 찌푸렸다.“오늘 밤, 내 태도가 문제인가?”이 사람이 그래도 말이 통한다는 느낌을 받은 서정호는 몇 마디 덧붙였다.“대표님은 오늘 밤 엄 어르신을 향해 조유진 씨의 남편이라고 했어요. 이 말을 듣고 어느 아버지가 화를 내지 않을까요? 대표님과 아가씨는 아직 혼인신고도 안 했습니다. 그런데 벌써 다른 사람의 귀염둥이 딸을 납치하려는 겁니까?”“나는... 유진이를 납치할 생각은 없었어.”이번에 성남에 온 것은 당당하고 떳떳하게 조유진과 함께 있기 위해서이다.그동안 관계를 공개하지 않고 조유진을‘제삼자’라는 스캔들에 휘말리게 한 것은 모두 그의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서정호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어이가 없는 듯 말했다.“하지만 대표님 말투는 꼭 마치 조유진 씨가 자기 것인 마냥 자기 사람을 데려가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눈치가 있으면 사람을 내놓으라고 말하는 것 같았죠.”배현수는 어리둥절했다.“내 말투가 그렇게 안 좋았어?”말이 나온 김에 서정호는 계속 말했다.“저는 장인어른께 감히 그렇게 말 못 합니다. 처음 뵈러 갔는데 빈손으로 간 것도 모자라 앞에서 이렇게 날뛰면... 아이고, 아마 장인어른께서 빗자루로 저를
배현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물었다.“어떤 선물을 가지고 가야 할 것 같아?”“대표님의 신분과 집안으로 좋은 술과 담배 몇 갑을 들고 가는 것은 엄씨 집안을 얕잡아 보는 것과 같아요. 게다가 그렇게 큰 성행 그룹에게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귀한 물건은 아무것이나 상관없어요. 중요한 것은 배 대표님이 자세를 낮출 의향이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 있어요.”배현수가 손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상 절대 평범한 물건은 아닐 것이다.하지만... 뭘 선물하면 좋을까?시중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이런 작은 선물들은 엄준의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감동은 더더욱 없다.서정호는 헛기침한 뒤 한마디 덧붙였다.“배 대표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결혼할 사람은 조유진 씨가 아니라 성행 그룹의 유일한 상속녀 엄환희 씨예요. 현실적으로 친딸을 데려오는 것만큼 간단하지 않아요. 엄 어르신의 딸과 결혼한다는 소문이 퍼지면 이 업계가 깜짝 놀랄 겁니다. 성행 그룹 임직원들도 걱정할 게 한두 개가 아닐 거예요. 비즈니스 결혼은 회사 발전에 유리하지만 이 비즈니스 결혼은... 너무 많은 사업이 연루되어 있어요. 어느 한쪽의 이익을 침해한다면 부부관계를 떠나서 각자 왕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서정호가 말한 이것들을 성남에 오기 전에 배현수도 당연히 고민했다.그가 고려했던 일은 엄준도 분명 생각했을 것이다.엄준이 조유진을 주려 하지 않는 것은 분명 회사의 권력을 물려주려는 것이 분명했다.조유진이 성행 그룹을 물려받아 진정한 권력자로 되게 하려는 것이다.하지만 그에게 시집가서 대제주시로 돌아간다면 성행 그룹 입장에서는 진정한 후계자를 잃은 것이니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배현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려 흰 손의 네 번째 손가락에 있는 백금 반지를 바라봤다.그에게 조유진은 그저 유진이일 뿐이다.그는 7년 전처럼 조유진을 곁에 두고 싶어 했다. 정말 이기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조유진에게 엄준의 딸인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엄준은 하나뿐인
도 집사가 답답한 듯 말했다.“아가씨, 회사는 9시에 출근하면 됩니다. 이제 겨우 8시밖에 되지 않았어요. 좀 더 자도 됩니다.”차 키를 받은 조유진은 공손하게 대답했다.“첫 출근인데 일찍 가서 나쁠 게 없잖아요. 아저씨, 저 먼저 갈게요!”흰색 벤츠가 엄씨 사택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자 어제의 그 검은 차가 도 집사의 시선에 들어왔다.도 집사는 싱긋 웃으며 차를 우렸다.엄준은 지팡이를 쥔 채 위층에서 내려왔다.“환희는? 벌써 갔어?“아가씨 방금 나갔습니다. 어르신, 보세요. 입구에 누가 왔습니까?”고개를 들어 창가를 바라보니 꼿꼿한 기럭지의 한 남자가 마당을 향해 오고 있었다.엄준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한마디 농담을 건넸다.“환희가 가자마자 바로 왔네. 지금 젊은 사람들은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잘 잡는 것 같아.”도 집사는 차를 따르면서 창밖을 몇 번 쳐다보았다. “그러니까요, 정말 귀신 같아요. 어르신, 만약 오늘 단단히 준비하고 온 것이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까요?”엄준은 거실을 서성거리다가 진지하게 말했다.“상황에 맞게 대처하지.”“만일 뺏으려 한다면요?”비즈니스 할 때 배현수는 수법이 포악하고 횡포하다. 전적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원하는 것이 있다면 어디 뺏는 것뿐이겠는가?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은 업계 내부의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었다.대단한 장사꾼이지만 결코 장인어른의 눈에 좋은 사윗감은 아니다.엄준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감히!”배현수가 마당에 들어서자 그의 뒤로 선물을 든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섰다.서정호가 옆에서 지휘했다.“이쪽으로 오세요. 안에 술과 도자기가 있으니 조심하시고요. 깨뜨리면 안 됩니다!”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 10여 명이 문 앞에 줄지어 서 있었다.도 집사가 밖으로 나와 물었다.“지금 뭐 하는 겁니까?”배현수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 말했다.“결혼 얘기를 꺼내려고 왔습니다.”도 집사 자리에 얼어붙은 채 멍해 있었다.이때 옆에 있던 서정호가 한마
성행 그룹 빌딩.조유진은 각 부서의 팀장들과 얼굴을 익혔다. 이때 엄명월이 회사 명함이 있는 목걸이를 건네며 말했다.“내 비서가 되려면 적어도 한 달 동안 인턴으로 일해야 해요. 어디 함부로 가지 말고요.”조유진은 목걸이를 건네받으며 말했다.“수습 기간 급여는 얼마인가요?”엄명월은 마치 우스갯소리를 들은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뭐라고요?”조유진이 다시 물었다.“수습 기간 임금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엄명월은 그녀를 한 번 훑어봤다. 장난기 섞인 눈빛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수습 기간 월급은 백만 원이에요. 하지만 나와 같이 다니면서 수주받고 일에 도움이 되면 재무팀 사람에게 말해서 2퍼센트 인센티브를 줄 수 있어요.”엄명월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어젯밤 하민 건설 그 건은 표현이 좋았으니까 성과급과 상여금은 다음 달 급여일에 지급될 겁니다.”조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엄명월의 눈빛에 흠모하는 눈빛이 스쳐 지났다. 하지만 옅고 가벼워서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그리고 목청을 가다듬더니 한바탕 비웃었다.“감사할 필요 없어요.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성행 그룹은 실제 산업을 기반으로 시작한 회사에요. 바깥의 화려한 자본시장과 많이 달라요. 그룹의 몇몇 어르신들은 실력파예요.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면 진정한 능력을 발휘하여 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 해요. 하지만 단지 그냥 놀러 왔거나 배 대표와 싸운 것 때문에 임시로 있으면서 언제든지 대제주시로 돌아가야 한다면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도 돼요. 가서 사모님 생활이나 즐기세요. 어차피 예쁜 아내가 되는 것도 창피한 일은 아니잖아요. 누군가의 예쁨을 받고 한도 없는 다이아몬드 카드를 쓰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니까요. 게다가 일편단심 한 사람만 바라보는데 좋지 않아요?”이것은 사실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다. 말 속에 많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조유진도 독설을 퍼부으며 증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얼굴로 설명했다.“놀러 온 거 아니에요. 엄 팀장님에게
중요한 고객을 만나려면 이미지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 조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엄씨 사택 안.엄준은 하얀 바둑, 배현수는 까만 바둑알을 두고 있었다.여러 번 수를 둔 후, 까만 바둑알은 탈출하면서 하얀 바둑알을 공격했다.이때 엄준이 귀띔했다.“궁지에 몰렸으니 더 뛰면 손해요.”남자는 하얀 손으로 까만 바둑알을 집어 들더니 바둑판에 놓으며 말했다.“엄 어르신과 달리 저는 안목이 좁아서 한순간의 안일함만을 바랄 뿐입니다.”엄준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그 하나를 위해서 이 모든 것의 희생을 감수하겠다고요? 알면서도 기어코 하려는 건가요?”하얀 바둑알이 바둑판에 떨어졌다.까만 바둑알은 하얀 바둑알에 의해 계속 공격을 당했다.하지만 동쪽 한편의 까만 바둑알은 오히려 활기가 넘쳤고 조금도 쇠퇴하지 않았다.서로 수를 주고받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른다.하얀 바둑알은 동쪽 한구석에 있는 까만 바둑알을 끝까지 잡을 수 없었다.팽팽한 경기에서 도저히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엄준이 귀띔하며 말했다.“이 바둑알을 버리면 판이 확 바뀔 거예요. 충고하는데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배현수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여전히 틈새로 탈출해 꿋꿋이 살아남았다.“저는 엄 어르신과 다릅니다. 저는 이 바둑알을 위해 이 판을 시작했습니다. 만약 이 바둑알을 포기한다면 전체 판을 지는 것과 다름없습니다.”엄준은 쇠약한 눈빛으로 그를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이 하나 때문에 전체를 포기한다고요? 과연 그 가치가 있을까요?”“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남이 판단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가치가 있다고 느끼면 그만입니다.”엄준은 맞은편에 앉은 젊은이를 힐끗 쳐다보더니 눈썹을 치켜뜨고 말했다.“정말... 아깝지 않아요?”“네, 아깝지 않습니다.”이 말을 들은 엄준은 넋을 잃고 허허 웃었다.“이 바둑알을 보호하려고 할수록 나는 그렇게 해 주고 싶지 않네요. 젊은 친구, 동기가 너무 일찍 드러났어요.”바둑판
선유는 어린이 숟가락을 잡고 순두부를 한 모금 떠서 먹었다. “할아버지가 나를 정말 예뻐해 줘요. 우리는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매일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어요!”배현수의 눈빛은 급격히 어두워졌다.“대제주시보다 낫다고?”녀석은 청경채 만두를 집어 들더니 한 입 먹고 말했다.“네! 아빠, 요즘 살이 많이 쪄서 이 뱃살 좀 봐요! 할아버지 집밥도 너무 맛있어요!”자신도 모르게 양미간을 찌푸린 배현수는 가슴이 꽉 막히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이런 것은 대제주시에도 있어.”녀석은 즐겁게 먹으며 짧은 다리를 여유롭게 흔들었다.“그런데 엄마가 여기를 좋아해요. 엄마가 말하기를 대제주시보다 공기가 훨씬 좋다고 했어요. 성남에 왔는데 기침도 잘 안 난다면서요!”배현수는 심장이 찌릿했다.“엄마도 여기 있고 싶다고 했어?”대제주시의 가을과 겨울에는 가끔 황사가 있다. 성남 쪽의 공기가 확실히 습하고 깨끗했다.폐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은 대제주시보다 성남에서 더 살기 편하다.아직 거짓말할 줄 모르는 어린 선유는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아빠, 아빠가 차라리 할아버지 댁으로 이사 와요!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얼마나 잘해주는데요. 그리고 할아버지만 두고 가기 섭섭해요.”할아버지를 두고 가기 섭섭한 것일까, 아니면 할아버지 댁의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할까 봐 섭섭한 것일까?배현수는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보름 동안 그는 조유진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은 채 줄곧 기지에서 요양했다.조유진도 그에게 전화한 적이 없다.여기까지 생각하니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엄마가 내 얘기 한 적 있어?”순두부 국물을 얼굴에 묻히고 있는 선유는 눈을 부릅뜨더니 배현수를 애꿎게 쳐다보며 말했다.“아니요.”그래, 그렇단 말이지...보아하니 아주 즐겁게 지내는 것 같다.선유는 배현수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눈을 깜빡이며 위로의 말 한마디를 건넸다.“아빠, 사실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어요. 까먹고 말하지 못했어요.”“말해.”선유는
문을 밀고 회의실로 들어가니 고객사는 이미 도착했다.고개를 든 조유진은 순간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배현수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안경 렌즈 뒤의 눈동자는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엄명월이 먼저 인사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은 마치 재물신을 모시는 듯했다.“배 대표님, 또 뵙네요. 어젯밤 성남에 왔는데 신라호텔에서 잘 지냈습니까?”배현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쁘지 않았어요.”잠시 후, 몇몇 회사 직원이 회의실에 들어왔다. 법무팀 직원도 있었고 에너지 부서 팀원들도 있었다.회의실에 있는 긴 테이블에 갑을 십여 명이 마주 본 채 앉았다.이때 엄명월이 물었다.“배 대표님, 뭐 드시겠습니까?”“아무거나 상관없어요.”사실 회의실 테이블에는 생수가 많이 준비되어 있다.그러나 중요한 접대 자리에서는 일반적으로 차와 커피와 같은 음료도 준비된다.조유진은 엄명월의 오른쪽에 앉았다.엄명월이 불쑥 다가와 한마디 했다.“배 대표님이 뭘 좋아하는지 아니까 탕비실에 가서 준비하세요.”조유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엄명월은 어리숙한 척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 상사의 말을 어기는 거예요? 빨리 가보세요.”조유진은 엄명월이 일부러 이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겉으로 최대한 예의를 지키며 말했다.“바로 가서 음료수 준비해 오겠습니다.”일어나서 회의실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 배현수의 눈빛은 그녀에게로 떨어지지 않았다.조유진은 옅은 색의 정장 차림이었다. 긴 다리, 균형 잡힌 몸매, 흰 피부, 정말 아름다운 각선미를 뽐냈다. 하지만 발에는 누드 색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임신한 사람이 이렇게 가는 굽을 신었다가 삐끗하기라도 하면...남자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잠시만요.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엄명월은 조용히 혼자 입꼬리를 올렸다.“네, 화장실은 나가서 오른쪽에 있습니다. 탕비실을 지나서 좀 더 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