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고객을 만나려면 이미지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 조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엄씨 사택 안.엄준은 하얀 바둑, 배현수는 까만 바둑알을 두고 있었다.여러 번 수를 둔 후, 까만 바둑알은 탈출하면서 하얀 바둑알을 공격했다.이때 엄준이 귀띔했다.“궁지에 몰렸으니 더 뛰면 손해요.”남자는 하얀 손으로 까만 바둑알을 집어 들더니 바둑판에 놓으며 말했다.“엄 어르신과 달리 저는 안목이 좁아서 한순간의 안일함만을 바랄 뿐입니다.”엄준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그 하나를 위해서 이 모든 것의 희생을 감수하겠다고요? 알면서도 기어코 하려는 건가요?”하얀 바둑알이 바둑판에 떨어졌다.까만 바둑알은 하얀 바둑알에 의해 계속 공격을 당했다.하지만 동쪽 한편의 까만 바둑알은 오히려 활기가 넘쳤고 조금도 쇠퇴하지 않았다.서로 수를 주고받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른다.하얀 바둑알은 동쪽 한구석에 있는 까만 바둑알을 끝까지 잡을 수 없었다.팽팽한 경기에서 도저히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엄준이 귀띔하며 말했다.“이 바둑알을 버리면 판이 확 바뀔 거예요. 충고하는데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배현수는 의지를 굽히지 않고 여전히 틈새로 탈출해 꿋꿋이 살아남았다.“저는 엄 어르신과 다릅니다. 저는 이 바둑알을 위해 이 판을 시작했습니다. 만약 이 바둑알을 포기한다면 전체 판을 지는 것과 다름없습니다.”엄준은 쇠약한 눈빛으로 그를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이 하나 때문에 전체를 포기한다고요? 과연 그 가치가 있을까요?”“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남이 판단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가치가 있다고 느끼면 그만입니다.”엄준은 맞은편에 앉은 젊은이를 힐끗 쳐다보더니 눈썹을 치켜뜨고 말했다.“정말... 아깝지 않아요?”“네, 아깝지 않습니다.”이 말을 들은 엄준은 넋을 잃고 허허 웃었다.“이 바둑알을 보호하려고 할수록 나는 그렇게 해 주고 싶지 않네요. 젊은 친구, 동기가 너무 일찍 드러났어요.”바둑판
선유는 어린이 숟가락을 잡고 순두부를 한 모금 떠서 먹었다. “할아버지가 나를 정말 예뻐해 줘요. 우리는 아주 잘 지내고 있어요. 매일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을 수 있어요!”배현수의 눈빛은 급격히 어두워졌다.“대제주시보다 낫다고?”녀석은 청경채 만두를 집어 들더니 한 입 먹고 말했다.“네! 아빠, 요즘 살이 많이 쪄서 이 뱃살 좀 봐요! 할아버지 집밥도 너무 맛있어요!”자신도 모르게 양미간을 찌푸린 배현수는 가슴이 꽉 막히는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이런 것은 대제주시에도 있어.”녀석은 즐겁게 먹으며 짧은 다리를 여유롭게 흔들었다.“그런데 엄마가 여기를 좋아해요. 엄마가 말하기를 대제주시보다 공기가 훨씬 좋다고 했어요. 성남에 왔는데 기침도 잘 안 난다면서요!”배현수는 심장이 찌릿했다.“엄마도 여기 있고 싶다고 했어?”대제주시의 가을과 겨울에는 가끔 황사가 있다. 성남 쪽의 공기가 확실히 습하고 깨끗했다.폐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은 대제주시보다 성남에서 더 살기 편하다.아직 거짓말할 줄 모르는 어린 선유는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아빠, 아빠가 차라리 할아버지 댁으로 이사 와요!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얼마나 잘해주는데요. 그리고 할아버지만 두고 가기 섭섭해요.”할아버지를 두고 가기 섭섭한 것일까, 아니면 할아버지 댁의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할까 봐 섭섭한 것일까?배현수는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보름 동안 그는 조유진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은 채 줄곧 기지에서 요양했다.조유진도 그에게 전화한 적이 없다.여기까지 생각하니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엄마가 내 얘기 한 적 있어?”순두부 국물을 얼굴에 묻히고 있는 선유는 눈을 부릅뜨더니 배현수를 애꿎게 쳐다보며 말했다.“아니요.”그래, 그렇단 말이지...보아하니 아주 즐겁게 지내는 것 같다.선유는 배현수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눈을 깜빡이며 위로의 말 한마디를 건넸다.“아빠, 사실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어요. 까먹고 말하지 못했어요.”“말해.”선유는
문을 밀고 회의실로 들어가니 고객사는 이미 도착했다.고개를 든 조유진은 순간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배현수가 그곳에 서 있었다. 안경 렌즈 뒤의 눈동자는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엄명월이 먼저 인사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은 마치 재물신을 모시는 듯했다.“배 대표님, 또 뵙네요. 어젯밤 성남에 왔는데 신라호텔에서 잘 지냈습니까?”배현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쁘지 않았어요.”잠시 후, 몇몇 회사 직원이 회의실에 들어왔다. 법무팀 직원도 있었고 에너지 부서 팀원들도 있었다.회의실에 있는 긴 테이블에 갑을 십여 명이 마주 본 채 앉았다.이때 엄명월이 물었다.“배 대표님, 뭐 드시겠습니까?”“아무거나 상관없어요.”사실 회의실 테이블에는 생수가 많이 준비되어 있다.그러나 중요한 접대 자리에서는 일반적으로 차와 커피와 같은 음료도 준비된다.조유진은 엄명월의 오른쪽에 앉았다.엄명월이 불쑥 다가와 한마디 했다.“배 대표님이 뭘 좋아하는지 아니까 탕비실에 가서 준비하세요.”조유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엄명월은 어리숙한 척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렇게 쳐다봐요? 상사의 말을 어기는 거예요? 빨리 가보세요.”조유진은 엄명월이 일부러 이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겉으로 최대한 예의를 지키며 말했다.“바로 가서 음료수 준비해 오겠습니다.”일어나서 회의실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 배현수의 눈빛은 그녀에게로 떨어지지 않았다.조유진은 옅은 색의 정장 차림이었다. 긴 다리, 균형 잡힌 몸매, 흰 피부, 정말 아름다운 각선미를 뽐냈다. 하지만 발에는 누드 색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임신한 사람이 이렇게 가는 굽을 신었다가 삐끗하기라도 하면...남자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잠시만요.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엄명월은 조용히 혼자 입꼬리를 올렸다.“네, 화장실은 나가서 오른쪽에 있습니다. 탕비실을 지나서 좀 더 가야 합니다
배현수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을 향했다. 조유진을 바라보는 눈빛은 매우 애매했다.배현수는 어색한 기색 없이 자연스럽고 여유로워 보였다.조유진은 다소 어색한 모습으로 자리로 돌아왔다.그 모습을 지켜보는 엄명월의 눈에는 은은한 미소가 묻어있었다. 잠시 후, 비로소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협상 과정은 순조로웠다.성행 그룹 법무팀은 검토를 마친 계약서를 배현수에게 건넸다.이때 계약서를 받던 서정호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엄 팀장님, 배터리 가격을 잘못 표시한 것 아닙니까? 작년에 SY그룹이 성행 그룹에서 배터리를 구매했을 때는 현재 가격보다 20만 원 낮았습니다.”엄명월의 눈빛이 반짝였다. 하지만 이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상황을 말씀드리죠. 서 비서님, 올해는 돼지고기 가격도 올랐어요. 성행 그룹에서는 올해 배터리에 또 많은 개발비용을 투자했습니다... 리튬배터리 개당 20만 원씩 오른 것은 합리적인 겁니다. 비싸지 않아요.”합리적이라고?비싸지 않다고?서정호는 가볍게 소리 내며 웃었다.“엄 팀장님, 설마 개그 하세요? 돼지고기 가격이 회사 리튬배터리 가격처럼 이렇게 터무니없이 올랐나요?”리튬배터리의 개당 단가는 20만 원이나 올랐다.SY그룹이 성행 그룹에서 리튬배터리 100만 개를 주문하려고 한다. 즉 SY그룹은 2000억 원의 가격 차이를 내면서 작년과 같은 물건을 구매해야 했다.“엄 팀장님, 아무리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해도 이건 장난이 너무 심하십니다.”엄명월을 바라보는 서정호의 눈빛은 꼭 마치 ‘지금 우리를 바보로 아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엄명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배현수를 향해 침착하게 웃었다.“배 대표님,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까?”계약서를 훑어본 배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때 책상 아래에서 하이힐이 그의 양복바지를 문질렀다.하이힐 끝이 그의 종아리를 따라 점점 위로 올라갔다. 분명 그를 꼬드기는 것이었다.배현수는 양미간을 찌푸렸다.천
이 말을 입 밖에 내자마자 엄명월의 아연실색한 눈빛이 눈에 띄었다.조유진의 차갑고 예쁜 옆모습을 보며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입꼬리가 걷잡을 수 없이 올라갔다.차가워 보이는 조유진이 고객사에게 이렇게 빨리 설명할 줄 몰랐다. 그것도 아주 정색한 얼굴로 이렇게 청산유수처럼 말이다.방금 한 말은 정말 완벽에 가까웠다.맞은편에 앉은 배현수도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분명 장난기 어린 눈매였지만 왠지 모를 압박감이 느껴져 조유진으로 하여금 몸 둘 바를 모르게 했다.조유진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배 대표님, 저는 엄 팀장님이 제시한 가격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현수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얇은 입술로 한마디 내뱉었다.“합리적이네요.”엄명월은 가슴속 깊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한 손으로 만년필을 들더니 공손히 건넸다.“배 대표, 사인 부탁드립니다.”옆에 있던 서정호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이 계약을 제지하려 했다.“배 대표님, 이건...”너무 잘 맞네요?뒤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배현수는 이미 만년필을 쥐었다. 손을 크게 휘두르더니 빠른 속도로 서명했다.엄명월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배 대표님, 역시 시원시원하십니다.”배현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조유진을 바라보았다.“엄 팀장님의 비서가 똑똑해 보이네요. 이따가 성행 그룹 좀 구경 부탁드려도 될까요?”조유진이 ‘안된다’라고 말하려 할 때 엄명월은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좋아요. 엄 비서, 이따가 배 대표님을 데리고 성행 그룹 좀 구경시켜드리세요. 배 대표님은 우리 성행 그룹의 중요한 고객입니다. 저 대신 잘 대접해 주세요.”조유진은 심호흡한 후 고개를 들었다. 만면에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엄 팀장님.”하지만 이것으로 만족할 엄명월이 아니었다.계약서를 받아든 그는 배현수에게 말했다.“참, 배 대표님. 오늘 이렇게 큰 계약, 그것도 재계약을 했
엄명월은 젊고 예쁜 처녀를 보며 아쉬워했다.“방금 배 대표님을 건드린 게 너야?”젊은 여자는 눈빛이 반짝였다.“그럼요. 엄 대표님, 대표님이 저에게 분부하셨...”엄명월은 바로 말을 끊었다.“다리는 함부로 문질러도 되지만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돼. 성행 그룹은 정식 기업이지 막돼먹은 곳이 아니야. 너 이름이 뭐였더라?”세상 물정에 어두운 소녀는 자신이 일등공신인 줄 알고 황급히 대답했다.“제 이름은 김주희라고 합니다. 엄 팀장님, 저녁 식사...”엄명월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김주희 씨, 오늘 너무 잘했어. 재무팀에 얘기할 테니 가서 정리해고 보상을 받으면 돼요.”김주희는 자리에 얼어붙었다.엄명월은 하이힐을 밟고 돌아서서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다가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참지 못하고 주의를 시키었다.“아, 참. 방금 두 번 문지른 거는 무덤까지 갖고 가는 게 좋을 거야, 입 함부로 놀리며 아무 데서나 자랑하지 말고.”“엄 팀장님이 저보고...”엄명월은 바로 선을 그었다.“내가 고객사를 꼬드기라고 시켰다고? 증거 있어? 아니면 배 대표에게 가서 고자질이라도 할래?”엄명월은 희색이 만면하여 사무실로 돌아왔다.김주희가 이런 짓을 하다니! 묘하군!2000억 원의 차액이 이렇게 쉽게 손안에 들어왔다.그녀는 벤치에 앉아 한가롭게 있다가 신라호텔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저녁에 꼭대기 층 전망이 보이는 식당 전체를 비워주세요.”“그런데 엄 팀장님, 오늘 밤 단골손님 몇 분이 자리를 예약하셨습니다. 임시로 취소하라고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엄명월은 손끝으로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누가 자리를 예약했든 취소하라고 하세요. 오늘 밤 꼭대기 층 전세 냈다고 하세요.”전화기 너머의 사장님은 초조한 듯 말했다.“중요한 분이 몇 분 계시는데...”엄명월의 목소리 옥타브가 높아졌다.“중요한 손님인지 아닌지 나와 상관있어요? 아무리 중요해도 성행 그룹보다 더 중요해요? 오늘 밤 SY 그룹의 배 대표가 사랑스러운 아내와
엄창민, 이 재수 없는 놈!일부러 좋은 기분을 망쳐 놓으려고 온 것이다!엄명월은 거액의 계약서를 집어 들고 사무실에서 매우 기뻐했다.2000억 원의 가격 차이라니!엄창민은 인간 세상에 욕망이 없는 사이비란 말인가?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 검은돈을 벌지 않으면 무슨 돈을 벌겠는가?양심까지 다 챙겨가며 돈을 벌어야 한단 말인가?특히 배현수 같은 자본 게임으로 유명해진 대자본가에게 돈은 휴짓조각에 불과했다. 그녀는 그저 좋은 마음으로 그의 자금유통을 도와준 것이다. 그 돈이 쓸데없는 돈이 되지 않게 하려고! 눈알을 휙 굴린 엄명월은 CCTV 실에 전화를 걸었다.“8층 대회의실의 CCTV를 다 꺼버려.”“네, 엄 팀장님.”...8층 대회의실, 갑을 양측의 직원들은 거의 다 자리를 떴다. 서정호는 배현수 지시로 가서 후속 작업을 하고 있었다.거대한 회의실에 조유진과 배현수만 남았다.“배 대표님, 성행 그룹을 구경시켜드릴게요.”몸을 돌리자 큰 손이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등이 그의 가슴에 닿는 순간, 조유진은 동공이 살짝 떨렸다.배현수는 그녀의 뒤에 서서 가냘픈 몸 전체를 품에 감쌌다. 창문이 은은하게 그림자를 반사했다.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의 온몸에서 냉랭하고 금욕적인 아우라가 풍겼다.조유진은 가녀린 몸이었지만 사실 키는 168센치를 넘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은 꼭 마치 작은 새 같았다.남녀는 체형 차이가 많이 났지만 눈에 띄게 잘 어울렸다.뼈마디가 뚜렷한 남성은 큰 손으로 그녀의 가는 허리를 살짝 잡고 힘을 주더니 그녀의 허리와 엉덩이를 그의 아랫배에 대고 눌렀다.모든 행동에는 강함과 부드러움이 한데 섞여 있었다. 두 사람은 빈틈이 없을 정도로 밀착했다.조유진은 허리춤에 잡힌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이때 뜨거운 키스가 그녀의 귓불을 파고들었다. 가랑비처럼 촘촘하고 부드럽게 퍼졌다.“배현수...!”그녀의 부름에 남자의 목구멍에서 나지막한 농담이 흘러나왔다.“왜 배 대표라고 부르지 않아?”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조유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누군가가 하이힐로 문질렀다고?조유진은 피식 웃었다.“하이힐로 문지른 사람은 내가 아니네요. 배 대표님,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조유진은 손을 뻗어 배현수를 밀쳤다.그의 품에서 살짝 떨어지자마자 그에게 잡혔다.남자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의심스러운 듯 말했다.“네가 아니라고?”조유진 말고 누가 감히 하이힐 구두로 그의 다리를 문지르겠는가?조유진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진짜 나 아니에요. 배 대표님, 미팅 자리에서 구두로 고객사 대표의 다리를 문지를 만큼 그렇게 심심하지 않아요.”배현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미간은 점점 더 찡그려졌다.조유진인 줄 알고 마음껏 문지르도록 내버려 뒀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배현수의 눈빛은 음험하고 혐오스럽게 변했다.신발이 양복바지 위를 문질렀지만 목구멍에는 파리가 끼인 것처럼 속이 메스꺼웠다.손가락 마디마디의 뼈가 보일 만큼 주먹을 꽉 쥐었다.다시 정신을 차린 조유진은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갔다.“배 대표님, 따지려면 엄 팀장님을 찾아가세요. 하지면 계약서에 이미 사인까지 했으니 계약을 무르려면 위약금을 물어야 할 것 같네요.”엄명월은 방금 일부러 그녀를 이용했다.그러니 한 번쯤 역습하는 것이 그리 과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배현수의 얼굴은 얼어붙은 듯 차가웠다.“배 대표님, 엄 팀장님 사무실은 9층에 있습니다. 안내해 드리죠.”가서 따지라고?물론 조유진은 이 단어를 말하지 않았다....9층 사무실.엄명월은 대박을 터뜨린 기쁨에 잠겨있었다. 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엄 팀장님, 배 대표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미친, 조유진 이 여자, 복수심이 대단하네! 이렇게 빨리 역습하다니?’사무실 문이 열리자 조유진은 배현수에게 안으로 들어가라는 포즈를 취했다.배현수가 들어가자 조유진은 공손하게 웃으며 말했다.“배 대표님, 그럼 엄 팀장님과 얘기 잘 나누세요. 저는 이만 다른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습니다.”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