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입 밖에 내자마자 엄명월의 아연실색한 눈빛이 눈에 띄었다.조유진의 차갑고 예쁜 옆모습을 보며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입꼬리가 걷잡을 수 없이 올라갔다.차가워 보이는 조유진이 고객사에게 이렇게 빨리 설명할 줄 몰랐다. 그것도 아주 정색한 얼굴로 이렇게 청산유수처럼 말이다.방금 한 말은 정말 완벽에 가까웠다.맞은편에 앉은 배현수도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분명 장난기 어린 눈매였지만 왠지 모를 압박감이 느껴져 조유진으로 하여금 몸 둘 바를 모르게 했다.조유진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배 대표님, 저는 엄 팀장님이 제시한 가격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현수는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얇은 입술로 한마디 내뱉었다.“합리적이네요.”엄명월은 가슴속 깊은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한 손으로 만년필을 들더니 공손히 건넸다.“배 대표, 사인 부탁드립니다.”옆에 있던 서정호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이 계약을 제지하려 했다.“배 대표님, 이건...”너무 잘 맞네요?뒤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배현수는 이미 만년필을 쥐었다. 손을 크게 휘두르더니 빠른 속도로 서명했다.엄명월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배 대표님, 역시 시원시원하십니다.”배현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조유진을 바라보았다.“엄 팀장님의 비서가 똑똑해 보이네요. 이따가 성행 그룹 좀 구경 부탁드려도 될까요?”조유진이 ‘안된다’라고 말하려 할 때 엄명월은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좋아요. 엄 비서, 이따가 배 대표님을 데리고 성행 그룹 좀 구경시켜드리세요. 배 대표님은 우리 성행 그룹의 중요한 고객입니다. 저 대신 잘 대접해 주세요.”조유진은 심호흡한 후 고개를 들었다. 만면에 웃음을 띠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엄 팀장님.”하지만 이것으로 만족할 엄명월이 아니었다.계약서를 받아든 그는 배현수에게 말했다.“참, 배 대표님. 오늘 이렇게 큰 계약, 그것도 재계약을 했
엄명월은 젊고 예쁜 처녀를 보며 아쉬워했다.“방금 배 대표님을 건드린 게 너야?”젊은 여자는 눈빛이 반짝였다.“그럼요. 엄 대표님, 대표님이 저에게 분부하셨...”엄명월은 바로 말을 끊었다.“다리는 함부로 문질러도 되지만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돼. 성행 그룹은 정식 기업이지 막돼먹은 곳이 아니야. 너 이름이 뭐였더라?”세상 물정에 어두운 소녀는 자신이 일등공신인 줄 알고 황급히 대답했다.“제 이름은 김주희라고 합니다. 엄 팀장님, 저녁 식사...”엄명월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김주희 씨, 오늘 너무 잘했어. 재무팀에 얘기할 테니 가서 정리해고 보상을 받으면 돼요.”김주희는 자리에 얼어붙었다.엄명월은 하이힐을 밟고 돌아서서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다가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참지 못하고 주의를 시키었다.“아, 참. 방금 두 번 문지른 거는 무덤까지 갖고 가는 게 좋을 거야, 입 함부로 놀리며 아무 데서나 자랑하지 말고.”“엄 팀장님이 저보고...”엄명월은 바로 선을 그었다.“내가 고객사를 꼬드기라고 시켰다고? 증거 있어? 아니면 배 대표에게 가서 고자질이라도 할래?”엄명월은 희색이 만면하여 사무실로 돌아왔다.김주희가 이런 짓을 하다니! 묘하군!2000억 원의 차액이 이렇게 쉽게 손안에 들어왔다.그녀는 벤치에 앉아 한가롭게 있다가 신라호텔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저녁에 꼭대기 층 전망이 보이는 식당 전체를 비워주세요.”“그런데 엄 팀장님, 오늘 밤 단골손님 몇 분이 자리를 예약하셨습니다. 임시로 취소하라고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엄명월은 손끝으로 테이블을 치며 말했다.“누가 자리를 예약했든 취소하라고 하세요. 오늘 밤 꼭대기 층 전세 냈다고 하세요.”전화기 너머의 사장님은 초조한 듯 말했다.“중요한 분이 몇 분 계시는데...”엄명월의 목소리 옥타브가 높아졌다.“중요한 손님인지 아닌지 나와 상관있어요? 아무리 중요해도 성행 그룹보다 더 중요해요? 오늘 밤 SY 그룹의 배 대표가 사랑스러운 아내와
엄창민, 이 재수 없는 놈!일부러 좋은 기분을 망쳐 놓으려고 온 것이다!엄명월은 거액의 계약서를 집어 들고 사무실에서 매우 기뻐했다.2000억 원의 가격 차이라니!엄창민은 인간 세상에 욕망이 없는 사이비란 말인가?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 검은돈을 벌지 않으면 무슨 돈을 벌겠는가?양심까지 다 챙겨가며 돈을 벌어야 한단 말인가?특히 배현수 같은 자본 게임으로 유명해진 대자본가에게 돈은 휴짓조각에 불과했다. 그녀는 그저 좋은 마음으로 그의 자금유통을 도와준 것이다. 그 돈이 쓸데없는 돈이 되지 않게 하려고! 눈알을 휙 굴린 엄명월은 CCTV 실에 전화를 걸었다.“8층 대회의실의 CCTV를 다 꺼버려.”“네, 엄 팀장님.”...8층 대회의실, 갑을 양측의 직원들은 거의 다 자리를 떴다. 서정호는 배현수 지시로 가서 후속 작업을 하고 있었다.거대한 회의실에 조유진과 배현수만 남았다.“배 대표님, 성행 그룹을 구경시켜드릴게요.”몸을 돌리자 큰 손이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등이 그의 가슴에 닿는 순간, 조유진은 동공이 살짝 떨렸다.배현수는 그녀의 뒤에 서서 가냘픈 몸 전체를 품에 감쌌다. 창문이 은은하게 그림자를 반사했다.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남자의 온몸에서 냉랭하고 금욕적인 아우라가 풍겼다.조유진은 가녀린 몸이었지만 사실 키는 168센치를 넘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은 꼭 마치 작은 새 같았다.남녀는 체형 차이가 많이 났지만 눈에 띄게 잘 어울렸다.뼈마디가 뚜렷한 남성은 큰 손으로 그녀의 가는 허리를 살짝 잡고 힘을 주더니 그녀의 허리와 엉덩이를 그의 아랫배에 대고 눌렀다.모든 행동에는 강함과 부드러움이 한데 섞여 있었다. 두 사람은 빈틈이 없을 정도로 밀착했다.조유진은 허리춤에 잡힌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이때 뜨거운 키스가 그녀의 귓불을 파고들었다. 가랑비처럼 촘촘하고 부드럽게 퍼졌다.“배현수...!”그녀의 부름에 남자의 목구멍에서 나지막한 농담이 흘러나왔다.“왜 배 대표라고 부르지 않아?”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조유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누군가가 하이힐로 문질렀다고?조유진은 피식 웃었다.“하이힐로 문지른 사람은 내가 아니네요. 배 대표님,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조유진은 손을 뻗어 배현수를 밀쳤다.그의 품에서 살짝 떨어지자마자 그에게 잡혔다.남자는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의심스러운 듯 말했다.“네가 아니라고?”조유진 말고 누가 감히 하이힐 구두로 그의 다리를 문지르겠는가?조유진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진짜 나 아니에요. 배 대표님, 미팅 자리에서 구두로 고객사 대표의 다리를 문지를 만큼 그렇게 심심하지 않아요.”배현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미간은 점점 더 찡그려졌다.조유진인 줄 알고 마음껏 문지르도록 내버려 뒀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배현수의 눈빛은 음험하고 혐오스럽게 변했다.신발이 양복바지 위를 문질렀지만 목구멍에는 파리가 끼인 것처럼 속이 메스꺼웠다.손가락 마디마디의 뼈가 보일 만큼 주먹을 꽉 쥐었다.다시 정신을 차린 조유진은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갔다.“배 대표님, 따지려면 엄 팀장님을 찾아가세요. 하지면 계약서에 이미 사인까지 했으니 계약을 무르려면 위약금을 물어야 할 것 같네요.”엄명월은 방금 일부러 그녀를 이용했다.그러니 한 번쯤 역습하는 것이 그리 과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배현수의 얼굴은 얼어붙은 듯 차가웠다.“배 대표님, 엄 팀장님 사무실은 9층에 있습니다. 안내해 드리죠.”가서 따지라고?물론 조유진은 이 단어를 말하지 않았다....9층 사무실.엄명월은 대박을 터뜨린 기쁨에 잠겨있었다. 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엄 팀장님, 배 대표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미친, 조유진 이 여자, 복수심이 대단하네! 이렇게 빨리 역습하다니?’사무실 문이 열리자 조유진은 배현수에게 안으로 들어가라는 포즈를 취했다.배현수가 들어가자 조유진은 공손하게 웃으며 말했다.“배 대표님, 그럼 엄 팀장님과 얘기 잘 나누세요. 저는 이만 다른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습니다.”엄명
...배현수가 떠나자마자 사무실에 있던 엄명월이 소리쳤다.“엄환희!”입구에 앉아 업무를 보던 조유진은 의아한 얼굴로 걸어 들어왔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엄명월을 바라보며 말했다.“엄 팀장님, 명이 기네요. 어디도 다치지 않은 것을 보니.”엄명월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렸다.“일부러 그랬죠? 계약서에 금방 사인했어요. 배 대표가 혹시라도 계약을 파기하면...”앞에 서 있는 조유진은 입을 달싹였다.“엄 팀장님, 팀장님이 먼저 그렇게 행동하셨어요. 그저 그대로 돌려드린 것뿐입니다.”“하...”엄명월은 씩 웃었다.그제서야 조유진을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했다.그래... 그렇단 말이지...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인 줄 알고 한참 놀렸는데 결국에는 엄명월이 얕잡아 본 것이다.조유진은 말문이 막혔다. 웃음을 참으며 한마디 했다.“엄 팀장님이 저를 이용한다면 저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죠.”엄명월은 한참을 참다가 겨우 대답했다.“그래요. 훌륭해요!”조유진은 그녀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며 가느다란 손가락을 움직였다.엄명월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바닥을 힐끗 쳐다봤다.“또 뭐예요?”“방금 SY그룹과의 계약은 저와의 관계 때문에 성사된 거잖아요. 2000억 원의 차액을 엄 팀장님은 어떻게 나눌 생각인가요?”‘그래, 좋아. 계산이 이렇게 빠르단 말이지. 조유진, 이 여자가 엄창민 그 목탁머리보다 훨씬 재미있는 것 같네...’엄명월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20%?조유진은 뻗은 손을 거두지 않은 채 손바닥을 내밀었다. 50%라는 뜻이다.엄명월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욕심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50%?”“엄 팀장님만큼이야 하겠어요? SY그룹에 2000억 원이라는 바가지까지 씌울 만큼이요. 김주희를 시켜 고객사를 꼬시려고 한 일은 외부에 발설하지 않을게요. 물론 엄 팀장의 성의를 보고 판단할 거예요. 만약 엄 팀장님이 김주희를 시켰다는 것을 배 대표님이 알면...”엄명월의 얼굴에 싸늘한 웃음이 번졌다.좋은 장기
엄명월 코웃음을 쳤다.“비서 하나 누가 아까워해요? 본인이 뭐...”장난기 가득한 조유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리도 좋고 일도 시원시원하고 눈치도 잘 보는 전임 비서가 생각났다.그런데... 갑자기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떠난 그달의 월급도 아직 그에게 정산되지 않았다.이 자식, 어느 회사의 높은 연봉에 홀려 도망갔는지도 모른다. 만약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바로 가서 귀를 비틀어 버릴 것이다.엄명월은 일을 제쳐두고 도망가 본인이 뒤치다꺼리해야 하는 부하 직원을 가장 싫어한다.엄명월이 넋을 잃은 모습에 조유진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엄 팀장님? 1000억 원, 제 월급 카드에 송금하는 것을 잊지 마세요.”엄명월은 바로 정신을 차렸다.“저기요! 현금 1000억 원이 어디 있어요? SY그룹과 거래하는 자금이 내 주머니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미친! 이 프로젝트 진행해도 연말 배당금이 1000억 원이 안 돼요! 그런데 내가 왜 1000 억 원을 줘야 하는데요?”조유진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한마디 했다.“엄 팀장님, 말에 책임을 지셔야죠. 비서와의 약속도 번복하는데 앞으로 성행 그룹에서 어떻게 발을 붙이시겠습니까?”엄명월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나에게 1000억의 현금이 어디 있겠어요? 가서 엄 어르신에게 달라고 하세요! 이 돈은 회사 재무팀에 들어간 것이지 나 엄명월 주머니에 들어간 것이 아니에요! 미친... 엄환희 씨, 당장 돌아와요!”조유진을 호구로 알고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오후 비즈니스 협상테이블에서 조유진과 짜고 SY그룹에 바가지를 씌움으로써 2000억이 넘는 마진을 보게 되었다. 기쁨에 겨운 나머지 조유진에게 절반의 금액을 주겠다고 약속해 버린 것이다!하지만 마진 2000억이 엄명월의 개인 계좌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설마 사비를 털어 비서에게 상이라도 줘야 한단 말인가?엄명월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성행 집단 전체의 실질적 지배자이자 수혜자는 엄준이다. 엄준의 유일한 후계자는 엄환희이다.엄
...저녁.조유진은 엄명월을 따라 신라호텔로 가 꼭대기 층에 있는 전망이 좋은 식당에 도착했다. 엄명월은 배가 아프다며 조유진을 자리에 혼자 남겨두었다.잠시 후, 엄명월의 꿍꿍이 수작을 알아차린 조유진은 자리를 뜨기 위해 말했다.“배 대표님, 엄 팀장님이 갑자기 생리 중이라고 저더러 생리대를 사달라고 하네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어설프고 합리적인 이유를 꾸며대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할 때 뒤에 있는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배현수는 뒤에 서서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엄 팀장님, 안 올 거야.”조유진은 어색하게 웃었다.“설마 변기에 빠진 거 아닐까요? 그럼 내가 가서...”“유진아.”배현수는 굳은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얼굴은 매우 엄숙해 보였다.“성남에 온 이후로 너 계속 나를 피해. 전에 선유와 스위스로 가라고 한 것은 내가 잘못했어. 숨기지 말았어야 했는데... 저번에 서로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지난 보름 동안 충분히 시간을 줬어. 성남에 오래 있다 보니 나라는 사람마저 잊어버린 것 아니야?”조유진은 달싹이더니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배현수는 그녀의 턱을 잡고 억지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강경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얘기해봐.”냉전 때마다 조유진은 배현수를 공기처럼 무시했다. 남들과는 정상적으로 웃고 떠들었고 엄명월과도 여러 번 눈을 마주쳤다.배현수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 시큰시큰했다.조유진에게 이틀 가까이 무시당하니 그동안의 인내심은 싹 사라졌다.그녀를 뼛속까지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솟구쳤다. 그녀의 왼손을 감싼 후, 창가에 누르더니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키스하려고 했다.보름 만에 만났다. 배현수라는 사람을 잊었다면 다시 기억을 되살려주는 것도 괜찮았다.품에 안긴 조유진은 쓸데없이 몸부림치는 작은 새처럼 보였다.그녀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문득 손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느껴졌다. 커플링과 핑크 다이아몬드를 착용하지 않았다.배현수는 고개를 숙이고 물었다.“반지는? 왜 안 꼈어”
“웁...”배현수가 홱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무거운 키스가 그녀의 입술과 입안을 파고들었다. 심한 키스에 조유진은 거의 탈진 상태였다.그는 자기의 품에 조유진을 완전히 감싸 안았다. 하이힐을 신은 탓에 한동안 똑바로 서 있지 못했다.배현수는 그녀의 허리를 받쳐줬다. 키스가 끝난 후에야 그녀를 놓아줬다. 눈물이 그렁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내 신용 자질을 재점검하고 싶은 것은 얼마든지 가능해. 하지만 유진아, 날 버리려고 하는 것은 안 돼.”낮은 그의 목소리는 살짝 잠겨있었고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강했다.조유진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배현수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덥석 올려 들었다.여기는 식당이다. 비록 사람이 없지만 깊은 얘기를 하기에는 곤란했다.테이블 위의 음식도 얼마 먹지 않았다.배현수는 이미 조유진을 안고 꼭대기 층 전망식당을 나와 9층 스위트룸으로 향했다.방에 도착한 후, 조유진은 두 발이 땅에 떨어지자마자 떠날 생각을 했다.하지만 배현수에게 붙잡혔고 침대에 옮겨졌다. 배현수는 얼굴을 찌푸렸다.“제대로 앉아.”남자는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던지더니 넥타이도 풀어헤쳐 한쪽으로 내팽개쳤다.셔츠 단추가 두 개 풀렸다.플래티넘 커프스도 협탁에 놓았다.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자 굵고 매끄러운 팔이 드러났다.온몸의 우울함이 이제야 조금 사라지는 듯했다.조유진은 침대 옆에 앉아 있었고 그는 그녀 앞에 섰다.“방금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는데 오늘 밤 다 말하고 가.”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억지를 부릴 수 있단 말인가?조유진은 심호흡한 후 한마디 했다.“할 말 없어요. 10시가 다 됐어요. 안 돌아가면 아빠가 걱정하실 거예요.”그녀의 치졸한 변명에 배현수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그녀의 발에 있는 하이힐에 시선이 옮겨졌다. 낮은 한숨을 내쉬더니 몸을 숙였다.한쪽 무릎을 꿇더니 그녀의 발목을 잡고 발에 있는 하이힐을 벗겼다.살며시 안아 침대에 옆에 기대게 해주었다.배현수는 옆 의자를 끌어당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