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유진이 미처 답장하기도 전에 남초윤에게서 음성통화가 걸려왔다.“여보세요? 유진아. 배현수가 너에게 웨딩드레스까지 사줬는데 왜 실검에는 네가 배현수에게 차였다는 기사가 떴어? 어떻게 된 거야?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어. 어젯밤에 배현수가 괴롭혔어?”순간 조유진은 어리둥절했다. 괴롭혔다고?관계를 갖는 게 괴롭힘이라고 하면... 어젯밤 그는 정말 심각하게 그녀를 괴롭혔다. 장미 향의 콘돔이 아직도 머릿속에 또렷이 남을 정도로...남초윤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아침 일찍 실검에 들어가 보니 네가 배현수에게 차여서 울면서 붙잡는 사진이 있더라고.”순간 조유진은 가슴이 두근거렸다.“그럼... 그 사적인 스킨십 장면도 다 찍혔어?”그 말에 남초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떤 스킨십인데? 수위가...?”“어떻게 배현수와 관계 갖는 사진까지 찍을 수 있어? 그것도 SNS에 올렸다고?”몇 초 동안 멍하니 있던 남초윤은 그제야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다.“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아직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조유진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이런 게 사생활 침해 아니야? 고소할 수 있지?”사무실에 있는 남초윤은 하마터면 배를 끌어안고 폭소를 터뜨릴 뻔했다.“그러니까 실검에서 배현수가 너를 찼다는 게 가짜란 말이지? 어제 꽤 뜨거운 밤을 보냈나 봐?”배현수가 조유진을 울렸다고?조유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누가 누구에게 차였다는 거야? 도대체 무슨 말인데?”남초윤은 계속 웃으며 말했다.“네가 직접 실검에 들어가서 봐봐. 그런데 유진아, 그동안 네가 아주 순수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엉큼하네?”음성통화를 끊은 후, SNS에 들어간 조유진은 배현수와 관련된 연관 검색어를 여러 개 발견했다.[SY그룹 배현수 대표. 글로벌 하버에 깜짝 등장, 사망 소식 허위 확인][SY 주가가 하루아침에 폭등][배현수, 첫사랑과 결별]앞의 두 검색어는 사실이었기에 이상한 점이 없었다. 어젯밤, 두 사람이 데이트를 나가기 전, 배현수가
[두 사람은 헤어져라! 배 대표님은 송인아 씨와 다시 만납시다! 우리 송인아 씨는 절대 남자 친구를 감옥에 보내지 않을 거예요! 비즈니스 거물 vs 여자 톱스타! 세기의 결혼! 추진! 추진!]...넋을 잃은 채 악플을 보고 있던 조유진은 남초윤이 보낸 메시지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지금 누리꾼들 정말 오지랖이 넓어. 남의 일까지 다 참견하고! 배현수가 누구와 있든 본인들과 무슨 상관인데? 송인아 씨 팬들도 웃기네? 이참에 배현수와 다시 어떻게 해보려는 심산인데? 유진아. 너의 SNS 계정에 웨딩드레스 사진을 올려버려! 팬들이 열 받아 죽게!]조유진은 한숨을 푹 내쉰 후, 전화기를 들어 답장했다.[안 그래도 인터넷에 평판이 안 좋은 마당에 웨딩드레스 사진까지 올려봐? 내가 배현수와 재결합했다고 하면 송인아의 팬들이 가만히 있겠어? 분명 배현수에게 화풀이하면서 SY그룹에까지 피해를 주겠지.][그럼 송인아의 팬들이 너를 욕하는 거 보고만 있을 거야? 보니까 이런 악플들 대다수가 송인아의 뇌절 팬들이 쓴 것 같던데. 송인아가 뭔데? 본인이 진짜로 배현수의 약혼녀인 줄 아는 거야? 깨진 거울을 다시 붙인다고? 깨질 거울이라도 있긴 있어? 시작도 끝도 없었는데 다시 만난다는 얘기는 또 뭐야? 열 받아 죽겠네!]조유진은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잠시 침묵에 빠졌다.이런 악플에 조금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솔직히 말해서 배현수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웨딩드레스를 선물했지만 프러포즈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적어도 당분간, 배현수는 그녀와 결혼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조유진도 이 부분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사실 이 점이 제일 의아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남초윤에게 물었다.[내 친구가 있는데... 전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났대. 두 사람 다 결혼할 나이가 됐는데 남자가 결혼할 생각이 없는 것 같대. 여자를 떠보려는 걸까?][??? 배현수가 너를 울렸는데도 너와 결혼하지 않겠대? 완전히 쓰레기네?!][..
SY그룹, 회의실 안.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임원 회의가 방금 끝났다.어떤 사람은 배현수의 능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배현수가 실종 당시, 사람들은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홍보팀에서는 최대한 외부에 소식이 퍼지지 않도록 막으려 했다. 하지만 배후에서 움직이는 그 상대를 통해 밝혀지는 바람에 얼마 전 SY의 주가는 한동안 바닥을 쳤다.조유진이 회사 일에 개입하자 불만을 품고 있던 대주주들은 주식이 바닥을 치기 전, 아예 팔아치워 버렸다.그러다 보니 그 지분은 예외 없이 배현수에게 돌아갔다.이런 수법은 월가에서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었다.마지막까지 주식을 꼭 쥐고 있다가 팔지 않은 대주주들은 손에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배현수가 사고 나기 전, 그의 명의로 되어 있는 주식은 45% 정도였다. 하지만 한차례의 큰 풍파가 지나가자 그의 주식은 55%로 늘었다. 그중 10%가 넘는 주식은 사람들이 헐값에 매각하면서 사들인 것이었다. 어젯밤, 조유진과 글로벌 하버에서의 데이트 사진이 공개된 후, 회사 홍보팀에서는 각 매체를 통해 배현수가 죽지 않았다는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그러다 보니 오늘 아침 SY그룹의 주가는 무려 9포인트나 반등했다.어떤 임원들은 배현수가 의도적으로 그런 것 아니냐고 추측하기도 했다. 홍보팀 팀장 박상민은 어젯밤 각 언론 매체들과 한바탕 여론 전쟁을 치른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었다.“배 대표님, 이런 기사가 한 번 더 나와주면 주가가 10%는 더 뛸 수 있을 것 같아요.”고개를 들어 배현수의 안색을 살피던 서정호는 박상민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박 팀장님, 어제 홍보팀에서 언론 기자들과 여론전을 펼치느라 너무 수고했어요.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왔네요. 점심시간이 다 되었으니 얼른 점심 드시고 좀 쉬세요. 그래야 다시 정신을 바짝 차려 일하죠.”하지만 한창 신이 난 박상민은 서정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안 그래도 지금 여론이 한창 좋을 때인데 생각이 없는 송인아는 트위터에 다이아몬드 반지 사진까지 올렸더라고요
만약 사실이라면 박상민은 정말 이 기회를 잘 이용하려고 할 것이다.옆에 있던 서정호는 배현수를 힐끗 바라봤다.남자의 눈빛은 음험하기 짝이 없었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기운마저 잔뜩 감돌았다.서정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박상민 이 인간은 기사화될 좋은 건수들도 많은데 하필이면 배 대표의 사생활 감정을 이용하려 하고 있으니... 그러다 보니 조유진까지 여론에 오르내리게 되었고 사람들의 표적이 되었다.배현수의 눈에 차갑고 경멸스러운 감정이 가득 감돌았다. 그런 도도한 눈빛은 저도 모르게 주위 사람을 압박했다.“조햇살을 이용해 사이버폭력을 가하는 것도 박 팀장이 계획한 여론 홍보인가요? 한번 말해봐요. 또 어떤 방법을 더 생각하고 있는지. 내가 어느 장단에 맞춰서 춤을 추면 될까요?”배현수가 내뱉는 한 글자 한마디는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온몸이 으스스 떨리게 했다. 박상민은 그제야 말을 잘못했음을 깨달았다.“배 대표님, 조햇살과 글로벌 하버에서 헤어지는 사진은 공개되자마자 누리꾼들의 동시다발적인 호응을 받았습니다. 송인아는 계획에 없었던 겁니다. 갑자기 이렇게 나타날 줄 몰랐어요.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네티즌들이 조햇살에게 한 말들이 사이버폭력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한동안 인터넷에 떠도는 욕설은 감수해야겠죠. 하지만 인터넷은 기억이 없어요. 이 열기가 식으면 조햇살은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차마 들을 수 없었던 서정호는 눈을 꼭 감으며 말했다.“박 팀장님, 그만 좀 닥치세요.”‘닥치지 않으면 내일 이 회사에 출근 못 할 수도 있어요!’ 입꼬리만 올리며 웃는 배현수의 얼굴은 차갑기 그지없었다.“누가 조햇살과 헤어졌다고 했어요? 그리고 내가 송인아와 사귀었다고요? 증거는요?”그럼 아니란 말인가?박상민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조용히 배현수를 바라봤다.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배, 배 대표님... 조햇살과의 결별 소식이 전해지자 주가가 바로 올라가서
만약 이번 여론전에서 조유진을 단순히 숨기려만 한다면 그 효과는 크지 않을 것이다. 누리꾼들이 잠잠해지는 데 시간이 걸린다.만약 조유진과의 관계를 정식으로 공개하면 적들의 함정에 빠져 또다시 SY를 부정적인 여론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거짓 증언을 한 사람이 설사 강요로 한 행동이라고 해도 기정사실로 된 사건의 전말은 어떻게든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배현수와의 의지와 별개로 바깥사람들에게 조유진은 그렇게 긍정적인 존재가 아니었다.미간을 잔뜩 찌푸린 배현수는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서정호는 배현수의 생각을 대충 짐작했다.“배 대표님, 지금쯤 아마 드래곤 파에서도 저희 행동을 눈여겨보고 있을 겁니다. 만약 한 발이라도 잘못 내디디면 오히려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조유진 씨도 사리에 밝은 사람이니 분명 대표님을 이해할 거예요.”홍보팀의 박상민이 꼼수를 부리긴 했지만 이번 수법으로 부정적인 여론에 휩싸였던 SY그룹의 상황을 단숨에 반전시켰다.단 한방으로 승리한 셈이다.서정호의 말을 들은 배현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조롱 섞인 어조로 말했다.“오늘 아침에 웨딩드레스를 선물했어. 그런데 반나절도 안 돼서 외부에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반박기사를 낼까? 유진이가 너그러운 사람이니까 이런 것도 다 감수해야 하는 거야?”침을 꿀꺽 삼킨 서정호는 잠자코 가만히 있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눈을 꼭 감은 배현수의 눈시울은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피식 웃으며 한마디 했다.“내가 얼마나 원망스러울까?”“아니... 아니에요. 조유진 씨가 그렇게 억지 부릴 사람은 아니에요.”‘하지만 완전히 실망하겠죠.’물론 이번 기회를 빌려 그녀가 자발적으로 대제주시를 떠날 수 있게 한다면 이것도 어쩌면 그의 계획에 있던 것이 아닌가?배현수는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들을 머릿속에 계산하고 있었다.SY의 주가 하락은 계획의 일환이었다.글로벌 하버 데이트 사진도 그중 하나였다. 몰래 결별설이 불거지게 하기 위해서였다.그런 포즈를 일부적으로 취하지 않으면 누가
립스틱을 바르자 조유진의 얼굴은 순식간에 화사해 보였다.선유 역시 초롱초롱한 눈을 똑바로 뜨고 작은 팔로 조유진을 끌어안으며 말했다.“엄마, 너무 예뻐. 나와 결혼해 줄래?”그러자 옆에 있던 장은숙이 웃으며 말했다.“엄마는 아빠에게 시집가야 하는데 어떻게 너와 결혼해? 네가 화동하면 되겠네.”그 말에 선유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화동이 뭐예요?”“화동은 말이지... 너의 엄마와 아빠 결혼식 때 앞에서 꽃을 뿌려주는 아이들이야.”전신거울 속 웨딩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던 조유진은 곧 배현수를 만나러 나갈 생각에 왠지 모르게 긴장되었다.럭셔리한 웨딩드레스에 잠깐이나마 배현수와 결혼한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장은숙과 선유가 조유진의 뒤에서 드레스 자락을 들어줬다.조유진은 계단 손잡이를 잡고 한 계단씩 아래로 내려갔다.소파에 앉아 있던 배현수는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그쪽으로 돌렸다.선유는 어디에서 갖고 왔는지 장미 꽃잎 한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녀석은 작은 손으로 꽃잎을 움켜쥐고 허공에 뿌리며 외쳤다.“신부 입장!”분홍색 장미 꽃잎이 바닥에 가득 떨어졌다.눈이 마주친 배현수는 마치 진짜로 신부를 맞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조유진은 웨딩드레스 치맛자락 한끝을 들고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그에게 걸어갔다.분명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이 몇십 초라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머리 위에 신부 왕관을 썼더라면 완벽에 완벽을 가했을 것이다. 조유진이 가까이 다가오자 배현수는 순간순간을 놓칠세라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그윽하고 은은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뜨거운 시선에 조유진은 저도 모르게 쑥스러워 웨딩드레스를 위로 올리며 물었다.“예뻐요?”“응. 예뻐.”조유진은 살면서 처음으로 웨딩드레스를 입었다.배현수 또한 웨딩드레스를 입은 조유진을 처음 봤다.어디 예쁘기만 하겠는가?배현수의 눈빛에 놀라운 기색이 역력했다.선유가 뛰어오더니 조유진과 배현수의 손을
뜨거운 기운이 조유진의 온몸을 감쌌다.배현수는 큰 손으로 그녀의 뛰는 심장을 어루만졌고 조유진은 숨을 헐떡였다.통제 불능인 상태에 다다랐을 때, 한 손으로 배현수의 목을 껴안은 조유진은 마지막 남은 정신줄을 억지로 붙잡고 버텼다. 그러고는 근육 라인이 선명한 그의 손목을 잡고 천천히 눈을 떠 그를 바라보았다.“배현수.”한껏 달아오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그녀의 부름이었다.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배현수는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그만하라고? 일부러 나를 괴롭히는 거야?”배현수가 다가와 그녀에게 키스하려 했다.그러자 조유진은 얼굴을 옆으로 피하며 말했다.“물어볼 게 있어요.”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배현수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뭔데?”“송인아가 트위터에 올린 다이아몬드 반지, 현수 씨가 선물한 거예요?”“아니.”이런 그의 대답이 사실 놀랍지 않았다.조유진도 송인아가 트위터에 올린 다이아몬드 반지가 배현수가 선물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큰 다이아몬드는 배현수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고급 보석 연구에 취미가 있는 남초윤은 송인아가 올린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고 한눈에 가짜임을 알아챘다. 진품 로트 넘버는 한국에 없기 때문이다.그렇게 큰 빨간 보석은 전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았다.설사 배현수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했다고 해도 가짜를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조유진의 이 물음은 다른 것들을 물어보기 위해 배현수를 떠보는 것이었다. 그녀가 정말 묻고 싶은 것은 송인아가 아니었다.배현수의 다리 위에 앉아 있는 조유진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말했다.“외부에 나와의 관계를 공개하고 결혼할 거라고 말하면 SY그룹에 분명 안 좋은 영향이 있는 거죠?”조유진은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누리꾼들이 자기에 대한 평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거짓 증언을 해서 무죄인 사람을 감옥에 보낸 그녀에게 누가 좋은 말을 해주겠는가?아마 평생 이 꼬리표를 떼지 못할 것이다. 이 꼬리표는 그녀가 직접 자신에게 붙인 것이다.
세상의 이목은 아랑곳하지 않아도 되지만 만약 그런 이목이 SY그룹과 배현수에게 상처를 준다면 조유진은 결코 편안한 마음으로 그의 곁에 있을 수 없었다.여기까지 생각한 조유진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가끔은 정말로 7년 전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 작은 셋방에 다시 살고 싶어요. 그때의 배현수는 아무 걱정도 없이 조유진을 사랑할 수 있었고... 그때의 결백한 조유진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당당하게 살 수 있었으니까.”그땐 아무도 조유진이 배현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대제주시 방송학과의 퀸카 조유진, 대제주시 법학과 수재 배현수, 두 사람 모두 한없이 빛나는 앞날을 기약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의 조유진은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배현수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가 아니라 조유진에게 거짓 증언의 딱지가 붙어 뗄 수 없기 때문이었다.배현수는 늘 멘탈을 붙잡고 이성을 유지하려 했지만 막상 조유진을 밀어내려고 하니 마음이 한없이 약해졌다.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모르는 배현수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며 한마디 했다.“적어도 나에게 너는 절대 부정적인 존재가 아니야. 유진아, 네가 있어서 내 인생도 가치가 있는 거야.”눈시울이 붉어진 조유진은 웃으며 말했다.“그럼 나와 결혼해 줄래요? 배현수 씨?”‘얼마든지.’마음속으로 열 번 넘게 하는 말이었지만 쉽게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그에게 쓸데없는 세상의 이목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배현수가 원한다면 그 여자가 살인범이어도 상관이 없었다.조유진의 그까짓 죄명은 그만 용서해 주면 그만이다. 세상 사람들이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다.하지만 조유진이 죽어가는 사람과 결혼하게 할 수는 없었다.배현수는 눈을 꼭 감고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나는 할 수 없어.”그녀를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할 수 없는 것이다.조유진도 그리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배현수를 원망하지도 않았다.목이 꽉 막힌 조유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