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기운이 조유진의 온몸을 감쌌다.배현수는 큰 손으로 그녀의 뛰는 심장을 어루만졌고 조유진은 숨을 헐떡였다.통제 불능인 상태에 다다랐을 때, 한 손으로 배현수의 목을 껴안은 조유진은 마지막 남은 정신줄을 억지로 붙잡고 버텼다. 그러고는 근육 라인이 선명한 그의 손목을 잡고 천천히 눈을 떠 그를 바라보았다.“배현수.”한껏 달아오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듯한 그녀의 부름이었다.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배현수는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그만하라고? 일부러 나를 괴롭히는 거야?”배현수가 다가와 그녀에게 키스하려 했다.그러자 조유진은 얼굴을 옆으로 피하며 말했다.“물어볼 게 있어요.”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배현수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뭔데?”“송인아가 트위터에 올린 다이아몬드 반지, 현수 씨가 선물한 거예요?”“아니.”이런 그의 대답이 사실 놀랍지 않았다.조유진도 송인아가 트위터에 올린 다이아몬드 반지가 배현수가 선물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큰 다이아몬드는 배현수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고급 보석 연구에 취미가 있는 남초윤은 송인아가 올린 다이아몬드 반지를 보고 한눈에 가짜임을 알아챘다. 진품 로트 넘버는 한국에 없기 때문이다.그렇게 큰 빨간 보석은 전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았다.설사 배현수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했다고 해도 가짜를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조유진의 이 물음은 다른 것들을 물어보기 위해 배현수를 떠보는 것이었다. 그녀가 정말 묻고 싶은 것은 송인아가 아니었다.배현수의 다리 위에 앉아 있는 조유진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말했다.“외부에 나와의 관계를 공개하고 결혼할 거라고 말하면 SY그룹에 분명 안 좋은 영향이 있는 거죠?”조유진은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누리꾼들이 자기에 대한 평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거짓 증언을 해서 무죄인 사람을 감옥에 보낸 그녀에게 누가 좋은 말을 해주겠는가?아마 평생 이 꼬리표를 떼지 못할 것이다. 이 꼬리표는 그녀가 직접 자신에게 붙인 것이다.
세상의 이목은 아랑곳하지 않아도 되지만 만약 그런 이목이 SY그룹과 배현수에게 상처를 준다면 조유진은 결코 편안한 마음으로 그의 곁에 있을 수 없었다.여기까지 생각한 조유진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가끔은 정말로 7년 전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 작은 셋방에 다시 살고 싶어요. 그때의 배현수는 아무 걱정도 없이 조유진을 사랑할 수 있었고... 그때의 결백한 조유진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당당하게 살 수 있었으니까.”그땐 아무도 조유진이 배현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대제주시 방송학과의 퀸카 조유진, 대제주시 법학과 수재 배현수, 두 사람 모두 한없이 빛나는 앞날을 기약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의 조유진은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배현수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가 아니라 조유진에게 거짓 증언의 딱지가 붙어 뗄 수 없기 때문이었다.배현수는 늘 멘탈을 붙잡고 이성을 유지하려 했지만 막상 조유진을 밀어내려고 하니 마음이 한없이 약해졌다.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모르는 배현수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며 한마디 했다.“적어도 나에게 너는 절대 부정적인 존재가 아니야. 유진아, 네가 있어서 내 인생도 가치가 있는 거야.”눈시울이 붉어진 조유진은 웃으며 말했다.“그럼 나와 결혼해 줄래요? 배현수 씨?”‘얼마든지.’마음속으로 열 번 넘게 하는 말이었지만 쉽게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그에게 쓸데없는 세상의 이목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배현수가 원한다면 그 여자가 살인범이어도 상관이 없었다.조유진의 그까짓 죄명은 그만 용서해 주면 그만이다. 세상 사람들이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다.하지만 조유진이 죽어가는 사람과 결혼하게 할 수는 없었다.배현수는 눈을 꼭 감고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나는 할 수 없어.”그녀를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할 수 없는 것이다.조유진도 그리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배현수를 원망하지도 않았다.목이 꽉 막힌 조유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현
허탈한 미소를 지은 조유진은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나도 화내고 싶어요. 7년 전에 거짓 증언으로 현수 씨에게 3년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시키지 않았다면 인터넷에 떠도는 송인아와의 기사를 해명하라고 화를 냈겠죠. 빨리 우리 사이를 공개하라고 했겠죠. 하지만 나에게는 자격이 없어요. 그렇게 하면 SY그룹에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것도 잘 알아요. 물론 현수 씨에게도, 나에게도...”사람들은 지금 그들이 헤어진 줄 알고 손뼉을 치며 환호하고 있다.그리고 송인아와 재결합하라는 내용이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조유진이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이런 수모를 참을 수 없었다.배현수는 분명 그녀의 남자친구이고 얼마 전 금방 재결합했다. 하지만 배현수와 송인아 사이에서 그녀는 제3자에 불과했다.설령 배현수와 송인아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조유진이 알고 있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 혼자만 알 뿐, 밖에 있는 그 누구도 모르기 때문이다.배현수가 바로 반박기사를 내 해명하지 않은 것을 조유진은 묵묵히 받아들이고 눈치껏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배현수에게 누를 끼치면서 그의 인생에 오점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인터넷 여론은 조유진에게 매우 우호적이지 않았다.배현수가 뒤에서 아무리 사람을 시켜 조유진에 대한 연관검색어를 지운다고 해도 열기가 워낙 뜨거운 탓에 여론의 목소리는 한동안 사그라지지 않았다.남초윤마저 보다 못해 쏘아붙였다.“배현수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아예 송인아와의 관계를 인정한 거야?”조유진은 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주말에 심미경 씨 결혼식에 갔다가 바로 성남으로 돌아갈 거야.”“무슨 뜻이야? 헤어진다고? 배현수가 진짜 헤어지자고 했어?”조유진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눈치껏 알아챈 남초윤은 잔뜩 화를 내며 말했다.“배현수와 같이 있고 싶다는 사람은 너였어. 이제 누리꾼들이 두 사람 헤어졌다고 하면 진짜 헤어진 거야? 예전에는 배현수가 그래도 뚝심이 있는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인제 보니 내가 착각
남초윤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네티즌들은 배현수와 송인아를 아예 커플로 인정했어요. 회사 직원들조차 두 사람이 언제 결혼하냐고 물어요. 진짜로 그런 생각이 없으면 왜 나와서 해명하지 않는 건데요?”육지율은 하나하나 분석하기 시작했다.“현재는 송인아의 열기가 SY의 주가 반등에 도움을 주고 있어요. 일단 맛 좀 보고 나서 해명해도 늦지 않고요. 비즈니스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부분까지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조유진만 그 여론들이 거짓이고 오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 돼요.”남초윤은 씩 웃더니 콧방귀를 뀌었다.“당신네 남자들이란 정말 다 똑같아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죠. 거절도 인정도 하지 않고요. 쓰레기 같은 인간!”분명 배현수에게 하는 욕이었지만 왜 말에 뼈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까? 왠지 누구를 저격하는 말처럼 들리네? 남초윤의 말에 육지율은 수건으로 머리를 닦던 행동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당신네 남자들? 육씨 집안 사모님. 말에 뼈가 있네요?”눈살을 찌푸린 남초윤은 아무렇지 않은 듯 계속 입을 열었다.“당신은 남자 아니에요? 설마 여자예요?”남초윤이 여기서 말하는 ‘남자’는 결코 좋은 단어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잘생긴 남자를 보고 사람들은 단지 ‘저 남자’라고 지칭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육지율의 귀에 이것은 부정적인 의미였다.손에 있던 수건을 옆으로 내던진 육지율은 몸을 숙이더니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잊었어요? 내가 남자라는 것 외에 당신의 남편이라는 것을?”남초윤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어차피 곧 남편도 아니잖아요. 이혼하기로 약속한 거 잊었어요?”육지율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이혼하기로는 했지만 조건이 있어요.”“무슨 조건인데요?”육지율은 차분한 얼굴로 따지며 말했다. “결혼한 지 2년이나 됐는데 당신은 육씨 집안 사모님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았어요. 나도 별 요구는 없어요. 못다 한 아내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의무는 하고 가야 하지 않겠어요.”
일요일, 부경 산장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갰다.결혼식은 야외 잔디밭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부경 산장의 잔디밭은 전문 인력이 관리하고 있어 겨울에 접어드는 11월에도 색이 바래지 않아 사진이 잘 찍혔다.한 무리의 사람이 결혼식장에 도착했다.남초윤은 조유진과 선유와 같이 산장 주변을 돌아보며 사진을 여러 장 찍은 후 결혼식장의 디저트 테이블 근처로 돌아와 술잔을 기울였다.야외 결혼식장에 은은한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 퍼졌고 장미 꽃잎이 바닥에 깔려 있었다.남초윤은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이상하네? 강이찬의 결혼식인데 왜 소란 피우기 좋아하는 여동생이 안 보이지? 이렇게 큰 행사에 얼굴 드러내는 거 좋아하지 않았어?”“분장실에서 도와주고 있겠지.”그 말에 남초윤이 코웃음을 쳤다.“걔가 돕긴 뭘 도와. 말썽만 안 부리면 다행이지. 결혼식에 오지 않은 것 같은데?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어!”조유진은 별생각 없이 샴페인 잔을 들고 마시려던 참이었다.이때 남초윤이 그녀의 잔을 확 낚아채며 말했다.“유진아, 무슨 생각하는 거야? 이건 술이야! 넌 마시면 안 돼.”결혼식이었지만 조유진은 기분이 다운되어 있었다. 멀찍이 서서 술잔을 든 채 육지율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배현수를 본 남초윤은 조유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내일 정말 성남에 가는 거야? 다시 얘기해 볼 생각 없어? 그동안의 감정이 아깝지도 않아?”조유진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깨진 거울은 절대 다시 붙일 수 없나 봐. 다시 붙인다고 해도 그 흔적이 남으니까. 서로 너무 오랫동안 시간만 지체한 것 같아. 이제 정말 인연이 끝난 것 같아. 우스운 얘기기는 한데 사실 7년 동안 우리는 한 번도 같이 있은 적이 없어. 그래서 그런지 지금 헤어져야 정상이라는 생각까지 들어.”너무 많은 것들을 오랫동안 잃어버리면 없는 것에 습관이 되고 그런 상태가 일상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저도 모르게 이 감정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결혼식장
심미경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로 중년여성의 기세등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당신 누구야? 급한 일이 있으니까 강이찬 좀 바꿔. 직접 나와서 해결하지 않으면 경찰서에 가서 여동생을 폭로해 버릴 수밖에 없어!”심미경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저는 강이찬 씨의 아내입니다. 누구세요? 이찬 씨를 왜 찾는 거죠?”맞은편에는 중년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표준 서울 발음이 아닌 사투리가 억세게 들렸다.“아, 그러니까 당신이 강이진의 시누이야? 누구든 상관없어. 돈만 받으면 되니까! 아직 1억이 남았는데 왜 안 갚는 거야? 전화도 안 되고 문자를 해도 답장이 없어. 어디 도망간 거 아니야?”심미경은 들으면 들을수록 아리송했다.“당신 대체 누구예요? 이진이가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는데요?”설마 이진이가 도박 빚이라도 졌단 말인가?전화기 너머의 장순자는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강이진! 그 년이 내 남편을 사주해 교통사고를 내게 했어. 감옥에 들어가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생겨 입막음 비용으로 우리에게 2억을 주겠다고 했어. 그런데 지금 1억밖에 못 받았어. 당신들이 강이진 대신 이 돈을 갚지 않으면 당장 경찰서에 가서 신고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심미경은 잠시 멍해졌다.“혹시 전화 잘못 거신 거 아니에요?”“잘못 건 거 아니야! 강이진의 오빠가 강이찬이잖아? 맞지? 발뺌할 생각하지 마! 2억은 당신 같은 사람들에게 껌값이잖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돈을 보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교통사고는 내 남편이 다 뒤집어썼어. 물론 내 남편은 음주운전에 그치긴 했지만 강이진 그 년은 살인 미수야! 누구의 형이 더 무거울지 잘 생각해 봐!”교통사고?음주운전?살인 미수?강렬한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심미경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부여잡으며 말했다.“당신 남편 이름이... 뭐예요?”“황인구!”순간 뇌 정지가 된 듯 머릿속이 윙윙 소리가 났다.황인구? 황인구...심미경의 교통사고도 황인구라는 사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나간 후 분장실에는 심미경과 강이찬만 남았다.심미경은 화장대를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두 다리가 후들거려 지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강이찬이 부축해 주지 않았더라면 분명 넘어졌을 것이다.“미경 씨.”강이찬의 손을 덥석 잡은 그녀는 시뻘게진 눈시울로 심문하듯 물었다.“강이진 짓이에요?”긴 침묵이 흐른 후, 강이찬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말했다.“네, 이진이가 한 거예요. 어떻게 하면 직성이 풀릴까요? 말만 해요. 내가 바로 할 테니.”동공이 미세하게 떨린 심미경은 주위의 공기마저 희박하게 느껴져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그러니까 강이진이 한 짓이라는 걸 진작 알았던 거예요?”또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심미경은 우는 얼굴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당신네 남매의 눈에 내가 바보로 보여요? 매일 나를 죽이려 했던 살인범과 한 지붕 아래 살며 당신들에게 원숭이처럼 놀아나는 것을 보고 어땠어요? 기분이 좋았어요? 강이진 짓이라는 것을 진작 알았으면서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친동생을 감싸기 위해 평생 저를 속일 생각이었어요?!”강이찬은 강이진의 어깨를 잡으며 다급히 해명했다.“자수하라고 했어요. 그런데 자살하겠다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나를 협박해서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졌어요. 그래서...”심미경은 강이찬의 말을 끊었다.“강이진, 지금 어디 있어요? 방금 장순자 말로는 도망갔다고 하던데 오늘 결혼식에 안 온 것을 보면 벌써 도망갔나 보네요?”“이미 대선국에 갔을 거예요.”“하하... 강이진이 도망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뒀다고요? 강이찬 씨! 교통사고 때문에 우리 아이가 죽었어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운전을 제대로 못 한 내 탓이라고 생각해 얼마나 자책했는지 알아요? 매일같이 악몽을 꿨다고요. 꿈에서 강이진이 칼을 들고 내 배를 찔렀어요. 이것도 내가 생각이 많아서 이런 꿈을 꾼 줄 알고 감히 이찬 씨에게 말도 못 했어요! 그런데 이제야 알 것 같네요. 왜 이런 꿈을 꾸었는지.”강이
심미경은 웨딩드레스를 갈아입을 겨를도 없이 치맛자락을 들고 비틀거리며 뛰어나갔다.강이찬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고 눈시울은 시뻘게졌다.다이아몬드 반지가 ‘딸가닥’ 소리를 내며 손바닥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심미경과 완전히 끝났다.마당에서 한창 음식을 먹던 남초윤이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하얀 그림자가 산장 뒤뜰로 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저기 저 사람 신부 아니야? 왜 도망가는 거지?”조유진도 얼떨떨한 얼굴로 남초윤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진짜로 심미경이 뛰어가고 있었다.“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남초윤은 잔뜩 호기심이 생겼다.“강이찬이 또 무슨 짓을 했기에 심미경이 결혼식 날 도망가게 만들어?”결혼식 참석 하객들이 모여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랐을 때 신랑 측 비서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여러분, 오늘 결혼식에 문제가 생겨 예정대로 진행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음식은 예정대로 마련될 것이니 마음껏 드시고 즐기다가 가세요.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흰색 벤츠 한 대가 미친 듯이 부경 산장을 빠져나오고 있었다.차 안에 있는 심미경은 운전대를 꽉 잡고 가속페달을 힘껏 밟았다.눈물이 시야를 가려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혼자 있는 차 안에서 그녀는 큰 소리로 통곡했다. 오랫동안 운전을 하지 않았고 지난번 교통사고 이후로 함부로 운전대를 잡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흰색 벤츠는 마치 거침없는 맹수처럼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뒤에 검은색 벤틀리가 미친 듯이 경적을 울리며 쫓아왔다.강이찬의 차였다.휴대전화는 계속 울렸지만 그녀는 받을 생각이 없었다.부경 산장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어 가끔 길에 화물을 운반하여 산으로 올라가는 대형 화물차가 오가고 있었다.흰색 벤츠가 코너를 도는 순간 큰 트럭과 마주쳤고 날카로운 경적이 조용한 산길에 울려 퍼졌다.끼익!곧이어 급정거하는 소리와 함께 바퀴가 바닥에 마찰되며 검은색 타이어 자국을 몇 줄 그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