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시 엄씨 사택.엄씨 가문에는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그 사람은 바로 엄준의 친딸 백소미였다.엄준은 셰프에게 백소미를 맞이할 수 있도록 한상차림을 준비하라고 했다.저녁 식사 자리에는 조유진과 엄창민도 참석했다.엄준은 기쁜 마음에 잔을 들더니 말했다.“자. 소미가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한잔하지.”사람들은 다 같이 축배를 들었다.엄준은 백소미와 몇 마디 나누더니 조유진을 바라보았다.“최근에 환희 바이올린 연주 실력이 대단하다고 들었어.”조유진은 겸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조금은 할 줄 알아요.”백소미는 엄씨 가문에 오기 전에 가족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왔기 때문에 살짝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전에 인터넷에서 조햇살 씨가 바이올린 연주하는 동영상을 보게 되었어요. 엄청나게 잘하시던데요? 아빠, 전에 ‘골든 스틸’을 좋아하신다고 하지 않았어요? 오늘 밤 분위기도 좋은데 유진 씨 저희를 위해 연주해 줄 수 있을까요?”엄준은 아내 신희수가 죽은 뒤로 옛 기억이 떠오를가봐 연주회도 관람하지 않아 ‘골든 스틸’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그는 기대가 가득 찬 눈빛으로 조유진을 바라보았다.“환희야, 가능하다면 한 곡 부탁드릴게.”오늘은 친딸도 돌아오고, 수양아들 수양딸도 한자리에 함께해서 와인도 마셨겠다 아주 기분 좋은 상태였다.조유진은 분위기를 깨기 싫어서 이렇게 말했다.“그러면 부끄러운 실력이지만 한 곡 연주해 보겠습니다. 못해도 웃으시면 안 돼요.”엄준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그녀를 부드럽게 바라보더니 말했다.“도 집사, 사모님 바이올린 가져와 봐.”“사모님 바이올린이요?”도 집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특별제작한 그 바이올린은 신희수가 남긴 유물이었다. 살아생전 이 바이올린으로 자주 엄준에게 ‘골든 스틸’을 연주해 주었기 때문에 아무도 못 만지게 할 정도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물건이었다.‘그거를 조유진 씨한테 준다고?’“맞아. 환희가 연주할 수 있게 가져와 봐. 특별제작한 거라 음색이 아주 좋거든.”이 순
문제 있을 리가 없었다.세상에 비슷한 사람이 많다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그저 엄준과 조유진이 인연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었다.엄준은 혼이 빠져나간 듯 조유진을 쳐다보고 있었다.“그러게, 너무 닮았어...”아름다운 선율이 클라이맥스에 달했을 때, 끼익 소리와 함께 현이 하나 끊어지면서 노랫소리가 그만 멈추고 말았다.도 집사는 그만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현이 끊어졌다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닌데...’“어르신, 이거...”엄준이 손을 저었다.“괜찮아. 몇 해 동안 사용하지 않아서 그래. 현도 정기적으로 점검을 해야 하는데 시간이 오래돼서 끊기는 것도 정상이야. 다시 새로 교체하면 돼. 아무것도 아니야.”조유진이 사과했다.“저 때문에 끊어졌으니 교체하는 것은 저한테 맡겨주세요.”“그래. 이 바이올린 환희한테 어울리는 것 같은데 마음에 들면 내가 선물해 주고 싶어.”엄준이 아무렇지 않게 한 말에 사람들은 놀라고 말았다.조유진은 이 선물을 받을 수가 없었다.“아버지. 너무 소중한 물건이라 받을 수가 없어요.”이 바이올린은 조유진한테는 그저 평범한 바이올린뿐이었지만 신희수의 유물이라 엄준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엄준은 담담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예전에는 먼지가 쌓일가봐 계속 옷장에 넣어두고 있었어. 그런데 바이올린은 연주하라고 만들어진 거잖아. 계속 옷장에 있어봤자 빛을 발하지 못해. 몇 해 동안 사용하지 않았더니 바로 끊어지는 거 봐. 예술은 계승해야 한다고 부모님께서 말씀하셨다며. 아무도 사용하지 않으면 그냥 무용지물이 되는 거야. 받아. 소중한 물건이라고 생각되면 나한테 자주 연주해 줘.”엄창민이 말했다.“환희야, 받아. 아버지께서 큰맘 먹고 선물하는 건데 안 받으면 속상해하실 거야.”엄준은 엄창민을 가리키더니 소리 내 웃었다.“그동안 옆에 데리고 다닌 보람이 있네. 역시 창민이가 나를 가장 잘 알아.”엄준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조유진도 더는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받았다.“아버지, 저 이 바이
백소미는 엄준을 방까지 모셔다드리고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핸드폰이 울려 발신자 번호를 봤더니 모르는 번호였다.“여보세요, 보스님.”상대방은 변조된 목소리로 통화했다.“일은 잘 진행되고 있나?”“네.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이미 한 달도 지났는데 엄씨 가문에서는 언제 너의 신분을 밝히는 거야?”백소미는 미간을 찌푸렸다.“지금은 아직 엄준의 신임을 받지 못한 상황입니다. 보스님, 저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전화기 너머 남자의 말투는 아주 단호했다.“그러니까, 일이 잘 진행되고 있다더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네?”“엄준이 수양딸로 받아들인 조유진을 많이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엄씨 가문에 들어왔어도 엄환희의 신분은 계속 조유진이 사용하고 있습니다.”“만약 조유진이 우리의 계획을 방해하고 있다면 없애버려도 좋아.”“네, 알겠습니다. 보스님.”“빨리 성행 그룹에 입사해서 결정적 업무를 받아야 해. 나는 네가 엄씨 가문의 신임을 받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만한 인내심이 없다는 거 잘 알잖아.”“그러면 엄창민은...”전화기 너머의 남자가 악독하게 말했다.“방해되는 자는 모조리 죽여버려!”“...네.”“그리고 등 뒤에 있는 몽고반점 언제나 명심해. 엄씨 가문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경계심을 품고 있을 거야.”“알겠습니다.”백소미는 통화를 마치고 통화기록을 지워버렸다.옷을 벗어 거울을 통해 등 뒤를 확인했더니 멍든 자국이 아직 남아있었다.며칠 후 멍 자국이 없어지면 다시 부딪혀 보기로 했다....대제주시 반얀트리 호텔.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창문을 통해 침입했다.“보스님, 조유진이 엄준의 친딸일 수도 있습니다. 계속 살려둘까요?”“아니, 죽여버려.”똑 똑 똑.말이 끝나자마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방 안에 있던 사람은 표정이 확 바뀌더니 말했다.“일단 가봐.”“네.”침입자는 다시 귀신처럼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갔다.단 몇 초 사이, 스위트 룸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문밖
“그렇게나 빨리? 대제주시에서 볼 일은 다 끝났어?”“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네 주인인 내가 어디 가면 그냥 따라오면 돼.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그래요, 주인님.”하지만 성남으로 돌아가기 전, 두 사람의 목숨부터 해결하기로 했다.‘조유진이 죽으면 엄준이 슬퍼할지 모르겠네. 아쉽네, 곧 죽게 되는 마당에 자기 친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니.’...다음 날 오후 6시.엄창민은 말끔한 정장을 입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연주회 저녁 8시에 시작해서 10시에 끝나니까 먼저 저녁부터 먹자. 아니면 2시간 동안 배고플 거야.”“그래요, 간단히 아무거나 먹죠.”조유진이 차에 올라타자 엄창민이 물었다.“뭐 먹고 싶어?”“훠궈 먹으러 가요.”“훠궈?”엄창민에겐 오늘이 연인 사이의 데이트는 아니더라도 첫 정식 데이트라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첫 데이트에 훠궈? 좀 그렇지 않나?’조유진은 그가 훠궈를 싫어하는 줄 알고 말했다.“삼겹살 먹어도 괜찮아요.”“...그래. 네가 먹고 싶은 거 먹어.”이들은 극장 근처에 있는 쇼핑몰로 향했다.조유진은 아무거나 대충 먹자는 말 그대로 엄창민을 평범한 삼겹살 가게로 데려갔다.가게 앞에는 대기하는 사람들이 많아 한참 기다려야 했다.정장 차림인 엄창민은 다소 이 가게와 어울리지 않았다.조유진은 그를 쳐다보더니 머쓱해하면서 말했다.“평소에 어떤 곳에서 식사해요? 고급 레스토랑?”“...응.”사실대로 말했지만 조유진이 무안해할가봐 또 말을 바꿨다.“그런데 이 가게도 맛있을 것 같아. 삼겹살 가게는 또 처음 와보네. 삼겹살 좋아해?”“네. 평소에 많이 먹어요.”조유진은 삼겹살이며 훠궈를 먹기 좋아했다. 배현수와 연애했을 때도 그가 시간 날 때마다 같이 영화 보고, 밀크티를 마시고, 훠궈도 먹고 삼겹살도 먹었었다... 그리고 쇼핑몰 안마의자에서 온 오후 시간을 보냈었다.함께라면 아무리 재미없는 일을 해도 행복하기만 했다.사실 배현수는 주말에 그녀와 침대에서 뒹구는 것을 좋아했
삼겹살 가게 안에는 사람이 오고 갔고 기름 냄새가 가득했다.엄창민은 처음으로 이런 가게에 와봐서 그런지 주문하는 것도 서툴렀다.조유진은 테이블 위에 있는 큐알 코드를 스캔하더니 몇 가지 장바구니에 담고는 핸드폰을 엄창민에게 건넸다.“창민 오빠, 먹고 싶은 거 장바구니에 담으면 돼요.” 엄창민은 메뉴판을 보더니 순진하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말했다.“M9은 소고기랑 육질이 아예 달라. 이미지처럼 생기지도 않았고, 가격이 이렇게 쌀 리가 없어. 먹을 수 있는 거야?”조유진: “...풉!”조유진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내뿜는 모습에 엄창민은 흠칫하더니 설명했다.“그게 아니라, 이 가게에서 신선하지 않은 소고기를 판매할가봐. 정말 이 가게에서 먹을 거야? 배탈 나면 어떡해?”조유진이 웃었다.“저는 이런 가짜 와규를 자주 먹었어요. 맛있기만 했지 아무런 문제도 없었어요.”“...”‘이런 가게에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었어. 창민 오빠 낯설어하네. 길거리 음식이나 먹을 걸 그랬나? 그러면 더 습관이 안 되겠지.’“창민 오빠한테는 더 좋은 것이 어울려요.”음식 가게든 사람이든 말이다.엄창민은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환희가 좋아하는 음식 나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난 원래 새로운 걸 도전하기 싫어해서 어느 음식점이 괜찮으면 계속 그 음식점에만 가서 먹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한다면 나도 새로운 거 도전할 마음이 있어.”“창민 오빠, 너무 나한테 맞춰줄 필요 없어요. 저희는 그냥 다른 사람이라 취미도 다르고, 입맛도 다르고, 습관도 다른 거예요.”“시도해 보려고. 네가 좋아하는 거 나도 좋아할지 어떻게 알아?”엄창민은 어딘가 조급해 보였다.조유진은 몇 초간 멈칫하더니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그러면 이따 이 집의 삼겹살을 드셔보세요.”불이 오르고, 엄창민은 정장 외투를 벗어 셔츠 소매를 걷더니 조유진을 위해 삼겹살을 구웠다.처음 해보는 일이라 서투르기만 했다.조유진은 그를 전혀 비웃지 않고 집게를 가져오더니 농담 식으로
“내가 괜찮다면? 네가 마음을 비울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면...”“평생 비울 수가 없다면요?”엄창민은 멈칫하고 말았다.몇 초간의 침묵을 깨고 엄창민이 먼저 물었다.“배현수가 그렇게 좋아? 평생 잊어버릴 수 없을 만큼?”“좋고 나쁜 걸 떠나서 저는 저 자신한테 확신이 없어요. 그 사람을 깨끗하게 지울 수 있을지. 깨끗이 지우기 전까지는 새로운 시작 안 할 거예요. 창민 오빠는 저의 생명의 은인이잖아요. 저는 오빠한테 미안한 짓을 할 수가 없어요. 해서도 안 되고요.”“환희야, 사실 내 마음을 계속 모른척해도 돼. 난 계속 기다릴 수 있어. 네가 배현수를 잊을 때까지...”“제가 싫어요.”조유진은 멈칫하더니 일부러 한마디 더 쏘아붙였다.“저는 현수 씨를 잊어버리지 않을 거예요.”조유진은 일부러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엄창민은 그대로 굳어버리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환희야, 꼭 그렇게 매정하게 거절해야겠어? 전에 배현수랑 불가능하다고 했잖아...”“맞아요. 현수 씨랑 불가능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랑은 더욱 불가능한 거예요. 창민 오빠, 혹시 감정도 배타성을 띄고 있는 거 알아요?”엄창민도 당연히 가까운 사이에 배타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런데 배현수랑 사실 6년 동안 떨어져 있었는데 아직도 배타성을 가지고 있어?”“네. 저는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저는 창민 오빠를 속이고 싶지 않았어요. 심적으로는 육체적으로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도 강한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는 건 전생에 현수 씨한테 빚진 것이 있거나, 제가 비정상일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저는 다른 사람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조유진의 말이 끝나자, 엄창민은 침묵을 지키더니 실성한 듯 웃었다.“나 심지어 배현수랑 싸워보지도 못하고 졌어. 그런데 난 배현수한테 진 것이 아니라 너한테 진 거야. 환희 네가 나한테 기회를 주지 않아서야.”“미안해요.”엄창민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내가
두 사람은 생수를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이때 한 훤칠한 키의 남자 역시 생수 한 병을 쥐더니 따라서 카운터로 향했다.그가 손에 쥐고 있는 이 생수병은 조유진이 만졌다가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은 것이었다.그렇게 그는 조유진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계속 뒤를 따랐다.조유진과 엄창민 사이가 어느 정도로 깊어졌는지는 몰랐지만 함께 슈퍼를 돌 정도로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배현수는 아주 가까운 사이에서만 가능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함께 슈퍼를 돌면서 물건을 사는 것은 한 사람의 취미와 일상생활이 보이기 때문에 조유진 이외의 사람과 슈퍼를 돌 일이 없었다.조유진과 헤어진 이후로 슈퍼에도 가지 않았고, 생활용품은 모두 서정호에게 맡겼었다.송진연한테서 MECT 치료를 받으려고 했지만 병실 침대에 눕자마자 도망치고 말았다.여러 차례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모두 수신 거부하고 밤중에 성남으로 달려왔던 것이다.배현수는 이대로 포기할 수가 없어 조유진과 엄창민이 도대체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직접 성남에 와서 확인하고 싶었다.그저 엄창민이 자신보다 조유진을 더 많이 좋아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엄창민이 강이찬과 같이 그저 조유진의 외모에 혹해 만날까 봐 두려웠다.조유진은 자타공인의 미인이었기 때문이다.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조유진에게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첫사랑 이미지가 있었다.강이찬이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그가 조유진을 좋아한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조유진을 사랑하는 정도에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배현수는 그렇게 이 둘의 뒤를 따라다니게 되었고, 시선은 오로지 조유진만 바라보고 있었다.텔레파시가 통해서인지, 미행하는 내내 조유진은 계속 뒤돌아보았고, 배현수는 계속 피했다.배현수는 오늘 이상하리만큼 스타일이 평소와 달랐다.조유진은 그런 그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볼캡과 마스크를 쓰고 있어 피하지 않는다고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차에 올라타기 전, 엄창민은 자꾸만 뒤돌아
조유진이 유리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발걸음을 멈추니, 뒤에 있던 사람도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이때 엄창민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더니 물었다.“뭘 보고 있어? 얼른 들어가자. 10분 뒤면 시작해.”조유진이 뒤돌아 확인하려고 했을 때, 그 사람은 이미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연주회 감상하러 온 사람이겠지.’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조유진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이 사람은 블랙 볼캡에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다크 그레이색 후드를 입고 있었으며 후줄근해 보이긴 했어도 깔끔해 보였다.평소에 도도한 모습의 배현수와는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하지만 키가 크고 다리가 긴 것이... 체형은 똑같아 보였다.그가 옆을 지나쳤을 때 조유진은 은은한 침목향의 담배 냄새를 맡게 되었다.배현수는 조유진이 침목향을 사준 이후로 계속 사용하고 있었다.조유진은 그의 뒷모습을 보고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는 느낌에 본능적으로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현수 씨!”이 외침에 엄창민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앞에서 걷고 있는 그는 역시나...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그저 아무렇지 않게 앞으로 걸어가더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내가 잘못 봤나?’엄창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배현수였다면 모른척할 리가 없겠지.”‘만약 정말 배현수였다면, 평소에 했던 짓을 봤을 때 진작에 환희를 끌고 갔겠지. 저번에 대제주시 공항에서도 대놓고 뺏어갔잖아. 이름까지 불렀는데 모른척할 리가 없어.’...엄창민과 조유진이 극장으로 들어가자 연주회가 바로 시작되었다.두 줄 뒤에 앉은 배현수의 자리에서는 바로 조유진이 보였다.하지만 조유진은 고개 돌릴 일이 없었다.고개를 돌린다고 해도 배현수가 보일 리는 없었다.루커스는 조유진이 어릴 때부터 몇십 년 동안 좋아했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조유진이 18살 되던 해, 루커스가 유럽 순회공연을 하고 있을 때 목이 빠져라 기대하면서 물은 적이 있었다.“우리 언제 루커스 유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