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현수는 조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내 전부 재산이야. 나중에 월급도 이 계좌로 들어올 거야. 비밀번호는 너의 생일. 뭐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할 필요도 없이 그냥 긁으면 돼. 그런데 매달 내 용돈과 담뱃값은 남겨줘야 해. 나머지는 다 네 거야.”조유진은 감동해서 두 눈이 붉어졌고 그의 목을 끌어안더니 울먹이면서 말했다.“그래도 아직 대답하지 않았잖아요.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이건 아무것도 아닐 거잖아요.”배현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유진아, 난 마음이 쉽게 안 변해. 난 너를 잃는 게 두려워. 그래서 마음도 안 변할 거야.”배현수는 맞는 말만 하는 사람이라 영원하다면 영원한 것이었다.그래도 조유진이 믿지 않을까 봐 말을 덧붙였다.“2년 후 네가 법적으로 혼인신고 가능한 나이가 되면 우리 바로 혼인 신고하러 가자. 응?”“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그때면 저는 고작 20살인데, 현수 씨한테 시집가야 해요?”“유진아.”배현수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말했다.“나랑 결혼 안 하면 누구랑 할 건데?”“...”그때 조유진은 어려서 혼인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그저 배현수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결혼해도 마음이 변할 수 있잖아요. 법률은 결혼 혹은 이혼만 상관했지 현수 씨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잖아요.”배현수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더니 조유진의 얼굴을 꼬집으면서 말했다.“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이혼할 생각부터 하고 있어? 유진이는 정말 대단해.”“...아파요!”“아픈 건 아네. 일단 결혼했으면 이혼할 수 없는 거야. 이혼하려고 하면 더 아프게 할거야.”조유진은 그의 목을 꽉 깨물더니 말했다.“현수 씨는 왜 복수심이 그렇게 강해요?”“나를 뭐 하루 이틀 봐?”배현수는 그녀를 품에 와락 안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유진아, 난 마음이 안 변해. 결혼하면 내 수입과 재산 다 네 것으로 만들 거야. 똑같이 너도 날 버리면 안 돼.”이때 조유진은 그의 품에 안겨 손가락으로 목젖을 어루만지더니 장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되었었다. 마음이 아파서 조유진에게 출산의 고통을 맛보게 하고싶지 않았다.그때 당시 조유진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차마 잠자리를 가지지 못해 동거했을 때 얼마나 냉수마찰을 하면서 진정시켰는지 몰랐다.그는 늘 조유진의 이마에 키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아프면 안 해도 돼.”그때까지만 해도 조유진과 오래 만날 거라는 생각에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감옥에 간 이후로...조유진은 18살에 임신하고, 아이를 낳고,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6년 동안 싱글맘으로 살았었다...약속했던 모든 것들이 바사삭 깨지고 말았고 모든 일이 모두 정상을 벗어나고 말았다...조유진을 그렇게 아꼈지만 결국엔 고생이란 고생은 다 맛보게 한 것이었다.이제는 성숙해지고, 강해져서 더는 애교도 부리지 않았고, 또 마음이 변할 건지와 같은 유치한 질문도 하지 않았다. 배현수는 옛날로 돌아가고 싶었다.조유진이 예전처럼 목에 매달려 마음이 변할 건지, 자신을 영원히 사랑할 건지, 자신을 버릴 건지 계속 물어봐 줬으면 했다.그러면 한 번이고 두 번이고 단호하게 알려줬을 것이다.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이고, 영원히 사랑할 것이며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하지만 조유진은 더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뒷좌석에 앉은 배현수는 살짝 고개를 쳐들어 어두운 불빛 속에서 조유진만 쳐다보았다.루커스의 연주를 함께 보았지만, 사이에 두 줄이라는 간격이 있을 뿐이었다.조유진은 무대를 보고 있었고, 배현수를 그녀를 보고 있었다.루커스의 연주는 그야말로 완벽했지만 조유진은 집중할 수가 없었다.그렇게 기대했던 연주회를 몇 년이 지나 드디어 보게 되었지만 옆에 앉은 사람이 배현수가 아니라는 느낌에 아쉽기만 했다.조유진은 자신의 감정을 들키기 싫어서 몰래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엄창민이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눈물범벅이 되고 말았고, 그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묵묵히 휴지를 건넸다.“이걸로 닦아. 메이크업이 번지면 안 되잖아.”“고마워요.”연주회가
극장 내, 화재 연기가 피어오르고 비상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극장 밖을 나온 배현수는 안에서 사람들이 작은 비상문을 비집고 달려 나오는 것을 보았다.그중에는 조유진이 없었다.갑자기 발생한 이유 모를 화재에 아직 구조대원도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다.현장은 순식간에 공포감에 휩싸이게 되었다.배현수는 사람들이 빠져나오는 방향을 거슬러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이때 한 사람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불났어요! 들어가지 마세요!”“뭐 하는 거예요? 빨리 나가요! 여기서 길 막고 계시지 말고!”하지만 배현수는 그래도 위험을 무릅쓰고 안으로 달려 들어가면서 조유진의 이름을 외쳤다.“유진아!”아무리 불러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극장 내, 불씨는 점점 커졌고 배현수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조유진은 쓰러져있었고 그옆에는 그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는 사람이 서 있었다.배현수는 그 사람에게 덮치자 두 사람은 뒤엉켜 버리고 말았다.배현수는 신속이 상대방이 총을 쥐고 있는 손목을 비틀어 총구를 돌렸고, 총알은 천장을 향해 날아가게 되었다.이렇게 작은 권총의 탄창에는 일반적으로 6, 7알의 총알이 들어있었다.상대방 역시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 손목 힘이 장난 아녔다. 그는 붙잡힌 오른손에 쥐고 있던 총을 떨어뜨려 오른발로 차서 왼손으로 잡더니 배현수의 머리를 겨냥했다.배현수가 피하자 총알은 그의 볼캡을 스쳐 맞은편 벽을 적중하고 말았다.상대방의 왼쪽 손목을 잡았을 때, 또 두 발을 쏘게 되었다.한 발은 앞에 있는 연주대를 적중했고, 다른 한발은 오른쪽에 있던 스포트라이트를 적중하게 되었다.불빛이 환해지더니, 배현수는 순식간에 업어치기로 상대방을 제압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저 멀리 걷어차 버렸다.불씨가 점점 커지고...극장 상방에 있는 샹들리에가 조유진 머리 위에서 곧 떨어질 듯이 흔들거리고 있었다.상대방은 배현수가 조유진을 쳐다보고 있는 틈을 타 주먹으로 복부를 힘껏 쳐서 제압을 벗어나게 되었다.스르륵!샹들리에가 떨어지려
깜짝 놀란 엄창민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배현수를 바라봤다.저 사람이 설마 배현수?엄창민은 어쩌면 자기가 잘 못 보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똑똑히 보려고 할 때 진료실에 들어가는 조유진이 눈에 띄었다.간호사가 엄창민에게 진단서를 건네주며 물었다.“환자분과 관계가 어떻게 되죠?”“오빠예요.”“네, 이거 갖고 가서 병원비 내시면 됩니다.”엄창민은 서둘러 접수를 마치고 돈을 냈다.한편, 배현수는 이미 수술실에 실려 들어갔다....VIP 병동.조유진은 쓰러지면서 연기까지 마시는 바람에 폐에 문제가 생겨 수액 여러 병을 맞고 나서야 겨우 의식을 되찾았다.그녀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다음 날 아침이었다.조유진은 눈을 뜨자마자 자기 병상 주위로 여러 명이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았다.엄준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환희야, 이제 정신이 들어?”엄창민은 조유진이 눈을 뜬 것을 보고 물었다.“의사를 불러올게.”도 집사는 조유진이 누워있는 침대의 상체를 세웠다.의사도 병실에 들어와 다시 한번 검사했다.“어제 환자분이 흡입한 것은 아이소플루레인이라는 불소를 지닌 흡입성 마취제의 일종입니다. 다행히 너무 많이 흡입한 게 아니어서 지금쯤 약효가 다 빠졌기에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말을 한 의사는 조유진을 한번 보더니 물었다.“다른 데 더 불편한 건 없으세요?”조유진은 약간 어지러운 듯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조금 어지럽고 기억이 잘 안 나요.”“정상적인 현상입니다. 오후쯤 되면 괜찮아질 거예요. 이 수액 다 맞으시면 퇴원하셔도 됩니다.”그 말에 옆에 있던 엄창민이 물었다.“며칠 더 지켜보지 않아도 될까요?”“네, 괜찮아요. 엑스레이나 검사한 사진 다 확인했는데 별문제가 없습니다.”의사가 나가자 조유진이 엄창민을 보며 물었다.“창민 오빠, 어제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제 입과 코를 막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로 기억이 없어요... 아마 그 후로 의식을 잃고 기
또 다른 VIP 병실.밤새 대제주시에서 성남으로 내려온 서정호는 하루 만에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배 대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배현수가 잠에서 깨자마자 가장 제일 먼저 걱정하는 것은 역시 조유진이었다.“유진이는 어떻게 됐어?”서정호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배현수를 보며 말했다.“배 대표님, 대표님 척추가 부러질 뻔했어요. 자기 몸부터 먼저 챙기는 게 어떠세요?”만약 정말 운이 나빴다면 분명 척추가 부러졌을 것이고 그러면 남은 생을 휠체어에서 보냈을 것이다.다행히 극장의 샹들리에 조명이 싼 제품이었고 진짜 크리스털이 아니었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였기에 비교적 가벼워 배현수는 그저 타박상에 그쳤고 당분간 약을 바르고 안정을 취하면 바로 나을 수 있었다. 만약 진짜로 무거운 크리스털이 배현수의 등에 떨어졌더라면 목숨은 건졌을지 몰라도 평생 장애가 남을 수 있었다. “유진 씨는 엄씨 가족에서 돌보고 있어서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한 번 가봐.”서정호는 내키지 않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배 대표님, 아직 수액도 다 못 맞았어요...”유진 씨는 그냥 기절한 것뿐인데 무슨 큰일이 있겠냐 말이다.배현수는 굳은 얼굴로 차갑게 한마디 내뱉었다.“이제는 대표 말도 안 듣는 거야? 점점 막 나가겠다는 거야?”서정호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그럼 제가 당당하게 보러 갈까요? 아니면 몰래 갈까요? 유진 씨가 저를 보면 대표님이 성남에 온 걸 바로 알 텐데... 대표님이 저더러 직접 얘기하라고 하면 바로 얘기할게요. 아마 유진 씨는 자기를 구해준 사람이 대표님인 줄도 모르고 있을 거예요.”배현수는 잠시 침대에 기대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좋은 일을 하고도 이름을 남기지 않는 영웅도 아니고...하지만 배현수는 조유진의 과민반응만 생각하면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분명 자기를 만나면 무서워서 피하려 할 거고 배현수 또한 그녀 앞에 나타나 그녀의 안 좋은 기억을 끄집어내고 싶지 않았다.이런 정신 질환은 일단 발작하면 견디
“대표님, 유진 씨가 엄창민 씨와 만나기로 했대요.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난다고 하더라도 유진 씨가 성남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대표님도 충분히 유진 씨를 다시 뺏어올 수 있어요...”뺏어오라고?배현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내가 그저 유진이를 좋아하는 거면 뺏을 수 있어. 더 심한 수법을 써서라도 뺏을 거야. 하지만 나는 유진이를 좋아만 하는 게 아니야. 나 때문에 유진이가 이미 한 번 죽으려고 했어. 유진이를 두 번 죽일 수 없어.”안정희의 죽음은 배현수와 무관하지만 예지은과 관련이 있다.그리고 예지은은 그의 친어머니이다.안정희가 죽자 조유진도 같이 따라 죽으려고 했다.그걸 잘 아는 배현수가 어떻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배현수는 더 이상 조유진을 강요할 수 없었다. 그녀의 옆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어도... 그녀만 살아 있으면 되니까...그러면 배현수는 그녀 뒤를 따라다니면서라도 그녀 얼굴을 한 번 더 볼 수 있으니까...서정호는 배현수의 말에 흠칫 놀랐다. “만약... 유진 씨가 엄창민 씨와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대표님...”배현수는 입술을 한 번 깨물더니 눈시울이 빨개진 채 말했다.“그러면 나는 한 마리의 개가 되어 계속 유진이 따라다녀야지. 언젠가는 유진이가 뒤돌아봐 줄 거라 기대하면서.”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을 소유하고 싶은 게 당연하다.하지만 조유진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배현수는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예전처럼 갑자기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 두 번 다시 그런 상황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1년 전, 조유진은 바다에 뛰어들었다.그는 조유진이 없는 시간 동안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고 제대로 잠이 든 적도 없었다. 매일 담배를 쉴 새 없이 피웠고 속이 메스껍고 손이 떨릴 때까지 탄산리 약을 먹었다. 하지만 그녀를 잃은 공포와 상실감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배현수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조유진이 살아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는 뭐든
조유진이 다급히 물었다. “혹시 키가 꽤 컸어요?”“아마도? 그런데 누워있어서 잘 못 봤어. 네가 쓰러져서 나는 너를 빨리 병원에 데려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거든.”운전하고 있는 엄창민은 백미러로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조유진을 힐끗 보고는 다시 물었다.“아는 사람이야? 아니면 혹시 의심 가는...”그 말에 조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현수 씨 같아서요.”“그럼 전화해서 한 번 물어봐.”조유진은 휴대전화를 손에 꼭 쥐고 몇 초간 망설였다.누구나 사실 매일 모순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거 아니겠는가? 그 사람이길 바라면서도 또 아니기를 바라는...그때 조유진이 또 물었다.“저를 구해준 사람... 많이 다쳤나요?”엄창민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꽤 심한 것 같았어. 소방대원분이 들어오셔서 나는 그분들에게 안에 사람 한 명 더 있다고 얘기했거든. 죽지는 않은 것 같았어.”엄창민의 말을 듣던 조유진은 크게 심호흡하고 배현수에게 전화를 걸었다....한편 병실에 있던 배현수는 갑자기 휴대전화 화면에 뜬 조유진의 이름을 보고 저도 모르게 눈빛이 흔들렸다. 전화가 한참 울려도 배현수가 가만히 있자 옆에 있던 서정호가 오히려 안달이나 안절부절못했다.‘이러다 유진 씨가 전화를 끊으면 어떡하려고...’배현수는 천천히 휴대전화 통화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전화기 너머의 조유진은 배현수의 ‘여보세요’라는 단어에 순간 저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조유진은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대제주시를 떠난 지 불과 일주일밖에 안 지났지만 다시 듣는 배현수의 목소리는 너무 오랜만인 것 같았다. 전화기 너머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 떨리는 가슴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때 배현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유진을 불렀다.“유진아?”“지... 지금 통화 괜찮아요?”“응, 괜찮아.”그녀의 전화라면 언제 어디서든 항상 괜찮았다.조유진은 일부러 돌려서 물었다.“지금... 지금 어디예요?”자기를 구해준 사람이 배
하지만 옆에 있는 엄창민은 조유진의 모든 감정을 그대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자신을 위로한다고 해도 실망스러운 표정은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너희 두 사람 사이는 쌓인 게 많아서 더욱 힘든 거야. 놓지 못하는 거고. 나는 현수 씨가 너와 제일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 쌓인 걸 어떻게 해결할지는 전부 너에게 달렸다고 생각해. 환희야, 너도 그래서 외면하는 거 아니야? 어느 날 갑자기 그동안 쌓였던 게 한순간에 다 없어지면 그때는 정말 끝날까 봐.”조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허탈하게 웃었다.“창민 오빠, 오빠 대학교 때 심리학 전공했어요?”“내가 연애 경험은 별로 없지만 남녀의 감정이라는 게 그렇잖아. 누군가와 함께하려면 두 사람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헤어지는 건 한쪽만 모질게 마음만 먹으면 되는 거니까. 너와 현수 씨가 지금까지 이렇게 있는 건 아무도 진짜로 손을 놓을 생각이 없었던 거지. 만약 진짜로 끝난 사이였다면 네가 현수 씨에게 전화하지도 않았을 거고.”“저희 두 사람, 이렇게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헤어지는 게 나아요. 다른 사람들은 헤어져도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저와 현수 씨는 이런 사이로 지낼 수밖에 없어요. 그동안 있었던 일들 우리 둘 다 피하려고만 하고 있었어요. 대제주시에 있는 동안, 저희는 겉보기에만 괜찮아 보였지 사실 과거의 원한들은 절대 잊을 수도 잊히지도 않거든요. 괜찮다고 생각하다가도 어느새 서로의 얼굴을 보면 바로 예전의 생각들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요.”“너 방금 그 사람에게 이미 한 번 기회를 준 거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현수 씨가 원하지 않는 걸 어떡하겠어.”조유진은 코를 훌쩍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잘 됐어요. 잠깐이었으니까 저도 바로 제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고. 만약 현수 씨가 진짜로 성남에 왔더라면 제 과민반응이 또 심해졌을 거예요. 그러면 오히려 더 골치 아파졌을 거고.”이렇게 말하는 조유진은 자신이 정말 무책임해 보였다. 만약 진짜로 배현수에게 신세를 져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