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옆에 있는 엄창민은 조유진의 모든 감정을 그대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자신을 위로한다고 해도 실망스러운 표정은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너희 두 사람 사이는 쌓인 게 많아서 더욱 힘든 거야. 놓지 못하는 거고. 나는 현수 씨가 너와 제일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 쌓인 걸 어떻게 해결할지는 전부 너에게 달렸다고 생각해. 환희야, 너도 그래서 외면하는 거 아니야? 어느 날 갑자기 그동안 쌓였던 게 한순간에 다 없어지면 그때는 정말 끝날까 봐.”조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허탈하게 웃었다.“창민 오빠, 오빠 대학교 때 심리학 전공했어요?”“내가 연애 경험은 별로 없지만 남녀의 감정이라는 게 그렇잖아. 누군가와 함께하려면 두 사람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헤어지는 건 한쪽만 모질게 마음만 먹으면 되는 거니까. 너와 현수 씨가 지금까지 이렇게 있는 건 아무도 진짜로 손을 놓을 생각이 없었던 거지. 만약 진짜로 끝난 사이였다면 네가 현수 씨에게 전화하지도 않았을 거고.”“저희 두 사람, 이렇게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헤어지는 게 나아요. 다른 사람들은 헤어져도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저와 현수 씨는 이런 사이로 지낼 수밖에 없어요. 그동안 있었던 일들 우리 둘 다 피하려고만 하고 있었어요. 대제주시에 있는 동안, 저희는 겉보기에만 괜찮아 보였지 사실 과거의 원한들은 절대 잊을 수도 잊히지도 않거든요. 괜찮다고 생각하다가도 어느새 서로의 얼굴을 보면 바로 예전의 생각들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요.”“너 방금 그 사람에게 이미 한 번 기회를 준 거나 마찬가지야. 하지만 현수 씨가 원하지 않는 걸 어떡하겠어.”조유진은 코를 훌쩍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잘 됐어요. 잠깐이었으니까 저도 바로 제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고. 만약 현수 씨가 진짜로 성남에 왔더라면 제 과민반응이 또 심해졌을 거예요. 그러면 오히려 더 골치 아파졌을 거고.”이렇게 말하는 조유진은 자신이 정말 무책임해 보였다. 만약 진짜로 배현수에게 신세를 져 버리
강이진이 심미경 얼굴의 산소마스크를 건드리려는 순간, 중환자실의 문이 열렸다.강이찬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뭐 하는 거야?”“오빠, 왔어? 새언니 얼굴의 산소마스크가 삐뚤어져 있는 것 같아서. 제대로 해주느라고.”강이진은 억울한 척하며 말했다.심미경의 병상 옆으로 간 강이찬은 별 이상이 없는 것을 보고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나가 있어. 그리고 앞으로 여기 오지 마.”“어차피 나중에 오빠와 결혼할 건데 내가 와서 새언니 보는 게 어때서? 심미경도 우리 가족이야. 오빠, 심미경이 교통사고 난 이후로 나에게 너무 쌀쌀맞은 거 아니야?”강이진은 뾰로통한 얼굴로 한마디 불평을 토로했다.요즘 모든 일에 예민한 강이찬도 그녀의 말이 기분 좋게 들릴 리가 없었다.“너 예전에 미경 씨를 그렇게 괴롭혀 놓고 미경 씨가 너를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굳이 여기까지 들어온 이유가 뭐야? 일부러 미경 씨 자극하려는 거야?”“내가 뭘 괴롭혔다고 그래? 그냥 말로만 몇 마디 한 거지.”“됐어, 나가. 그만 떠들어. 미경 씨 쉬어야 하니까.”강이진은 입술을 깨물며 가까스로 화를 억눌렀다.심미경의 사고 이후, 그녀도 오빠의 태도가 돌변한 것을 느꼈다.예전에는 심미경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도 않았으면서 여기에 누워서 깨어나지도 못하니까 그제야 관심하고 있으니 말이다. 강이진은 중환자실을 나오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알았어, 나갈게. 그래 다들 나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하나밖에 없는 친오빠까지도 나에게 이러고 있으니.”그 말에 강이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여동생에 대해 어느 정도 실망은 했지만 어쨌든 그의 친동생이기 때문에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매일 술집이나 다니지 말고 시간이 나면 책이라도 좀 봐. 일도 좀 알아보고.”“알겠다고. 일은 알아보는 중이라고.”강이진이 중환자실을 나간 후, 심미경의 옆에 있던 강이찬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심미경이 사고가 난 후, 강이찬은 예전보다 부쩍 예민해졌다. 매일 병원과 회사 두 곳을 하루도 빠짐없이 다
이건 분명 강이찬의 가족 카드를 사용하여 자동인출기에서 4천만 원을 꺼낸 것이다.순간 강이찬은 눈썹을 찡그리며 전화를 걸었다.“내 신용카드로 4천만 원을 꺼냈어?”강이찬은 차가운 말투로 바로 물었다.그 말에 전화기 너머의 강이진은 간이 콩알만 해졌다. “오빠, 오빠가 집에서 나를 쫓아냈잖아. 아직 취직도 못 했는데 그럼 내가 노숙자들과 같이 길바닥에서 잘까? 나 매일 친구 집에서 잔단 말이야. 그렇다고 언제까지 친구 집에 있을 수는 없잖아? 나에게 일단 빌려줬다고 생각해. 취직하면 갚을 테니까.”사실 강이찬이 신경 쓰는 것은 이 4천만 원이 아니었다.예전부터 강이찬이 너무 오냐오냐한 탓에 여동생의 버릇은 이미 나빠질 대로 나빠졌다. 어디 이 4천만 원뿐이겠는가? 예전의 강이진은 2억을 쓴 적도 있었다.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뜬 후, 강이찬은 그녀가 가여운 마음에 적어도 물질적인 부분에서만은 하나뿐인 여동생을 푸대접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 사달라는 건 뭐든 아낌없이 다 사줬다.그러나 인제 와서 보니 그동안 너무 오냐오냐한 탓인지 강이진은 누구에게나 버릇없이 함부로 대했다. 강이찬은 다시 그녀를 바른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이미 배인 나쁜 습관들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밖에서 세를 맡는 게 한꺼번에 4천만 원씩이나 필요하지 않잖아? 도대체 어디에 이렇게 큰돈이 필요한 건데?” “오빠, 내가 4천만 원 쓴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소비 습관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고쳐? 돈을 잘 안 쓰던 사람에게 쓰라고 하는 건 쉽겠지만 나 같이 펑펑 쓰던 사람더러 갑자기 아껴 쓰라고 하면 그게 어디 그리 말처럼 쉽냐고? 아무리 내 생활비를 끊는다고 해도 내가 적응할 시간은 줘야 하지 않겠어? 게다가 고작 4천만 원이야. 예전에 4억 쓸 때도 별말 안 했으면서 지금은 왜 갑자기 이렇게 따지는 건데? 이제 결혼할 사람이 생겼다고 이 친동생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거야?”강이진은 강이찬의 약점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자기가 이 말을 하면 강이찬이
한편 전화를 끊은 강이진은 즉시 현금 4천만 원을 가방에 넣었다.사고를 낸 운전기사는 감옥에 수감 중이었지만 그 기사가 감옥에 들어가기 전, 강이진의 정보와 전화번호를 자기 아내에게 알려줬다. 그래서 운전기사의 아내는 매일이다시피 강이진에게 전화해 돈을 요구하며 귀찮게 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돈을 안 주면 강이진을 당장 고소하겠다고 했다. 그녀의 협박에 강이진은 어쩔 수 없이 돈을 들고 기사의 가족을 찾아갔다.돈만 주고 나면 그들은 이제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다.‘절대 나까지 끌어들일 생각하지 마!’ ...모자와 선글라스를 푹 눌러쓴 강이진은 돈 가방을 들고 그 집의 대문을 두드렸다.운전자 가족은 시내 중심의 어느 한 달동네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이 일대는 더럽고 지저분하며 대부분 2층짜리 낮은 건물들이라 집안에 화장실도 없어 주민들은 길 어귀의 공중화장실을 사용하고 있었다.문 앞을 지키던 진돗개는 낯선 얼굴을 보고 ‘멍멍’ 짖어댔다.곧바로 허름한 대문이 열리더니 잠옷 차림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한 중년 여성이 나왔다.이 중년 여성이 바로 사고를 낸 운전자의 아내였다.강이진을 보자마자 그녀는 매서운 눈빛으로 바로 물었다.“돈은?”“가방 안에.”중년 여성은 강이진 더러 들어오라는 듯 몸을 옆으로 비켰다. 뒤로 흘끔 돌아본 강이진은 뒤따라오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가방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가방 안에 있던 돈을 낡고 허름한 작은 소파에 전부 쏟아 내더니 거만한 얼굴로 말했다.“4천만 원이야. 일전 한 푼 모자라지 않으니 앞으로 더 이상 연락하지 마!”“너 때문에 내 남편이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생겼어! 당연히 네가 줘야 할 돈이야! 이거 고작 4천만 원이잖아! 그동안 일도 못 할 텐데 그 비용도 네가 책임져!”그 말에 강이진이 씩 웃더니 대답했다.“무슨 비용? 일개 기사가 하루에 벌면 얼마나 번다고! 4천만 원이면 감사한 줄 알아! 경고하는데 그 입 함부로 놀리지 마! 그리고 앞으로 연락하지 말고!
‘있는 집사람들에게는 체면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돈도 많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인색하지?’강이진은 마음을 가라앉힌 후, 길게 한 번 심호흡하고 말했다.“얼마나 원하는데? 한 번에 끝내! 구질구질하게 시간이나 끌지 말고!”“이봐 아가씨, 나도 당신과 시간 끌고 싶지 않아. 당신과 더 이상 엮이고 싶지도 않고. 이렇게 해, 2년간 일을 못 한 비용 1억. 그리고 우리 남편 출소하면 전과자 신분이니까 일자리 찾기도 어려울 거야. 그 정신적 피해 보상으로 1억. 그러면 총... 2억. 2억 주면 될 것 같아.”2억?!강이진은 그 중년 여성을 노려보며 말했다.“차라리 은행을 털지 그래?”중년 여성은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나라고 안 그러고 싶겠어? 할 수만 있다면 진작 털었겠지. 하지만 내가 은행을 털 때까지 경찰이 가만히 있을까? 이런 말 다 필요 없고 돈은 줄 거야 말 거야? 그것부터 말해.”“못 줘! 이 4천만 원이 전부니까 받든 말든 맘대로 해.”말하자마자 강이진은 바로 돌아섰다.그때 중년 여성이 뒤에서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남편에게 들었는데 너에게 돈 많은 친오빠가 있다지? 네가 돈을 안 주면 너의 친오빠를 찾아가서 달라고 하면 되겠네. 어차피 나는 돈만 받으면 되니까 누가 주든 다 상관없어!”순간 강이진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두 주먹을 불끈 쥔 강이진은 뒤돌아서 매서운 눈빛으로 중년 여성을 노려보며 말했다.“뭐라고? 그러기만 해봐 어디! 경고하는데 만약 우리 오빠를 찾아가면 이 줬던 돈도 다시 뺏을 거야! 알아서 해!”“그러면 너라도 2억을 줘야 할 거 아니야? 참는 것도 한계가 있어. 빨리 행동하는 게 좋을 거야!”협박을 당한 강이진은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 마땅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약점이 잡힌 이상 맞설 수도 없었다.“알았어. 2억, 약속 지켜. 그때 가서 또 더 달라고 귀찮게 하지 말고!”“아가씨, 그건 걱정하지 마. 돈만 받으면 내가 우리 가족들 데리고 여길 떠날
선유는 영상에서 쉴 새 없이 말하고 있었지만 조유진의 귀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배현수는 분명히 대제주시 없는데 그날 그에게 전화했을 때 왜 굳이 대제주시에 있다고 거짓말을 했을까?조유진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하다고 느껴졌다.선유가 아무리 말해도 조유진이 대답하지 않자 녀석은 소리 높여 그녀를 불렀다.“엄마!”“어?”“엄마, 아빠, 다들 대체 왜 그래? 아빠와 통화해도 계속 넋이 나가 있고 엄마도 내 말 안 듣고!”조유진은 뽀로통한 녀석의 얼굴을 보고 한마디 달랬다.“밀크티 안 마실래?”‘밀크티’라는 말에 순간 선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방금 양치했는데 마셔도 돼?”“내가 시켜줄게. 금방 도착할 거야. 도착하면 할머니보고 문 앞에서 받아달라고 해.”그 말에 선유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응, 응! 요 며칠 아빠가 집에 없으니까 엄마가 매일 한 잔씩 주문해 주면 안 돼?”단 것을 좋아하는 선유는 밀크티를 제일 좋아했다. 하지만 요즘 유치 교환 시기라 충치 때문에 치과도 자주 가고 있었다.늘 아이에게 엄격한 배현수는 선유에게까지 칼같이 요구했다. 그래서 배현수와 선유는 군것질 문제, 고양이 문제로 자주 싸우곤 했다.배현수가 집에 없자 선유는 꼬마 다람쥐처럼 입을 내밀며 조유진에게 부탁했다.“엄마, 나에게 밀크티 시켜준 거 아빠에게 말하지 마.”아빠가 집에 있을 때면 양치 후에는 아무것도 못 먹게 했다.아무리 배고프다고 해도 배현수는 절대 선유의 말을 듣지 않고 엄격하게 가르쳤다.“저녁 잘 먹었으면 지금 배가 안 고프지. 그러니까 밥을 먹을 때 딴청 피우는 습관 좀 고쳐!”조유진은 선유의 귀여운 모습에 심장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또 먹고 싶은 거 없어? 같이 주문해 줄게.”“진짜? 그래도 돼? 그럼 엄마, 나는 에그타르트와 치킨! 둘 다 먹고 싶어.”“알았어. 다른 간식은? 더 먹고 싶은 거 없어? 엄마가 좀 이따 인터넷으로 사서 택배로 보내줄게. 침대 밑에 숨겨 놓고 먹어. 아빠에게 들키지 말고.”
올린 글은 ‘열두 바늘 꿰맸다’였다.그리고 그 위에는 그날 다친 그의 팔 사진이 있었다.평소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는 조유진이라 오늘 처음으로 이 스토리를 보았다. ‘팔의 상처가 다 나았는지 모르겠네...’만약 배현수가 진짜로 성남에 있다면 그녀를 구한 사람이 분명 그였을 텐데...참다못한 조유진은 서정호에게 전화를 걸었다....한편 병원에 있던 서정호는 발신자 표시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배 대표님, 유진 씨에게서 온 전화인데 받을까요?”“받아.”서정호는 전화를 받자마자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여보세요. 유진 씨?”전화기 너머의 조유진이 직접 물었다.“현수 씨는 지금 어디 있어요?”순간 배현수를 바라본 서정호는 그의 눈빛을 바로 알아차렸다.“배 대표님은 지금 대제주시에 있습니다.”조유진은 서정호의 말을 믿는지 안 믿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한 마디 되물었다.“그래요?”“네, 유진 씨. 시간이 늦었는데 아직 안 주무셨네요?”“누구에게 바보처럼 속으니 잠이 안 오죠.”순간 서정호는 깜짝 놀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옆에 있는 배현수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선유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그렇다면 거짓말을 한 사람은 틀림없이 배현수와 서정호일 것이다.배현수가 입을 막 열려는 순간 조유진이 전화를 끊었다.서정호는 멍한 표정으로 배현수를 보며 물었다.“배 대표님, 유진 씨가 대표님이 성남에 있는 걸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저희가 같이 속여서... 지금 화난 거죠?”조유진과 배현수는 닮은 점이 있다. 화가 날수록 말투가 차분해진다는 것이다.배현수는 병상에 기댄 채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옆에 있던 서정호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배 대표님, 제가 다시 전화해서 유진 씨에게 얘기할까요?”“무슨 얘기?”아무리 얘기한다고 해도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이때 갑자기 배현수가 한마디 했다.“퇴원 수속 좀 해 줘.”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서정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배현
한편 퇴원 수속을 마친 서정호는 배현수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다.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 주차장에 도착하자 ‘딩동’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배현수와 서정호는 왼쪽 엘리베이터 문으로 나왔고 조유진은 고개를 숙인 채 오른쪽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조유진은 한달음에 입원동 6층에 도착했다.그는 바로 접수대로 달려가 물었다.“선생님, 배현수 환자 어느 병실에 입원해 있나요?”“배현수 환자분? 잠시만요.”몇 분 후, 간호사가 다시 그녀를 보며 말했다.“배현수, 그 외상환자... 615호에 있어요.”“감사합니다.”조유진은 인사를 하고 바로 615호로 뛰어갔다. 그러나... 병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지만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설마 미리 전화한 것 때문에 현수 씨가 눈치라도 채고 도망간 걸까? 나를 만나는 게 그렇게도 두려운 걸까?’조유진은 한참을 병실 앞에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돌아섰다.차를 몰고 병원 지하 주차장에서 나오는 순간 눈에 익은 검은색 폭스바겐 차량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조유진은 저 차가 며칠 전 줄곧 자기 뒤를 따라다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조유진이 그 차를 뒤따랐다. 그렇게 두 차는 앞뒤로 도로를 달리게 되었다. 하지만 달리는 방향은 공항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사실 이 차는 배현수가 성남에 온 후 렌트한 것으로 지금은 서정호가 운전해 렌터카 가게로 향하고 있었다. “배 대표님, 성남에 유진 씨 보러 오셨는데 스타일이... 아주 멋지네요.”그는 차마 ‘없어 보여요’라는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어 다른 단어로 에둘러 표현했다. 캐주얼한 점퍼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머리에는 검은색 스냅백 모자를 쓰고 폭스바겐을 타고 있으니... 그 억지스럽고 날카로운 눈빛을 가리고 체형만 보면 분명 대학교에 갓 입학한 새내기 대학생이라 할 것이다.서정호는 조유진이 배현수를 알아보지 못한 게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다. 렌터카 가게에 도착한 후, 배현수가 가게 밖에 서서 담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