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분명 강이찬의 가족 카드를 사용하여 자동인출기에서 4천만 원을 꺼낸 것이다.순간 강이찬은 눈썹을 찡그리며 전화를 걸었다.“내 신용카드로 4천만 원을 꺼냈어?”강이찬은 차가운 말투로 바로 물었다.그 말에 전화기 너머의 강이진은 간이 콩알만 해졌다. “오빠, 오빠가 집에서 나를 쫓아냈잖아. 아직 취직도 못 했는데 그럼 내가 노숙자들과 같이 길바닥에서 잘까? 나 매일 친구 집에서 잔단 말이야. 그렇다고 언제까지 친구 집에 있을 수는 없잖아? 나에게 일단 빌려줬다고 생각해. 취직하면 갚을 테니까.”사실 강이찬이 신경 쓰는 것은 이 4천만 원이 아니었다.예전부터 강이찬이 너무 오냐오냐한 탓에 여동생의 버릇은 이미 나빠질 대로 나빠졌다. 어디 이 4천만 원뿐이겠는가? 예전의 강이진은 2억을 쓴 적도 있었다.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뜬 후, 강이찬은 그녀가 가여운 마음에 적어도 물질적인 부분에서만은 하나뿐인 여동생을 푸대접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 사달라는 건 뭐든 아낌없이 다 사줬다.그러나 인제 와서 보니 그동안 너무 오냐오냐한 탓인지 강이진은 누구에게나 버릇없이 함부로 대했다. 강이찬은 다시 그녀를 바른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이미 배인 나쁜 습관들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밖에서 세를 맡는 게 한꺼번에 4천만 원씩이나 필요하지 않잖아? 도대체 어디에 이렇게 큰돈이 필요한 건데?” “오빠, 내가 4천만 원 쓴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소비 습관을 어떻게 하루아침에 고쳐? 돈을 잘 안 쓰던 사람에게 쓰라고 하는 건 쉽겠지만 나 같이 펑펑 쓰던 사람더러 갑자기 아껴 쓰라고 하면 그게 어디 그리 말처럼 쉽냐고? 아무리 내 생활비를 끊는다고 해도 내가 적응할 시간은 줘야 하지 않겠어? 게다가 고작 4천만 원이야. 예전에 4억 쓸 때도 별말 안 했으면서 지금은 왜 갑자기 이렇게 따지는 건데? 이제 결혼할 사람이 생겼다고 이 친동생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거야?”강이진은 강이찬의 약점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자기가 이 말을 하면 강이찬이
한편 전화를 끊은 강이진은 즉시 현금 4천만 원을 가방에 넣었다.사고를 낸 운전기사는 감옥에 수감 중이었지만 그 기사가 감옥에 들어가기 전, 강이진의 정보와 전화번호를 자기 아내에게 알려줬다. 그래서 운전기사의 아내는 매일이다시피 강이진에게 전화해 돈을 요구하며 귀찮게 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돈을 안 주면 강이진을 당장 고소하겠다고 했다. 그녀의 협박에 강이진은 어쩔 수 없이 돈을 들고 기사의 가족을 찾아갔다.돈만 주고 나면 그들은 이제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다.‘절대 나까지 끌어들일 생각하지 마!’ ...모자와 선글라스를 푹 눌러쓴 강이진은 돈 가방을 들고 그 집의 대문을 두드렸다.운전자 가족은 시내 중심의 어느 한 달동네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이 일대는 더럽고 지저분하며 대부분 2층짜리 낮은 건물들이라 집안에 화장실도 없어 주민들은 길 어귀의 공중화장실을 사용하고 있었다.문 앞을 지키던 진돗개는 낯선 얼굴을 보고 ‘멍멍’ 짖어댔다.곧바로 허름한 대문이 열리더니 잠옷 차림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한 중년 여성이 나왔다.이 중년 여성이 바로 사고를 낸 운전자의 아내였다.강이진을 보자마자 그녀는 매서운 눈빛으로 바로 물었다.“돈은?”“가방 안에.”중년 여성은 강이진 더러 들어오라는 듯 몸을 옆으로 비켰다. 뒤로 흘끔 돌아본 강이진은 뒤따라오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가방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그녀는 가방 안에 있던 돈을 낡고 허름한 작은 소파에 전부 쏟아 내더니 거만한 얼굴로 말했다.“4천만 원이야. 일전 한 푼 모자라지 않으니 앞으로 더 이상 연락하지 마!”“너 때문에 내 남편이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생겼어! 당연히 네가 줘야 할 돈이야! 이거 고작 4천만 원이잖아! 그동안 일도 못 할 텐데 그 비용도 네가 책임져!”그 말에 강이진이 씩 웃더니 대답했다.“무슨 비용? 일개 기사가 하루에 벌면 얼마나 번다고! 4천만 원이면 감사한 줄 알아! 경고하는데 그 입 함부로 놀리지 마! 그리고 앞으로 연락하지 말고!
‘있는 집사람들에게는 체면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돈도 많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인색하지?’강이진은 마음을 가라앉힌 후, 길게 한 번 심호흡하고 말했다.“얼마나 원하는데? 한 번에 끝내! 구질구질하게 시간이나 끌지 말고!”“이봐 아가씨, 나도 당신과 시간 끌고 싶지 않아. 당신과 더 이상 엮이고 싶지도 않고. 이렇게 해, 2년간 일을 못 한 비용 1억. 그리고 우리 남편 출소하면 전과자 신분이니까 일자리 찾기도 어려울 거야. 그 정신적 피해 보상으로 1억. 그러면 총... 2억. 2억 주면 될 것 같아.”2억?!강이진은 그 중년 여성을 노려보며 말했다.“차라리 은행을 털지 그래?”중년 여성은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나라고 안 그러고 싶겠어? 할 수만 있다면 진작 털었겠지. 하지만 내가 은행을 털 때까지 경찰이 가만히 있을까? 이런 말 다 필요 없고 돈은 줄 거야 말 거야? 그것부터 말해.”“못 줘! 이 4천만 원이 전부니까 받든 말든 맘대로 해.”말하자마자 강이진은 바로 돌아섰다.그때 중년 여성이 뒤에서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남편에게 들었는데 너에게 돈 많은 친오빠가 있다지? 네가 돈을 안 주면 너의 친오빠를 찾아가서 달라고 하면 되겠네. 어차피 나는 돈만 받으면 되니까 누가 주든 다 상관없어!”순간 강이진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두 주먹을 불끈 쥔 강이진은 뒤돌아서 매서운 눈빛으로 중년 여성을 노려보며 말했다.“뭐라고? 그러기만 해봐 어디! 경고하는데 만약 우리 오빠를 찾아가면 이 줬던 돈도 다시 뺏을 거야! 알아서 해!”“그러면 너라도 2억을 줘야 할 거 아니야? 참는 것도 한계가 있어. 빨리 행동하는 게 좋을 거야!”협박을 당한 강이진은 당장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 마땅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약점이 잡힌 이상 맞설 수도 없었다.“알았어. 2억, 약속 지켜. 그때 가서 또 더 달라고 귀찮게 하지 말고!”“아가씨, 그건 걱정하지 마. 돈만 받으면 내가 우리 가족들 데리고 여길 떠날
선유는 영상에서 쉴 새 없이 말하고 있었지만 조유진의 귀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배현수는 분명히 대제주시 없는데 그날 그에게 전화했을 때 왜 굳이 대제주시에 있다고 거짓말을 했을까?조유진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하다고 느껴졌다.선유가 아무리 말해도 조유진이 대답하지 않자 녀석은 소리 높여 그녀를 불렀다.“엄마!”“어?”“엄마, 아빠, 다들 대체 왜 그래? 아빠와 통화해도 계속 넋이 나가 있고 엄마도 내 말 안 듣고!”조유진은 뽀로통한 녀석의 얼굴을 보고 한마디 달랬다.“밀크티 안 마실래?”‘밀크티’라는 말에 순간 선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방금 양치했는데 마셔도 돼?”“내가 시켜줄게. 금방 도착할 거야. 도착하면 할머니보고 문 앞에서 받아달라고 해.”그 말에 선유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응, 응! 요 며칠 아빠가 집에 없으니까 엄마가 매일 한 잔씩 주문해 주면 안 돼?”단 것을 좋아하는 선유는 밀크티를 제일 좋아했다. 하지만 요즘 유치 교환 시기라 충치 때문에 치과도 자주 가고 있었다.늘 아이에게 엄격한 배현수는 선유에게까지 칼같이 요구했다. 그래서 배현수와 선유는 군것질 문제, 고양이 문제로 자주 싸우곤 했다.배현수가 집에 없자 선유는 꼬마 다람쥐처럼 입을 내밀며 조유진에게 부탁했다.“엄마, 나에게 밀크티 시켜준 거 아빠에게 말하지 마.”아빠가 집에 있을 때면 양치 후에는 아무것도 못 먹게 했다.아무리 배고프다고 해도 배현수는 절대 선유의 말을 듣지 않고 엄격하게 가르쳤다.“저녁 잘 먹었으면 지금 배가 안 고프지. 그러니까 밥을 먹을 때 딴청 피우는 습관 좀 고쳐!”조유진은 선유의 귀여운 모습에 심장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또 먹고 싶은 거 없어? 같이 주문해 줄게.”“진짜? 그래도 돼? 그럼 엄마, 나는 에그타르트와 치킨! 둘 다 먹고 싶어.”“알았어. 다른 간식은? 더 먹고 싶은 거 없어? 엄마가 좀 이따 인터넷으로 사서 택배로 보내줄게. 침대 밑에 숨겨 놓고 먹어. 아빠에게 들키지 말고.”
올린 글은 ‘열두 바늘 꿰맸다’였다.그리고 그 위에는 그날 다친 그의 팔 사진이 있었다.평소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는 조유진이라 오늘 처음으로 이 스토리를 보았다. ‘팔의 상처가 다 나았는지 모르겠네...’만약 배현수가 진짜로 성남에 있다면 그녀를 구한 사람이 분명 그였을 텐데...참다못한 조유진은 서정호에게 전화를 걸었다....한편 병원에 있던 서정호는 발신자 표시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배 대표님, 유진 씨에게서 온 전화인데 받을까요?”“받아.”서정호는 전화를 받자마자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여보세요. 유진 씨?”전화기 너머의 조유진이 직접 물었다.“현수 씨는 지금 어디 있어요?”순간 배현수를 바라본 서정호는 그의 눈빛을 바로 알아차렸다.“배 대표님은 지금 대제주시에 있습니다.”조유진은 서정호의 말을 믿는지 안 믿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한 마디 되물었다.“그래요?”“네, 유진 씨. 시간이 늦었는데 아직 안 주무셨네요?”“누구에게 바보처럼 속으니 잠이 안 오죠.”순간 서정호는 깜짝 놀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옆에 있는 배현수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선유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그렇다면 거짓말을 한 사람은 틀림없이 배현수와 서정호일 것이다.배현수가 입을 막 열려는 순간 조유진이 전화를 끊었다.서정호는 멍한 표정으로 배현수를 보며 물었다.“배 대표님, 유진 씨가 대표님이 성남에 있는 걸 이미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저희가 같이 속여서... 지금 화난 거죠?”조유진과 배현수는 닮은 점이 있다. 화가 날수록 말투가 차분해진다는 것이다.배현수는 병상에 기댄 채 굳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옆에 있던 서정호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배 대표님, 제가 다시 전화해서 유진 씨에게 얘기할까요?”“무슨 얘기?”아무리 얘기한다고 해도 두 사람 사이는 여전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이때 갑자기 배현수가 한마디 했다.“퇴원 수속 좀 해 줘.”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서정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배현
한편 퇴원 수속을 마친 서정호는 배현수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다.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 주차장에 도착하자 ‘딩동’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배현수와 서정호는 왼쪽 엘리베이터 문으로 나왔고 조유진은 고개를 숙인 채 오른쪽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조유진은 한달음에 입원동 6층에 도착했다.그는 바로 접수대로 달려가 물었다.“선생님, 배현수 환자 어느 병실에 입원해 있나요?”“배현수 환자분? 잠시만요.”몇 분 후, 간호사가 다시 그녀를 보며 말했다.“배현수, 그 외상환자... 615호에 있어요.”“감사합니다.”조유진은 인사를 하고 바로 615호로 뛰어갔다. 그러나... 병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지만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설마 미리 전화한 것 때문에 현수 씨가 눈치라도 채고 도망간 걸까? 나를 만나는 게 그렇게도 두려운 걸까?’조유진은 한참을 병실 앞에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돌아섰다.차를 몰고 병원 지하 주차장에서 나오는 순간 눈에 익은 검은색 폭스바겐 차량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조유진은 저 차가 며칠 전 줄곧 자기 뒤를 따라다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조유진이 그 차를 뒤따랐다. 그렇게 두 차는 앞뒤로 도로를 달리게 되었다. 하지만 달리는 방향은 공항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사실 이 차는 배현수가 성남에 온 후 렌트한 것으로 지금은 서정호가 운전해 렌터카 가게로 향하고 있었다. “배 대표님, 성남에 유진 씨 보러 오셨는데 스타일이... 아주 멋지네요.”그는 차마 ‘없어 보여요’라는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어 다른 단어로 에둘러 표현했다. 캐주얼한 점퍼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머리에는 검은색 스냅백 모자를 쓰고 폭스바겐을 타고 있으니... 그 억지스럽고 날카로운 눈빛을 가리고 체형만 보면 분명 대학교에 갓 입학한 새내기 대학생이라 할 것이다.서정호는 조유진이 배현수를 알아보지 못한 게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다. 렌터카 가게에 도착한 후, 배현수가 가게 밖에 서서 담배를
순간 조유진은 목이 턱 메어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눈도 시릴 정도로 아팠다.배현수는 조유진의 용기를 거절했다.조유진은 목구멍에서 맴돌던 ‘보고 싶어요’라는 말을 결국 내뱉지 못했다. 그의 대답에 조유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미안해요, 방해해서.”배현수의 확실한 거절 앞에 그녀는 더 이상 매달릴 수 없었다.말을 마친 조유진은 전화를 끊고 가속페달을 힘껏 밟았다. 그렇게 하얀색 차는 어둠 속을 뚫고 배현수와 점점 더 멀어졌다.기분이 극도로 안 좋은 조유진은 갑자기 밟은 브레이크에 저도 모르게 몸이 앞으로 쏠렸다. 조유진은 배현수가 자기를 포기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단지 그녀의 추측일 뿐이었다.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잡은 조유진은 머리를 핸들 위에 묻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심장이 너무 아파 온몸이 차가워졌고 손발이 저렸다. 사람은 괴로움이 극에 달할 때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게 된다.조유진은 스스로 자신을 계속 진정시켰다. 그녀는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늘 이렇게 해왔었다. 어렸을 때 로맨틱 드라마 속 남녀 주인공이 서로 말하지 않을 때면 그렇게 답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그녀가 이런 상황이 되어보니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사실 말을 해도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침묵 외에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것을... 오직 침묵만이 답이라는 것을...배현수는 진짜로 그녀의 뜻을 몰랐을까? 사실 배현수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한 번의 만남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한 번의 만남으로 서로에게 상처만 깊어질 거라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조유진은 배현수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할 자격도 자기를 기다려 달라고 할 자격도 없었다.그들 사이에는 피로 얽힌 원한이 있다. 그것은 단지 몇 마디 설명으로 무마할 수 있는 작은 오해가 아니었다.그때 조유진의 핸드폰이 울렸다.“여보세요?”전화기 너
배현수는 새벽 3시가 다 되어서야 대제주시로 돌아왔다.아빠가 집에 없는 사이 잔소리할 사람이 없자 선유는 자유의 시간을 한껏 즐기고 있었다. 밤낮이 거의 뒤바뀌다시피 생활한 녀석은 마당에 울리는 엔진 소리를 듣고 큰 눈으로 창밖을 두리번거리며 애니메이션을 껐다.아뿔싸!아빠가 갑자기?선유는 황급히 테이블에서 먹다 남은 밀크티, 에그타르트, 치킨을 치웠다. 하지만 양이 너무 많아 미처 다 치우기도 전에 배현수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선유는 테이블에서 수거한 군것질을 작은 몸으로 가리며 소리쳤다.“아빠! 왜 갑자기 돌아왔어요!”깜짝이야!“밤늦게까지 안 자고 뭐 해? 내가 며칠 집에 없는 사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선유는 몸을 좌우로 흔들며 최대한 몸 뒤에 숨긴 것들을 배현수에게 안 보여 주려 했다. “자고 일어났는데 목이 너무 말라서 물을 마시려고 내려온 거예요!”쓰레기통에 버려진 밀크티를 힐끗 본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밀크티를 그렇게 많이 마셨는데 목이 말라?”선유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작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아뿔싸, 몰래 먹다가 들켜 버렸다! 아빠가 또 반성문을 쓰라고 하겠지?’지난번에도 선유가 우유 맛 사탕을 몰래 먹은 게 들켜버려 배현수는 선유 더러 ‘우유 맛’을 손이 아플 때까지 백 번 넘게 쓰게 했다. 나중에 선유는 우유 맛 사탕만 보면 두려워 저절로 손을 움츠렸다. ‘아마 이번에는 밀크티를 백 번 쓰라고 할까?’어린 선유는 용기를 내어 아빠의 꾸지람을 들을 준비를 했다. 아빠 잘못했어요!하지만 선유가 말하기도 전에 배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늦었으니 양치하고 빨리 자.”“네.”선유는 눈만 멀뚱멀뚱 깜빡이며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아빠가 언제부터 이렇게 상냥해졌지?영리한 선유는 아빠가 발견하기 전에 얼른 쓰레기통을 집어 테이블 위의 쓰레기를 모두 쓸어 넣었다.“놔둬, 내일 아침 은숙 이모더러 치우라고 해.”“네.”선유는 쓰레기통을 내려놓고 태블릿을 안고 조용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