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퇴원 수속을 마친 서정호는 배현수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다.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 주차장에 도착하자 ‘딩동’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배현수와 서정호는 왼쪽 엘리베이터 문으로 나왔고 조유진은 고개를 숙인 채 오른쪽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조유진은 한달음에 입원동 6층에 도착했다.그는 바로 접수대로 달려가 물었다.“선생님, 배현수 환자 어느 병실에 입원해 있나요?”“배현수 환자분? 잠시만요.”몇 분 후, 간호사가 다시 그녀를 보며 말했다.“배현수, 그 외상환자... 615호에 있어요.”“감사합니다.”조유진은 인사를 하고 바로 615호로 뛰어갔다. 그러나... 병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지만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설마 미리 전화한 것 때문에 현수 씨가 눈치라도 채고 도망간 걸까? 나를 만나는 게 그렇게도 두려운 걸까?’조유진은 한참을 병실 앞에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돌아섰다.차를 몰고 병원 지하 주차장에서 나오는 순간 눈에 익은 검은색 폭스바겐 차량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조유진은 저 차가 며칠 전 줄곧 자기 뒤를 따라다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조유진이 그 차를 뒤따랐다. 그렇게 두 차는 앞뒤로 도로를 달리게 되었다. 하지만 달리는 방향은 공항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사실 이 차는 배현수가 성남에 온 후 렌트한 것으로 지금은 서정호가 운전해 렌터카 가게로 향하고 있었다. “배 대표님, 성남에 유진 씨 보러 오셨는데 스타일이... 아주 멋지네요.”그는 차마 ‘없어 보여요’라는 말을 입 밖에 낼 수가 없어 다른 단어로 에둘러 표현했다. 캐주얼한 점퍼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머리에는 검은색 스냅백 모자를 쓰고 폭스바겐을 타고 있으니... 그 억지스럽고 날카로운 눈빛을 가리고 체형만 보면 분명 대학교에 갓 입학한 새내기 대학생이라 할 것이다.서정호는 조유진이 배현수를 알아보지 못한 게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다. 렌터카 가게에 도착한 후, 배현수가 가게 밖에 서서 담배를
순간 조유진은 목이 턱 메어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눈도 시릴 정도로 아팠다.배현수는 조유진의 용기를 거절했다.조유진은 목구멍에서 맴돌던 ‘보고 싶어요’라는 말을 결국 내뱉지 못했다. 그의 대답에 조유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미안해요, 방해해서.”배현수의 확실한 거절 앞에 그녀는 더 이상 매달릴 수 없었다.말을 마친 조유진은 전화를 끊고 가속페달을 힘껏 밟았다. 그렇게 하얀색 차는 어둠 속을 뚫고 배현수와 점점 더 멀어졌다.기분이 극도로 안 좋은 조유진은 갑자기 밟은 브레이크에 저도 모르게 몸이 앞으로 쏠렸다. 조유진은 배현수가 자기를 포기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단지 그녀의 추측일 뿐이었다.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잡은 조유진은 머리를 핸들 위에 묻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심장이 너무 아파 온몸이 차가워졌고 손발이 저렸다. 사람은 괴로움이 극에 달할 때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게 된다.조유진은 스스로 자신을 계속 진정시켰다. 그녀는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늘 이렇게 해왔었다. 어렸을 때 로맨틱 드라마 속 남녀 주인공이 서로 말하지 않을 때면 그렇게 답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그녀가 이런 상황이 되어보니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사실 말을 해도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침묵 외에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것을... 오직 침묵만이 답이라는 것을...배현수는 진짜로 그녀의 뜻을 몰랐을까? 사실 배현수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한 번의 만남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한 번의 만남으로 서로에게 상처만 깊어질 거라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조유진은 배현수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할 자격도 자기를 기다려 달라고 할 자격도 없었다.그들 사이에는 피로 얽힌 원한이 있다. 그것은 단지 몇 마디 설명으로 무마할 수 있는 작은 오해가 아니었다.그때 조유진의 핸드폰이 울렸다.“여보세요?”전화기 너
배현수는 새벽 3시가 다 되어서야 대제주시로 돌아왔다.아빠가 집에 없는 사이 잔소리할 사람이 없자 선유는 자유의 시간을 한껏 즐기고 있었다. 밤낮이 거의 뒤바뀌다시피 생활한 녀석은 마당에 울리는 엔진 소리를 듣고 큰 눈으로 창밖을 두리번거리며 애니메이션을 껐다.아뿔싸!아빠가 갑자기?선유는 황급히 테이블에서 먹다 남은 밀크티, 에그타르트, 치킨을 치웠다. 하지만 양이 너무 많아 미처 다 치우기도 전에 배현수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선유는 테이블에서 수거한 군것질을 작은 몸으로 가리며 소리쳤다.“아빠! 왜 갑자기 돌아왔어요!”깜짝이야!“밤늦게까지 안 자고 뭐 해? 내가 며칠 집에 없는 사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선유는 몸을 좌우로 흔들며 최대한 몸 뒤에 숨긴 것들을 배현수에게 안 보여 주려 했다. “자고 일어났는데 목이 너무 말라서 물을 마시려고 내려온 거예요!”쓰레기통에 버려진 밀크티를 힐끗 본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밀크티를 그렇게 많이 마셨는데 목이 말라?”선유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작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아뿔싸, 몰래 먹다가 들켜 버렸다! 아빠가 또 반성문을 쓰라고 하겠지?’지난번에도 선유가 우유 맛 사탕을 몰래 먹은 게 들켜버려 배현수는 선유 더러 ‘우유 맛’을 손이 아플 때까지 백 번 넘게 쓰게 했다. 나중에 선유는 우유 맛 사탕만 보면 두려워 저절로 손을 움츠렸다. ‘아마 이번에는 밀크티를 백 번 쓰라고 할까?’어린 선유는 용기를 내어 아빠의 꾸지람을 들을 준비를 했다. 아빠 잘못했어요!하지만 선유가 말하기도 전에 배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늦었으니 양치하고 빨리 자.”“네.”선유는 눈만 멀뚱멀뚱 깜빡이며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아빠가 언제부터 이렇게 상냥해졌지?영리한 선유는 아빠가 발견하기 전에 얼른 쓰레기통을 집어 테이블 위의 쓰레기를 모두 쓸어 넣었다.“놔둬, 내일 아침 은숙 이모더러 치우라고 해.”“네.”선유는 쓰레기통을 내려놓고 태블릿을 안고 조용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아빠
조범은 감정이 북받친 얼굴로 말했다.“당장 날 만나러 오라고 해! 나는 유진이 친아버지야. 아무리 버르장머리가 없어도 내가 여기에 들어온 지 1년이나 되었는데 어떻게 한 번을 보러 오지 않아? 말이 돼?”“유진이가 배현수를 위해 친아버지를 감옥에 들여보냈어요. 유진이는 배현수에게 일편단심이에요. 그런데 걔가 당신을 만나러 오겠어요? 지난번 백화점에서 내가 그렇게 무릎 꿇고 부탁했는데도 꿈쩍을 안 하더라고요. 유진이에게 기대 같은 거 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다른 방법 좀 잘 생각해 봐요. 젊은 우리 아들, 몇 년씩 감옥에서 썩게 할 수는 없잖아요.”조범은 화가 너무 난 나머지 관자놀이의 핏줄까지 곤두서 있었다.“이 못된 년! 내가 나가면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빨리 방법 좀 생각해 보라니까요. 당신이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당신을 꺼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어쩌면... 순간 조범은 눈빛이 반짝이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장 부장을 한 번 찾아가 봐. 장 부장이라면 나를 꼭 도와줄 거야.”정설혜는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물었다.“믿을 만한 거예요?”“내 손에 숨겨 놓은 장부가 있어. 내가 아직 외부로 오픈하지 않았고. 이게 내 마지막 카드야. 한번 찾아가서 얘기해 봐. 만약 장 부장이 계속 그 자리에 있고 싶다면 분명 나를 꺼내 줄 방법을 생각해 내겠지.”“알겠어요. 한 번 찾아가 볼게요!”“설혜야, 우리 여기서 나가면 곧바로 해외로 이민 가자.”“집 재산... 진작에 전부 압류당했어요. 이민 갈 돈이 어디 있어요?”조범은 독기 서린 눈으로 말했다.“조유진! 이 못된 년! 감히 나를 배신하다니! 내가 그동안 걔에게 들인 돈이 얼만데! 여기서 나가면 내 노후는 걔가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니야?”“유진이 눈에는 배현수 그 자식밖에 없는데 언제 당신을 챙기겠어요? 걔에게서 돈 받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요!”“안 준다고? 흥! 주기 싫어도 줘야 해!”...한편, 강이진은 친구들에게 연락했지만 겨우 2, 3천만 원밖에 빌리지 못
강이진은 병원으로 가는 길에 불안함만 가득했다.‘왜 오빠는 나한테 묻지 않지? 심미경이 나를 실토할 정도로 아직 정신 차리지 못했나?’그녀는 더는 깊게는 생각하지 못하고 운전해서 바로 제일 병원으로 달려갔다....제일 병원.심미경은 중환자실에서 보름 가까이 지내다 이제 막 깨어나 VIP 병실로 옮겨졌다.“미경 씨, 이제 깨어났는데 아이 일은 잠시...”강이찬이 위로하기도 전에 심미경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아이요?”‘무슨 아이지?’강이찬은 멈칫하고 말았다.“차 사고 난 거 기억 안 나요?”심미경은 고개를 흔들더니 낯선 눈빛으로, 심지어 경계심을 품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누구세요? 저희 아는 사이에요?”“...”강이찬은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넋을 놓게 되었다.아무리 감정을 추슬러 보려고 해도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미경 씨, 정말 저 기억 안 나요?”심미경은 정말 기억이 안 나는지 진지하게 고개를 흔들었다.그야말로 복잡미묘한 감정이었다.전문의들은 심미경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심미경 씨 차 사고당했을 때 머리에 극심한 충격을 받으셔서 외부적인 충격과 대출혈 및피 공급부족으로 해마에 손상이 와 기억이 상실된 것 같습니다.”“혹시 치료 방법이 있을까요?”의사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사실대로 말했다.“있긴 하지만 차 사고에 유산까지 하셔서 신체가 허약한 상태에서 두 번째 수술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일단 약물치료를 받아보시고 상태가 좋아지는지 지켜보다가 별로 효과가 없으면 신체가 회복되는 대로 수술을 진행하셔도 됩니다.”강이찬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은 심미경이 쾌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치료 방법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지금 몸 상태는 어떤가요?”“큰 사고에 유산까지 더해져서 지금 많이 허약하신 상태입니다. 회복 기간이 필요하실 거예요. 이제 방금 깨어나셨기 때문에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으려고 애쓰지도 말고요. 스트레스를 받으면 회복이 어려울 것입니다.
강이진은 심미경을 만나지도 못하고 강이찬한테서 돈을 받지도 못했지만 돌아가는 길내내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심미경 깨면 뭐 어때. 어차피 기억하지 못해 오빠한테 말할 수도 없는데!’하지만 기쁜 마음도 잠시, 골치 아플 만한 전화 한 통이 걸려 와 전화를 받자마자 아예 욕설을 퍼부었다.“그만 좀 재촉해!”“강이진 씨,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제 2억 원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네? 줄 거야 말 거에야? 안 줘도 괜찮아. 당신 오빠한테 가서 달라고 하면 바로 줄 거니까.”강이진은 눈을 부릅뜨더니 말했다.“2억 원 쉽게 줄줄 알았어? 1년에 얼마나 번다고! 2억 원이 너한테는 얼마나 큰 돈인데! 인내심 좀 가져! 일을 그르치는 날엔 나랑 함께 죽을 줄 알아!”“그래,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더 줄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고, 약속 안 지키는 날엔 어떻게 되는지 한번 두고 보자고!”“기다려 봐!”강이진은 씩씩거리면서 전화를 끊었다....병원 병실 안.심미경과 강이찬은 서로 힐끔거리면서 어색하기만 했다.낯선 남자에게 무엇부터 질문해야 할지 몰랐다.강이찬은 불안해하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낯선 느낌에 심미경이 손을 빼려고 하자 이렇게 부드럽게 물었다.“미경 씨, 정말 저 기억 안 나요?”그는 어느 정도 기대감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랐지만 심미경은 손끝만 움찔할 뿐 여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저희 사이에... 아이가 있었어요?”그녀는 천천히 사실을 받아들이는 눈치였다.“저희 연애한 지 1년 가까이 되어가요. 사고 나기 전 임신을 했고 결혼까지 하기로 약속했는데...”심미경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저희 속도위반 결혼이었어요?”“...아니에요.”심미경이 궁금한 마음에 물었다.“저희... 서로 좋아했나요?”강이찬은 몇 초간 그녀를 바라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맞아요. 서로 좋아해서 결혼하기로 한 거예요.”사실 전에 있었던 일이 좋은 기억도 아니었기 때문에 강이찬은 어쩌면 그녀가 기억을 잃고 새로 시작하
사람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기 마련이었다.저녁, 심미경은 병실 침대에 누워 핸드폰 주소록을 보았다. 어떤 이름은 낯익다는 생각이들긴 했어도 누군지 도저히 기억나지 않았다.특히 조유진의 이름이 더 그랬다.애써 기억해 내려고 했지만 머리가 아파져 와 손으로 두드리려다 강이찬에게 제지당하고 말았다.“이마 상처 아직 낫지도 않았어요. 억지로 생각하지 말아요. 다 나았을 때까지도 기억나지 않으면 수술하면 되니까요.”“수술로 회복될 수 있어요?”강이찬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런데 지금은 신체가 너무 허약해서 두 번째 수술을 진행하기 어렵다고 하셨어요. 일단은 회복이 최우선이에요.”“조유진 씨가 누군지 아세요?”“갑자기 조유진 씨는 왜요?”강이찬은 그녀가 지금까지도 조유진에 대해 경계심을 품고 있는 줄 알고 굳이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심미경이 계속 캐물었다.“조유진 씨 아세요? 혹시 어떤 분이세요?”강이찬은 더는 숨기지 않으려고 했다.“사실 유진이는 저의 대학교 후배였어요. 배현수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걔 여친이었어요. 전에 저랑 싸우고 임신한 몸으로 혼자 뛰쳐나갔다가 저혈압으로 길바닥에 쓰러져있는 거 유진이가 살려줬어요. 그렇게 서로 알게 된 거예요.”“그렇구나. 글쎄 어딘가 익숙하다 했어요.”심미경은 차 사고당하기 전 조유진에게 전화했던 적이 있었다.조유진은 그녀가 자신한테 고마워하면서 식사 대접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했다.그러고 한밤중에 근처에서 만두를 사 오겠다고 차를 끌고 나갔는데 어째서인지 내비게이션에는 산성 별장이 찍혀있어 강이찬도 의아하던 찰나였다.하지만 아직 허약한 상태라 뭐라 더 물어보기도 그랬다.“비서한테 영양사를 알아보라고 했는데 특별히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먹어도 되는지 물어보게요. 유산 후에는 몸조리 잘해야 해요.”부드러운 남자한테 끌리지 않는 여자는 없었다. 특히나 가장 허약하고 의지할 곳이 필요할 때 말이다.자신이 누군지도 기억나지 않으면서 자신한테 잘해주는 이 남자를 보고 있자니
‘나는 기억상실 때문에 아이가 없어졌어도 별로 슬프지 않지만 강이찬 씨는? 모든 걸 기억하고 있잖아.’심미경은 미안한 마음에 그를 밀쳐냈다.“제 잘못이에요. 한밤중에 만두사러 가는 거 아니었어요. 그러면 차 사고도 당하지 않았을 거고 아이도...”강이찬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위로했다.“미경 씨만 괜찮으면 됐어요. 아이는 나중에 또 가지면 되니까요.”유산된 아이 언급에 두 사람은 표정이 씁쓸해지고 말았다.강이찬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있는 그녀의 손을 잡더니 화제를 돌렸다.“이거 제가 선물한 거예요. 맘에 들어요? 별로라면 퇴원해서 다른 거 사러 가요. 이참에 웨딩드레스도 피팅해보고요.”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심미경이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로 다정하기만 했다.그녀는 약지에 끼워져 있는 반짝반짝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쳐다보면서 다른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네, 맘에 들어요. 강이찬 씨...”“예전에는 저를 이렇게 부르지 않았어요.”“그러면 어떻게 불렀는데요?”“성을 빼서 불러줬어요.”심미경은 살짝 부끄러웠다.“이... 찬 씨?”강이찬은 그녀를 안더니 고개 숙여 입맞춤을 했다.결국 심미경은 이 스킨십에 잠재적 감정이 수면에 떠오르기 시작했다.기억이 상실되긴 했지만 자신이 이 남자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아니면 내가 왜 혼전임신을 했겠어? 많이 좋아해서 혼전임신도 괜찮다고 생각했을 거야.’한 사람은 기억 상실 후 가장 먼저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기 마련이었다.더군다나 강이찬이 자신을 극진히 챙겨주는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하지만 첫눈에 반한 사랑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성남시.지난번 배현수가 대극장에서 조유진을 구해주고 사라진 이후로 이 둘은 서로 연락한 적이 없었다.조선유에게 영상통화를 보냈을 때도 배현수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했다.조유진은 성행 그룹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배울 것도 많았기 때문에 일로 자신의 감정을 무마시키면 그나마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