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겹살 가게 안에는 사람이 오고 갔고 기름 냄새가 가득했다.엄창민은 처음으로 이런 가게에 와봐서 그런지 주문하는 것도 서툴렀다.조유진은 테이블 위에 있는 큐알 코드를 스캔하더니 몇 가지 장바구니에 담고는 핸드폰을 엄창민에게 건넸다.“창민 오빠, 먹고 싶은 거 장바구니에 담으면 돼요.” 엄창민은 메뉴판을 보더니 순진하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말했다.“M9은 소고기랑 육질이 아예 달라. 이미지처럼 생기지도 않았고, 가격이 이렇게 쌀 리가 없어. 먹을 수 있는 거야?”조유진: “...풉!”조유진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내뿜는 모습에 엄창민은 흠칫하더니 설명했다.“그게 아니라, 이 가게에서 신선하지 않은 소고기를 판매할가봐. 정말 이 가게에서 먹을 거야? 배탈 나면 어떡해?”조유진이 웃었다.“저는 이런 가짜 와규를 자주 먹었어요. 맛있기만 했지 아무런 문제도 없었어요.”“...”‘이런 가게에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었어. 창민 오빠 낯설어하네. 길거리 음식이나 먹을 걸 그랬나? 그러면 더 습관이 안 되겠지.’“창민 오빠한테는 더 좋은 것이 어울려요.”음식 가게든 사람이든 말이다.엄창민은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환희가 좋아하는 음식 나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난 원래 새로운 걸 도전하기 싫어해서 어느 음식점이 괜찮으면 계속 그 음식점에만 가서 먹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한다면 나도 새로운 거 도전할 마음이 있어.”“창민 오빠, 너무 나한테 맞춰줄 필요 없어요. 저희는 그냥 다른 사람이라 취미도 다르고, 입맛도 다르고, 습관도 다른 거예요.”“시도해 보려고. 네가 좋아하는 거 나도 좋아할지 어떻게 알아?”엄창민은 어딘가 조급해 보였다.조유진은 몇 초간 멈칫하더니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그러면 이따 이 집의 삼겹살을 드셔보세요.”불이 오르고, 엄창민은 정장 외투를 벗어 셔츠 소매를 걷더니 조유진을 위해 삼겹살을 구웠다.처음 해보는 일이라 서투르기만 했다.조유진은 그를 전혀 비웃지 않고 집게를 가져오더니 농담 식으로
“내가 괜찮다면? 네가 마음을 비울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면...”“평생 비울 수가 없다면요?”엄창민은 멈칫하고 말았다.몇 초간의 침묵을 깨고 엄창민이 먼저 물었다.“배현수가 그렇게 좋아? 평생 잊어버릴 수 없을 만큼?”“좋고 나쁜 걸 떠나서 저는 저 자신한테 확신이 없어요. 그 사람을 깨끗하게 지울 수 있을지. 깨끗이 지우기 전까지는 새로운 시작 안 할 거예요. 창민 오빠는 저의 생명의 은인이잖아요. 저는 오빠한테 미안한 짓을 할 수가 없어요. 해서도 안 되고요.”“환희야, 사실 내 마음을 계속 모른척해도 돼. 난 계속 기다릴 수 있어. 네가 배현수를 잊을 때까지...”“제가 싫어요.”조유진은 멈칫하더니 일부러 한마디 더 쏘아붙였다.“저는 현수 씨를 잊어버리지 않을 거예요.”조유진은 일부러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엄창민은 그대로 굳어버리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환희야, 꼭 그렇게 매정하게 거절해야겠어? 전에 배현수랑 불가능하다고 했잖아...”“맞아요. 현수 씨랑 불가능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랑은 더욱 불가능한 거예요. 창민 오빠, 혹시 감정도 배타성을 띄고 있는 거 알아요?”엄창민도 당연히 가까운 사이에 배타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런데 배현수랑 사실 6년 동안 떨어져 있었는데 아직도 배타성을 가지고 있어?”“네. 저는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저는 창민 오빠를 속이고 싶지 않았어요. 심적으로는 육체적으로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도 강한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는 건 전생에 현수 씨한테 빚진 것이 있거나, 제가 비정상일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저는 다른 사람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조유진의 말이 끝나자, 엄창민은 침묵을 지키더니 실성한 듯 웃었다.“나 심지어 배현수랑 싸워보지도 못하고 졌어. 그런데 난 배현수한테 진 것이 아니라 너한테 진 거야. 환희 네가 나한테 기회를 주지 않아서야.”“미안해요.”엄창민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내가
두 사람은 생수를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이때 한 훤칠한 키의 남자 역시 생수 한 병을 쥐더니 따라서 카운터로 향했다.그가 손에 쥐고 있는 이 생수병은 조유진이 만졌다가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은 것이었다.그렇게 그는 조유진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계속 뒤를 따랐다.조유진과 엄창민 사이가 어느 정도로 깊어졌는지는 몰랐지만 함께 슈퍼를 돌 정도로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배현수는 아주 가까운 사이에서만 가능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함께 슈퍼를 돌면서 물건을 사는 것은 한 사람의 취미와 일상생활이 보이기 때문에 조유진 이외의 사람과 슈퍼를 돌 일이 없었다.조유진과 헤어진 이후로 슈퍼에도 가지 않았고, 생활용품은 모두 서정호에게 맡겼었다.송진연한테서 MECT 치료를 받으려고 했지만 병실 침대에 눕자마자 도망치고 말았다.여러 차례 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모두 수신 거부하고 밤중에 성남으로 달려왔던 것이다.배현수는 이대로 포기할 수가 없어 조유진과 엄창민이 도대체 어디까지 발전했는지 직접 성남에 와서 확인하고 싶었다.그저 엄창민이 자신보다 조유진을 더 많이 좋아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엄창민이 강이찬과 같이 그저 조유진의 외모에 혹해 만날까 봐 두려웠다.조유진은 자타공인의 미인이었기 때문이다.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조유진에게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첫사랑 이미지가 있었다.강이찬이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그가 조유진을 좋아한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조유진을 사랑하는 정도에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배현수는 그렇게 이 둘의 뒤를 따라다니게 되었고, 시선은 오로지 조유진만 바라보고 있었다.텔레파시가 통해서인지, 미행하는 내내 조유진은 계속 뒤돌아보았고, 배현수는 계속 피했다.배현수는 오늘 이상하리만큼 스타일이 평소와 달랐다.조유진은 그런 그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볼캡과 마스크를 쓰고 있어 피하지 않는다고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차에 올라타기 전, 엄창민은 자꾸만 뒤돌아
조유진이 유리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 발걸음을 멈추니, 뒤에 있던 사람도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이때 엄창민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더니 물었다.“뭘 보고 있어? 얼른 들어가자. 10분 뒤면 시작해.”조유진이 뒤돌아 확인하려고 했을 때, 그 사람은 이미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연주회 감상하러 온 사람이겠지.’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조유진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갔다.이 사람은 블랙 볼캡에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다크 그레이색 후드를 입고 있었으며 후줄근해 보이긴 했어도 깔끔해 보였다.평소에 도도한 모습의 배현수와는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하지만 키가 크고 다리가 긴 것이... 체형은 똑같아 보였다.그가 옆을 지나쳤을 때 조유진은 은은한 침목향의 담배 냄새를 맡게 되었다.배현수는 조유진이 침목향을 사준 이후로 계속 사용하고 있었다.조유진은 그의 뒷모습을 보고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는 느낌에 본능적으로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현수 씨!”이 외침에 엄창민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앞에서 걷고 있는 그는 역시나...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그저 아무렇지 않게 앞으로 걸어가더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내가 잘못 봤나?’엄창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배현수였다면 모른척할 리가 없겠지.”‘만약 정말 배현수였다면, 평소에 했던 짓을 봤을 때 진작에 환희를 끌고 갔겠지. 저번에 대제주시 공항에서도 대놓고 뺏어갔잖아. 이름까지 불렀는데 모른척할 리가 없어.’...엄창민과 조유진이 극장으로 들어가자 연주회가 바로 시작되었다.두 줄 뒤에 앉은 배현수의 자리에서는 바로 조유진이 보였다.하지만 조유진은 고개 돌릴 일이 없었다.고개를 돌린다고 해도 배현수가 보일 리는 없었다.루커스는 조유진이 어릴 때부터 몇십 년 동안 좋아했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조유진이 18살 되던 해, 루커스가 유럽 순회공연을 하고 있을 때 목이 빠져라 기대하면서 물은 적이 있었다.“우리 언제 루커스 유
배현수는 조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내 전부 재산이야. 나중에 월급도 이 계좌로 들어올 거야. 비밀번호는 너의 생일. 뭐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할 필요도 없이 그냥 긁으면 돼. 그런데 매달 내 용돈과 담뱃값은 남겨줘야 해. 나머지는 다 네 거야.”조유진은 감동해서 두 눈이 붉어졌고 그의 목을 끌어안더니 울먹이면서 말했다.“그래도 아직 대답하지 않았잖아요.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이건 아무것도 아닐 거잖아요.”배현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유진아, 난 마음이 쉽게 안 변해. 난 너를 잃는 게 두려워. 그래서 마음도 안 변할 거야.”배현수는 맞는 말만 하는 사람이라 영원하다면 영원한 것이었다.그래도 조유진이 믿지 않을까 봐 말을 덧붙였다.“2년 후 네가 법적으로 혼인신고 가능한 나이가 되면 우리 바로 혼인 신고하러 가자. 응?”“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그때면 저는 고작 20살인데, 현수 씨한테 시집가야 해요?”“유진아.”배현수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말했다.“나랑 결혼 안 하면 누구랑 할 건데?”“...”그때 조유진은 어려서 혼인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그저 배현수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결혼해도 마음이 변할 수 있잖아요. 법률은 결혼 혹은 이혼만 상관했지 현수 씨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잖아요.”배현수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더니 조유진의 얼굴을 꼬집으면서 말했다.“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이혼할 생각부터 하고 있어? 유진이는 정말 대단해.”“...아파요!”“아픈 건 아네. 일단 결혼했으면 이혼할 수 없는 거야. 이혼하려고 하면 더 아프게 할거야.”조유진은 그의 목을 꽉 깨물더니 말했다.“현수 씨는 왜 복수심이 그렇게 강해요?”“나를 뭐 하루 이틀 봐?”배현수는 그녀를 품에 와락 안더니 진지하게 말했다.“유진아, 난 마음이 안 변해. 결혼하면 내 수입과 재산 다 네 것으로 만들 거야. 똑같이 너도 날 버리면 안 돼.”이때 조유진은 그의 품에 안겨 손가락으로 목젖을 어루만지더니 장
아이를 낳지 않아도 되었었다. 마음이 아파서 조유진에게 출산의 고통을 맛보게 하고싶지 않았다.그때 당시 조유진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차마 잠자리를 가지지 못해 동거했을 때 얼마나 냉수마찰을 하면서 진정시켰는지 몰랐다.그는 늘 조유진의 이마에 키스하면서 이렇게 말했다.“아프면 안 해도 돼.”그때까지만 해도 조유진과 오래 만날 거라는 생각에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감옥에 간 이후로...조유진은 18살에 임신하고, 아이를 낳고,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6년 동안 싱글맘으로 살았었다...약속했던 모든 것들이 바사삭 깨지고 말았고 모든 일이 모두 정상을 벗어나고 말았다...조유진을 그렇게 아꼈지만 결국엔 고생이란 고생은 다 맛보게 한 것이었다.이제는 성숙해지고, 강해져서 더는 애교도 부리지 않았고, 또 마음이 변할 건지와 같은 유치한 질문도 하지 않았다. 배현수는 옛날로 돌아가고 싶었다.조유진이 예전처럼 목에 매달려 마음이 변할 건지, 자신을 영원히 사랑할 건지, 자신을 버릴 건지 계속 물어봐 줬으면 했다.그러면 한 번이고 두 번이고 단호하게 알려줬을 것이다.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이고, 영원히 사랑할 것이며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하지만 조유진은 더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뒷좌석에 앉은 배현수는 살짝 고개를 쳐들어 어두운 불빛 속에서 조유진만 쳐다보았다.루커스의 연주를 함께 보았지만, 사이에 두 줄이라는 간격이 있을 뿐이었다.조유진은 무대를 보고 있었고, 배현수를 그녀를 보고 있었다.루커스의 연주는 그야말로 완벽했지만 조유진은 집중할 수가 없었다.그렇게 기대했던 연주회를 몇 년이 지나 드디어 보게 되었지만 옆에 앉은 사람이 배현수가 아니라는 느낌에 아쉽기만 했다.조유진은 자신의 감정을 들키기 싫어서 몰래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엄창민이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눈물범벅이 되고 말았고, 그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묵묵히 휴지를 건넸다.“이걸로 닦아. 메이크업이 번지면 안 되잖아.”“고마워요.”연주회가
극장 내, 화재 연기가 피어오르고 비상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극장 밖을 나온 배현수는 안에서 사람들이 작은 비상문을 비집고 달려 나오는 것을 보았다.그중에는 조유진이 없었다.갑자기 발생한 이유 모를 화재에 아직 구조대원도 도착하지 않은 상황이었다.현장은 순식간에 공포감에 휩싸이게 되었다.배현수는 사람들이 빠져나오는 방향을 거슬러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이때 한 사람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불났어요! 들어가지 마세요!”“뭐 하는 거예요? 빨리 나가요! 여기서 길 막고 계시지 말고!”하지만 배현수는 그래도 위험을 무릅쓰고 안으로 달려 들어가면서 조유진의 이름을 외쳤다.“유진아!”아무리 불러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극장 내, 불씨는 점점 커졌고 배현수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조유진은 쓰러져있었고 그옆에는 그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는 사람이 서 있었다.배현수는 그 사람에게 덮치자 두 사람은 뒤엉켜 버리고 말았다.배현수는 신속이 상대방이 총을 쥐고 있는 손목을 비틀어 총구를 돌렸고, 총알은 천장을 향해 날아가게 되었다.이렇게 작은 권총의 탄창에는 일반적으로 6, 7알의 총알이 들어있었다.상대방 역시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 손목 힘이 장난 아녔다. 그는 붙잡힌 오른손에 쥐고 있던 총을 떨어뜨려 오른발로 차서 왼손으로 잡더니 배현수의 머리를 겨냥했다.배현수가 피하자 총알은 그의 볼캡을 스쳐 맞은편 벽을 적중하고 말았다.상대방의 왼쪽 손목을 잡았을 때, 또 두 발을 쏘게 되었다.한 발은 앞에 있는 연주대를 적중했고, 다른 한발은 오른쪽에 있던 스포트라이트를 적중하게 되었다.불빛이 환해지더니, 배현수는 순식간에 업어치기로 상대방을 제압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저 멀리 걷어차 버렸다.불씨가 점점 커지고...극장 상방에 있는 샹들리에가 조유진 머리 위에서 곧 떨어질 듯이 흔들거리고 있었다.상대방은 배현수가 조유진을 쳐다보고 있는 틈을 타 주먹으로 복부를 힘껏 쳐서 제압을 벗어나게 되었다.스르륵!샹들리에가 떨어지려
깜짝 놀란 엄창민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배현수를 바라봤다.저 사람이 설마 배현수?엄창민은 어쩌면 자기가 잘 못 보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똑똑히 보려고 할 때 진료실에 들어가는 조유진이 눈에 띄었다.간호사가 엄창민에게 진단서를 건네주며 물었다.“환자분과 관계가 어떻게 되죠?”“오빠예요.”“네, 이거 갖고 가서 병원비 내시면 됩니다.”엄창민은 서둘러 접수를 마치고 돈을 냈다.한편, 배현수는 이미 수술실에 실려 들어갔다....VIP 병동.조유진은 쓰러지면서 연기까지 마시는 바람에 폐에 문제가 생겨 수액 여러 병을 맞고 나서야 겨우 의식을 되찾았다.그녀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다음 날 아침이었다.조유진은 눈을 뜨자마자 자기 병상 주위로 여러 명이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았다.엄준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환희야, 이제 정신이 들어?”엄창민은 조유진이 눈을 뜬 것을 보고 물었다.“의사를 불러올게.”도 집사는 조유진이 누워있는 침대의 상체를 세웠다.의사도 병실에 들어와 다시 한번 검사했다.“어제 환자분이 흡입한 것은 아이소플루레인이라는 불소를 지닌 흡입성 마취제의 일종입니다. 다행히 너무 많이 흡입한 게 아니어서 지금쯤 약효가 다 빠졌기에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말을 한 의사는 조유진을 한번 보더니 물었다.“다른 데 더 불편한 건 없으세요?”조유진은 약간 어지러운 듯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조금 어지럽고 기억이 잘 안 나요.”“정상적인 현상입니다. 오후쯤 되면 괜찮아질 거예요. 이 수액 다 맞으시면 퇴원하셔도 됩니다.”그 말에 옆에 있던 엄창민이 물었다.“며칠 더 지켜보지 않아도 될까요?”“네, 괜찮아요. 엑스레이나 검사한 사진 다 확인했는데 별문제가 없습니다.”의사가 나가자 조유진이 엄창민을 보며 물었다.“창민 오빠, 어제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제 입과 코를 막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로 기억이 없어요... 아마 그 후로 의식을 잃고 기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