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야항 바에서 배현수는 자리에 앉아 술 한 세트를 주문했다.열 잔을 마신 그는 목이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옆에 있던 서정호가 그런 그의 모습에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배 대표님, 팔의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는데 이렇게 독한 술을 마시면 상처 회복에 좋지 않아요.”그 말을 들은 배현수가 차가운 얼굴로 한마디 툭 내뱉었다.“마실래?”“저... 저는 이따가 운전해야 해서 마시지 않겠습니다.”게다가 곤드레만드레 취한 상태로 한밤중에 집에 돌아가면 분명 와이프가 화낼 거예요.하지만 서정호는 그다음 말을 할 수 없었다.조유진은 내일 아침 성남으로 돌아갈 예정이고 배 대표는 이제 아내가 없기 때문이다. “안 마실 거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네...”배현수는 오늘 정말 죽도록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힘들 때일수록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마시면 마실수록 오히려 정신이 더 맑아지고 있었다.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느끼는 이 아픔은 더 말할 것 없이 고통스러웠다.그는 술잔을 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술은 빠른 속도로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고 도수 높은 술 때문에 위가 당장이라도 불타오를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알코올로 끊임없이 모든 장기를 마비시켜야만 심장이 그나마 통증을 덜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한잔 또 한잔, 몇 잔을 마셨는지도 모른 채 그는 끊임없이 들이켰다.이때 옆에 있던 서정호가 한마디 했다.“배 대표님, 열여덟 번째 잔이에요. 이러다 위가 다 망가지겠어요. 더 마시면 진짜로...”응급실에 갈 수도 있어요.배현수는 손에 잔을 쥔 채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내가 죽으면 유진이가 안 가지 않을까?”서정호는 배현수의 물음에 순간 멈칫했다.그는 배현수가 목숨까지 걸 만큼 이런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무슨 일이 생기면 조유진 씨가 슬퍼할 거고 조유진 씨뿐만 아니라 선유도 많이 슬퍼할 거예요.”만약 예전의 배현수였다면 그는 분명 이 하찮은 목숨으로 조유진을 붙잡으려 했을 것이다. 어쩌면 강제로 조유진을 가두려
서정호는 서둘러 우산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배 대표님, 팔 상처가 아직 낫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비를 맞으면 감염될 수 있어요! 얼른 차에 타세요!”서정호는 검은 우산으로 배현수를 향해 덮치는 비바람을 막았다.그러나 배현수는 자리에 선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7년 전, 유진이가 법정에서 나를 지목했을 때도 나는 한 번도 유진이를 잃을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어. 나만 유진이 미워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언제든 내가 돌아보면 유진이는 분명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릴 거로 생각했어.”“조유진 씨가 생각이 짧아서 그러는 걸 수도 있잖아요. 나중에 대표님을 이해하면 다시 돌아올 거예요...”그 말에 배현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서정호, 유진이가 더 이상 나를 안 봐. 유진이에게 이제 나는 없어.”“배 대표님, 제 생각에 조유진 씨는 여전히 대표님을 사랑해요.”서정호는 그저 이런 말로 그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 여느 때보다 정신이 맑은 배현수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사랑만으로는 이제 안돼.”그녀가 배현수를 사랑하려고 진심으로 원해야만 소용이 있다.만약 그녀에게 다가가기까지 백 걸음이 필요하다면 그래서 그녀가 한 걸음, 아니 딱 반걸음만 앞으로 내디뎌 준다면 배현수는 남은 걸음을 기꺼이 걸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반걸음이 없는 한, 배현수가 아무리 백 걸음, 천 걸음을 걸어도 결국 두 사람은 이어질 수 없다. ...비 오는 밤, 흰색의 작은 벤츠 한 대가 산성 별장으로 가고 있었다.이때 심미경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힐끗 바라보니 강이찬에게 온 전화이다.심미경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이찬 씨?”“나 방금 집에 도착했는데 미경 씨 어디예요? 마당에 차도 없네요.”이렇게 늦은 밤, 그녀는 어디로 간 걸까?심미경은 솔직히 말할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강이찬이 그녀의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누가 자신의 친여동생이 살인범이라는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대형 트럭의 주인은 곧 차에서 내렸다.그는 깨진 흰색 벤츠의 차 유리창 사이로 손을 넣어 심미경의 인중에 갖다 대 호흡을 확인했다. “아직 숨 쉬어. 안 죽었어!”“죽여.”“뭐라고?”멀지 않은 곳에서 차 안에 앉아 있는 강이진은 독기 서린 눈으로 외쳤다.“죽이라고!”그러자 대형 트럭 주인은 머뭇거리며 그녀의 말을 거절했다.“나는 못 해. 너나 해!”술을 마시고 트럭을 몰다가 교통사고를 내 사람을 친 건 기껏해야 음주운전 사고일 뿐이다. 상대방이 고소해 처벌받는다고 하더라도 얼마 선고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이 여자를 죽이면 이것은 명백히 살인이다.“너 진짜!”강이진은 화가 나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려 했다.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경찰차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란 트럭 주인은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경찰이 왔어! 당신도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게 좋을 거야. 만약 일부러 사람을 죽이려고 사고를 낸 게 들키기라도 하면 상황이 달라져. 그리고 죽이고 싶으면 네가 해! 괜히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트럭 주인의 말에 강이진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이것저것 전부 신경 쓸 수 없는 상황, 지금은 우선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심미경은...그녀를 생각한 강이진의 눈은 점점 더 음흉하고 포악스러워졌다.흰색 차가 그렇게 심하게 부딪쳤는데 아무리 숨이 남아있다고 해도 구급차가 오기 전에 이미 죽었을 것이다. 아, 참, 배 속에 아이가 있었지...심미경의 명이 정말 끈질기지 않은 한, 살아남기는...여기까지 생각한 강이진은 핸들을 돌려 그곳을 떠났다. ...늦은 밤, 제일병원.강이찬이 수술실 앞에 도착했을 때, 심미경은 이미 수술실 안에서 수술 중이었다. 담당 직원이 수술 동의서를 가지고 와서 그에게 사인하라고 했다.“심미경 씨 가족 되시나요?”“네, 약혼자예요.”“여기 수술 동의서에 사인 좀 부탁합니다. 환자분 지금 많이 다치셨어요.”순간 강이찬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급하다는 의사의 말에 다급히 수술 동의서에 사인
강이찬은 심지어 서점에 가서 임산부와 태아에 관한 책을 잔뜩 사놨다. 하지만 이런 책도 아직 미처 읽지 못했는데...아이가 갑자기 사라졌다.그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었지만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어른만은 꼭 살려주세요!”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의사가 간 후 강이찬은 옆에 있는 벤치에 주저앉았다. 그는 온몸이 마치 차가운 얼음 속에 갇혀 있는 것 같았고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아 뼛속까지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조용한 수술실 밖에서 그의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그는 발신자 표시도 보지 않고 바로 전화를 받았다.“오빠, 나 이제 술집에서 막 돌아왔는데 왜 집에 아무도 없어? 오빠 심미경이랑 어디 간 거야?”강이찬은 몇 초 동안 잠자코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경 씨가 지금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서 수술 중이야.”“뭐라고? 심미경은 괜찮아?강이진은 매우 놀란 기색이었다.“아이는 못 지켰고 미경 씨는 아직 수술 중이야.”강이진은 걱정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오빠, 너무 슬퍼하지 마, 나도 가서 오빠 옆에 있을까?”“아니, 됐어.”강이찬은 말 한마디만 툭 내뱉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에게는 지금 시간이 없다. 강이진이 뭘 하든 상관할 기분도 아니다.그는 고개를 들어 불이 켜진 수술실을 바라보았다. 그는 오직 심미경의 수술만 무사히 잘 끝나길 바랄 뿐이다.그녀가 이 고비를 잘 이겨 낼 수만 있다면 앞으로 강이찬은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고 할 것이다....전화를 끊은 강이진의 심장은 쿵쾅쿵쾅 사정없이 뛰고 있었다.그녀는 휴대전화를 손에 꼭 쥔 채 오랫동안 긴장된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했다. 심미경 배 속의 애는 이제 죽었고 만약 어른까지 같이 죽으면... 조유진 어머니의 죽음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심미경, 이 여자는 좋은 말로 할 때 안 듣더니 꼭 이렇게 피를 봐야만 직성이 풀리나... 쓸데없이 참견하지만 않았어도 그녀를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을 텐데...모두 그녀 스스로 자초한 일이
한편 병원에 있는 배현수는 방금 진통 소염 수 링거 두 병을 맞았다.병상에 누워있던 배현수가 일어나려고 하자 서정호가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배 대표님, 상처 좀 더 지켜보다가 가시죠.”조금 이따 조유진 씨가 병원에 올 텐데 배 대표님이 안 계시면 안 되잖아요. 헛걸음하게 만들면 안 되니까...서정호는 목구멍의 말을 삼키고 있었고 배현수는 서정호의 말이 마치 시어머니 잔소리처럼 느껴졌다.“지켜보긴 뭘 지켜봐, 안 죽어.”“배 대표님... 정말이에요. 만약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요?”순간 배현수는 까만 눈동자로 서정호를 노려보며 말했다.“지금 나를 저주하는 거야?”그 말에 서정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감히?배현수가 자리를 박차고 가려고 할 때 지나가는 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다.“어디 가시는 거죠?”“링거를 다 맞았으니 이제 가도 되죠?”“팔의 상처는 치료 안 하고 가실 거예요? 상처에 물이 닿아 많이 심각해졌을 텐데. 이 팔 이제 필요 없으신 거예요?”옆에 있던 서정호가 다급히 간호사의 말을 거들었다.“네, 배 대표님. 간호사님이 상처를 다시 봐주실 수 있게 여기 앉으세요. 그러다가 진짜로 한 쪽팔 못 쓰시게 되면 조유진 씨가 얼마나 자책하겠어요.”똑똑한 서정호는 이런 상황에 조유진을 언급하면 분명 배현수가 말을 듣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아니나 다를까 배현수는 정색한 얼굴로 원하지 않는 표정을 지었지만 다시 병상에 앉았다. 간호사는 의료용 장갑을 끼고 그의 팔에 있는 거즈를 떼어냈다. 상처 자체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는데 물까지 닿았다. 게다가 봉합된 부분도 약간 벌어져 있어 그 안에 붉은 살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상태에 간호사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일단 상처 주의를 깨끗이 닦아낸 다음에 약 한 번 바꿔 드릴게요. 그리고 수술 밴드 붙여드릴 테니까 절대 물에 닿으면 안 됩니다. 안 그러면 분명 후유증이 남을 거예요. 일부러 상처를 덧나게 하는 이유라도 있어요? 스파
서정호가 몸을 옆으로 돌려 시신을 피해서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귀에 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서 비서님!”서정호가 고개를 들어보니 그곳에는 조유진이 서 있었다.“유진 씨, 오셨어요?”조유진은 배현수가 교통사고가 났다는 말에 외투만 대충 걸치고 병원으로 달려왔다.평소 시내 안에서의 제한 속도는 80, 90킬로 정도였지만 오늘 밤 그녀는 100킬로를 넘나드는 속도로 이곳까지 단숨에 달려왔다.슬리퍼를 신은 채 서 있는 그녀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아마 차에서 내리자마자 이곳까지 바로 뛰어온 것 같았다. “유진 씨, 배 대표님은...”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시신을 운구하던 의료진이 지나가면서 한마디 했다.“다들 옆으로 비켜주세요!”순간 조유진의 시선은 하얀 천으로 덮인 시신을 향했다.서정호가 시신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모습에 그녀는 이 시신이 배현수라고 확신했다.조유진은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고 흰 천으로 덮인 시신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순간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현수 씨...”조유진이 시신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자 서정호는 그녀와 시신을 번갈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유진 씨가...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조유진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하얀 손으로 시신이 놓여있는 침대를 잡았다.“저... 마지막으로 이 사람 한 번만 볼 수 있을까요?”의료진이 물었다.“사망자 가족분 되십니까?”“네...”아이의 아빠예요.의료진도 이런 상황은 자주 겪었던지라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그럼 빨리 마지막 인사하세요. 그리고 바로 영안실로 모실게요.”여기에 너무 오래 머무르면 응급환자들의 이동에 방해가 된다.조유진은 침을 몇 번 삼키고 나서야 얼굴에 덮인 흰 천을 거둘 용기를 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흰 천에 닿으려 할 때 그녀는 갑자기 배현수를 볼 용기가 없었다.오늘 밤의 그 포옹이 두 사람의 마지막 포옹이 될 줄 몰랐다.오늘의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은 더더
배현수는 왼팔을 뻗어 조유진의 등을 감싼 채 몇 초 동안 꼭 껴안았다.이때 시신 옆에 서 있던 병원 직원이 한 마디 툭 쏘아붙였다.“사랑싸움하는데 길은 막지 말아야 할 거 아니에요! 비키세요!”배현수가 한 손으로 조유진을 안아 옆으로 옮겼다.시신이 멀리 옮겨진 후 주위는 다시 조용해졌다.조유진은 배현수를 꼭 껴안은 채 그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점차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마음이 진정된 후에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어색함이 찾아왔다. 조유진은 고개를 들어 멋쩍은 얼굴로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그게...”배현수는 허리를 약간 숙인 채 큰 손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고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한 마디 물었다.“울다가 웃으면?”조유진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내가 죽어야 네가 나를 위해 우나 보네.”그녀가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배현수는 입술을 깨물더니 그녀를 보며 한마디 했다.“이걸로도 충분해. 유진아.”적어도 그녀의 마음속에 배현수의 자리가 있다는 뜻이니까 그걸로도 충분하다.조유진이 입술을 깨물자 한 줄기의 맑은 눈물이 또다시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울지 마, 나 안 죽었잖아. 너의 앞에 이렇게 잘 서 있잖아.”계속 울면 배현수는 조유진을 더더욱 놓아주지 못할 것이다.조유진은 아직도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듯 입을 벌리고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듯했다.13년 동안 알고 지내 두 사람은 서로의 눈빛만 봐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고 있었다.예전에 조유진이 불안해할 때마다 배현수는 늘 그녀를 꼭 껴안아 줬다. 가끔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안고만 있어도 어느새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갔었다. 조유진은 포옹을 좋아했다.배현수가 그녀를 안았던 팔을 풀며 물었다.“계속 안고 있어?”조유진은 아무 말 없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천천히 다시 그를 껴안았다.그녀는 배현수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그의 온몸의 체취를 느끼고 있었다.아마 담배를 피울 때 침향 스틱을 계속
산성 별장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새벽 3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고 사정없이 쏟아지던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조유진이 슬리퍼를 신은 채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배현수는 병원에서처럼 그녀를 안아 올렸다.그는 한쪽 팔로 그녀의 허벅지와 엉덩이를 받쳐주었고 조유진은 떨어질까 봐 그의 목을 꼭 껴안았다.“나 혼자 갈 수 있어요.”하지만 배현수는 그녀를 놓지 않았고 안은 자세 그대로 별장 안으로 향했다.“다음번에는 언제가 될지 모르잖아.”어쩌면 오늘이 그녀를 마지막으로 안는 것일 수도 있었다.잠깐 생각에 잠겼던 배현수가 입을 열었다.“유진아, 오늘 병원에 찾아와 줘서 고마워.”조유진은 그런 배현수가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두 사람 사이가 어쩌다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조유진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게 바로 운명의 장난일지도 모른다.이게 사람의 인생이다. 좌우할 수도, 바꿀 수도 없다. 그저 인생이 시키는 대로 그 강력한 힘에 떠밀려 갈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조유진은 또다시 마음이 약해졌다.“현수 씨 팔의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어요. 그리고 우리가 약속한 기한이 5일이나 남았고요. 정말... 정말...”배현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유진아,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돼서 그러는 거면 됐어. 너에게 불쌍하게 보이고 싶지 않아.”배현수가 원하는 것은 그녀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불쌍한 감정은 나약한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다. 도도하기 짝이 없는 배현수는 남이 자기를 불쌍히 보는 것도 싫고 조유진이 자기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별장에 들어서자마자 배현수는 그녀를 소파에 내려놓았다.그는 깨끗한 슬리퍼 한 켤레를 가지고 와서 한쪽 무릎을 그녀 앞에 꿇고는 그녀의 발을 잡고 슬리퍼를 신겨 주었다.그러고는 고개를 떨구고 한마디 했다.“유진아, 여기까지만 할게. 앞으로 혼자 잘 가야 해. 그러다가 도저히 못 가겠으면...”사실 배현수가 하고 싶은 말은 혼자 가기 힘들면 자기를 찾으러 돌아오라는 것이었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