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한 분위기에 우아한 신사의 풍격도 느껴졌다.하지만 조유진은 배현수가 “우아한 신사”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반대로 배현수는 뼛속까지 야만적이고, 집착이 심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이 날카롭고 결단력 있으며 강력하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걸 가차 없이 빼앗는 사람이다.조유진은 배현수가 오늘날의 성취를 이룬 것에 전혀 놀라지 않는다.배현수는 야망이 크고 이 피가 난무하는 비즈니스계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야옹~”몸집이 크고 통통한 주황색 고양이 한 마리가 높은 책장에서 뛰어내려 조유진을 깜짝 놀라게 했다.그녀는 주황색 고양이가 낯이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예삐야?”조유진이 몸을 웅크리고 앉자 예삐는 그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6년 동안 못 봤는데 너 정말 많이 컸구나! 예전에는 날씬했는데 왜 이렇게 뚱뚱해졌어?”역시 부자 손에서 자란 덕분에 마른 주황색 고양이였던 예삐는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아우를 풍겼다.이 엄청난 풍요로움은 사람뿐만 아니라 고양이도 고급스럽게 만들었다.이 주황색 고양이는 6 년 전 조유진이 공원에서 주운 고양이인데, 그때는 아주 작았고 주인에게 버림받아 조유진은 그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견딜 수 없어 배현수와 함께 이 새끼 고양이를 데려갔었다.조유진과 배현수는 둘 다 고양이가 너무 이쁘게 생겼다고 생각해서 이름을 예삐라고 지었다.배현수가 계약서에 사인하고 서재에서 내려왔을 때 조유진은 고양이와 장난치고 있었다.조유진과 예삐는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6년 전처럼 여전히 친한 사이였다.잠시 동안 배현수는 마치 6년 동안 함께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조유진은 아쉬운 듯 말했다.“아직 기르고 있을 줄 몰랐어요. 난 대표님이... 예삐를 다른 사람한테 보냈을 줄 알았어요.”“육지율이 나 대신 3 년 동안 데리고 있었고, 내가 밖에 나와서 예삐를 집으로 데려왔어. 처음엔 예삐가 나를 낯설어해서 내가 많이 긁혔어.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 보낼까 생각도 했는데 너무 못생겨서 가지겠다는
누가 나이트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걸 원할까?다 돈이 필요한 탓이다.조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대표님 잊으셨어요? 대표님 때문에 저는 직장을 잃었어요. 지금 업계의 어떤 회사도 감히 저를 원하지 않아요. 저는 살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아르바이트조차 할 수 없다면 내일 당장 굶어 죽을 거예요.”배현수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빛은 당황한 듯했다.한 달 전, 그는 방송국에 조유진을 해고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러면 그녀가 강이찬을 통해서라도 자신에게 와서 애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조유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조용히 방송국을 떠난 다음 다른 일자리를 찾으러 갔고, 사방에서 거절당해도 그에게 애원하지 않았다.“조유진, 나한테 애원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대표님한테 애원하는 게 도움이 될까요? 제가 대표님한테 저를 용서해 달라고 빌면 대표님이 저를 바로 용서할까요? 하지만 저는 이 모든 걸 당할 만하고 받아들일 거예요. 다만 대표님께 제 마지막 희망을 끊지 말아 달라고 간청할 뿐입니다.”선유가 없었다면 아마도... 그녀는 이 재미없고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고 싶었을 것이다.지금은 선유의 수술비가 충분하지 않아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할 수 없다.배현수는 한참 말이 없자 조유진은 배현수가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배현수가 갑자기 말했다.“내일 이력서를 가지고 SY 부동산 영업팀에 가서 등록해.”조유진은 배현수가 자신에게 일할 기회를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어서 그 말을 듣고 얼어붙었다 무려 SY 부동산이다.마침내 그녀의 눈가에 미소가 번졌다.“감사합니다, 대표님.”배현수는 멈칫했다.조유진은 신준우를 보면서 다정하게 미소 지으면서 배현수에게는 늘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두 사람이 다시 만나고 난 후 그녀가 그에게 미소를 짓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배현수가 그녀에게 일자리를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진실된 미소를 짓는다고?“너무 일찍 기뻐하지 마. 넌 분양사무실에 가서 집을 팔아야 해.
남초윤 무슨 말을 하는 거야!“배현수와 난 평범한 이별을 한 게 아니잖아. 난 배현수가 가해자라고 직접 증언했고 내가 그 사람을 3 년 동안 감옥에 보낸 사람이었어. 그리고... 그 사람은 감옥 안에서 다른 사람한테 심장을 찔려 거의 죽을 뻔했어. 배씨 부인은 누구라도 될 수 있지만, 오직 나만은 이번 생에서 글렀어.”조유진은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고 눈가에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남초윤은 증오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6년 전의 일이 없었더라면 너와 배현수는 아마 이미 아이를 여러 명 낳았을 거야! 다 그 늙은 괴물 조범 때문이잖아, 왜 이렇게 잔인한 거야! 그나저나 선유가 도움이 필요할 때 왜 나한테 돈 빌리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 그래도 난 선유의 대모니까 내가 돈을 내야지!”“너도 지출이 꽤 많은데, 나한테 돈 빌려주면 너 가방 살 돈은 있니?”“곧 월급 나올 거야! 게다가 내가 가방을 자주 사는 것도 아니잖아. 선유가 수술하는 건 큰일이라고.”조유진은 남초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배현수가 이미 SY에서 일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고, 부동산을 팔면 기본 월급에 보너스도 붙을 거야. 내가 잘하면 곧 충분한 돈을 벌 수 있을 거야. 네 돈은 너 비상시를 대비해 적금 들어놔. 그리고 이번에 네가 도와준다고 해도 다음에는 도와주기 힘들 거야. 내가 예전에 너한테 빌린 돈도 적지 않았잖아? 만약 나한테 선유를 부양할 능력도 없다면 내가 왜 애를 배현수한테 보내지 않겠어?”“선유가 어떻게 너를 떠날 수 있겠어? 어휴... 근데 너네 둘은 정말, 넌 배현수의 애를 키우고 있고, 배현수는 아직도 네 고양이를 키우고 있잖아. 도대체 둘이 무슨 생각이야?”“배현수가 예삐를 다른 사람한테 보내려고 했는데 너무 못생겨서 누구도 원하지 않았대.”남초윤은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이봐요 아가씨, 넌 그런 헛소리를 믿어?! 그건 배현수가 키운 고양이라고, 아무리 못생겨도 가지려는 사람이 있을 거야!”“... 아마도 예삐를 버릴 수 없기
“내일이요?”조유진은 내일 SY 부동산에 가서 등록해야 하기 때문에 조금 당황스러웠다.“네, 혹시 유진 씨... 와서 배웅해 주실 수 있나요? 전 대제주시에 친구가 많지 않은데, 유진 씨는 몇 안 되는 친한 친구 중 한 명이예요.”신준우의 말투에는 간곡함이 묻어났다.어쨌든 신준우는 자신과 선유의 은인이었고, 지난 3년 동안 선유가 열이 나거나 감기에 걸릴 때마다 신준우가 도와줬었다. 조유진은 이를 악물고 동의했다.“알았어요. 내일 갈게요. 몇 시 비행기예요?”“아침 10시요.”그러면 그녀는 조금 늦게 SY 부동산에 등록하러 가야 한다.전화를 끊은 후 남초윤은 의심했다.“신 선생님은 왜 갑자기 다른 병원으로 전출된 거지?”“나도 잘 모르겠어. 두 병원에서 서로 협상한 거 아닐까?”“그럴 리가. 어느 병원에서 젊고 실력 좋은 의사를 다른 곳으로 보내겠어. 너무 이상해... 신 선생님 혹시 누구 기분을 상하게 한 건 아니겠지?”S시도 대도시이지만 그 병원은 대제주시 제일 병원보다 훨씬 못하다.조유진은 갑자기 나쁜 예감이 들었지만 재빨리 그 생각을 떨쳐 버렸다.“신 선생님은 평소에도 부드럽고 착하셔서 누구에게도 기분을 상하게 할 분이 아니야.”...하얀 승합차 안.송인아가 행사장으로 가는 길에 휴대전화에 은행 메시지가 떴다.[안녕하세요 존경하는 고객님, 14:23에 끝 번호 6798의 은행 카드에 200,000,000원이 입금되었습니다.]2억 원?조유진이 돈을 돌려준 걸까?송인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이 여자가 무슨 정말 수로 은행 카드 번호를 알아낸 거야!옆에 있던 매니저가 그녀의 표정을 보고 물었다.“인아야, 왜 그래?”“언니, 내가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던 조유진에 대해 알아봤어? 그 여자 출신이 정확히 어떻게 돼?”“알아봤지만 너 공연해야 하는데 기분에 영향을 줄까 봐 말하지 않았어. 공연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얘기하는 게 어때?” 송인아는 성격이 급한 사람인데 어떻게 기다릴 수 있을까.“지금 당
조유진은 종이봉투를 들고 재빨리 달려가 손에 든 것을 신준우에게 건넸다.“신 선생님, 제가 늦은 건 아니죠? 길 가실 때 드시라고 제가 만든 작은 비스킷을 준비했어요. 제가 값비싼 선물을 드릴 수 없으니 이건 작은 감사의 표시로 받아주세요.”신준우는 비스킷이 들어있는 봉지를 받아 들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유진 씨가 배웅하러 와줘서 너무 기뻐요. 유진 씨가 만든 비스킷은 정말 맛있을 것 같아요. 제가 언제 다시 대제주시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앞으로는 유진 씨가 만든 비스킷을 먹지 못할 것 같아 아쉬워요.”조유진은 별다른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나중에 제가 만든 비스킷이 먹고 싶으면 전화하세요. 제가 만들어서 진공포장하고 택배로 보내드릴게요.”신준우는 감동한 나머지 손을 뻗어 조유진을 안았다.“유진 씨는 정말 착한 사람이에요.”조유진은 깜짝 놀라 서둘러 그를 밀어냈다.“신 선생님, 3년 동안 선유가 아플 때마다 도와주셨잖아요. 정말 감사해요. 앞으로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안전하게 가시길 바라고 거기서도 즐겁게 지내셨으면 좋겠어요.”“유진 씨, 만약에, 만약에 말이에요. 제가 S시에 정착해서 유진 씨와 선유에게 집을 줄 수 있다면... 선유를 데리고 S시로 올 의향이 있어요?”대제주시를 떠나라고?조유진은 진심으로 어머니와 선유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이미 배현수에게 티켓을 압수당한 데다가 대제주시를 떠나는 배마저 잡혀 있는 상태였다.“신 선생님, 전 선생님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저에게는 혼자 생활하기 힘드신 어머니가 계시고 제가 보살펴야 하는 6살짜리 딸도 있어요. 저는 신경 써야 할 가족이 많아요. 그래서 저는 선생님한테 안 어울려요.”“좋아하는데 어울리고 안 어울리는 게 어디 있어요. 제가 좋아하면 되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유진 씨는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가요?”조유진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제가 이런 상황인데, 제가 감히 어떻게 마음에 들지 않을 자격이 있겠어요.”조유진의 휴대전화
서정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조유진 씨는... 아직 안 온 것 같습니다!”그렇게 말한 서정호는 조심스럽게 배현수의 표정을 살폈다.배현수의 얼굴은 차갑게 가라앉았다.“출근 첫날에 지각하다니, 누가 조유진에게 그런 특권을 준 거야?”“오늘 길이 막혀서 그런가 봐요!” 서정호는 조유진 대신 변명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배현수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대제주시의 지하철이 막힌다고?”“...”서정호는 배현수의 불만을 잠재우려 했다.“지금은 왔을지도 몰라요. 대표님, 제가 다시 영업부에 가볼까요?”갑자기 배현수의 휴대전화에 카카오톡 메시지가 몇 개 떴다.송인아가 보낸 것이었다.“대표님, 제가 방금 해성시에 공연하러 가려고 공항에 왔는데 우연히 조유진을 마주쳤어요. 그런데 왜 어떤 남자랑 껴안고 있는 거죠?”송인아는 여러 장의 사진을 보냈다.사진 속 조유진과 한 남성이 공항에서 작별 인사를 하는 듯 포옹하고 있었다.그리고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신준우였다.배현수는 신준우가 오늘 S시 병원으로 부임하기 위해 떠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서정호는 배현수의 표정을 살폈다. 배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은 점점 차가워졌다.“대표님?”배현수는 휴대전화를 옆으로 던졌고 그의 눈빛은 아주 차가웠다.“됐어. 영업팀에게 말해. 조유진이 앞으로 30분 안에 출근을 하지 않으면 입사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고.”30분, 배현수가 가진 전부의 인내심이다.“알겠습니다. 지금 가서 말하겠습니다.”...조유진은 서둘러 SY 부동산 영업팀으로 향했고 너무 급하게 와서 숨을 헐떡였다.시간을 확인해 보니 10시 반이 채 지나지 않았다.오는 길에 차가 막히지 않아서 다행이었지, 아니면 11시까지 회사에 도착할 수 없었을 것이다.서정호는 영업팀 입구에 서서 이리저리 살피다가 드디어 조유진이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조유진 씨, 드디어 오셨군요! 배 대표님이 화내실 뻔했어요!”“벌써 알고 계세요?”서정호는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진 팀장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조유진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조유진은 겸허히 받아들였다.“다시는 안 그럴 거예요. 앞으로는 일찍 도착할게요.”진 팀장은 조유진을 살피더니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조유진 씨, 혹시 서 비서님의 친척인가요? 영업팀 일반 직원들 중에 서 비서님이 직접 추천해서 온 직원은 본 적이 없어요.”이건 무슨 뜻일까, 그녀와 서 비서의 사이가 얼마나 좋은지 캐묻는 건가?조유진은 당황한 척했다.“서 비서님과 저는 아는 사이인 건 맞지만 친척은 아니고 같은 학교 출신이에요!”조유진은 거짓말했다.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같은 학교 출신이라고.직장에서 발생하는 일은 모두 눈치 싸움이다. 배경이 없으면 동료와 상사들이 괴롭힐 것이고, 그렇다고 배경이 너무 강하면 뒤에서 험담할 것이다. 약간의 배경이 가장 일반적이지만 가장 합리적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은 감히 괴롭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소외시키지도 않을 것이다.“그렇군요. 나는 유진 씨가 1호 빌딩 대표님의 친척인 줄 알았어요. 조금 전까지 유진 씨에게 어떤 태도로 말해야 할지 몰랐어요.”“그룹의 임원들은 모두 1호 빌딩에 계신가요?”진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거의 그렇죠. 우리 같은 말단 직원들은 1호 빌딩과 접촉할 일이 많지 않아요. 저희 영업팀에서는 서 비서님 같은 분들을 6개월에도 한 번 만나지 못합니다. 배 대표님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조유진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배현수를 자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은 꽤나 좋은 일이다.배현수를 볼 때마다 그녀는 손바닥에 식은땀이 흘렀고 극도의 압박감에 시달렸기 때문이다.“우리 영업팀은 분양사무실에 가서 고객을 접대해야 하고 관심 있는 고객이 있으면 일주일 연속 회사를 떠나 고객을 데리고 집을 보러 다녀야 해서 엄청 피곤해요. 유진 씨 보기에는 너무 말랐는데 이런 고생 할 수 있겠어요?”“네!”“에너지가 좋네요. 유지하세요.” ...조유진이 출근한 첫날, 선임은 그녀를 데리고 전체 업무 내
조유진은 진심 어린 태도로 말했다.“어르신, 55평짜리를 보셔도 됩니다. 55평짜리는 대저택이라 전용면적이 아주 넓습니다. 조금 전에 보신 90평짜리는 사실 대형 복층이라 층과 층 사이가 6미터나 됩니다. 2층으로 가시려면 계단을 오르셔야 하는데 어르신이 지팡이를 짚고 계시고 거동이 불편하시기 때문에 90평짜리는 어르신께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어르신은 조유진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눈빛으로 보았다.“젊은이가 이런 것까지 생각하고 아주 섬세하군.”조유진은 의젓하면서도 부드러운 미소로 말했다.“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다했을 뿐입니다. 어르신, 집을 마련하는 것은 큰일이잖습니까? 많이 둘러보셔야 잘 선택할 수 있습니다.”그렇게 어르신은 몇 분을 더 둘러보았다.조유진은 어르신께 물 한 컵을 따라주었다.“어르신,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엄 씨일세. 젊은이는?”조유진은 자신의 명찰을 보여주면서 말했다.“저는 조유진이라고 합니다.”어르신은 그녀의 명찰을 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조유진이라, 그러면 유진 씨, 계약서를 쓰도록 합시다.”조유진은 놀라면서 물었다.“어르신, 더 보지 않으셔도 되겠어요?”“안 봐도 돼. 55평짜리로 하지.”조유진은 몇초간 멈칫하더니 그에게 소개했다.“어르신, 5동, 6동 모두 55평인데 몇 동 몇 층을 선호하시나요?”“젊은이는 어떤 것이 좋을 것 같아?”어르신은 이미 조유진을 믿고 있는 듯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6동 13층이 좋을 것 같습니다. 6, 13이 모두 좋은 숫자이지 않습니까.”어르신은 의아한 듯 물었다.“왜 6동 6층은 아니고? 육이 좋은 숫자잖아?”“어르신께서 도덕경을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으며 만물은 음을 등지고 양을 껴안아, 기를 격동시켜 화기를 이룬다고 하였습니다.”‘이 젊은이가 아주 흥미롭군.’어르신은 웃었다.“그러면 왜 3층은 추천 안 했지? 셋은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