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후, 조유진은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출발했다.출발하기 전날 밤, 엄준이 또 그녀를 보러 병원으로 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엄준이 사진 한 장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와 물었다.“유진 씨, 이 사진 속의 아가씨가 당신 맞나요?”사진에는 배현수와 눈이 내리는 날 눈싸움을 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그녀는 절대 자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진 속의 아가씨는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조유진은 도저히 반박할 수 없어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엄 어르신, 어르신이 어떻게 이 사진을... 가지고 있으세요?”“그래서 당신은 정말로 배현수 대표의 아내인가요?”아내?조유진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저에게 어떻게 그런 자격이 있습니까? 저와 그 사람은 진작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입니다.”“그럼 배현수 대표와 어떤 관계인가요?”“대학 시절 연애를 한 적이 있는데 그냥 전 여자 친구일 뿐이에요.”전 여자 친구일 뿐인데 배현수가 굳이 성남까지 찾아와 사람을 찾아달라고 부탁할 수 있을까? 그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을 만큼 사람 찾는 거에 올인하려 할까? 엄준은 오랫동안 사업을 해 오면서 행동 하나 표정 하나로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바로 파악했다. 배현수 얘기가 나오자 조유진의 얼굴은 확연히 달라졌다.그녀는 분명히 숨기는 일이 있을 것이다.하지만 엄준도 억지로 말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배현수 씨는 성남에 있어요. 우리 그룹과 계약서를 체결하러 온 줄 알았는데 사실은 조유진 씨를 찾으러 온 거래요.”순간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유진 씨가 어디 있는지 말하지 않았어요. 전에 배현수를 모른다고 한 것도 분명 말 못 할 사정이 있을 거로 생각해요. 물론 유진 씨가 구체적인 이유를 말하지는 않지만 유진 씨 결정을 존중할게요. 저도 배현수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 모르기에 쉽게 그에게 유진 씨에 대해 얘기할 수 없어요.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미국으로 출발하면
성남은 남방의 도시로 대제주시만큼 번화하다. 그리고 밤에도 곳곳마다 가로등과 상가의 불이 환하게 켜져 먼 곳까지 훤히 보였다.창가에 선 조유진은 환한 불빛에 도심까지 한눈에 보였다.지구같이 생긴 랜드마크 건물이 바로 반도호텔이다.그렇게 그녀는 오랫동안 그곳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내일 아침 일찍, 조유진은 만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에 있는 미국에 치료받으러 가야 한다.앞으로 배현수와는 산과 바다를 사이에 둔 채 두 번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그녀는 말없이 창문을 닫은 후 커튼을 쳤다.이제 더 이상 조유진으로 살지 않기로 했으니 앞으로 조유진과 관련된 모든 과거도 같이 봉인해야 했다....반도 호텔 안.서정호가 문을 두드린 후 안으로 들어왔다.“배 대표님, 제가 음식 몇 개 주문해 드렸어요. 좀 이따 호텔 직원이 가져다줄 겁니다.”배현수는 손에 든 사진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조유진 소식은 새로 확인된 게 있어?”서정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아직... 없어요. 배 대표님, 우리가 엄 어르신께 같이 찾아달라고 부탁했으니 곧 소식이 있을 겁니다. 조급해하지 마세요.”하지만 서정호 역시 현재 상황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저 배현수를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 조유진이 바다에 뛰어들어 실종된 지 한 달이 넘었다. 그녀의 생존 확률은 매우 낮다.사실 그들은 조유진이 죽었다는 사실을 진작에 받아들였다. 조유진의 절친 남초윤마저도 배현수더러 이제는 장례를 치르자고 재촉했다. 하지만 배현수는 조유진이 죽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주위에서도 오직 배현수만 모든 정신을 다 쏟아부으며 그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배현수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서정호가 하던 말을 계속했다.“배 대표님, 저희가 성남에 며칠째 있으니... 대제주시에서 자꾸 전화가 오네요. 내일 아침 비행기 표를 예약하고 대제주시로 다시 돌아가는 게 어떨까요?”사실 그는 직접 말하고 싶었다. 조유진은 이미 죽었고 시간을 허비해서 사람을 찾아도 그저 스스로 잠
이튿날 아침, 성남에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성남 공항 안, 오고 가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엄 어르신과 도 집사가 직접 조유진을 공항 로비까지 데려다줬다. “조유진 씨, 조심히 가요.”“메이오 클리닉에 무사히 도착하면 전화해요.”조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 어르신, 도 아저씨, 건강 잘 챙기세요.”엄 어르신이 손을 흔들었다.“늦었어요. 들어가요.”조유진이 항공권과 여권을 들고 국제 탑승구로 걸어갔다.한편, 조유진이 금방 들어갔을 때.배현수와 서정호도 공항 로비에 도착했다. 다만 그들은 국내 탑승구로 가서 대제주시에 갈 예정이었다.공항 휴게실에 들어가기 전, 조유진은 한번 뒤돌아봤다. 24년 동안 국내에서 생활하다 갑자기 떠나려니 마음속에 조금의 불안함과 실망감이 있었다. 앞날은 멀고 생사를 예측할 수 없다. 지금 이렇게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그녀는 아쉬움에 마지막으로 뒤돌아봤다. 이와 동시에, VIP 휴게실로 들어가려던 배현수가 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눈길을 돌려 바라봤다.거의 같은 순간, 조유진이 뒤돌아 국제 탑승구에 들어갔다. 순식간에 인파가 넘쳐흐르고, 수많은 사람의 그림자가 뒤엉켰다. 이윽고 서로 인파 속에 파묻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배현수는 공항 왼쪽으로 가고 조유진은 공항 오른쪽으로 갔다. 서로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비행기가 이륙하기 전.비즈니스석에 앉은 배현우가 낡은 검은색 핸드폰을 열었다. 갤러리를 열자 모두 조유진 사진이었다. 두 사람이 연애할 때, 그녀는 늘 그의 전화로 셀카 찍기를 좋아했다. 그들이 같이 찍은 사진도 엄청 많았다. 그런데 대부분 시간은 그가 일에 몰두하고 그녀가 옆에 앉아 그의 전화로 몰래 그들이 함께한 수많은 순간을 찍었다. 비행기가 이륙할 시간이 되어 배현수는 전화를 껐다. 그는 부처님을 믿지 않았지만 한 번쯤 부처님을 믿고 그 앞에 무릎 꿇고 싶었다. 그도 그녀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데 방해되
배현수가 성남에서 산성 별장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저녁 10시였다.별장에는 작은 무드등만 켜져 있었다. 갑자기 작은 그림자가 튀어나와 그의 허벅지를 꼭 껴안았다. “선유?”그는 손을 뻗어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유가 시무룩해서 입을 열었다. “아빠, 아빠도 안 돌아오는 줄 알았어요.”“그럴 리가, 아빠는 널 버리지 않을 거야.”“엄마도 그렇게 말했는데 날 버렸잖아요. 아빠, 아빠는 엄마처럼 안 좋은 생각하면 안돼요.”아이는 작은 얼굴을 들어 그를 애타게 바라봤다. 배현수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아빠... 안 좋은 생각 한 적 없어.”“거짓말, 엄마가 떠난 후 매일 밤 엄마가 꼈던 반지를 보며 멍때렸잖아요. 가끔 거실 소파에서 밤새 말 한마디 없이 앉아있기도 하고. 아빠, 엄마랑 같이 가지 마요. 무서워요.”아이의 작은 두 손은 그의 정장 바지를 꼭 잡고 있었다. 마치 손을 놓으면 아빠가 떠날 것처럼. 배현수가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줬다. “아빠가 약속할게. 언제가 곁에 있을 거야.”이것은 조유진의 유언이었다. 아무리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도 선유를 잘 키울 것이다. “엄마는 떠났고 다시는 안 돌아오는 거 맞죠?”선유의 머루알 같은 눈동자가 배현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이가 비록 어리지만 모든 걸 다 알고 있다. 매번 초윤이 이모가 올 때마다 눈빛이 비통했다. 예전에 이모한테 엄마에게 연락해달라고 하면 바로 전화했었는데 지금은 화제전환만 할 뿐이다. 배현우는 몸을 숙여 아이와 눈을 맞췄다. 투박하고 따뜻한 큰 손이 말랑한 작은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는 손을 뻗어 아이를 안고 작은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타일렀다. “선유야 무서워하지 마. 아빠는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아빠, 앞으로 우리 둘밖에 없잖아요. 꼭 잘 있어야 해요. 아빠한텐 내가 있잖아요.”배현수는 눈시울이 붉어지며 대답했다. “응, 알았어.”그날 밤, 배현수는 선유를 안고 아기방으로 갔고 이
“아빠, 오늘 저녁은 강 삼촌이 사주는 거예요?”“응, 강 삼촌이 결혼 준비 중이야. 여자 친구랑 같이 우리를 만나러 올 거야.”일 년 전, 배현수가 한번 화낸 것 때문에 강이찬이 강이진을 데리고 SY 그룹을 떠났다. 일 년간, 그들 사이에 연락이 많지 않았다. 모두 육지율이 가운데서 소식을 전했다. 강이진은 성격이 간사하고 제멋대로지만 강이찬은 항상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잘못된 일을 한 적이 없다. SY가 오늘과 같은 날이 있게 된 것도 강이찬 덕분이 크다. 그룹의 주식 분할도 강이찬의 몫이 줄곧 있었다. 배현수는 그의 주식을 회수하지 않았다. 선유는 작은 입을 움찔거리며 물었다. “그... 강이진 이모도 있는 건 아니죠? 그 이모는 만나고 싶지 않아요. 만나면 참지 못하고 싸워요.”“없어. 오늘 강 삼촌이 나만 불렀어. 그리고 육 삼촌이랑 초윤이 이모가 올거야.”“너무 좋아요. 육 삼촌이랑 이모 안 본 지 오래됐어요.”금방 룸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배현수는 육지율의 목소리를 들었다. 룸 안, 육지율이 강이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하고 있었다. “이찬아, 현수가 그때는 단지 화가 나서 강이진이 꺼지길 바란 거야. 네가 맞서서 뜻대로 안 되니 당연히 너한테 화내서 같이 꺼지라고 한 거지. 일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어?”“나... 안 돌아가고 싶어. 지율아, 너도 내 성격 알잖아. 난 사람과 대립하는 걸 안좋아하는 거. 만약 계속 SY에 있으면 너희랑 의견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어. 그런데 난 일 때문에 형제랑 얼굴 붉히고 싶지 않아. 그리고 지금 SY는 충분히 강대해져서 더 이상 내가 필요하지 않아. 내가 있든 없든 SY는 잘 될 거야.”육지율은 또 몇 마디 타일렀다. “우리 셋이 대학교 때부터 전우 같은 사이였는데. 진짜 형제를 버리고 혼자 창업할거야?”“내가 언제 너희를 버렸어? 오늘 같이 밥 먹자고 불렀잖아. 내가 창업해서 성공하면 너희들을 주주로 영입할게.”말하고 있는데 배현수가 선유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남초윤이 반응하기도 전에 강이찬이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온 여자를 끌어안고 소개했다. “심미경이라고 해. 우리 지금 약혼한 사이고 다음 주에 결혼식을 할 생각이야.”두 사람이 맞잡은 손에는 백금 커플링이 끼워져있었다. “미경 씨, 두 분은 내 제일 친한 친구 배현수와 육지율이에요. 배 대표랑 육 대표라고 부르면 돼요.”심미경이 웃으며 두 사람과 인사했다. “배 대표, 육 대표님 안녕하세요.”배현수의 예리한 눈빛이 심미경을 천천히 훑어봤다. 1초만 머물고 재빨리 눈길을 거뒀다. 칠흑 같은 눈동자 아래 기쁨과 분노가 분명치 않았다. 사람이 전부 도착하자 음식이 바로 올라왔다. 선유는 배현수 옆에서 아가 새처럼 입을 벌리고 음식을 먹으며 한편으로 강이찬 옆의 여자를 관찰했다. 심 이모라는 사람이 왜 엄마처럼 꾸몄지?선유는 배현수에게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빠, 심 이모가 엄마랑 닮은 것 같지 않아요?”아이가 개미만 한 목소리로 말해 배현수만 들을 수 있었다. 배현수는 갈비찜을 한 조각 집어주며 뜨뜻미지근하게 한마디 했다. “안 닮았어. 헛소리 하지 마.”“아... 네.”선유는 묵묵히 갈비를 들어 작은 입을 틀어막아 더 이상 헛소리하지 않았다. 선유가 궁금해하지 않자 오히려 남초윤이 궁금증이 생겼다. 심미경의 얼굴을 보고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심미경의 생김새가 비록 부드럽고 귀엽게 생겼지만 자세히 보면 조유진과 차이가 컸다. 그런데 옷차림과 꾸민 모습이 조유진과 너무 많이 닮았다. 마치... 일부러 따라 하는 것처럼.설마 강이찬이 이런 취향이 있는 건가?친구의 여자를... 짝사랑하는?남초윤은 술을 한 잔 따라 강이찬과 심미경에게 권했다. “강 대표님, 심 여사님. 두 분 약혼 축하드립니다.”심미경이 술잔을 들고 얼른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저는 원샷할게요. 편한 만큼 드세요.”심미경이 고개를 들고 원샷했다. 남초윤은 그런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뭘 생각한 거지?심미경이 어떻게 유진일 수
옆에 앉아있던 배현수는 심미경이 술을 권하기 전까지 줄곧 말하지 않았다. “배 대표님, 한잔하시지요.”배현수는 살짝 눈을 들었다. 맑은 검은 눈동자가 냉정하게 그의 옷차림을 훑더니 목소리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이 옷차림, 어울리지 않아요.”젓가락을 쥐고 있는 강이찬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이유를 모르는 심미경이 물었다.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건가요?”배현수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 숙여 선유에게 음식을 집어줬다. 심미경은 무안하게 술잔을 들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절반쯤 먹었는데 배현수는 입에 술을 대지 않았다. 그는 옆의 아이에게 물었다.“배불렀어?”선유가 만족의 트림을 하더니 턱을 끄덕였다. “네. 배불러요.”“수박 한 조각 가지고 가자.”수박을 좋아하는 선유는 고사리 같은 손을 뻗어 수박 한 조각 집었다. 배현수가 일어나며 말했다. “선유가 졸려 하네. 먼저 데리고 가야겠어. 천천히 먹어.”배현수와 선유가 차량 근처까지 걸어갔을 때, 강이찬이 쫓아왔다. 배현수는 선유에게 당부했다. “먼저 차에 타. 아빠는 강 삼촌이랑 이야기 몇 마디하고 갈게.”“네.”선유는 얌전히 차에 탄 후 문을 닫았다. 두 사람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강이찬이 말했다.“현수야, 네가 생각하는 거 아니야. 심미경은...”“내가 생각한 게 아니면 왜 굳이 쫓아 나와서 해명해?”“난...”“심미경은 심미경이고, 조유진은 조유진이야. 헷갈리지 않았으면 해.”강이찬이 한숨을 쉬었다. “심미경은 단지 우연히 옷 스타일이 조유진과 비슷할 뿐이야. 내가 말했었지, 조유진에게 마음 없다고.”배현수는 강이찬의 해명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을 움찔거렸다. “만약 창업에 도움 필요하면 말해. 그리고 SY에 돌아올 생각이 있어도 말해.”“현수야...”“들어가. 다들 기다리겠다.”“나랑 심미경 결혼식 날에 올 거야?”“상황 봐서. 지금 결혼하는 장면 못 봐. 너도 알잖아, 나 부럽고 질투 날걸.”그의 목소리는 담담했
블루레일 아파트 안.심미경이 강이찬을 따라 집에 들어가자마자 강이찬 현관에 눌렀다. 오늘 저녁은 대리를 불러 집에 왔다. 배현수가 떠난 후, 강이찬이 술을 엄청 많이 마셨다. 이때, 감정을 이미 통제할 수 없었다. 그는 심미경의 치마자락을 들춘 후 그녀의 허리를 짓눌렀다. 심미경이 놀라서 뒤돌아보려 했다. “이찬 씨...”“말하지 마요.”입을 열면 그녀와 닮지 않았다. 조유진의 목소리는 맑고 청아했다. 음이 날카롭지 않고 시냇물 같았는데 방송과 전공이어서 표준어가 매우 정확했다. 심미경은 남쪽에서 나고 자랐다. 비록 대제주시에서 2년 일했지만 목소리가 부드럽고 달콤했다. 조유진의 목소리와는 정반대였다. 삼 개월 전, 심미경이 강이찬이 창업한 회사의 프런트 면접을 봤다. 그날 묶음 머리에 흰 치마를 입고 발에는 컨버스 하이를 신었다. 얼굴에는 옅은 화장을 했다. 면접 볼 때 긴장해서 표현이 좋지 않았는데 왜인지 통과했다. 그리고 어느 날 회사에서 컵라면을 먹다 회사 사장 강이찬을 만났다. 강이찬은 그녀에게 영양소가 없는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하고 심지어 적극적으로 그녀를 데리고 외부 식당에 가서 밥을 먹었다. 이렇게 오고 가다 두 사람은 연인 사이가 되었다. 오늘까지도 심미경은 강이찬이 자기를 마음에 들어 한 이유를 몰랐다. 그녀는 평범한 대학을 졸업했고 학력과 집안 모두 평범했다. 그런데 강이찬은 국내 최고급 학교를 졸업하고 예전엔 큰 회사 임원이었다가 지금은 창업한 사장이었다. 둘은 신분 차이가 커 외부 사람이 보기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강이찬은 다정하고 돈이 많을 뿐만 아니라 잘생기기까지 했다. 그의 구애에 심미경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강이찬을 잡게 된다면 앞으론 더 이상 프런트 걸이 아니다. 그녀는 곧바로 사모님으로 신분 상승할 수 있는데 이것은 많은 사람이 꿈도 못 꿀 일이다. “이찬 씨, 방으로 가는 게 어때요?”그녀는 뒤돌아 그를 안고 키스하려고 했는데 남자에게 다시 제압당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