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복부 첫 장에는 ‘배’자가 가득 쓰여 있었다. 이게 다른 사람이 우연히 쓴 글자라면 뒷장으로 넘겼을 때는 선유라는 두 글자가 기복부 전체를 채웠다.이 세상에 이와 같은 우연은 절대 없을 것이다.현공민도 기복부를 보고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제가 잘못 가져왔네요. 이 기복부는 이미 다 쓰여 있네요. 새것으로 다시 가져오겠습니다.”현공민이 다시 가져가려고 할 때 배현수는 손으로 그것을 꽉 잡으며 물었다.“이 기복부를 쓴 사람이 조유진 씨 맞습니까?”현공민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 기복부를 쓴 사람을 아십니까?”“네, 이것은 틀림없이 그녀가 쓴 거예요.”현공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간절히 바라는 게 이 사람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맞습니다.”“저도 그 아가씨에 대해 인상이 깊어요. 아가씨가 산에 올라온 날도 오늘처럼 날이 어둑어둑해진 후였어요. 그녀가 세상을 포기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제가 몇 마디 타일렀었죠. 그러자 아가씨가 오랫동안 이곳에서 기복부를 쓰더라고요. 혹시 이 기복부에 쓴 ‘배’자가 당신 성씨인가요?”배현수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글자가 쓰인 종이 위에 손을 갖다댔다. 현공민이 낮은 소리로 위로하듯 입을 열었다.“아가씨가 얼굴이 선하니 모든 일도 반드시 잘 풀릴 겁니다. 젊은 친구,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처럼 천천히 기다려 보세요.”배현수는 그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그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스님의 덕담이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현공민은 새 기복부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조유진의 기복부를 들고 중얼거리던 배현수가 현공민을 보며 입을 열었다.“그녀의 글씨를 좀 더 보게 해주세요.”“그래요... 여기서 보고 계세요.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현공민이 자리를 떠나고 작은 방에 배현수 한 사람만 앉아 있었다.그는 한 페이지 가득 채운 ‘배’라는 글자를 보면 볼수록 가슴이 메여져 참을 수 없었다.그는 손가락으로 장마다 있는 자신의 이름과 선
배현수는 조유진과 닮은 뒷모습 하나에도 가끔 넋을 잃고 있었다....조유진이 떠난 후.산성 별장에서 선유는 항상 별장 입구에서 뚱이를 안은 채 쪼그려 앉아 조유진이 오기만을 기다렸고 그 옆에는 감자가 선유 곁을 지키며 함께 했다. 그 모습에 장 셰프가 선유를 보고 잘 먹는 어린이가 되어야 엄마가 빨리 돌아온다고 말하면 선유는 그 어느 때보다 밥도 잘 먹고 잘 자면서 말을 잘 들었다. 선유는 혹시라도 말을 듣지 않으면 엄마를 다시는 못 볼까 봐 두려웠다.남초윤은 선유를 보러 오면서 장난감을 한 박스 가져왔다.하지만 선유는 남초윤을 볼 때마다 똑같은 질문을 했다.“이모,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어? 이모가 엄마와 제일 친하잖아.” 그럴 때마다 남초윤은 가슴이 아팠다.그녀는 차마 선유에게 엄마가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할 수 없었다.넓은 산성 별장 안에 배현수와 선유 두 사람만 있을 때는 아무도 조유진을 언급하지 않았다.선유는 만약 자기가 엄마 얘기를 하면 아빠도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어느 하루는 악몽을 꾸다 깨어난 선유가 아빠 방으로 가려고 서재 앞을 지나갈 때, 우연히 아빠가 서재에서 아직 잠들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그때 배현수는 은반지를 손에 들고 그것만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선유는 그 은반지가 누구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예전에 엄마는 늘 그 은반지를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걸고 다녔다.선유는 아직 어리지만 아빠가 그 누구보다도 엄마를 더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배현수는 더더욱 그 누구에게도 조유진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물론 입 밖으로 한 마디도 꺼내지 않지만, 이 산성 별장에 있는 모든 것은 조유진과 관련이 있다.조유진이 세 들어 살던 집을 배현수가 샀고 그 안에 그녀가 쓰던 물건들과 삶의 흔적들을 배현수는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다.그는 가끔 저녁 늦게까지 야근하고도 이곳을 지나칠 때면 들어와서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배현수는 소파에 앉아 조유진의 휴대전화를 켰다. 그녀의
폐암?순간 엄준과 한 선생은 깜짝 놀라 서로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한 선생이 먼저 입을 열었다.“검사는 해 봤어요?”조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그때 제가 흉부에 심각한 외상을 입어 정밀검사는 하지 못하고 흉부 X-ray 사진만 찍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저의 폐 상태가 좋지 않다며 병원에 입원해 정밀검사를 하라고 했는데... 그때 제가 다른 일이 있어서 병원을 더 가지 못했어요.”“그럼 이렇게 해요. 사진 다시 한번 찍고 필요하면 정밀검사까지 해서 지금 상태가 어떤지 확인합시다.”조유진은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눈빛은 그의 깊은 생각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엄준은 조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 씨, 당신이 어떤 병이든 나는 최선을 다해 도울 거예요. 하지만 당신이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아무도 당신을 도울 수 없어요. 폐암이 아무리 치료할 수 있는 병이라 해도 당신이 죽기를 간절히 바라면 염라대왕이라도 당신을 구할 수는 없어요.”“엄 어르신, 구해줘서 고맙지만 저는 더 이상 세상을 살아갈 의미를 찾지 못했어요...”“살아있는 게 의미가 있는 거예요. 유진 씨, 당신은 잠시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을 뿐이에요. 유진 씨는 아직 젊기에 무엇이든 해 볼 수 있잖아요. 유진 씨보다 훨씬 더 오래 산 내 말을 한번 믿어봐요. 세상을 살아가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없다는 거, 그리고 죽음은 비겁한 자들이 하는 선택이라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하늘이 우연한 기회로 당신을 구하게 했으면 분명 당신더러 이 세상을 더 살아가라는 의미예요. 유진 씨, 자신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봐요. 방금 유진 씨가 말했던 살아갈 의미? 그건 당신이 살아야만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엄준은 최선을 다해 그녀를 타이르고 있었다.그의 양아들인 엄창민은 창백한 얼굴로 병상에 누워있는 조유진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당신은 아직 너무 젊어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쉽게 포기해서
엄준은 지팡이를 움켜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유진 씨, 만약 미국의 메이오 클리닉에서 치료만 가능하면 저는 당장이라도 유진 씨를 그곳에 보내드릴 수 있어요.”“엄 어르신, 저는 어르신과 핏줄로 이어진 친척도 아닌데 왜 이렇게 저에게 잘해주세요? 저는...” 조유진의 눈시울은 벌써 뜨거워졌다.그 모습에 엄준이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괜히 잘해주는 건 아니에요. 물론 제가 남을 돕는 일을 많이 하지만 누구에게나 다 이렇게 하지는 않아요. 저는 유진 씨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왠지 모르게 친근감이 느껴졌어요.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유진 씨는 제가 아는 한 사람과 너무 닮았어요. 물론 그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로 갔지만 저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유진 씨 나이가... 저의 잃어버린 딸과 비슷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측은지심이 들어요.”옆에 있던 한청희가 갑자기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엄 어르신, 어르신은 유진 씨와 이렇게 인연이 깊은 데 수양딸을 한 명 더 두시는 게 어때요? 어차피 어르신의 수양딸과 아들은 어느 곳에나 다 있잖아요.” “안 그래도 그 말을 하려고 했어요. 저에게는 수양딸과 아들이 각각 한 명씩 있어요. 딸이 한 명 더 있으면 저야 당연히 더 좋죠.”그러자 한청희가 조유진을 보며 말했다.“조유진 씨, 엄 어르신을 양아버지로 받아들이시는 게 어때요?”엄준은 따뜻한 눈빛으로 조유진을 바라보았다.“유진 씨, 어떻게 생각해요?”그 말에 조유진은 감정이 북받쳐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엄 어르신, 어르신과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제 평생의 영광이고 복이에요. 어르신은 제 목숨을 구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수양딸까지 말씀하시다니...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만약 제가 운이 좋아서 다시 살게 되면 앞으로 어르신이 원하는 일은 그게 무엇이든 절대 마다하지 않고 다 할 수 있습니다.”“그래요. 당연히 살아야죠. 그래야 나도 필요할 때 유진 씨 부를 수 있죠. 유진 씨
엄준은 저녁이 다 되어서야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고 엄 씨 사택에는 이미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도 집사, 주방에 무슨 요리를 하라고 시켰기에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엄명월은 그 소리에 얼른 소파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 다녀오셨어요?”그녀는 활짝 웃으며 엄준의 팔짱을 꼈다.“도 집사 아저씨께서 오늘 아버지의 기분이 좋으시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주방에 몇 가지 요리를 더 추가하라고 하셨다면서요?”엄준은 엄명월의 손등을 톡톡 치더니 입을 열었다.“너도 오랜만에 왔구나. 오늘은 창민이도 있으니 너희 둘이 나와 한잔하면 되겠네.”“좋아요! 그런데 아버지, 저 요즘 살이 빠진 것 같지 않아요?”엄준이 앉자마자 엄명월이 그의 앞에서 한 바퀴 돌며 말했다.“그룹 내부 일 처리가 너무 힘들어서 그런 거야? 아니며 좀 쉴래? 해외사업부 일을 창민이에게 맡기고. 놀러 나가서 남자 친구나 좀 찾아서 데려와. 그래... 내 탓이지. 그렇게 많은 일을 맡겼으니 연애할 시간도 없을 거야.”엄창민과 엄명월은 그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다.비록 성행 그룹의 주요 책임자는 엄준이지만 그는 많은 일을 엄창민과 엄명월에게 맡겼고 또 나이가 들면서 게으름도 피우며 살고 싶었다.엄창민과 엄명월은 그가 직접 선택하고 가르친 후계자이기에 많은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그들에게 더 많은 경험을 쌓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해외 프로젝트는 엄명월이 심혈을 기울여 시작한 것이다.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양반이 버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중요한 프로젝트를 엄창민에게 넘겨줄 생각 따위는 전혀 없다.엄명월은 엄준에게 다가가 애교 섞인 말투로 일을 열었다.“아버지, 저는 연애에 관심이 없어요. 그냥 아버지 곁에서 그룹이 더 성장할 수 있게 힘쓰고 싶어요. 해외 프로젝트는 제가 처리할 수 있어요. 창민 오빠야말로 나이가 적지 않으니 빨리 결혼해야 하지 않겠어요?”엄명월은 교활하게 결혼 얘기를 맞은편에 있는 엄창민에게 돌렸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엄명월은 과일 한 접시를 들고 엄준의 서재로 갔다.엄준은 책상에 앉아 아내의 옛날 사진을 보고 있었다.“아버지, 또 어머니를 생각하시는 거예요?”“너의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어. 그녀도 폐가 좋지 않았단다. 그 시절에는 의료기술이 지금처럼 좋지 않았어. 나는 그때 너의 어머니를 데리고 전국 곳곳의 명의들을 다 찾아다녔지만 방법이 없었어. 나중에 나는 너의 어머니가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병원에 부탁해 심장만 뛰게 해달라고 했어. 너의 어머니는 나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통스러웠어. 조유진, 그 아이를 보면 자꾸 너의 어머니가 생각나. 그래서 더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 같아.”엄명월은 그제야 엄준이 조유진을 챙기는 이유를 알았다. 그때 엄명월 눈길이 탁자 위에 놓인 계약서를 향했다.그것은 다름 아닌 공급 협력계약서였다.“아버지, 우리 성행 그룹이 정말로 SY그룹과 같이 일해요? SY그룹에 불평등한 조항이 꽤 있던데 우리가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겠죠?”“이번에 대제주시에 가서 SY그룹그룹을 견학했는데 그들의 경영에는 그룹 문화가 포함되어 있어서 규칙을 비교적 잘 지키고 있었어. SY그룹가 제시한 가격이 상대적으로 적당하기도 하고 그룹 규모도 비교적 크기에 우리가 공급상으로서 SY그룹과 전략적 협력관계를 맺을 수 있으면 오랫동안 같이 발전할 수 있어.”“아버지, 아직 계약서 체결 안 하기도 했고 혹시 모르니까 제가 배현수 씨를 한 번 만나고 올까요?”“요즘 해외사업부 일 때문에 바쁘잖아. 괜찮으니까 엄창민 보고 가라고 해. 엄창민은 너의 오빠야, 당연히 더 많은 것들을 책임질 줄 알아야지.” 엄명월은 붉은 입술을 꼭 깨물며 다소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그 모습에 엄준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뭐든 잘 해내는 건 알아. 하지만 너는 너무 급해. 앞만 보고 달리려고 하고 옆을 보지 않아. 하지만 창민이는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는 애라 이런 건 네가 좀 배워야 해. 인제 그만 얘기하고 가서 창민이나 불러
밤이 된 성남은 곳곳이 번화한 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대제주시는 북쪽에, 성남은 남쪽에, 이렇게 남과 북은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조유진은 병실 창가에 서서 창문을 열어 밤바람을 쐬고 있었다.불과 한 달만에 대제주시에서 발생한 일들은 마치 전생처럼 머릿속에 그려졌다.큰 트라우마를 겪고 나면 선택적 기억상실증에 걸린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왜 잊히지 않고 오히려 더 또렷이 기억이 나는 걸까?그녀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천천히 손을 들어 허전한 목을 만졌다.조유진은 원래 이곳에 은반지가 있는 은목걸이를 항상 하고 다녔다. 엄창민이 보온병을 들고 병실에 들어갔을 때 가녀린 그림자가 창가에 넋이 나간 채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는 주먹을 쥔 손을 입 앞에 갖다 대며 가볍게 기침했다. “조유진 씨, 이건 아버지가 보내라고 한 음식이에요. 엄 씨 사택의 주방에서 만들었는데 입맛에 맞는지 한 번 드셔보세요.”조유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고마워요. 괜히 저 때문에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오게 했네요. 저 대신 어르신에게도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저에게 베풀어준 은혜는 나중에... 나중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면 꼭 최선을 다해 갚도록 할게요.” “메이오 클리닉은 의료기술이 아주 잘 되어 있으니 유진 씨에게도 분명 나중이 있을 겁니다.”그는 조유진에게 한 마디 위로를 건넸다. 조유진은 풍성한 음식들을 보고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며 인사를 전했다.“다들 고마워요. 덕분에 저에게도 나중이 있다는 것을 기대하게 되었어요”점점 빨개지는 그녀의 눈시울을 보고 있자니 엄창민은 갑자기 궁금한 것이 생겼다. 그녀가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가녀린 아가씨가 바다에 뛰어들기까지 했는지 말이다. 하지만 엄창민은 참하고 됨됨이가 있는 사람이라 사적인 일을 절대 쉽게 묻지 않는다. “엄 어르신에게서 들었는데 유진 씨가 예전에 SY그룹에서 일했다면서요? 혹시 SY 그룹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을까요?”그 말에 그녀의 동공이 끊임없이 흔들렸고
...다음 날 이른 아침.엄준은 도 집사를 데리고 조유진을 보러 왔다.“이분은 도 집사예요. 엄 씨 사택에서 오랫동안 일을 했으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도 집사를 찾으세요.”“도 집사 아저씨, 안녕하세요.”도 집사는 병상의 조유진을 보고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감탄했다.“어르신, 이 아가씨는 그때 당시의 사모님과 정말 비슷하네요.”그러자 엄준이 웃으며 대답했다.“내 말이 맞지? 유진 씨는 나와 인연이 깊다니까. 도 집사, 내가 사라고 한 새 휴대전화는?”도 집사는 새 휴대폰를 조유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아가씨, 이건 어르신이 유진 씨를 위해 사라고 한 새 휴대전화입니다. 안에 SIM 카드도 다 넣어 놨어요.”조유진은 감히 손을 내밀지 못했다.“어르신, 저는...”“받아요, 그저 새 핸드폰일 뿐이에요. 병원에 혼자 있으니, 우리가 이렇게 왔다 갔다 하기도 불편하고. 핸드폰이 있으면 우리도 유진 씨와 연락하기 편해서 그래요.”조유진은 이미 충분히 신세를 지고 있는 상황에 더 이상 그들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아 건네는 휴대폰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엄 어르신, 고마워요.”“근데 아가씨는 왜 아직도 어르신이라고 부르나요. 어제 어르신이 수양딸로 삼기로 했잖아요.”엄준은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조유진을 바라보았다.조유진은 도저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머뭇거린 후에야 겨우 한마디 했다.“아버지.”순간 엄준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만개했다.하지만 그녀의 병을 생각하면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유진 씨, 미국에 가는 비자는 제가 사람을 보내서 신청하게 했는데 발급기관에서 신분을 증명할 만한 서류가 필요하다고 하네요. 혹시 신분증 같은 건 있나요?”“아니요, 바다에 뛰어들 때는 아무것도 안 가지고 있었어요.”엄준과 도 집사는 서로 얼굴을 한 번 마주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눈앞에 있는 젊은 아가씨가 죽을 결심으로 바다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했다. 엄준이 입을 열었다.“사실 다른 서류라면 돈 좀 들
육성일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화 너머에서도 남초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묵직한 압박감은 느껴졌다. 그때 어떻게 그런 용기를 냈는지, 어떻게 육씨 집안에 시집갔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만약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차라리 구걸을 하더라도 절대 육씨 집안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초윤은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할아버지, 부탁드려요. 저희가 약속했던 건 두 달 전이었잖아요. 아직 두 달이 채 안 지났고, 제가 지금 아기를 가졌다고 해도 확인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기에 육성일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전화를 겨우 넘겼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이번엔 ‘개자식’ 육지율이었다. “...” 할아버지와 손자는 통화 시간까지 맞춘 것처럼 기가 막히게 연달아 전화를 걸어온다. 그녀는 냉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요?” 육지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폭탄이라도 먹었어요?” 육지율이 자신의 책을 내리게 만들고, 지난달과 이번 달 원고료도 다 날려버린 상황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아직 유지 중이었고 필요한 것도 있으니 남초윤은 결국 목소리를 가다듬고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지율 오빠, 무슨 일이에요?” “... 뭐라고 불렀어요?” “지~율~오~빠~” 그녀는 유설영의 말투를 흉내 내며, 아니, 오히려 더 능숙하게 말했다. 육지율은 순간 닭살이 돋았다. “제발 평소처럼 말해요. 저녁에 내 친구가 귀국하는데 같이 식사해요. 6시에 잡지사로 데리러 갈게요.” 남초윤은 단번에 거절했다. “난 안 갈래요.” “저녁에 뭐 다른 약속 있어요?” 남초윤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결혼한 지 3년 됐지만 당신은 나한테 친구 한 명도 소개해 준 적 없잖아요.” 그리고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친구를 만날 필요는 더 없었다.이혼하고 나서 친구들이
조유진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학교에서 누가 너 괴롭히진 않았어?” 배선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응, 나 괴롭히는 사람 없어. 할아버지가 우리 학교에 엄청난 돈을 기부하셔서 선생님들도 항상 나한테 잘해주시고 많이 관심 해주셨어. 그래서 나도 함부로 장난칠 수가 없어. 혹시 선생님이 할아버지한테 이르실까 봐.” 배현수는 이 말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배선유는 작은 악동처럼 말이 많았고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배현수의 말에도 자주 대꾸를 하니, 만약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벌써부터 떠벌렸을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쪽에 더 가까웠다. 성남에서 엄준은 배선유를 엄청나게 아끼며 키웠고, 그래서인지 아이는 주눅이 들지 않고 활발하게 자랐다.조유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 선유가 공부를 게을리할 걱정은 없겠어.” 배현수는 딸을 겁주듯 말했다. “너 공부 안 하고 일찍 연애라도 시작하면, 널 대제주에 데려와서 24시간 동안 지켜볼 거야.” 배선유는 입술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이건 너무 심해요! 나 혹시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거 아니에요?” 배현수는 코웃음을 치며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말했다. “공부 안 하면 좋은 날은 없을 거야.” 잠시 후, 학교 종이 울릴 시간이 가까워졌다. 배선유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친구가 그린 결혼사진 두 장을 영상 속으로 건네받았다. “선유야! 너랑 지우의 결혼사진 내가 그려놨어! 한 번 봐봐!” 배선유가 물었다. “한 장에 얼마야?” “너니까 공짜로 해줄게! 대신 다음번엔 나랑 결혼해 줄 수 있어?” “생각해볼게!” “...” 이 속도로라면 그들 부부는 도대체 몇 명의 사위를 맞이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편, 스타라이트 매거진에서.남초윤이 사이트 편집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의 책은 예상대로 플랫폼에서 삭제되었고 이달 원고료는 한 푼도 들어오지 않
[합법적 부부] 함께 올라온 사진엔 결혼반지를 낀 두 손이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가자마자 마치 깊은 바다에 떨어진 폭탄처럼 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어 반응했다. 육지율: [8년의 여정 끝에 드디어 자랑할 수 있네!] 송하진: [어! 전 두 사람 목숨 구해준 은인이에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사람이 어떻게 혼인신고까지 했겠어요? 당장 절 주빈으로 식사 대접해요!] 남초윤: [아아아아! 유진이를 결혼이라는 무덤 속으로 끌어들이다니! 대표님 너무하세요!] 엄창민: [내 여동생한테 잘해요. 혹시라도 괴롭히면 내 주먹이 용서 못 해요!] 엄명월: [형부! 이렇게 좋은 일에 저희한테 뭐라도 사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이찬: [축하해, 결국 원하는 대로 됐네.] 심미경: [백년해로하세요. 행복하길 기원합니다!] 서정호: [대표님, 일 다 끝냈으면 빨리 돌아오세요. 의사 선생님이 여기서 엄청 화내고 있어요. 저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학교 가기 싫어: [와! 아빠랑 엄마가 드디어 결혼했네요! 헤헷, 아빠, 나도 오늘 결혼했어요!] 배현수는 배선유의 댓글을 보고 순간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조유진이 운전하며 그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래요?” “선유가 결혼했다는데.” “뭐라고요?” 조유진은 깜짝 놀라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 급히 배선유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 저쪽에서 배선유는 학교에 있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었다. 외국어 학교라 분위기가 자유로워 아이들은 평소에도 부모님과 연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배선유는 전화를 받자마자 얼굴을 카메라 앞으로 들이밀었다. “엄마, 아빠! 나 사진 보고 싶어!” 조유진은 그녀에게 사진을 보여주고 나서 물었다. “선유야, 아까 결혼했다고 했잖아. 누구랑 결혼한 거야?” “우리 반 한지우랑! 엄마, 나 오늘 엄청 많은 축의금을 받았어! 내가 다 적어 놨어!”
조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갈게요.” 그가 환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이번 한 번은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서정호가 산성 별장에서 두 벌의 정장과 결혼 서류를 준비해왔다. 조유진은 오랜만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머리도 고데기로 말았다. 그녀는 하얀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고 사진에 잘 나올 수 있도록 최대한 신경 썼다. 그녀는 한동안 이렇게까지 꾸미지 않았는데 하이힐을 신고 배현수 앞에 서니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 물었다. “나 어때요?” “아름다워. 넌 언제나 아름다워.” 배현수는 전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조유진은 웃음을 참으며 옆에 있던 넥타이를 집어 들고 배현수에게 매어주었다. 배현수는 그녀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며 협조했다. 조유진은 평소와 다르게 더 복잡하고 정중한 ‘엘드리지 매듭’으로 넥타이를 맸는데 배현수는 평소에 간단한 윈저 매듭만 했었다. “이 매듭은 좀 생소하네.” 조유진은 넥타이를 다 매고 나서 그의 셔츠와 정장 재킷의 깃을 정리해 주었다. “이게 엘드리지 매듭이라고 해요. 중요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방식이죠. 어때요, 괜찮아요?” “멋져. 하지만 여보, 우리 서둘러야 해. 조금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웃으며 농담하듯 이야기하던 배현수는 조유진의 외투를 챙겨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고, 그녀를 한 손으로 감싸 병실을 몰래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마치 도망치듯 병원을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 그들이 빠져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사가 병실에 회진을 왔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그곳에는 ‘무관한 사람’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엄숙한 표정으로 서정호를 보며 물었다. “환자는 어디 갔죠? 튜브까지 다 뽑다니, 누가 뽑았습니까?” 서정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환자 본인이 뽑았습니다.” “도대체 어디 간 겁니까? 팔을 정말 망가지게 할 작정인가요
배현수의 가슴이 떨렸다. 그는 조유진과 이마를 맞대며 낮게 속삭였다. “그때 난 네 옆에 있진 않았지만 네 뒤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왜 울었어?” “현수 씨 생각이 났어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펐거든요. 내가 이렇게 좋은 남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서, 그게 너무 아쉽고 후회스러웠죠. 그래서 울었어요.” 지금 이렇게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느낌이었다. 조유진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이나 후회 때문이 아니었다. 감동과 감사함 때문이었다. 운명이 그들을 온갖 고난 속에서도 끝끝내 묶어 놓았고, 그들 사이에선 이제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깊은 연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배현수는 긴 손가락을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손을 꼭 맞잡았다. 순간 그들의 손바닥에서 따뜻함이 퍼져나갔다. 그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아, 넌 한 번도 날 잃은 적 없어. 우리가 몇 번을 떨어져도, 얼마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더라도 난 결국 널 찾아내서 꼭 안고 말해줄 거야. 사랑한다고. 오직 너만 사랑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조유진은 배현수의 유일한 선택이었고 그 선택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조유진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현수 씨, 우리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까요?” “그럼.” 그의 대답은 8년 전과 똑같았다. 짧지만 확고했으며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조유진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손목에 걸린 달콤한 연녹색 비취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상처가 나으면 우리 같이 아주머니를 위한 좋은 묘지를 고르러 가요. 그분을 위한 의관묘라도 만들어 드리는 게 어때요?” “아직도 ‘아주머니’라고 불러?” 조유진은 순간 얼굴이 뜨거워지며 말투를 바꿨다. 배현수는 그녀의 팔찌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풍수 좋은 곳을 따로 고를 필요는 없어. 어머니께
육지율은 그 필명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문득 기억해 냈다. “이 자식! 기억났어! 이 녀석이 책에서 날 모욕하지 않았나? 내 명성을 망가뜨렸잖아?” 남초윤은 급하게 말했다. “잘못 본 거 아니에요? 비엘 작가가 주인공을 모욕할 리가 없어요! 그러면 밥숟가락 들고 욕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요?” “나를 ‘수’로 묘사한 게 모욕이 아니고 뭐예요? 왜 항상 배현수가 공이냐고?” 남초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그 부분을 신경 쓰고 있었던 거였다.남초윤은 그가 진짜 작가를 고소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말했다. “다음번엔 지율 씨가 공이고, 배 대표님이 수가 될 수도 있잖아요. 원래 BL 소설에서는 공수 구분이 모호해요. 겉보기에 수 같아도 사실은 공일 수도 있다고요!” 조유진은 살짝 의문을 제기했다. “난 현수 씨가 수 같지는 않았는데. 만약 현수 씨가 진짜 수라면 캐릭터 붕괴지. 차라리 육 변호사님이 수인 게 더 어울려. 자유롭고, 매력적이고, 다정하잖아.”“?”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육지율은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며 조유진에게 따졌다. “아니, 조유진. 내가 약해 보이는 수 같은 느낌을 준다고?” “...” 배현수는 차갑게 말했다. “유진이가 쓴 것도 아닌데 왜 화내? 그럴 시간 있으면 작가나 고소해.” 남초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그냥 재미로 쓴 거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를 고소하면 너무 쪼잔해 보일 거예요!” 하지만 육지율은 이성을 잃고 이를 악물었다. “쪼잔해 보이든 말든, 그 책을 하차할 거예요!” 자신이 소설 속에서 수 역할로 묘사되었고, 그것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조유진은 객관적으로 말했다. “사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아요. 꽤 재미있고 독자도 많아요.” “독자가 몇 명인데?”“몇만 명 정도?” “뭐?”‘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날 수로 상상했
병실에서 조유진은 그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잠들었다. 잠에 들어서도 손가락이 배현수의 손에 살짝 얽혀 있었는데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진은 완전히 남자 친구 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입원 생활이 지루하다고 하다니.육지율이 댓글을 남겼다. “뭐야, 입원했어? 혹시 가정 폭력이라도 당한 거야?” 댓글을 남기고 나서 육지율은 차에 시동을 걸며 남초윤에게 말했다. “과일 바구니 좀 사서 병문안이나 가요. 친구가 입원했어요.” “친구? 설마 배 대표님이세요? 어디 아파요?” 육지율은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진짜 아플 수도 있고 그냥 꾀병일 수도 있고.” 혹시 모른다. 꾀병일지도....병원에서는 조금 전 장은숙이 산성 별장에서 저녁 식사를 가져왔다. 수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밤은 죽 같은 유동식만 먹어야 했다. 배현수는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조유진이 죽 그릇을 들고 숟가락으로 그에게 먹여주고 있었다. 첫 숟가락을 그의 입 앞에 가져가자 배현수는 뜨겁다고 투덜댔다. 조유진이 후후 불어 온도를 맞춘 후 말했다. “이제 적당히 식었어요.” 배현수는 그제야 죽을 한 입 삼켰다. 그 순간 병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장난스러운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아기로 됐네? 밥도 혼자 못 먹고, 조유진이 널 너무 오냐오냐한 거 아냐?” 조유진이 놀라서 뒤돌아보니, 육지율과 남초윤이 병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설명했다. “오른쪽 어깨에 부상을 입었어요. 의사 선생님이 며칠 동안 오른손은 쓰지 말라고 하셨어요. 상처가 더 심해질 수 있거든요.” 그러자 육지율은 다짜고짜 그의 오른쪽 어깨를 툭 쳤다. “진짜야?” 배현수는 고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 미친놈아!” 조유진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변호사님, 진짜로 다쳤다니까요! 어깨에 구멍이 났다고요, 함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녀를 겨우 한 번 데리러 온 김에 출퇴근길의 불편함을 느끼고는 아예 차를 사서 해결하려고 하다니, 정말 육지율 다운 방식이었다.이 4S 매장에서 파는 차들은 모두 포르쉐였고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저렴한 모델도 수천억 원대였다. 남초윤은 이미 남씨 집안이 육지율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었기에, 그가 차를 선물해 주겠다고 해도 받을 수 없었다.남초윤은 차분히 말했다. “앞으로는 출퇴근 길에 당신을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 굳이 차를 선물할 필요는 없어요.”육지율은 순간 멈칫했다가 살짝 비웃으며 말했다. “차 한 대 선물한다고 귀찮다는 딱지가 붙어요? 이런 확산적 사고방식은 참 대단하네.”“....”정말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평소에도 성격이 불 같았던 육지율은 차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그녀를 달래는 상황이 우스웠는지 어이없어 웃었다. 둘 중 누가 더 성격이 나쁜지 모를 일이었다.영업 직원은 남초윤을 육지율이 외부 애인으로 오해했고, 이 큰 거래가 깨질까 봐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변호사님께서 차를 사주시는 건 출퇴근 시간을 줄여서 그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해주려는 마음이 아닐까요?”남초윤은 더 이상 그의 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갚을 수 없는 빚이 너무 많았고 계속해서 더 쓴다면 두 아이를 낳아야 겨우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육지율은 그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그는 VIP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빨리 골라요. 차 안 사면 집에 못 돌아가요.”남초윤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여자 영업 직원이 다가와 다양한 모델을 소개할 때, 그저 듣기만 했다. 그 직원은 미소를 띠며 말도 아주 달콤하게 했다. “변호사님은 저희 매장의 단골이세요. 그런데 여자를 데리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변호사님이 정말로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비싼 차를 고르시면 아마 더 기뻐하실 거예요.”역시, 판매왕이었다.감정적 가치를 제공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아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남초윤은 그저 외부의
남초윤은 결혼 상태를 한 번도 업데이트한 적이 없었다. 동료들 눈에는 여전히 미혼으로 보였다.처음 그녀와 육지율의 스캔들이 터졌을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모두 육지율의 매력적인 외모 때문이었다. 아무도 남초윤처럼 작고 평범한 존재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지율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들의 침대 사진이 언론이나 남재원에게 유출되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육지율이라는 유명한 바람둥이가 ‘함정'에 빠져 순진한 여자와 관계를 맺은 후, 마지못해 결혼했다는 소문만 믿고 있었다.육지율이 연예계 인물이 아닌 만큼 동료들 중에서도 아무도 그 사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육지율이 ‘좋은 집안의 아들’ 이라는 사실만 기억하고 그의 결혼 상대가 누군지에는 무관심했다. 그녀는 어디에도 크게 드러나지 않았고 언론에서도 그의 곁에 서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남초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눈에 숨겨져 있었다.동료들은 그저 그녀가 조금 집안 배경이 있는 부유한 여자인 줄로만 알았고 육지율의 아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어쨌든 육지율의 아내라면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그들과 같이 일하며 고생할 일은 없을 테니까. 설령 과거에 파파라치 일을 했더라도 그렇게 높은 곳에 시집갔다면 육씨 집안이 그녀를 계속 그 일을 하도록 놔두지 않았을 거라고 여겼다.비록 세상은 모두 직업의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상류 사회에는 여전히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체면과 명예가 그들의 신분과 존엄을 상징했다. 파파라치라는 직업은 육씨 집안에게 있어 절대 자랑스러울 수 없는 일이었으니, 육지율과 강란희가 그녀에게 좀 더 체면 있고 유망한 직업들을 제안했지만 남초윤은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시간을 보낸 끝에 동료들은 하나둘씩 퇴근하고 남초윤만 남았다. 한 시간이 흐른 뒤 남초윤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저녁 7시가 되었다. 그녀는 통화 기록을 훑어보고 다시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마도